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콩 대법제자 역사상에서 정교(正敎)나 사이비교 모두 신도를 확대하고 있지만 양자의 구별은 사이비교는 사람에게 정신통제를 하지만 정교는 신도에 대해 정신교화를 한다. 이렇게 되는 것은 양자의 목적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정교의 목적은 “사람을 제도하며” 그로 하여금 지혜를 개발함으로써 최종적으로는 “각오(覺悟)한 사람”으로 되게 하는 것이지 신의 조종을 받는 로봇과 같은 정신노예가 아니다. 명백한바, 이 목적은 오직 정신교화를 통해서만이 도달할 수 있지만 정신통제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사이비는 바로 이와 정반대이며 그것의 목적은 신도들로 하여금 교주의 통제를 받는 공구로 되게 하려는 것이다. 때문에 신도들에 대해 정신교화를 하기는 불가능하며 꼭 정신통제를 하게 된다. 바꾸어 말한다면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선택한 수단 역시 당연히 같지 않다.
파룬궁은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의 수련 방법으로서 그도 역사상 모든 정교와 마찬가지로 정신통제하고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
우선 파룬궁이 단독적으로 가지고 있는 전수와 인도방식은 “선(善)을 권하는 것”으로서 정신통제와는 완전히 상반된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1992년 이래 리훙즈(李洪志) 선생은 法輪大法(파룬따파)의 법리를 전파하시기 위해 해외의 많은 나라들을 다니셨으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강의하셨다. 비록 그는 반복적으로 사람들에게 대법이 진귀하다고 알려주었지만 그는 종래로 어떠한 사람에게도 강제로 그의 학설을 접수하라고 하지 않았다. 이 한점에 대해 그는 《전법륜》중에서 똑똑히 말씀하셨다. “하지만 우리 이 우주에는 또 이런 이치가 있다. 당신 자신이 구하는 것과 당신이 가지려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간섭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에서 여러분을 바른 길로 가라고 가르치는 동시에 법을 당신에게 투철히 이야기하여 당신 자신이 깨닫게 하지만, 배우고 안 배우고는 여전히 당신 자신의 문제이다. 사부는 문으로 들어오도록 이끌고, 수행은 자신에게 달렸다. 당신을 강박하고 핍박하여 수련하게 할 사람은 없다. 수련하고 안 하고는 당신 개인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어느 길로 가려고 하며, 당신이 무엇을 가지려고 하며, 당신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누구도 당신을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다만 선(善)을 권할 뿐이다.”(《전법륜》)또한 리선생께서는 법을 전하시는 초기에 대법은 조직이 없다고 규정하셨으며 배우고 싶으면 와서 배우고, 배우고 싶지 않으면 가도 되며 오고가고 하는 것이 완전히 자유인바, 아무런 형식상의 속박도 없다고 하셨다. 광대한 파룬궁 수련생들은 공을 전하는 과정 중에 모두가 이렇게 했다. 몇 년래 수련생들의 제고를 도우기 위해 리선생께서는 그들의 수련 중에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 수고도 마다하고 차근차근하게 한 차례 또 한 차례 설법을 하셨지만 종래로 수련생에게 강제로 그가 한 말씀에 따라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사실상 리선생은 줄곧 제자들의 독립사고를 제창하셨으며 수련 중에서의 지위와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셨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수많은 수련생들이 직접 몸으로 실천한 것이 증명하다시피 파룬궁은 종래로 우리로 하여금 독립사고 능력을 포기하거나 상실하게 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는바, 강제성적인 방식을 취했거나 아니면 비강제성적인 온화한 유도방식을 취했던 지를 막론하고이다. 반대로 대법은 종래로 수련생이 반드시 독립사고를 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리선생은 반복적으로 강조하셨는데, 수련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하나의 “깨달음”이 존재한다고 하셨다. 무엇이 “깨달음”인가? 《전법륜》중에서 매우 똑똑히 말씀하셨다. “불교에서는 수련하는 사람의 불법(佛法)에 대한 이해를 가리키며, 인식상의 깨달음과 최종의 깨달음을 가리키는데, 혜오(慧悟)라는 뜻을 가리킨다.”(《전법륜》)여기에서 지적한 “이해”, “혜오”를 수련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데 바로 수련자가 갖고 있는 일종의 독특한 독립사고 형식이다. 깨달음은 파룬궁 수련생들의 각 방면에서 구현되며 우리들의 옹근 수련과정의 시작에서부터 마지막까지 관통되어 있다. 리선생은 경문 “깨달음”중에서 말씀하셨다. “인간세상이 혼혼(渾渾)하야 주목상혼(珠目相混)이로다. 여래가 세상에 내려오심에 필연 조용하도다. 법을 전할 때 필연 사문(邪門)의 교란이 있도다. 道와魔가 함께 전하고 함께 한 세상에 있거니, 진짜와 가짜를 가려냄은 주로 깨달음에 있노라. 어찌 분별할고, 필연 상사(上士)가 있도다. 과연 연분(有缘)이 있고 능히 깨닫는 자들이 잇따라 모여 와서 입도(入道)하여 법을 얻노라. 正과 邪를 가려내고 진짜 경을 얻어, 그 몸을 가볍게, 그 지혜를 풍부하게, 그 마음을 충실하게 하고 (法船)을 타거니 유유하도다. 옳도다! 원만을 이룰 때까지 분발할지어다.” 나는 여기에서 말씀하신 정과 사를 가려내라고 하신 것은 입문할 때의 깨달음이라고 이해한다.
수련과정에서 구체적인 일에 대해 마찬가지로 깨달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수련에는 본보기와 이미 해놓은 답안이 없기 때문이다. 《전법륜》결말부분에 “법은 다만 이 한 층까지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으며 더욱 높은 것은 당신 자신에 의거하여 수련해야만 얻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문제를 제출함에 있어서 제출할수록 더욱 구체적인데, 만일 생활 중의 문제를 모두 나에게 해답하라고 한다면 당신 자신은 또 무엇을 수련하겠는가! 당신은 자신이 수련해야 하고 자신이 깨달아야 한다. 내가 모두 이야기한다면 당신이 수련할 것이 없게 된다.”(《전법륜》)
리선생께서 강조 하셨는바, 수련의 옹근 과정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법에 대해 근본상에서 믿는가 믿지 않는가 하는 고험이 있는데 이런 고험에 대해 사부는 제자가 자신의 독립사고를 거쳐 그것의 진위를 판별할 것을 허락하셨다. 때문에 1999년 7월 20일 이후 리선생은 그저 중앙에 다만 한 통의 편지를 쓰셨고, 그 후에는 중공의 정부 매스컴에서 그에 대해 하늘을 뒤덮을 듯한 개인적인 포위공격에도 한 마디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으며 1년이 지난 후에서야 비로소 법회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작년 ‘4.25’ 이후로부터 줄곧 ‘7.20’에 발생한 사건 중에서 어떤 수련생은 첫 시작부터 사상적으로 많은 파동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이 역시 정상적이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속인의 사상이 있기 때문에 당신은 비로소 수련할 수 있는 것이며, 속인의 사상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비로소 흔들릴 수 있으며, 속인의 사상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흔들림 속에서 당신이 마땅히 가야할 정확한 길을 확립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수련이다. 그러므로 그 때에 우리 많은 사람은 모두 생각하고 있었다. 즉 내가 배운 이 법이 맞는가 틀리는가, 바른가 바르지 않은가? 李洪志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 요언을 날조하여 중상한 사악한 세력, 그가 한 말이 맞는가 틀리는가? 매 수련생은 이런 문제를 모두 사색하고 있었고 적든 많든 당신들은 모두 사색하고 있었는데 이 역시 당신들에게 하나의 사색할 기회를 준 것이다. 잘못이 아니다. 당신들은 냉정해진 다음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길을 걸었고 사람의 어떤 언어로 표명할 필요가 없고 자신의 인식이 어떠한가를 말할 필요가 없이 당신의 행동은 이미 일체를 증명하였다. 능히 대법 속에서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는 당신의 행동은 이미 당신이 하고자 한 것과 하나의 수련인으로서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실증하였다.”(《북아메리카 대호구법회에서 하신 설법》)이것도 하나의 깨달음이며 수련자가 대법에 대해 근본상에서 견정하게 믿는가를 고험할 때의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독립사고의 하나의 특수한 형식이기 때문에 리선생께서는 부동한 층차에는 부동한 층차의 법이 있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하셨다. “수련자가 법에 대한 인식 역시 자신이 이 한 층에까지 수련된 인식이며 개개 수련자가 법에 대한 이해가 부동함도 매 사람이 있는 층차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정진요지》“빠짐이 없게 하자 ”)
실제상황으로부터 보면 파룬궁 수련생들은 모두가 깨닫고 있다. 그러나 동일한 문제에 대해 종래로 모두가 완전히 같지 않았으며 줄곧 차이가 존재했는바, 어떤 때는 심지어 매우 큰 차이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들이 독립사고의 능력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지 않는가? 이로부터 볼 때 다른 하나의 측면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바, 파룬궁은 수련자의 독립사고를 제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반대로 만약 리선생이 중국 정부에서 선전하는 것처럼 제자에게 정신통제를 진행했다면 여러 사람들이 따르는 것이 한 사람의 사부이고 똑같은 하나의 법이고 똑같은 연공인데 사고하고 생각하는 이치가 완전히 같아야 논리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파룬궁이 정신통제와 관계가 없다는 세 번째 이유는, 신도들에 대해 정신통제를 실행하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은 자신에 대한 신도들의 열광적인 숭배를 온 힘을 다하여 부추기고 있지만 파룬궁에서는 이러한 것을 완전히 부정한다. 리선생님께서는 일찍이 제자들에게 “속인의 대법에 대한 감정에 집착함은 전진하는 길 위에 가로 놓인 한개의 산이다 (执著于常人对大法的感情是横在前进路上的一座山, 주: 번역문을 찾지 못하여 번역원이 임의로 번역하였음.)”
문장완성 : 2004년 7월 7일
문장발표 : 2004년 7월 9일
문장갱신 : 2004년 7월 9일 10:01:11 PM
원문위치 :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9/7895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