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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과 환경

글 / 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5년 6월 8일】

1. 가설을 이야기 함

7.20 이래, 사악이 하늘을 뒤덮듯이 몰려오던 그 시각부터 나는 시간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가지고 이 일체의 종결을 간절히 바랐다. 그때 사부님이 계시고 법이 있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도무지 정념이 생기지 않았다. 이리하여 속인 식의 “지탱하기,의지하기,기다리기”와 같은 사람의 집착으로 하루하루, 한걸음씩 한걸음씩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낡은 세력의 배치에 순종하였으며 심지어 법을 외울 때, ‘만일 붙잡힌다고 해도 법을 배울 수 있다.(이와 같은 가설은 사실상 이미 그것을 구한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최후에는 사악에게 박해를 받아 간수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간수소에서 생각하기를,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만약 지금 나를 노동교양소로 보낸다면 나는 ‘전화(轉化)’될 수도 있다. 그렇게 많은 ‘열심히 수련하는 사람들’도 ‘전화(轉化)’되었는데 나는 더욱 안 될 것이다. 차라리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낫겠다. 판결을 받을지언정 노동교양소에는 가지 않겠다.(박해를 승인하는 가운데서 진일보 가설한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법을 외우는 과정에서 자신은 점차적으로 청성(淸醒)해졌다. 매 한 편을 외울 때마다 나는 인식상에서 더욱 청성해졌으며 정념도 더욱 확고해졌다. 그 한 단락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이 ‘법 속에 용해되다’의 의미인가를 진정하게 체득하였다. 그러나 고생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줄곧 낡은 세력의 배치를 철저하게 부정하지는 못했다. 그때 나는 ‘낡은 세력을 부정한다는 것은 바로 형식상에서는 여전히 낡은 세력의 배치이지만, 다만 이 과정 중에서 잘 하는 것이 바로 부정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후에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잘못된 기점에서 한 방면으로는 사악의 배치에 순종하고 한 방면으로는 법을 다그쳐 외우면서 생각하기를, ‘만약 감옥에 가게 되면 머릿속에 법을 많이 담아야 감옥에서 사악에게 세뇌를 당할 때 잘 해낼 수 있다.(낡은 세력의 배치를 승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근본적으로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이번의 박해를 감당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세인들 중에서 진상을 알리기 위한 것은 더욱 아니다. 이는 박해가 나타났고 이러한 일종의 상태가 조성되었기 때문에 나는 비로소 대법제자들더러 가서 진상을 알리게 하였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대법제자의 존재는 결코 진상을 알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낡은 세력이 조성한 이 한 차례의 박해가 우리들로 하여금 부득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박해를 반대하는 가운데서 이 한 차례의 박해를 이용하였으며, 진상을 똑바로 알리는 가운데서 대법제자의 더욱 큰 위덕을 세웠다.” (《2004년 부활절 뉴욕 법회에서의 설법》)

심지어 내가 곧 감옥에서 나오게 될 때, 610이 마중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고 만약 나온다면 여하여하하게 하겠다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틀렸다고 인식했을 때 재빨리 그 생각을 제거해 버렸다. 그러나 사악은 더욱 이러한 점을 틀어쥐고 반복적으로 각종 방식으로 제시하고 교란하였다.

내가 걸어온 이 한 단락 기간 동안, 나는 일이 일어났을 때 자주 비자각적으로 많은 줄거리를 가상하고(속인일 때의 습관), 이리저리 생각한 다음 또 이렇게 하는 것이 틀렸다고 생각되어 다시 제거하곤 했다. 그리고 또 생각하고 또 제거했다. 인위적으로 자신에게 부담을 더해 준 것이다.

현재 나는 명백해졌다. 이 일체 이른바 가설은 모두 한 글자를 벗어나지 못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사(私)이고 나를 위한 것이며 모두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이다. 또한 당문화 중에서 악당의 폭정 하에서 형성된 유연한 방식으로 목적을 이루려 하고 뒤로 물러서면서 부차적인 것을 구하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무능하고 헛된 작법이다. 그것은 바로 당신더러 가상하게 하고 당신더러 불안 속에서 생활하게 하며 당신더러 그에게 타협하게 하고 당신더러 그의 통제를 받게 하는데 당신이 이렇게 생각하면 그는 목적을 달성한다.

당신이 그를 인정하고 그의 배치를 승인했다고 생각하면 그가 배치한 길로 가게 되며 가설은 가능하게 정말로 현실로 될 수 있다. 다른 한 방면에서 말하면, 오로지 생각만 하는 것도 구하는 것이고 자신이 인위적으로 집착을 증가하는 것이며 어려움을 증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신에게 알려 주기를, ‘자신은 반드시 똑똑히 분간해야 한다. 그것은 진정한 자신이 아니다. 꼭 그것을 억제하여 그로 하여금 작용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며 엄숙하게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라고 했다.

여기까지 쓰고 나서, ‘삼사이행'(三思而行, 거듭 생각한 다음에 행동하다)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나는 한때 나의 이런 심사숙고가 이른바 ‘삼사이행'(三思而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진정한 ‘삼사(三思)’ 란 바로, 일을 하기 전에 우선 이 일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상해가 있는가 없는가, 좋은 사람으로 되는 표준에 부합되는 가 부합되지 않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알려 주시기를, “정법 중에서 정념을 갖고 사람의 마음을 갖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 이른바 가설은 바로 수련 중에서 제거해 버려야 할 사람의 마음이다.

2. 환경을 이야기 함

내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 먼저 들어간 대법제자들의 정념정행과 간고한 노력으로 인해 어떤 감옥 감시구는 비교적 좋은 환경을 개창하였다. 법공부하기, 연공하기, 패쪽을 달지 않기, 일을 하지 않기, 신고하기를 부르지 않기 등이다. 동시에 사존의 보호 및 동수들의 정체적인 협력 하에서 유력하게 사악을 억제하였다. 물론 사악의 박해는 여태껏 멎어본 적이 없다. 그렇게 어려운 정황에서 우리 모두는 세가지 일을 잘 하면서 환경 창조에 노력하고 있다.

한번은 모 감옥 감시구의 대법제자가 특별실에 갇혔다. 소식은 재빨리 우리가 있는 감옥 감시구로 전해왔다. 사람들은 교류를 한 후, 함께 감옥 감시구의 관리인을 통해 사람을 석방하라고 감옥에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관리인은 고함을 지르며 얼버무리는 말도 많이 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심태는 아주 온화하였다. 이리하여 이튿날 우리는 사람이 이미 석방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악이 늘 거짓말을 했었기 때문에 우리는 확인하고자 사람을 파견하여 알아보려고 하였는데 사악은 승낙했다.(나중에 확인된 바, 당시 기타 감시구의 대법제자들도 역시 모두 행동으로 성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매우 많다.

한 단락 시간 내, 여러 분들이 노력한 덕분에 환경은 갈수록 좋아졌다. 당시 느낌은 신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현재 되돌아 생각해보니 그때 일정한 정도에서 기존의 환경을 만족시켰던 것은 환경을 창설하는 것을 하나의 목적으로 한 것이지 하나의 과정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또 제고됨이 필요할 때,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며 어떤 때는 대법을 실증하는 일에서 불일치가 나타나지만 법에서 교류와 소통을 잘 하지 못해 일부 문제에서 인식 상에서의 부동함을 조성하여 정체적인 협력에서 누락이 생겨 사악에게 틈을 탈 기회를 주게 된다.

예를 들면, 돌파하려고 하고 또 개창한 환경을 수호하려고 하지만, 일부제자들의 정념정행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기존의 환경에 만족해하고 종결되기를 기다리기와 시간에 의지하려는 사상이 있으며 근본적으로 이번 박해를 부정하지 못함으로써 앞을 향해 돌파함에 있어서 장애를 만들었다. 희망을 정체적인 이끌림에 위탁하고 자신은 착실하게 제고하지 않아 문제에 부딪쳤을 때 완전히 정념으로 가서 대하지 못한다. 어떤 때는 사람의 방식으로 상대하는데 더욱이 위선(僞善)과 대면할 때 사람 마음으로 대하기 쉬워 전진함에 있어서 느리게 함과 무거움을 조성할 수 있다.

감옥에서 시시각각 사악과 상대하기 때문에 시시각각 강대한 정념을 유지하기를 요구하며 조금만 누락이 있어도 사악은 뚫고 들어온다. 긴 시간 이러한 환경 중에서 거대한 정신적 압력 하에서 고통스러운 시달림 중에서 강인한 의지와 누락이 없는 정념이 필요하다. 걸어 나오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하나의 근본적인 집착, ‘자아(自我)’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착을 내려놓으면 가벼운 배 빠를 것이다”. (《심자명(心自明)》)

수련은 엄숙한 것으로서 “어떠한 하나의 사람 마음도 하늘로 가지고 갈 수 없다”.

이상 인식이 마땅치 않은 곳이 있으면 동수들께서 자비로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문장완성 : 2005년 6월 7일
문장발표 : 2005년 6월 8일
문장갱신 : 3005년 6월 8일 10:44:59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05/6/8/1036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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