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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가부좌의 통증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글 / 대만 대남대법제자

[명혜망] 신통가지법은 나로 하여금 정말로 사랑하면서도 또한 두렵게 한다. 오묘함이 무궁한 동시에 온가부좌의 고통스러운 소업(消業)은 정말로 심장을 아프게 한다. 나로 말하자면 그런 통증이 이미 극에 달했다. 그러나 통증의 뜻을 알기 때문에 매일 연공은 모두 억지로 지탱함을 견지하였다. 또한 시일이 지나면서 일찍이 반가부좌에서 온가부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5분, 10분, 30분에서 지금은 한 시간을 견지할 수 있다. 그러나 매일의 통증은 여전히 감소되지 않았다. 전에 동수들과 어떻게 대할 것인가 교류하였는데 결과는 참고 이를 악물고 지탱해야 한다는 것이 다수였다.

방학중에 우리 연공장에 한 스웨덴 수련생이 왔다. 그는 이미 법을 얻은 지 5년이 되었고 특별히 국립성공대학에서 중문을 배우고 있었는데 하루가 다르게 중문을 잘 배웠는데, 일찌감치 중문 >을 읽기 위해서였다. 지난 토요일 그는 사정이 있어 늦게 도착하였고 그 당시 우리의 가부좌는 거의 끝나갔다. 그는 마침 매 사람의 표정 상황을 보게 되었는데, 연공이 끝난 후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부좌하고 결인(結印)할 때 얼마나 아프든지를 막론하고 모두 신체를 움직이지 않음을 유지하는 동시에 얼굴에는 상화로움을 지녀야 한다. 반드시 참고 통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 가는 속인이 당신의 그 표정을 보고 어떻게 감히 와서 연공을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우리가 공공장소에서 연공하고 홍법하는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알고 있고 또한 그 이치에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참고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었다. 그가 말했다. “사상을 청정히 하고 심성을 제고하십시오.” 나는 암만 생각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깨닫지 못하였다. 나의 깨달음은 ‘심성은, 모순이 나타났을 때, 어려움이 왔을 때 자신의 심성을 제고한 후 모순과 어려움은 상대적으로 작게 변하여 이 관도 한번에 넘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부좌의 통증이 어찌 심성제고로서 넘을 수 있겠는가? 나는 깨닫지 못하였다. 두 번 째 날이 지나갔다. 나는 여전히 깨닫지 못하였다.

셋째 날, 가부좌 중에서 다리 통증의 감각이 차츰차츰 증강(增强)될 때 나는 스웨덴 동수의 말을 생각하며 마음을 내려놓았다. 내려놓았다. 내려놓았다. 또 내려놓았다. 마음이 천천히 갈수록 내려 놓여짐에 따라 마음은 이미 비어졌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주의식은 마치 정념을 발할 때처럼 그렇게 의념을 집중하고 음악에 전념할 수 있었다. 목탁 소리에 따라 의념은 차차 위로 승화되고 승화되고 승화되었으며 의경(意境)은 갈수록 높아졌으며 마음은 완전히 비었다. 이 때 신체는 아무 부담도 없었고 아주 홀가분했다. 유독 다리만 단단히 틀어져 움직일 수 없었다. 이 때 정신과 신체가 이미 분리되었음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다리통증을 느낄 수 있었고 정신의식은 위에 높이 있었는데 그것은 통증보다 높았고 통증은 이미 그것을 통제하지 못하였다. 이 때 나는 비로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얼굴에 상화로움은 지니고 마음은 자비가 생기는 그러한 장엄하고 엄숙한 형상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유유(幽幽)한 다리통증과 함께 “고생을 낙으로 여긴다” 하심의 함의를 깊이깊이 느끼었고 또한 진정으로 가부좌의 미묘함을 맛보았다. 이 하나의 관을 넘음으로써 나로 하여금 크게 한 걸음 나아가게 하였다. 하루가 지났고 나는 한 시간 연속 발정념을 할 수 있었다. 동시에 만약 또 시간을 연장하여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느끼었다.

한 점의 작고 작은 체험을 진심으로 동수들과 나누고자 한다. 자신의 제고된 것을 보면 참는 고통을 돌파하고 비로소 의경(意境)의 승화에 도달할 수 있다. 동시에 참음에 대해 더욱 깊고 넓은 인식이 있게 되었다. 위대하시고 자비하신 사부님께 감사를 드린다.

발표일자 : 2002년 12월 4일

문장분류 : 渡船初啓航(도선초계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