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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세력의 배치를 승인하지 않는다” 함에서 법리(法理)를 본다

글 : 해련 (海煉)

어떻게 법리에서 “낡은 세력의 배치를 승인하지 않는다” 함의 내포를 깊이 인식할 것인가는 정법 노정에 따라감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근일 동수들 문장에서 계발을 받아 자신의 수련 깨달음을 종합한 바, 나 개인의 일부 인식들은 이야기하고자 하니 동수들께서 자비하게 시정해 주기 바란다.

사부님의 “승인하지 않는다” 함과 제자의 “승인하지 않는다” 함은 한 개념이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낡은 세력의 배치를 승인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우주 속의 생명들이 모두 부패되었고 그것들의 생명이 구성된 본원 요소가 모두 불순해졌으며 요소의 요소가 모두 불순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그것들 자신도 발견하지 못하며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자신으로 하여금 진정하게 순정(純正)하게끔 할 수 없다. 그것들 자신이 정법(正法)과 새로운 우주 표면의 요구에 부합될 방법도 없는데 그것들이 어찌 법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정법(正法)을 어찌 그것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 있겠는가? 정법 후의 새로운 우주의 생김이 낡은 우주의 생명표준과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아직도 낡은 우주가 아닌가? 형식만 바꾸고 내용은 바꾸지 않은 격이 아닌가? 낡은 우주의 일체 중생, 그것들은 우주의 선천적으로 가장 순정(純正)할 때가 어떤 모양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데 어찌 그것들의 요구에 따라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그것들을 승인할 수 없다.”(>)

“낡은 세력의 배치를 승인하지 않는다” 함은 사부님 정법(正法)의 필연이다. 정법이 시작되자마자 이미 결정된 것이며 새우주의 법리의 체현이다. 반대로 만약 새우주가 그것들의 배치를 승인한다면, 단지 아주 작은 한 점일지라도, 섞여들어와 연화한 것이 한 분자일지라도 새우주는 순정하지 못하며 정법 역시 헛된 것이다.

사실 낡은 세력이 정법을 저애하는 배치를 한 것이 아니라, 사부님께서 그것을 승인하지 않으며 아울러 일체 낡은 우주 중의 생명은 모두 자격이 없기 때문에 또 정법을 배치할 수 없다. 그 배치가 저애 혹은 도움 같아 보일지라도 사람 이 곳에서 표현되는 소위 “좋다(好)” 혹은 “나쁘다(壞)”와 같다. 정법은 모두 필연코 “승인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법의 배치”는 낡은 우주 중의 개념이 아니며 낡은 우주 중에는 이 단어의 내포가 존재하지 않는다. 낡은 우주의 생명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대법에 동화되며 어떻게 법에 동화되는가를 위하여 배치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사람의 환경 속에서 신의 생활을 말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어떻게 상상하고 묘사하든지 간에 모두 신의 세계의 진정한 내포가 있을 수 없다. 단지 수련을 통하여 그 한 층의 경지에 동화되어 고급생명이 되어야 비로소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신의 세계를 왜곡하였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의 언어를 다 하여 불국세계(佛國世界)를 미화하여도 신 역시 사람의 생각에 따라 천국을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수련하여 승화하고 동화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대궁(大穹)의 밖에서 손을 휘젓는 사이에 새 우주를 만드셨고 또 대궁 이내의 생명과 그의 일들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내가 사부님의 “낡은 세력의 배치를 승인하지 않는다” 하심에 대한 이해이다.

제자의 “승인하지 않는다” 함과 사부님의 “승인하지 않는다” 하심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제자 역시 낡은 우주 중의 생명이기 때문에 제자는 사부님의 각도에 서서 “승인하지 않는다” 함을 말할 수 없다. 제자가 우선 해야 할 것은 사부님의 “승인하지 않는다” 함을 깨닫고 사부님의 법을 정오(正悟)하여 그 배후의 법리를 아는 것이다. 표면적인 이해만 해서는 안 된다.

사부님의 정법(正法) 하심 중 “낡은 세력의 배치를 승인하지 않는다” 함의 필연성을 알게 되면 제자의 “승인하지 않는다” 함의 내포를 아주 잘 인식할 수 있다. 대법제자로서 “낡은 세력의 배치를 승인하지 않는다” 함은 바로 우주대법에 동화하는 필연이다.

우리가 머리 속에 낡은 세력의 일체 배치에 대해 가져야 할 일념은 마땅히 “승인하지 않는다” 함이다. 그 배치가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혹은 이후의 것이든 부정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것에게 자라서 연화할 어떠한 조건도 주지 말아야 하며 우리가 새우주에 동화되는 노정을 교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승인하지 않는다” 함은 “좋고” “나쁘고”에 기초하여 얻어낸 판단이 아니며, 더욱이 일종의 싫어하는 정서가 아니라 법리상에서의 똑똑한 인식이다. 새우주는 낡은 우주와 완전히 다르다. 비록 우리의 신체가 아직도 낡은 우주 이치의 제약 속에 처해 있지만, 낡은 세력의 각종 배치의 제한을 받지만 우리 머리 속의 “승인하지 않는다” 함은 바로 법의 층면에서 낡은 우주와의 어떠한 연관력을 끊어 버리는 것이며 우리 신체가 최종적으로 새우주에 동화되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치 대법 수련자가 사람 속에서 수련할 때 나중에 반드시 사람에서 걸어나와야 비로소 원만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진정한 각자(覺者)는 사람의 일에 대해 한 치의 미련이 없으며 머리 속에서도 한치의 승인도 없다. 비록 인류사회가 수련의 좋은 환경이라고 하지만 사람의 일체는 각자로 놓고 말할 때 모두 더러운 것이다. 어떻게 그 더러운 것들을 순정한 불국세계로 지니고 갈 수 있는가? 그러므로 진수자(眞修者)는 절대 인류사회의 어떤 것도 승인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승인하지 않는다” 함은 사람 중에서 간고한 수련을 거쳐 도달된 그러한 경지이다. >에서는 한 사람이 나한으로 수련하는 이야기를 말씀하였다. 수련해낼 때 사람마음이 움직여 결국 두 번이나 떨어졌다. 다른 한 층면(層面)에서 볼 때 바로 그가 머리 속에서 사람의 것을 철저히 부정하지 않았고 여전히 사람의 염두(念頭)로 그가 수련해 낸 과위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사람의 관념에서의 이런 연관력은 나중에 그 개인이 동화되어 원만하는데 영향을 준다.

낡은 세력은 그것들의 소위 말하는 “정법”의 배치에 집착하는데 사람 이 곳에서 체현됨이 “좋든” “나쁘든”, 새우주의 창건에서 한치의 가치도 없으며 마치 삼계 내의 분자로서 구성된 물질이 불국세계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이 더러운 썩은 흙과 같다.

정법 중에 낡은 우주 중의 모든 생명에게 우주대법에 동화될 기회와 인연을 창조하여 주었다. 낡은 세력이 어떻게 배치하든가를 막론하고 만약 우리가 법에서 그것을 “승인하지 않는다” 함은 고의적으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함이 아니라 그 포함된 법리를 알게 된 후의 이성적인 승화이고 인식상의 제고이며 법에서 정법에 따라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부님께서는 그것을 이용하여 우리가 대법에 동화되도록 배치하실 것이며 사실 배치마저 함께 동화되는데 어찌하여 무슨 낡은 세력의 배치를 두려워할 수 있는가?

다른 한 방면에서 정법 중 대법제자에게 더욱 높은 요구를 제기한 것으로서 “승인하지 않는다” 함은 또 정념을 유지하는 데에서 체현된다. 우리가 대법에 동화됨을 교란하고 파괴하는 그 배치도 정념으로 제거해야 한다. 나는 낡은 세력의 이런 교란과 배치가 바로 구체적인 일에서 표현되지만 뿌리에서는 우리의 주의식을 교란하며 우리가 법에 부합되지 않으려는 관념을 키우는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표면적 일의 배치냐 아니냐에만 중점을 두고서 관념에서 착수하지 않는다면 “낡은 세력의 배치를 승인하지 않는다” 함을 철저히 해낼 수 없다. 이에 대해 법에서 마땅히 충분히 깨어있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간단한 한마디 “낡은 세력의 배치를 승인하지 않는다” 함 속에 포함된 법리, 그리고 제자의 정법수련에 연관된 내포는 우리가 한번 잘 깨달아 볼 가치가 있다. 대법제자가 전체적으로 법에서 인식하고 더욱이 정법에서 나타난 관건적인 문제에서 인식을 제고하면 제자가 책임진 대응된 공간 중에는 필연코 파란만장한 정법(正法)의 거대한 변화일 것이며 사람의 이 한 층도 따라서 변화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 정법 노정에 따라가는 구체적인 체현이다.

고층차의 신(神)의 일념은 바로 한 층의 하늘을 개창할 수 있는 것이다.

轉載 : 정견망 (2002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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