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싱가폴 대법 수련생, 위 이
[명혜망]
사부님께서는 “2004년 시카고 법회에서의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수련 중에서 마난에 부딪힐 경우 자신을 닦아야 하고 자신을 보아야 하는데, 이는 낡은 세력이 배치한 마난과 그것들이 배치한 마난 속에서 어떻게 잘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며, 이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낡은 세력 자체의 출현과 그것들의 배치한 일체마저 모두 부정하는 것으로, 그것들의 존재마저 승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근본 상에서 그것의 일체를 부정하며, 그것들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중에서 당신들이 행한 일체야말로 위덕이다. 그것들이 조성한 마난 속에 가서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승인하지 않는 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잘 걷는 것이며, 그것들 자체를 제거하는 마난의 표현마저도 승인하지 않는다.”
최근에 싱가폴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각한 교란을 마주하고, 동수들과 함께 사부님의 최신 설법을 공부한 후에 쉽게 오지 않았던 어떤 색다른 이해가 내게 왔다. 나는 더 많은 동수들과 내가 이해한 바를 교류하고 논의하고자 한다.
우리 수련생들 모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생 동안 진 큰 업과 집착심을 축적해왔다. 수련 과정이란 대법의 고층 법리의 인도 아래서 계속 업과 여러 집착심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원만에 이를 때까지 더 높은 경지를 향하여 계속 상승하는 과정이다. 우리로 하여금 수련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기 위해서, 사부님께서는 각 대법 제자들에게 각각 그들 자신의 환경과 그들이 인내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하여 서로 다른 유일한 수련의 길을 배치하셨다. 우리가 확고한 주의식과 강한 정념이 있는 한, 사부님께서는 우리의 집착을 조금 조금씩 그리고 한 조각 한 조각씩 떼어내신다. 이것이 병업이든 또는 心性(씬씽)의 모순과 관계된 고난이든지에 상관없이, 그것들은 모두 사부님께서 우리의 수련 길에 배치하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이러한 고난을 “고험”이라고 부르셨다.
사부님께서는 《 제 4장,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앞으로 연공 중에서 당신은 각양각색의 시달림에 부딪힐 수 있다. 이런 시달림이 없이 당신이 어떻게 수련을 하겠는가?”
사부님께서는 또한 초기 《싱가폴 법회에서의 설법》, 그리고 《장춘 보도원 법회에서의 설법》에서 법 [우주의 법 또는 법리]에 대한 설법을 하시면서 마난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는데, 마난이란 제자의 제고를 위해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그러한 고험이 아니라, 한 사람의 수련 중에 오는 마에 의한 교란이라고 지적하셨다. 1999년 7월 20일에 시작되었던 파룬궁에 대한 박해 이후, 설법 중에서 사부님의 마난에 대해 언급하심이 꽤 증가하였다.
원만 할 때까지 우리는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수련 과정을 따라야 했지만, 낡은 세력의 참여로 우리의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해졌다. 낡은 세력은 정법 중에 그들이 더 이상 상관하지 않는 생명들을 훼멸 시키기 위해 이 박해를 배치했다.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에게 진상하기 시작했다. 낡은 세력은 분명히 진상하는 우리의 노력을 음험한 수단으로 훼손하기를 원했지만, 직접 그렇게 하는 것은 낡은 우주의 법에도 위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낡은 세력은 우리에게 손상을 줄 구실을 찾아야했다. 그들이 가장 빈번하게 의존하는 구실은 대법 수련생의 표준에서 빗나간 집착이나 누락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도 우리 자신을 수련하고 있고, 아직도 속인의 많은 집착심을 가지고 있는데서 일어난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사악한 허위선전으로 독해되어 있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 그들에게 박해에 대해 진상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종종 이러한 과정 중에서, 우리의 과시심에 대한 집착은 물론 경쟁적인 정신상태가 억제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팽창되어 있다. 우리가 매우 바쁜 프로젝트 일정에 매여 있을 때, 우리는 법공부를 게을리 하게 되고, 이것은 우리의 사상이나 사업이 법으로부터 현저하게 빗나가게 하며 사악으로 하여금 그 약점을 착취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가 그러한 교란을 효과적으로 근절시키는 발정념을 하는데서 실패했을 때 마난이 일어날 것이다.
마난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틀림없이 우리가 지나쳐버린 집착심을 관찰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수련하기 위하여 진심으로 내면에서 찾아야하고, 확고하게 이러한 집착들을 근절시켜야 하지만, 결코 개인수련에서 오는 우리가 극복해야할 문제들을 감추기 위해 정법 수련을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악이 우리를 박해하기 위한 구실로 우리의 노출된 집착을 절대 사용하게 할 수 없으며, 또 그러한 마난을 참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주에 동화되는 것을 돕고 우리의 수련을 진일보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혼돈도 절대 가져서도 안 된다. 법륜대법 제자로서, 우리의 수련은 마지막 높은 경지의 요구에 도달할 때까지 각종 집착심을 점차 제거해야 한다. 사부님께서 이런 모든 것들을 보살펴주시고 인도해주신다. 우리가 이러한 길에서 빗나가지 않는 한, 우리는 원만에 이를 것이다. 그런 강요된 마난을 견디는 것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하신 길이 아니며, 집착심을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강요된 마난을 견뎌내거나 고통받은 것이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낡은 세력에 의해 배치된 박해가 아니었더라면, 우리의 수련에 진상이란 것이 포함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떤 수련생들은 그러한 마난을 우리가 견뎌내야 할 고난으로 잘못 취급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마난 중에서 걸어 나오지 못했다. 또 우리는 이성적으로 그리고 명석하게 낡은 세력의 배치를 그 뿌리로부터 부정하는 데 실패했으며, 단호하게 사부님께서 배치해주신 수련의 길로 돌아오는데 실패했다. 마난이 일어날 때 심각한 고험과 각종 무게가 우리를 내리누른다, 특별히 어떤 마난에 응함으로써 [압력하에서 법륜대법을 포기하는데 동의하는 것과 같은] 대법에 입혔을지도 모를 손상에 대해 양심을 찌르는 가책, 종종 일어나는 우리의 행동에 대한 깊은 적대감, 또는 자기-동정심 속에서 뒹굴고 있거나, 또는 간단하게 개인적인 희생과 손실을 통해서 전반적인 상황에 변화를 가져올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이러한 것들은 다만 수련의 문제를 보통적인 인간 관념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한 사업과 생각들은 실제로 우리의 약점과 당황함을 보여주는 것 일뿐, 해결책도 결심도 될 수 없다. 이것은 대법과 동수들을 위해 책임을 지고 해명할 의무에서라기보다는 얼렁뚱땅해서 일을 넘기려는 것이다. 이것은 다만 낡은 세력에게 우리를 박해하도록 더 많은 구실을 만들어주는 타협이고, 협력이며, 협조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수련은 가장 엄숙한 일이며,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법리에 기초해야한다. 만약 우리가 어떻게 법에 책임질 것인가 하는 것을 인간 관념에 따라 한다거나, 법리에서 빗나가 있으면서 대답은 안을 향해 찾는다면,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집착을 찾지 못할런지 모른다. 우리는 자신을 비난하고 속인들처럼 후회하는 데로 빠져버리게 될 것이고, 마난 중에 사부님께서 배치해주신 길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지게 될 것이다. 현재 그러한 마난을 마주하고 있는 동수들은 물론, 전체 그룹도 이 문제에 심각한 주의를 기우려야한다.
문장발표: 2004년 6월 30일
문장완성: 2004년 6월 30일
문장분류: [수련생관점]
중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4/6/15/77103.html
영문위치: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4/6/30/4966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