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장쩌민은 어떻게 민중의 요언을 믿는 심리를 이용하여 요언을 날조하였는가(상)

【명혜망 2004년 6월19일】장쩌민(江澤民)은 法輪功(파룬궁)을 박해하기 위하여 아주 많은 요언을 만들었다. 사실 정치운동을 여러 차례 겪은 후 사람들은 요언에 대하여 면역력이 생겼다. 하지만 장쩌민 본인은 개인의 위신에서도 과거의 지도자와는 근본 비길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의 요언을 쉽게 믿는 사람이 아직도 있는가?

아주 중요한 하나의 원인은 바로 장쩌민이 대중의 요언을 믿는 심리에 맞추어 요언을 날조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할 자유가 있으며 자신의 인생철학과 사람으로서의 이념이 있는 것으로서 이는 본래 크게 비난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장쩌민은 파룬궁을 추악하게 하기위하여 사람들이 쉽게 오해하는 일부 심리를 전문적으로 겨냥하여 아주 많은 요언을 날조하였으며 대중들도 저도 모르게 이번 박해 속으로 휘말려 들어왔다.

본문은 파룬궁에 대한 오해를 초래한 각종 심리상태를 분석하고자 시도하는데 목적은 대중을 경고하기 위해서이다. 아울러 사람들이 적게 혹은 많게 마음 속으로 장쩌민에게 이용당한 잠재적 편견을 의식하여 힘이 닿는 대로 본래 발생하지 말아야 할 이번 박해를 제지하도록 도와줄 것을 바란다.

1. 몇 십 년 동안의 무신론 교육이 의식형태적으로 뒷받침하다

무신론 교육은 “신에 대한 신념” 등을 “봉건미신”과 동일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내심으로부터 신도는 우매 무지하고, 과학을 반대하고 사기 당한 것이라고 여기게 하였다. “과학을 숭상하고 미신을 반대함”은 사실상 일체 종교를 부정한다. 대륙에서는 형식적인 또 몇 개의 종교가 있지만 그것은 그 당시 역사배경 하에서 통전(統戰 ; 공산당의 통일전선) 목적에 사용되기 위하여 남겨진 것이다. 근래에는 “과학자”, “원사(院士:과학원 등의 회원)” 직함을 머리에 떠받친 사람들이 또 “위(僞)과학”이란 명의를 이용하여 크게 떠들고 있다. 이렇게 하여 한 개의 극단적인 무신론 환경 속에서 사람들이 허용하는 신흥적인 신념의 공간은 아주 작다.

사실 서방의 발달한 국가에서 성과가 있는 수많은 과학자들도 성실한 종교신도들이다. 종교 혹은 신에 대한 신앙은 과학과 충돌하지 않는다. 아울러 도덕을 수호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대체할 수 없는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2. 역대의 정치운동이 민중들에게 “범정치화(泛政治化)”의 심리공포를 만들다
사람들은 정부가 탄압하는 상대가 정치성이 있든지 없든지를 막론하고 모두 “정치”에 귀착시킨다. 모든 일이 “정치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음모계략”, “사람에게 이용당함”, “사기당함”을 연상하게 하는데, 또한 반드시 “좋은 결말”이 없었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마음 속으로 반감하며 피한다.

3. 투쟁교육은 아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정하지 않으면 관용하려고 하지 않는다”라는 심리가 생기게 하다

역대의 정치운동 중에서 배운 명철보신(明哲保身)은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관심을 갖지 않는 사물에 동정심이 모자라게” 하였고, 심지어 “인정하지 않으면 마땅히 때려야 한다” 혹은 “맞아 싸다”라고 여기게 하였다. 최소한 “파룬궁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런 심리는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관영 매스컴 선전에 의심하는 태도를 나타내지 않고 진위를 깊이 가려내려고 하지 않게 하였다.

4. “살인방화”의 일에 대하여 사람들은 “일이 있었다고 믿으면 믿었지 일이 없었다고 믿지 않는다(宁信其有,不信其无)”

장쩌민이 요언을 날조함에는 선명한 규율이 있었는데 바로 박해가 승급됨에 따라 하나의 거짓말이 점점 더 커지고 심지어 서로 모순되었다. 약을 먹지 않는다 에서 자학하다에 이르렀고, 자살, 분신자살에서 가족을 살해함에 이르렀으며, 후에는 경찰을 살해하다에 한 사람이 16명을 살해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2004년 2월 공안부장 저우융캉(周永康)은 중특대(重特大)화재와 교통사고를 억제할 때 감히 “파룬궁 등의 교란 파괴활동”을 엄밀하게 방지하자고 크게 소리질렀는데 더욱 큰 날조를 위하여 미리 침을 놓는 것이 아닌가 고 사람들로 하여금 나중에 두렵게 하였다.

중공(中共)은 거짓말을 잘 한다. 이는 이미 사람마다 모두 잘 알고 있는 일이다. 허나 살인하고 입마(入魔)한 일은 사람목숨에 관련되지만 “일이 있었다고 믿으면 믿었지 일이 없었다고 믿지 않는” 이런 심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파룬궁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경계심이 일어나게 하였다.

5. 텔레비젼의 마법(魔法)──“눈으로 직접 본 것이 진실하다”는 사람들로 하여금 중공이 항상 역사를 날조하는데 대하여 경각심을 잃게 하다

이 십여 년 동안 중국의 텔레비젼은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는바, 2003년 관영의 통계에 따르면 시청자 총 인원수가 10.7억인에 달하였다. 사람들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진실하다”란 잠재심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텔레비젼에서 펼쳐 보이는 “진인진사(真人真事)”에 대하여 의심 없이 믿게 하였다. 당사자들의 탄백(坦白), 피해자의 흐느낌, 이웃들의 고소(告訴), 거기에 방송원의 “절대권위”의 기세를 가하면 현대 텔레비젼의 인터뷰와 편집, 제작과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꽃을 잘라 나무에 옮겨놓는 것을 모르고, 드라마의 “아주 신기할 정도로 속이는” 기술수법을 잘 모르는 시청자들이 텔레비젼의 내용에 믿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는가?

반대로 과거에는 신문에 스피커를 가한 정치선전 공세였다. 장쩌민이 텔레비젼을 이용하여 요언을 날조함은 예전의 어떠한 한차례 비방운동과 비할 바가 못 된다.

6. 뿌리 깊은 질투심리

누가 만약 이름을 날리면 아주 많은 사람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바로 “무엇을 믿고 그가 어떻게 어떻게 하였다”이다. 그러므로 “재물을 모으다”로 한 사람 혹은 하나의 집단을 더럽히는 것은 흔히 보는 수단이었다. “질투심”의 잠재적인 작용 하에 일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매스컴의 한 사람에 대한 공격을 믿는 경향이 있게 된다. 거기에 현재 이 텔레비젼의 수법을 가하여 일부 “실물정경”을 만들면 미혹성은 아주 커진다.

7 중국의 역사에서 비밀리에 무장봉기를 일으킨 사례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단체에 대하여 경계심리로 충만되게 하다

중국의 역사상에는 종교성질이 있는 단체가 발전하여 천하를 다투는 정치단체로 된 적이 있다. 역사의 비론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특히 지식인 계층과 일부 자유 지식인을 포함하여 모두 심리상에서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에 대하여 정치배경과 정치시도가 있다고 한 고발을 쉽게 받아들이게 하였다.

파룬궁은 그 비밀적인 교파들과 근본적인 구별이 있는데 바로 파룬궁의 “공개성”이다. 공개적으로 연공하고 공개적으로 법공부하고 공개적으로 법을 널리 알린다. 마침 장쩌민의 탄압은 공개장소에서 연공하기만 하면, 파룬궁수련생들이 함께 교류하기만 하면 붙잡히고 갇히는 위험을 조성하였다. 파룬궁수련생들이 박해를 반대하는 거대한 노력이 바로 “공개”하는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상 몇 년 동안 장쩌민 한 무리 마저 파룬궁이 무슨 정치적 목적이 있는지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8. 서방 중세기 종교재판소가 사람들에게 부정적 인상을 남겨주다

중학교 교과서에는 갈릴레이가 불에 타 죽은 것을 소개한 내용이 있는데 학생들로 하여금 종교가 우매하고 과학을 반대한다는 강력한 인상을 얻게 하였다. 거기에 근대의 일부 극단적인 종교 광렬 분자들의 테러 전쟁 행위는 무신론을 신봉하는 중국 민중을 놓고 말할 때 바로 절묘한 “반면교재”였는바, 종교는 사회를 해치는 더욱 나쁜 것으로 간주하게 하였다.

사실 현대 사회의 수 많은 국가에서는 이미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극단종교분자도 단지 소수인들이다. 중국은 정교 정법이 사회에 대해 정면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데에 대한 선전이 아주 적다. 미국 대통령 클린턴과 부시는 중국의 저명한 대학에 와서 강연할 때 모두 미국사회의 종교자유의 필요성, 종교가 사회에 대한 안정, 도덕을 수호함에 있어서의 거대한 공헌을 여러 차례 제기하였다.

9. 사람들의 “신을 믿지 않음으로써 신을 조롱하기 좋아하는”심리

“신이 아닌가? 재간이 아주 크지 않는가? 어찌하여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가?”–이런 심리는 신도가 아주 처참하게 박해당할 때 아주 쉽게 “신”이 없다는 증거로 된다. 다시 말하여 매스컴의 “신을 믿음”에 대한 비방을 비교적 쉽게 받아들인다.

사실 종교 혹은 신을 신앙함은 속인 속의 일과 다른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는 연고가 있다. 예수는 신이지만 오히려 사람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아마도 마침 이런 비웃음 속에서 “신”은 비로소 매개 사람의 심령의 진실한 표현을 똑바로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계속)

문장완성:2004년 6월18일

문장발표:2004년 6월19일
문장갱신:2004년 6월19일 4:11:41 AM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4/6/19/77422p.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