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밍후이왕 통신원 헤이룽장 보도) 치치하얼(齊齊哈爾) 파룬궁 수련생 선쯔리(沈子力)는 2007년 2월 27일 박해로 사망했는데, 이미 거의 13년이 된다. 중공(중국공산당) 정치깡패집단의 광적인 박해 중, 선쯔리는 잔혹한 육체와 정신적 학대를 당했다.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심한 박해를 당했다.
선쯔리는 그해 치치하얼 제4병원에서 근무했는데, 여러 차례 중공 경찰에게 납치 박해당해 치치하얼시 솽허(雙合) 여자 노동교양소에서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1999년 10월 21일, 선쯔리가 다니는 직장인 헤이룽장(黑龍江) 치치하얼 제4병원에서는 선쯔리의 월급으로 치치하얼 구치소로 가서 이불과 구류 당한 보름 동안의 식비 3백 위안(약 5만 원)을 냈다.
1999년 11월 25일, 선쯔리의 직장에서는 선쯔리의 월급을 공제한 후 치치하얼 룽사(龍沙)구 선전부 615(그 후 610으로 변경됨) 사무실에 이른바 교육비로 2천 위안(약 33만 원)을 냈다.
1999년 12월 22일, 선쯔리의 가족은 이른바 보증금 3천 위안(약 50만 원)을 내도록 강요받았고, 선쯔리가 박해당해 사망한 후 가족은 쟁론해 되돌려 받았다.
당시 선쯔리는 낮에 정상적으로 근무하고 저녁에는 직장 세뇌반으로 납치돼 동료에게 이른바 ‘보살핌’을 받으며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었다. 가족은 또 핍박에 의해 매주 한 번 직장으로 가서 ‘보살펴’줘야 했다. 직장에서는 선쯔리의 월급을, 보살펴 주는 사람이나 그들 가족에게 주었는데, 사람마다 매일 80위안(약 1만3천 원)씩 한 달 동안 지급됐다. 당시 치치하얼 제4병원 원장은 리톈쿤(李天坤)이고 부원장은 선거(沈革)이며 서기는 왕옌화(王豔華)였다.
2000년 6월 13일, 선쯔리는 치치하얼 톄펑(鐵鋒)구 공안분국으로 납치됐다. 그 후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2002년 3월 노동교양처분을 해제할 때까지 월급 지급이 전부 중지됐다.
2002년 4월 24일, 선쯔리는 치치하얼 제4병원 직장 책임자에게 거짓 고소를 당했다. 선쯔리는 치치하얼 젠화(建華) 공안분국에 의해 납치됐고, 아울러 1년 6개월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받았으며, 월급 지급도 중지됐다.
당시 치치하얼 솽허 노동교양소 2대대 부대대장 왕메이(王梅)는 가족과의 면회를 허락지 않았다. 그런 다음 개인적인 경로로 가족을 위협해 6천 위안(약 100만 원)을 갈취하고는 판결을 면할 수 있다고 거짓말했다. 2003년 10월 선쯔리가 노동교양소에서 풀려나 직장으로 돌아와 출근할 때까지도 이 6천 위안을 다시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2005년 3월 12일, 선쯔리는 치치하얼 정양(正陽) 파출소에 납치됐다. 이튿날, 선쯔리는 파출소에서 정념으로 벗어났다. 직장에서는 3개월 동안 월급만 준 후 곧 월급 지급을 중지했다. 그 후 치치하얼 제4병원이 해체됐고, 원래의 주소에 치치하얼 질병예방통제센터를 설립했다.
2006년 4월 2일, 선쯔리는 수련생 집으로 갔다가 잠복 감시하던 톄펑(鐵峰) 공안분국의 악독한 경찰에게 납치돼 수광(曙光) 파출소에서 호랑이의자, ‘오마분시(五馬分屍: 늘이기 침대)’, 대나무 판자, 쇠관, 쇠망치로 허벅지를 때리기 등 각종 학대를 당했다. 악독한 경찰 성타오(盛濤)는 너비가 2인치 되는 대나무 판자로 그녀가 기절할 때까지 발바닥을 때렸다. 선쯔리는 학대당해 상처투성이가 됐고 여러 차례 기절했다. 악독한 경찰은 냉수를 끼얹고 담배꽁초로 지지며, 악행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2006년 5월 9일, 가족은 핍박에 못 이겨 2만 위안(약 335만 원)의 ‘보증금’과 이른바 ‘의료비’ 3천 4백여 위안(약 57만 원)을 냈다. 당시 수광 파출소 소장 추춘(初春)과 부소장 쉬중허(徐中和)는 그 이상의 자금을 갈취했다. 선쯔리는 박해당해 생명이 위독해져서야 풀려났다.
2007년 1월 13일 오후 4시, 박해당해 유랑생활한 선쯔리, 쉬훙메이, 허우야첸(侯雅倩)이 허우야첸의 거처로 갔을 때, 갑자기 한 무리의 경찰이 들이닥쳐 강제로 그녀들을 룽사(龍沙)구 칭윈(靑雲)가 파출소로 납치했다. 악독한 경찰 이잔후이(衣湛暉)는 잔인하게 쉬훙메이를 4층에서 1층으로 잡아끌었다. 또 그녀에게 큰 ‘형틀’에 올리기 고문, 일자형 고문을 가했고, 또 각종 형구를 바꿔가며 혹독하게 구타해 인사불성 되게 했다. 이잔후이는 또 냉수를 그녀에게 끼얹어 정신 차리게 해 계속 학대했다. 그 후 또 그녀를 쇠 철장 안에 가뒀다. 선쯔리는 칭윈가 파출소의 악독한 경찰에게 테이프에 의해 의자 위에 묶였다. 그들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 벽에 부딪혀 기절시켰는데, 정신을 차리면 계속 혹독하게 구타했다.
칭위안가 파출소의 악독한 경찰 이잔후이, 저우환위(周環宇)는 그녀들에게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면서 신체에 심각한 내상을 입혔다. 선쯔리, 쉬훙메이 두 사람은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입에서는 피가 흘렀고 각혈했으며, 경련을 일으키고 전신이 붓고, 오장이 쇠약해지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고 전해질 장애가 나타나고 혈압에 문제가 생겼다. 또 먹은 대로 전부 토했으며,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어 수시로 생명을 잃을 위험이 있었다. 1월 18일, 악독한 경찰들은 온몸에 상처투성이고 사경을 헤매는 선쯔리, 쉬훙메이를 치치하얼시 구치소로 옮겨 계속 박해했다.
2007년 2월 1일 오전, 치치하얼 구치소에서는 가족에게 선쯔리를 면회하라는 통지를 내렸다. 선쯔리는 당시 면회실 안으로 업혀 갔는데, 그녀는 온몸에 기운이 없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 있었다. 그녀는 혈관에 이미 약이 들어갈 수 없다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2월 13일 오후, 구치소의 리리제(李麗傑)는 가족에게 선쯔리의 몸은 이미 아주 위험하다며 병원으로 데려가 간호하도록 했다. 그날 오후 선쯔리는 치치하얼 제2병원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치치하얼시 610, 공안국,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룽사구 610, 룽사구 공안분국, 룽사구 정법위, 칭윈가 파출소는 매우 비인간적이었으며 제때 석방하지도 않고 박해자 가족에게 2만 위안(약 335만 원)의 돈을 갈취하고 나서야 석방해주려 했다.
2007년 2월 16일, 칭윈 파출소 경찰은 가족에게 2만 위안(약 335만 원)을 내도록 제안했는데, 그러면 곧 선쯔리를 집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고 했다. 당시 치치하얼 룽사 공안분국 국장 장항(張航)이 현장에 있었는데 말이 없었다. 가족은 6개월 전에 수광(曙光) 파출소에 의해 2만 위안을 갈취당한 적이 있는데도 칭위안 파출소에서 또 갈취하려 했다. 가족은 돈을 낼 여력이 없었고 사당 인원들은 그녀들이 죽어도 놓아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당 인원들이 쉬훙메이, 선쯔리에게 ‘알부민’을 주사한 후, 그녀들은 눈이 풀리고 입을 열리고 숨을 가쁘게 쉬었으며 인사불성이 됐다. 쉬훙메이, 선쯔리는 각각 2007년 2월 27일 오후 4시 30분, 8시 50분 심신이 극히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억울하게 사망했다. 쉬훙메이는 당시 겨우 37세였고, 선쯔리는 49세였다.
선쯔리는 박해로 사망했으나, 관련 인원은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2007년 3월 26일, 치치하얼 제1구치소 소장 뉴리민(牛立民)은 선쯔리의 직장으로 가서 선쯔리의 화장비 1050위안(약 17만 원)을 받았는데, 선쯔리의 직장 치치하얼 질병예방통제센터에 발급한 장례비 안에서 공제했다.
이때 치치하얼 질병예방통제센터의 직장 인원 사망 명단 안에 나타난 이름은 이미 선쯔리가 아니고 선수춘(沈淑春)이었는데 선쯔리의 원래 이름이다.
원문발표: 2019년 12월 24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 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2/24/39745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