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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7.20” 베이징 청원을 회억하며

글 / 산둥 대법제자

【명혜망】”7.20″이 또 다가왔다. 대륙에서 파룬궁에 대한 탄압이 5년간 지속되고 있다. 5년 동안 나는 늘 이 한 차례의 박해가 금방 시작되었을 때의 일들을 생각하곤 했다. 특히 대법제자들이 그때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전진한 그 한 단락의 역사는 더욱 사람들로 하여금 잊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강권 폭정(强權暴政) 아래에서 오직 대법제자만이 비로소 구비할 수 있는 무사(無私), 용감한 장거로서, 또한 영원히 화하(華夏, 중국의 옛 이름)의 역사책(史冊)에 남아있을 한 순간으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때 당시에 직접 겪은 경력을 써내어 그리움을 표현하려 한다.

나는 산둥(山東)성 룽커우(龍口)시 남부산(南部山)구의 대법제자이며 1999년7월 20일 전야에 어머니와 정부요원들의 감시와 교란을 받았는데 후에야 [장씨에게 이용당한]중앙정부가 파룬궁에 대해 탄압 할 것이라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나는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려고 결심했다.

사면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향(鄕)진(鎭)에서 밖으로 나가려면 남북 방향으로만 나있는 길을 통과해야 하는데, 진 정부의 불법요원이 남북으로 통하는 큰길을 지키고 있어 여기에 있는 대법제자들은 나갈 수 없었다. 그들은 그 당시 대법제자들의 하나의 평화적인 수련환경과 대법이 더욱 광범위하게 전해질 것을 위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대법 중에서 심신의 승화를 얻고 나라에서 다시는 불행한 일들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매 하나의 진수 제자는 꼭 그 어떤 난관이 닥쳐올지라도 정부에 法輪大法(파룬따파)의 진실한 상황을 반영해야 한다는 심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무더운 여름의 더위를 무릅쓰고 잡목 수림으로 된 10여리 길(1리 = 0.3mile)을 헤치며 험하고 울퉁불퉁한 큰 산을 넘어서야 진 정부에서 설치한 초소를 피해 갈수 있었다. 이때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며 편벽한 길에는 지나가는 차들이 매우 적었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자그마한 농가용 차 한대가 오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차에는 젊은 부부가 있었는데 우리 옆에 오자 차를 세웠다. 내가 “우리를 차에 태워 주면 안돼요?”라고 묻자 젊은 여자가 우리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엄숙한 기색으로 “당신들은 산을 타고 넘어 왔지요? 파룬궁을 하는 사람이지요? 저는 당신들이 지금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알아요. 빨리 차에 오르세요”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급히 차에 올랐다. 차는 우리를 싣고 단숨에 자오위안(招遠)에 까지 왔다. 차에서 내린 후 어머니가 여비를 주었으나 그들은 굳이 사양했다.

자오위안 역전 문어귀에는 “파룬궁 인원에게 차량을 이용하게 하는 것을 엄금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었으며 역 안에는 적지 않은 사복특무들이 순찰하고 있었다. 우리는 웨이팡(濰坊)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 길에서 많은 승객들이 차에 올랐는데 느낌에 대법제자들이 많은 것 같았다. 자오위안에서 웨이팡까지 100km 좀 더 되는 노정에 10여 차례의 검문이 진행되었는바, 전부 무장한 경찰, 교통경찰들이 매 객차를 샅샅이 뒤졌는데 그들의 목적은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는 파룬궁 수련생들을 억류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의 이런 행동에서 나와 어머니는 현재 가능하게 어떤 중대한 사건이 발생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앉아있는 차 안에서 경찰들은 “수상한 사람”이라고 여겨지면 계속 끌어내갔는데 어머니와 나는 근심스러우면서도 긴장했으나 마음속으로 꼭 베이징에 가야 한다는 견정한 일념이 생겼다. 저녁 9시에 우리는 웨이팡에 도착했는데 베이징으로 가는 버스는 이미 없었다. 기차표를 살려면 “파룬궁 수련생이 아니다”라는 증명이 있어야 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택시를 잡아탔다. 결과 웨이팡 시(市)구(區)를 채 벗어나지도 못하고 경찰에게 잡혔다. 그들은 우리를 한 공안분국에 데려갔고 거기에는 큰 앞뜰이 있었는데 복도고 어디고 모두 억류된 파룬궁 수련생들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틈을 타서 빠져 나왔으며 어느 한 주유소에 이르렀다. 거기서 맥주를 만재한 대형 트럭에 고가로 돈을 내고 탑승하여서야 비로소 웨이팡 경찰들의 수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튿날 새벽 2시에 트럭은 우리를 싣고 빈저우(濱州)에 도착했으며 연도에서 마침 톈진(天津)으로 가는 버스를 만나서 탔다. 톈진까지 가는 중에도 몇 번이나 검사했는지 모른다. 다행히 7월 22일에 우리는 톈진에 도착했다.

톈진의 한 작은 역전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승객들은 모두 경찰의 상세한 검사를 받아야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억류되었는데 원인은 “그들이 파룬궁 수련자와 비슷”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또 한번 행운스럽게 차에 앉았는데 2시간 후에 끝내 베이징에 도착했다.

우리는 베이징 기차역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렸는데 이때 베이징의 날씨는 너무도 더웠는바, 정상이 아니었다. 땅에 조금만 앉아 쉬려고 해도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저녁 7시가 되자 광장의 노천 대형 영사막에서는 뉴스를 보도하고 있었다. 바로 그날 뉴스에서 法輪大法(파룬따파)에 대해 모욕 공격하기 시작했다. 연달아 조작해 낸 뉴스들이 백주에 많은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마음에 어느 정도 준비가 돼 있었지만 그러나 너무나도 돌발적이고 악랄한 선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에 우리는 우리가 베이징에 온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 국무원 신방반(信訪辦, 역자 주 : 대중이 서신과 방문을 통하여 관계부문에 의견을 제시하고 해결을 요구하는 것)에 상방하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톈안먼에서 서쪽을 향해 걸어갔는데, 약 200미터쯤 가자 여러 명의 경찰들이 가로막아 섰는바, 그들은 벌써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말투를 듣고 지방 말투인 것을 알고는 다짜고짜 어느 한 앞뜰로 데리고 가서 거기에 있던 10여명의 대법제자들과 함께 대형 버스에 태웠다. 차 안에는 모두 대법제자들이었는데 4-5대의 대형 버스에 몽땅 사람으로 찼다. 매 차 마다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으며 여러 사람들은 매우 질서 있게 경찰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여기 경찰들이 절대 다수가 파룬궁 수련생들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단지 어째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을 위해 베이징에 청원하러 오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차는 우리를 태우고 약 4-50분 정도 달렸는데 우리들을 규모가 작지 않은 한 노천 체육관 : 펑타이(丰台) 체육관에 내려놓았다. 체육관에 들어서니 남쪽 길에 전부가 사람들이었다. 우리를 산둥지구에서 온 사람들이 있는 곳에 보냈는데 여기에는 산둥의 각 지역에서 온 대법제자들이었는바, 모두들 땅에 앉아 있었으며 전부 무장한 무장경찰들이 우리들을 중간에 놓고 포위하고 있었다. 우리 옆에는 동북지구에서 온 대법제자들이 있었는데 숫자가 적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은 여기를 떠나려고 요구했으나 경찰은 듣지 않았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 >을 외우기 시작했다. 갈수록 소리가 높아졌으며 수천 명이 함께 외웠는데 당시 그 장면은 정말로 사람을 고양시켰으며 잊을 수 없게 하였다. 경찰들은 분명히 이런 장면을 보지 않았는데 멍해졌으며 두려워했다. 시작에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조금 후부터는 손을 쓰기 시작했다. 먼저 동북에서 온 남자 대법제자를 몇몇 경찰이 끌어가더니 폭행을 했으며 후에 나도 두 경찰한테 끌려 나가 매를 맞고 땅에 쓰러졌고 또 가부좌 하고 있던 다른 여 대법제자를 한 경찰이 달려들어 미친 듯이 발로 걷어찼는데 땅에서 굴러다녔다…… 경찰들의 돌발적인 폭행에 여러 사람들은 일제히 “경찰은 사람을 때리지 못한다”고 엄하게 소리쳤다. 사람을 때리던 어떤 경찰들은 뭇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낼까봐 두려워 손을 멈추었는데 나도 사람들 속에 되돌아왔다

이렇게 1시간가량 좀 지나자 체육장에 몇 십 명이 몰려오고 있었는데 그들 중 몇몇은 정부의 높은 관리였다. 그들은 대법제자들한테 다가왔다. 어떤 대법제자들은 그들에게 자신의 수련 체험과 베이징에 온 목적을 말했다. 그러나 이 한 무리 사람들의 태도는 매우 악랄하고 말도 거칠었는데 대법제자들이 아무리 선하게 설명해도 그들은 오히려 “당신들이 잠에서 깼는가?” “당신들이 약을 잘못 먹었구만 “라고 빈정거리면서 무리하게 훈계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옹근 하룻밤 억류됐는데 날이 밝아서야 경찰들은 산둥의 대법제자들을 차에 오르게 했으며 그들은 우리들을 강제로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대법제자들은 그들과 협력하지 않았으며 차에 오르지 않고 그들한테 우리들이 베이징에 온 목적을 실현하기 전에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경찰, 무장 경찰들은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끌려가지 않으면 발길로 차고 하면서 우리들을 6-7대의 버스에 꽉 채워 실었는데 어찌나 빽빽이 실었는지 몸을 돌리기 조차 어려웠다.

돌아오는 길에서 사람들은 모두가 뜨거운 열기와 목이 말라서 탔지만 참기 어려운 고통을 참아야만 했다. 산둥 둥잉(東營)에 도착한 후 여러 사람들을 또 각 지구의 경찰과 정부요원들이 강제로 끌고 갔으며 어떤 제자들은 수갑을 채워서 데려갔다.

당시 사악의 우두머리 장 x x는 파룬궁 수련생들의 합법적인 청원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국가 기구를 동원했고 전국적으로 인심을 황황하게 만들었으며 국가로 하여금 무수한 인력과 재력을 소모하면서 이렇게 많은 평화적인 민중을 대처했는데, 이것은 정말로 국가, 정부와 인민의 또 한 차례의 불행이다. 하지만 파룬궁 수련생들이 시종일관 선한 마음으로 실사구시의 태도로 자신의 안위를 제쳐놓고 정부를 향해 상황을 반영한 이것은 중국에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준 것이다.

7월 24일에 옌타이(烟台)공안이 어머니와 나를 강제로 룽커우시에 보냈으며, 후에는 불법으로 감금당했다. 그때로부터 당시에는 상상 하기 조차 어려운 박해가 잇따라 계속 진행되었다.

문장완성 : 2004년 7월 17일

문장발표 : 2004년 7월 18일
문장갱신 : 2004년 7월 18일 9:18:53 AM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4/7/18/796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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