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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듯한 학살에 직면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글/리즈칭(李致清)

【명혜망 2004년 7월 6일】명혜망의 오늘의 소식에 따르면 박해로 사망한 파룬궁 수련생의 숫자가 성명이 공식 확인된 경우만 해도 이미 1,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처럼 갑자기 늘어난 숫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중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번 박해의 잔혹성에 대해 더 큰 관심과 아울러 국제 사회의 책임을 더 심각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는 흔히 볼 수 있는 형식과는 다른 일종의 학살로서 공개적으로 총과 탄약 같은 무기로 학살하는 것이 아닌, (물론 총격사건도 사실상 이미 여러번 발생하였음) 엄밀한 봉쇄 속에서 혹형의 시달림을 가하는 형식으로 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한 생명을 잔인하게 철저히 없애 버리는 방식에서는 다른 살해 방법과 그 어떤 본질적인 구별이 없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후자(后者)는 심지어 전자(前者)보다 더 잔인한 바, 죽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긴 시간의 시달림을 받게 하고 더 큰 고통을 받게 하기 때문이다.

하늘의 법칙으로나 인생의 준칙으로나 아니면 도덕적 양심에서 보더라도 하나하나의 무고한 생명들이 받은 학대는 모두 인간 세상의 일종의 비극으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극심한 비통을 느끼게 한다. 더욱이 현재까지 무고하게 학살 당한 확인된 숫자만도 이미 1,000명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그들 중, 가장 어린 사람은 불과 몇 살 밖에 안되고 가장 나이 드신 사람은 70세가 넘었고 농민, 과학자, 자영업자, 정부 관리 여러 방면에 걸친 사람들이었고 50%이상은 여성이었다. 다시 말해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학살 중에서 살아 남은 자가 없었다. 그들의 평균 나이는 44세로 사회에 대하여 가장 많이 공헌할 수 있는 한창 나이였으나 박해자에 의해 잔인하게 목숨을 빼앗겼다.

만약 통계수치를 더 면밀하게 분석해 본다면 우리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2001년말에 공식 확인된 사망자 수가 겨우 400명일 때, 중국 공산당 관리당국의 2001년 10월말 내부 통계로는 감금 중에 사망된 파룬궁 수련생 사망자수는 이미 1,600명에 달한다고 집계되었는데 공식 확인 실제 수치의 4배였다. 그렇다면 이런 비율로 따져볼 때 박해 받아 사망한 사람 수는 아마 적어도 4,000명이 넘었을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아주 과소 평가한 것이다. 왜냐하면 강도 높은 박해의 시달림 속에서 박해 받는 자의 감당 능력은 갈수록 한계에 이르러 1분 1초를 더 견뎌내기 조차 힘들 것인바, 이런 상황에서 박해 받아 사망할 가능성이 갈수록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사망자 수가 증가함에 따라 박해를 가한 자는 사회적 정의에 의한 질책과 국제 사회의 압력 앞에서 여러 가지 수단을 써서 더 엄밀하게 소식을 봉쇄하고 아울러 죄행을 가릴 것이다.

얼마 전, 장씨 집단은 거액의 자금으로 국외의 사이버 감시통제시스템을 구입한 것을 여러분들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파룬궁에 관련된 각종 정보의 발송을 엄격하게 통제함과 동시에 주어진 여건에서 해외로 소식을 전송한 수련생들에 대하여 중형을 판결하는 등 더 엄격한 박해를 감행하였다. 그것들은 “때려 죽이면 그만이고 때려 죽이면 자살로 쳐라” “신원을 조사하지 말고 직접 화장하라”는 정책을 실행하여 시체를 없애고 흔적을 감추었다. 그러므로 박해가 가혹해 짐과 더불어 덮어 가려진 사망자 수의 비율도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사실상 현재 폭로해낸 사망 사례는 대부분 수 개월 전이나 심지어 몇 년전에 발생한 것들이다. 이 형세로 볼 때 박해 받아 사망한 수치는 4,000명에만 그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비록 이러할지라도 사망자 수로는 박해의 잔혹한 정도를 설명할 수 없다. 일반적인 학살에 비해 파룬궁에 대한 박해에서 박해를 가한 자는 수련생들에게 두가지 죽음을 선택하게 한다. 신념을 견지하는 사람들은 혹형의 시달림과 육체적인 사망에 직면하게 되고 그토록 큰 압력 앞에서 신념을 포기한 사람은 영혼의 학살을 받게 되어 정신과 양심의 죽음을 맞이해야 되는 것이다. 정신적인 죽음은 육체의 사망보다 사람들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 신념을 견지하며 살아 남은 수련생들은 죽음의 고비에서 몇 번이나 초인간적인 정념으로 버텨 왔는가? 또 수 많은 사람들이 비록 살아 있지만 정신과 육체적으로 크나큰 시달림을 받고 있고 심지어는 정상적인 생활마저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생활은 산 것과 죽은 것의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허난(河南)성 스바리허(十八里河) 여 노교소의 사람의 인대를 끊고 뼈를 부수어 산사람을 고통스럽게 죽이는 “구속옷”과 뤼순(旅順) 215부대 정신병원의 사람의 육체를 썩게 하거나 사전에 죽게 하는 이름 모를 약물 남용 등 박해가 얼마나 잔인 무도하고 사악이 극에 달했는가를 보라.

현재 국제사회의 이번의 박해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 대조된다. 현대의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이토록 대규모적인 잔혹한 학살이 발생할 때, 사람들의 광범한 질책과 사람들의 큰 지원을 보내는 것을 보게 되고 각국 정부에서 강대한 압력을 가하여 하루 빨리 제지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파룬궁에 대하여 지금까지 이에 대한 정의로운 성원은 아직 아주 제한되어 있고 물질적인 지원은 더욱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적지 않은 큰 인물, 조직과 정부는 장씨 집단의 경제적인 유혹과 외교 압력 앞에서 여전히 이번 박해를 공개적으로 명확하게 질책하지 못하고 있으며 박해 받는 자의 정의로운 항쟁을 성원하지 못하고 있을 뿐더러 때로는 심지어 박해자의 악행과 교란을 묵인하고 있으며 박해 받는 자의 항쟁에 장애를 증가시키고 있다.

만일 파룬궁의 항쟁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기거나 혹은 이번의 잔혹한 학살에 대하여 초연하게 대처하거나 막연하게만 여긴다면 너무나도 큰 잘못이다. 미래의 어느 날이면 우리는 그런 사망한 용감한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생존자를 위하여 공헌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과거의 기독교 신자들이 그 후의 신앙인들을 위하여 신앙의 권리를 쟁취했던 것처럼, 마틴 루터의 그 시기의 항쟁이 오늘날의 유색인종들에게 이로움을 가져다 준 것처럼, 오늘의 파룬궁 수련생들이 치른 댓가로 미래의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부터 가지고 온, 독재자에게 박탈당한 권리만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과감하게 일어서서, 모든 국가와 민족 , 어떠한 한 생명이 장기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기초와 터전인 “쩐싼런”의 준칙을 수호하였기 때문이다. 이 의의에서 볼 때, 그들이 한 일체는 역시 우리 개개인을 위한 것이다. 그들이 노력한 결과로 우리 생명의 근본 요소는 더욱더 안정하고 견고하게 세상에 길이 남을 것이고 가장 냉혹한 환경에서 뿌리 내려 싹을 틔울 수 있어 나중에는 검은 구름의 암흑을 뚫고 승리의 여명을 맞이 할 것이다.

파룬궁 수련생들의 끊임없는 항쟁으로 광명은 날이 갈수록 가까워지고 있다. 그들이 간고한 시련 속에서 걸어온 길과 역경 속에서 써낸 역사의 시는 이토록 장엄하고도 아름다우며 휘황찬란 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학살은 여전히 무고한 생명들을 병탄하고 있다. 이 일체에 직면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만일 우리의 책임을 다 하지 못했다면 정의와 양심의 천평과 생명의 미래를 우리는 어떻게 맞이 하겠는가? 미래의 역사책에 어떻게 오늘날의 이 한 페이지를 기록하겠는가? 우리는 자신에게 어떤 기억과 비명을 쓸 것인가? 만일 우리가 최선을 다했다면 더 이상의 유감은 없을 것이고 마음은 편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의 치욕으로 될 것이고 우리의 양심은 영원히 편안하지 못할 것이다.

60여 년전, 사람들의 히틀러에 대한 방임은 최종적으로 유태인들의 더욱 큰 비극을 초래하였고 10여 년전, 사람들의 루만다 학살에 대한 느린 반응으로 최종적으로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살해되게 하였다. 오늘 날, 우리가 역사의 과거에서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의 손실은 더욱더 참혹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이번 박해는 더 방대한 군중들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 한 곳에만 천백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직접 관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씨집단이 박해하려고 직접적으로 시도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에 그토록 중요한,”쩐싼런”에 대한 추구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교훈은 이미 너무나도 많다. 만일 선량한 자가 무고하게 학살되고 있는 것을 보고도 우리가 침묵을 지킬 때 악운은 우리 자신의 머리 위에 떨어지리라는 걸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우리 또한 외딴 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선량이 무고하게 불행을 당하고 숭고한 도덕 법칙이 학대 받고 있을 때, 우리는 다 함께 불행을 당하게 되고 또한 악행을 저지른 자가 조성한 후과를 감수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박해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반드시 더 많이 지불해야 하고 즉시 행동해야 한다.

칠레의 전 독재자 피노체트의 통치하에서 3,000여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되었다. 그는 후에 집단학살죄 즉 대학살죄로 기소당하였다. 오늘 날, 피의 빚을 잔뜩 진 장쩌민은 피노체트의 악행을 훨씬 능가한 만행을 저질렀다. 만약 국제 사회에서 더 많은 도움의 손길을 보낸다면 박해를 가한 원흉을 법에 따라 처벌하고 이번의 박해를 종식시키는 날은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우리 다 함께 마음과 힘을 더 기울이자. 선량함을 도모하는 것은 곧 자신을 돕는 것 이다.

문장완성: 2004년 7월 5일

문장발표: 2004년 7월 6일
문장갱신: 2004년 7월 6일 4:06:08 PM

문장분류: [시사초점]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4/7/6/78809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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