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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심>>을 찾아 내다

글 / 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5년 4월 11일] 오늘은 상태가 매우 안 좋다고 느껴졌다. 발정념시에 마음이 순정하지 못하고 정신은 다른 곳으로 갔다. 《전법륜》책을 펼치고 이어서 법공부를 하였는데 《질투심》 부분을 읽을 차례였다. 두 페이지를 보았는데 표면 뜻은 무엇인지 알겠지만 마음속에는 그렇게 들어오지 않았다. 이리하여 나는 분발하여 처음부터 다시 법공부를 시작하였고 동시에 자신에 대해서도 사고하였다 ……정각이 되었다. 나는 자신의 사상을 청리하고 발정념하여 사악을 깨끗이 제거하였다.

발정념 후 나는 다시 한번 《질투심》 부분의 법을 조용하고 천천히 공부하였다. 부지불식간에 사부님의 법은 나를 이끌어 걸어왔던 길과 부딪쳤던 일들을 사고하게 하였다. 나의 주의식은 점점 청성해졌고 점점 자신의 육체사상을 명석하게 꿰뚫어 보았다.

《왜냐하면 질투심은 중국에서 표현이 극히 강렬하며, 강렬함이 이미 자연스럽게 되었기 때문에 자신도 느끼지 못한다. 》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질투심을 제거하지 못하면 정과(正果)를 얻지 못하며 절대로 정과를 얻지 못한다.” 때문에 질투심은 아주 좋지 않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내가 질투심이 있다고 말할까 봐 두려워하였다. 명혜망에서 동수들의 질투심에 관한 체험을 보았을 때에도 마음속으로 자아 위안하였다. ‘나는 질투심이 없다. 이는 나를 말한 것이 아니다.’ 혹은 ‘나의 마음은 그렇게 강하지 않으므로 무슨 문제가 없다’ 라고. 나도 아주 많은 동수들이 자신의 과시심, 환희심은 모두 마음 편히 승인하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다른 사람이 제고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조급해하는 마음이지만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의 질투심을 찾아내는 것은 아주 적게 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물론 나 자신도 그 속에 포함된다. 우연하게 한 수련생이 말을 빙빙 돌려서 나에게 질투심이 있다고 할 때 나는 매우 조급하고 마음속은 화가 나서 평형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질투할 수 있단 말인가? 터무니없이 나를 모함하는데 정말로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마음을 가늠하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참을 수 있었다.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태도에 문제가 있음을 의식할 수 있었고 자신을 수련할 수 있었다.

표면으로 볼 때 내가 그들보다 능히 참을 수 있고 나의 “자태”도 높았다. 잠재 의식 중에는 자신의 심성은 그보다 높아야 하고 그와 같은 견식이 아니여야 한다고 여겼다. 사실 일체는 모두 우연한 것이 아니다. 사부님이 동수의 입을 빌어 나를 점화해주시든가 혹은 사악이 나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강렬하여 자신마저도 모두 느끼지 못하는 질투심이 눈에 거슬려 빈틈을 타고 들어와 교란하고, 동수 사이에 모순과 간격을 조성하여 이로부터 정체에 대한 협조를 파괴하는 것이다. 나는 비록 표면의 모순에 미혹되지 않았을지라도, 모순 중에서 자신을 수련하고 자신을 보고 마음속으로도 생각할 수 있었다. 수련생은 나를 원망하였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하여 나의 어떤 집착을 건드렸는가? 마치 자신을 수련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에는 어느 날 진정으로 제고하여 올라왔을 때에야 수련생은 나를 원망하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어떤 때에는 이 인식과정이 좀 아주 길었다. 1년, 2년, 3년……그리하여 애초에는 동수의 말이 자신의 질투심을 겨냥하여 온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심지어 생각하면 여전히 수련생이 자신을 원망하였고 표면에서는 모두 다른 사람이 틀렸다고 느껴졌다. 수련 중에는 정말로 우연한 일이 없다. 자신의 원만과 무관한 것은 절대 마음대로 섞여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틀림없다. 사부님은 우리의 수련제고를 위하여 배치하고 계시고 사악은 우리의 집착을 보고 기회를 엿보아 교란하고 파괴를 한다.

“누가 좋은 일이 있어 나타낸다면 다른 사람은 그 즉시 질투하는데 이만 저만이 아니다. 어느 직장에서나 직장 밖에서 상을 받았거나 또는 조그마한 좋은 일이 있어도 돌아와서 감히 말하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이 알면 마음속으로 평형을 잡지 못한다.” 사부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하였다. 자신의 몸에서 표현된 것은 체험문장을 《명혜주간》에 발표하고 나서, 감히 말하지 못하고 될 수 있는 한 동수들이 모르게 하였다. 물론 자신을 나타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일종 두려움이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나는 문장 쓴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있지만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자신이 버려야 할 마음이다. 《삼자경》에 “융사세, 능양배” 이야기가 있는데, 동한말기에 태어난 공융은 마음이 넓고 관용하여 네 살 때에 형들에게 양보하는 도리를 알았다. 과거에 나는 이 이야기가 무슨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 있기에 《삼자경》에 실리어 천고의 이야기로 전해지는가 고 생각했었다. 지금 나는 알게 되었다. 네 살 난 공융이 제일 어려운 것을 얻었는데, 질투심이 없는 것이다. 이익의 불평등 앞에서 그의 표현은 대단한 것이다. 지금 당장 당면한다면 누가 할 수 있는가? 어른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도리를 알게 되었을 때 즉시 자신의 질투심의 표현을 보았다.

계속하여 법공부하면서 사부님께서는 “이는 우리가 과거에 실시했던 절대 평균주의와 일부 관계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단번에 지금의 중국인들이 왜 그렇게 질투심이 강렬한지 알게 되었다. 당 문화의 절대 평균주의와 관계가 있는데, 이는 모두 공산당 사악한 영체의 독해이다. 이런 당 문화의 독해 하에 사람들은 모두 대가를 많이 치르려 하지 않는다. 일할 때 평균 분배하고 누가 일이 끝나면 누가 일이 없고 능력이 약한 사람은 자신을 탓한다. 자신이 일하고 다른 사람이 좀 게으름을 피워도 마음속으로 평형을 이루지 못한다. 특히 농촌에서 많은 가정모순이 모두 이로 인하여 발생하고 있다. 노인을 부양하는 것은 아래 사람의 의무와 책임인데 지금은 가정모순의 도화선으로 되었다. 당신도 아들, 그도 아들인데 왜 우리집만 많이 모셔야 하는가? 나도 며느리, 그도 며느리인데 왜 나 한 사람만 힘들어야 하는가? 왜 나만 많이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안 된다. 날짜를 정하여 각 집에서 돌아가면서 노인을 보따리처럼 밀어오고 밀어간다.

누구 집에서 며칠 더 모시고 싶어도 다른 사람이 비아냥거리는 말을 할까 봐 두려워한다. 어떤 사람은 내가 노인을 아주 잘 보살폈다고 생각하고, 다른 집에 가서 고생을 하고 배고픔을 당해도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한다. 어떤 대법제자도 이러한 가정모순을 정념으로 대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이 양보하고 또 양보하여 풍격이 아주 높고 인내심도 괜찮다고 느낀다. 나는 지금 사부님께서 지금 사람의 사상표준은 지옥 아래의 표준이라고 하신 법에 대해 점점 명백해졌다.

나는 또 우리 수련인들을 생각하고 자신을 생각하였는데, 평균주의의 독해를 받아 부딪친 마난을 정확하게 대하지 못하고 있다. 고생을 겪음이 좀 크고 많으면 어떤 때에 마음속으로 공평하지 않다고 느낀다. 사실 부딪친 마난이 큰 것은 자신의 업력이 크고 나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사부님이 우리를 도와 소업해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부님은 전부를 없애주실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중할 때 자신의 고난이 크다고 원망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더욱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마음속으로 사부님이 수련생을 똑같이 대하지 않고 편견이 있다고 원망한다. 하지만 사부님이 자신을 대신하여 감당한 것이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감당한 것을 얼마나 초월하는지 아는가! 모두 자신과 같다면 그럼 다른 사람도 사부님이 편견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사부님, 어찌하여 그를 대신하여 그렇게 많은 것을 감당하셨습니까? 특별할 때, 깨닫지 못할 때, 질투심이 나올 때 원망한다. 누구누구도 상태가 안 좋은데 사악은 왜 그(그녀)를 박해하지 않는가? 나에 대해 너무 불공평하다.

직면한 정법과 수련중에서 질투심의 표현은 아주 선명하게 나타난다. 어느 수련생이 눈에 거슬리는데,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떠어떠하게 심성이 좋고, 오성이 높다고 칭찬하면 정말로 듣기 싫어하며 마음은 정말로 평형을 이루지 못하고 불복한다. 그가 무엇이 좋은가, 그의 어느 방면이 어떻게 차하다고 한다……그가 수련한 것이 어떠한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마땅히 자신의 이 질투심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어떤 때에는 마음으로 생각한다. 나 이것이 질투심이 아닌가? 그러나 교활한 질투심은 내가 그의 무엇을 질투하는가 고 말할 것이다. 그가 만약 수련한 것이 괜찮다면 내가 가히 질투할 수 있지만, 그가 수련한 것이 이렇게 차한데 내가 어떻게 질투할 수 있는가? 흥, 나는 질투하는 게 아니다. 사실 마음을 조용히 하고 생각해보면 만약 그가 수련한 것이 확실히 아주 좋다면 나도 그가 수련한 것이 좋다고 인정하고 다른 사람도 그를 칭찬하며 나는 질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수련을 잘하지 않았는가, 탄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나 그의 부족한 일면을 보았을 때는 그가 수련한 것이 이렇게 차한가 고 여긴다. 의외로 이렇게 많은 수련생들의 칭찬을 받았는데 받지 말아야 할 칭찬이라며 마음은 평형을 이루지 못한다. 사부님이 설법중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 마음이 아니가? 어떤 수련생은 협조인으로 아주 많은 일을 하였고 매우 수고하였다. 자신이 아주 힘들 때 사람의 질투심이 나올 때 억울하다고 느낀다. 다른 사람이 쉽게 경문과 자료들을 얻는 것을 보고 마음은 평형을 이루지 못한다. 그들은 너무 쉽게 얻었다, 모두 내가 그들에게 보내 주었는데 그들은 너무 편리하다, 안 된다. 그들더러 자신이 와서 가져가게 해야지……그들이 주동적으로 와서 가져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건은 이 평형 되지 않는 마음을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개별적인 협조인은 “영도” 의식이 강하여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를 숭배하고 그가 수련한 것이 어떠 어떠하게 좋다고 칭찬하는 것을 보고 마음은 평형을 이루지 못한다. 흥, 그가 말을 잘하고 사부님의 법을 좀 외울 뿐이라고. 하지만 개인의 부족한 점을 말하면 대충 넘어간다. 심지어 문제가 아주 커도 종래로 자신의 부족점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사부님이 평주한 기타 수련생의 문장을 보고도 마음속으로 평형을 이루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그의 문장은 그래도 내가 쓴 것보다 못하지 않은가! 어떤 때에는 《명혜 주간》의 동수들의 체험을 보고도 마음속으로 평형을 이루지 못한다. 이런 체험담도 주간에 오르다니? 나는 보고싶지 않다! 수련생이 정말로 나보다 인식이 좋지 않다고 치더라도 담론한 것은 그 자신이 깨달은 법리가 아닌가! 다른 사람이 틀렸단 말인가? 내가 평형을 이루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을 아끼는 것은 바로 자신을 아끼는 것인데, 나는 해냈는가?

아, 이 질투심은 내가 동수들과 솔직하고 정직하게 교류하지 못하게 해치고, 내가 동수들과 정체를 이루지 못하도록 해치고, 동수들 사이에 간격을 산생하여 정체역량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정법노정이 끝에 와 있는데 이 질투심을 반드시 그것의 뿌리를 철저히 뽑아 버려야 한다.

이상은 개인의 현재 약간의 인식과 생각이다. 써내어 좋지 않은 것들을 폭로하고 빨리 그것들을 닦아 버려야 한다.

문장완성 : 2005년 04월 10일
문장발표 : 2005년 04월 11일
문장갱신 : 2005년 04월 11일 16:20:04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4/11/99401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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