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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을 말함

글 : 일본제자

관용은 일종의 미덕으로서, 속인 속에서의 선(善)의 체현이다. 그는 인류사회에 안정과 상서로움을 가져다 준다.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나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높은 요구를 제기하셨다고 이해한다. 그것이 바로 홍대(洪大)한 관용이다. 나는 그것이 마땅히 각자(覺者)의 본성의 일부분이라고 여긴다.

오늘날의 인류사회에는 바로 상생상극의 이치가 존재한다. 믿는 이가 있는가 하면 믿지 않은 이가 있고, 찬성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반대하는 이가 있으며, 착한 이가 있는가 하면 악한 이가 있다. 예를 들어 아이를 잘 교육하려면 그가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현재 아주 많은 사람들은 때리고 욕하는 이런 수단을 쓰는 것이 소위 “몽둥이 아래에 효자가 난다”라고 여기는데, 착한 소망이 반대로 악한 수단으로 표달되어 나온다.

인간세상에서 정법에 참여한 우리 이 대법제자들은 수시로 또 선하지 못한 일면을 표현해 낸다. 예를 들어 부동한 의견에 부딪치면 자신의 것이 맞고 다른 사람이 틀렸다고 여기어 온 힘으로 자신의 의견을 견지하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의견에 동의해주기를 희망한다. 엄중할 때에는 바로 변론하고 다퉈 고집하며 심지어 고함까지 친다. 이 때에는 자아(自我), 관념(觀念), 감정, 논리, 악념(惡念) 및 마성(魔性) 등이 위를 점할 수 있다.

관(寬)이란 넓음(廣)이요, 용(容)이란 큼(大)이다. 사람은 미혹 속에서 생각하고 보는 범위가 협소하여 용량이 자연히 작다. 옛날사람들은 “뱃 속에서 배를 몬다”로서 흉금이 넓음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마음 속에 광대한 천체 우주를 담고 무량한 중생을 담은 우리 이 정법제자들은 마땅히 “기량이 협소함”을 표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매 사람마다 장기적인 법공부, 수련 중에 모두 우주대법에서 일정한 층차의 법리를 증오하였으며 각 사람마다 깨달은 것은 자연히 차이점이 존재한다. 이것은 정상적이다. 증오한 것의 층차가 더 높을지라도 사람의 언어로 표달하면 그렇지 않다. 우리는 내려놓지 못한 집착이 있고 아직 의식하지 못한 변이관념과 논리가 있으며, 거기에 과시심·질투심·환희심 등등이 더 있다. 우리가 더욱 좋은 출발점이 있어도 이것들이 속에 끼여 있으면 모순을 만들어낸다.

매 한 명의 진수(眞修)제자는 모두 깨달은(覺悟) 일면이 있다. 우리는 마땅히 시시각각 정념을 유지하여 “각오한 본성”이 주도가 되게 해야 하며 마성(魔性)의 발작으로 모순을 만들고 모순을 전파하며 모순을 확대하지는 말아야 하며, 심지어 정법노정과 중생구도에 영향을 주는데도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며칠동안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생각할 때 마음 속으로 중복하였다. – 홍대한 관용, 홍대한 관용, 홍대한 관용. 나는 마음 속이 아주 많이 평온해짐을 발견하였다.

문장의 작가이면서 또 문장의 첫 번 째 독자인 나는 여기까지 쓰면서 갑자기 이 문장이 나 자신에게 쓴 것임을 알았다. 나는 두 눈의 눈물을 금하지 못하고 울고 말았다.

轉載 : 정견망 (2002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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