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치치하얼 파룬궁 수련생 먀오샤오루, 박해로 사망한 현장 기록

[밍후이왕](밍후이왕 통신원 헤이룽장성 보도) 치치하얼(齊齊哈爾)시 앙앙시구(昂昂溪)의 파룬궁 수련생 랴오샤오루(繆小露)는 앙앙시구 정부에서 근무했다. 몸매가 균형이 잡히고 단정하며, 성실하고 선량했으며, 태도가 온화하고 행동이 우아해 중화전통 여성의 우아한 자태가 있었다.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을 견지한 이유로, 중국 공산당이 파룬궁에 대한 광적인 박해 중에서 2001년 12월 27일에 납치당했고, 2002년 4월 10일에 5년의 불법 징역형을 선고받아 하얼빈 여자감옥에서 온갖 잔인무도한 학대를 당했다. 2006년 11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았는데, 결국 2008년 3월 11일에 억울하게 사망했다. 당시 나이 겨우 43세였다.

缪小露遗照
먀오샤오루
(繆小露)의 생전의 사진

먀오샤오루는 2001년 12월 27일에 납치됐고, 12월 30일에 치치하얼시 제2 구치소에 불법으로 감금당했다. 어느 하루, 구치소에서는 랴오샹루 등 파룬궁 수련생에게 사진을 찍었다. 먀오샤오루, 양옌추(楊豔秋), 왕수팡(王淑芳), 장수저(張淑哲), 류융쥐안(劉永娟)은 협력하지 않아 모두 박해를 당했다. ‘감방을 관리’하는 경찰 뤼정(呂征)은 그녀들 다섯 명을 불러냈다. 로비에는 많은 경찰이 여전히 사진기를 들고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은 먀오샤오루의 이름을 쓴 팻말을 들고 먀오샤오루를 찍었다. 그녀가 팻말을 땅 위에 던지자 그들은 노발대발하며 벌떼처럼 몰려들어 몽둥이, 주먹과 발을 함께 사용해 구타했다. 이때 그 외의 네 명 파룬궁 수련생은 “사람을 때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다)!”라고 높이 외쳤다.

酷刑演示:毒打
고문 재연
: 혹독한 구타 

2002년 4월 10일, 먀오샤오루는 5년의 불법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항소는 불법 기각을 당했고 원판결을 유지했다. 2002년 9월 19일, 치치하얼시 제2 구치소에서는 먀오샤오루, 류융쥐안 등 파룬궁 수련생을 헤이룽장성 여자감옥으로 보냈다. 아침에 날도 아직 밝지 않아 출발해 오후 1시가 넘어 헤이룽장 여자감옥에 도착했다. 헤이룽장 여자감옥에서는 먀오샤오루, 양옌추, 왕수팡, 장수저, 류융쥐안 5명 파룬궁 수련생이 점심밥을 먹은 다음에 곧 그녀들을 각각 사무실로 끌어가 이른바 ‘전향’을 진행했다. 악독한 경찰은 쭈그려 앉히기, 뒷짐결박, 전기봉 충격, 주먹과 발로 구타하기 등 수단으로 먀오샤오루 등에게 심한 상처를 입혔다. 먀오샤오루는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한편으로는 선행을 권했으나, 그들은 전혀 듣지 않고 손안의 전기봉으로 끊임없이 먀오샤오루의 몸을 쳐서 전기가 번쩍였다.

中共酷刑示意图:背铐、电击、棒打、踩踢
중국 공산당 고문설명도
: 뒷짐결박, 전기 충격, 몽둥이로 때리기, 밟고 걷어차기 

잠시 후, 감옥 경찰들은 또 먀오샤오루 등 5명 파룬궁 수련생을 ‘독방’에 보내 감금했다. 이튿날, 악독한 경찰은 또 그녀들은 따로따로 불러내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이른바 ‘전향’을 진행했으나 여전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또 ‘독방’으로 돌려보냈다. 셋째 날, 그녀들에게 ‘보고합니다’를 외치고 ‘감옥 규정’을 외우도록 했다. 먀오샤오루가 협력하지 않자 4~5명의 악독한 경찰은 또 그녀를 눌러 넘어뜨리고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그들이 어떻게 박해를 하든지 막론하고 먀오샤오루는 모두 사부님과 대법을 굳게 믿어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죽을지언정 사부님을 배반하지 않고 대법을 배반하지 않았다(이것은 그녀가 수련생에 대해 말한 것인데 그녀 당시의 심리임). 그 후 그들은 또 먀오샤오루를 ‘독방’으로 끌어다 박해를 진행했다. 이렇게 ‘독방’의 박해를 25일 동안 진행한 후, 또 그녀들 다섯 명 파룬궁 수련생을 3층으로 보냈다.

당시의 ‘610’ 사무실의 사람은 그녀들을 시멘트 바닥에 앉게 하고 뒷짐결박으로 채웠다. 그리고 화장실로 가려 해도 수갑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또 대법을 모함한 영상을 보여줬다. 그 당시 가을밤은 매우 쌀쌀했다. 그러나 저녁에 그녀들은 뒷짐결박으로 채워진 채 시멘트 바닥 위에서 잠을 잤다. 이튿날, 그녀들이 단식으로 박해를 항의하자 악독한 경찰은 그녀들을 집중훈련대대로 보냈다.

酷刑演示:背铐
고문 재연
: 뒷짐결박 

집중훈련대대에서 모든 파룬궁 수련생은 모두 두 명의 형사범이 감시했는데, 조금도 곁을 떠나지 않고 말을 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화장실로 가는 것마저 시간을 제한했고 펜, 종이를 갖고 있지 못하게 했으며, 대법 경서는 더구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먀오샤오루는 불법으로 여자감옥에 이송됐는데 당시 7감구 (2006년에 4감구로 고쳤음)였다.

7감구에 도착해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네 명 죄수가 감시하고 연좌제를 사용했는데 듣기 좋은 이름으로 ‘오연보(五聯保)’라고 불렀다. 파룬궁 수련생에게 ‘일’이 생기기만 하면, 감옥 경찰은 네 명 죄수의 책임이라고 했으며, 수련생과 죄수 사이에서 본래 있어서는 안 되는 왜곡된 관계와 갈등을 만들었다. 파룬궁 수련생은 서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죄수에게 혹독한 구타를 당했다. 한 번은 먀오샤오루와 넌장(嫩江)현 파룬궁 수련생 천웨이쥔 (陳偉君, 이미 박해로 사망)이 경서를 전했는데, 악독한 경찰은 그녀들 두 사람을 불러다 뺨을 한 대씩 때렸으며, 또 죄수들의 책임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오연보’ 네 명의 죄수에게 한바탕 욕설을 당했으며, 다른 ‘오연보’ 죄수도 수시로 이 일로 파룬궁 수련생을 위협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中共体罚示意图:长时间罚坐
중국 공산당 체벌 설명도
: 장기간 앉혀 두기 고문 

2003년 4월, 먀오샤오루와 다른 파룬궁 수련생은 죄수가 하는 노역을 거부했는데, 대대장 캉야전(康亞珍), 추이옌(崔豔)은 경찰, 죄수에게 지시를 내려 강제로 작은 의자에 앉히기 고문을 가했다. 듣기 좋은 이름을 가져다 붙여 ‘의자에 모아 앉히기(碼凳)’라고 했다. 아침 6시에 죄수는 일하러 나가서 저녁에 대략 8~9시에 일을 끝냈는데, 한 번 앉기만 하면 10여 시간을 앉았다. 죄수가 감시했는데 죄수들은 매우 힘들고 고생스럽게 일했다. 형기를 줄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감히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죄수는 파룬궁 수련생이 일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질투했다. 그 단락 시간에 먀오샤오루와 수련생들은 죄수의 질투와 미움, 욕설 속에서 보냈다. 4월 14일, 헤이룽장성 여자감옥의 정위 추수화(褚淑華)는 폭동방지대대의 10여 명을 거느리고 전신무장하고, 머리에 철모를 쓰고, 손에 경찰봉을 들고 파룬궁 수련생을 위협, 공갈 협박했으며 일하러 나가도록 핍박했다. 40여 명의 파룬궁 수련생은 복도에서 강제로 ‘작은 의자에 모여 앉히기’ 고문을 당했다.

2003년 10월 16일 저녁, 먀오샤오루와 7감구에 불법으로 감금당한 파룬궁 수련생은 함께 감옥 측에서 ‘출석을 부르는’ 방식의 박해를 거부해 인원을 보고하지 않았고, 쭈그려 앉기 고문을 거부했으며, 죄수에게 달게 하는 명찰(명찰 위에 이름, 죄명, 몇 해 동안의 형기가 있음)을 달지 않았다. 저녁에 출석하려고 줄을 설 때, 죄수 ‘오연보’ 네 명은 파룬궁 수련생에게 바싹 접근해 출석을 부르지 않은 파룬궁 수련생을 내리눌러 강제로 쭈그려 앉게 했다. 네 명의 죄수는 힘껏 허벅지를 차서 굽히게 했고, 연속 걷어차면서 욕설을 했다. 저녁에 전체 파룬궁 수련생의 출석을 다 부른 다음, 밤중 12시까지 세워 두기 고문을 당했는데 연속 며칠이나 당했다.

2003년 11월 말, 헤이룽장성 여자감옥 7감구에서는 강제로 먀오샤오루와 다른 파룬궁 수련생을 밖으로 끌고 가서 추위에 떨게 하고, 차가운 벽 아래에서 세워 두기 고문을 진행했다. 대대장 캉야전(康亞珍), 부대대장 추이옌(崔豔), 경찰 우쉐쑹(吳雪松), 장웨이(姜微), 린자(林佳), 그리고 그녀들이 선택해낸 가장 사악한 죄수 추이쉐(崔雪), 자오웨친(趙月琴)이 있는데, 그녀들은 저녁에 인원을 보고하지 않고 명찰을 달지 않은 파룬궁 수련생을 모두 명단에 기록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 그녀들이 명단을 들고 지명한 파룬궁 수련생은 강제로 실외로 끌려가 추위에 떨어야 했다. 죄수 추이쉐, 자오웨친, 웨거(岳革), 장쉬안(張璇) 등은 연속 수련생들을 실외로 끌어가 달리기, 추위에 떨게 하기 고문을 가하려 했다. 전체 파룬궁 수련생이 협력하지 않았던 이유로, 곧 그녀들을 건물 차가운 벽 아래에서 세워 두기 고문을 진행했다. 경찰은 죄수에게 지시를 내려 강제로 그녀들의 솜옷, 모자, 수갑을 잡아당겨 내렸다. 아침 8시에 경찰이 출근해서부터 오후 4시 반에 그들이 퇴근하기까지 먀오샤오루 등 파룬궁 수련생은 줄곧 밖에서 추위에 떨었다. 점심에 죄수들은 밥을 가져가 수련생들이 밖에서 추위에 떨면서 밥을 먹게 했다. 수련생들은 인성이 없는 이런 식의 방법을 거부하며 다들 모두 먹지 않았다. 당시 정훙리(鄭宏麗)는 추위에 떨다 기절해 땅에 쓰러졌다. 먀오샤오루는 눈을 감고 발정념을 발하다가 경찰 린자(林佳)가 지시한 죄수 웨거(岳革), 장위(張宇), 장쉬안 등에 의해 강제로 뒷짐결박을 당했다. 날씨는 매우 추웠고 그녀들은 감옥의 음침한 곳에 있었다. 먀오샤오루의 옷은 매우 얇았고 차가운 수갑을 차고 있었는데, 추워서 온몸이 저절로 경련을 일으켰다.

먀오샤오루는 연속 일주일 동안 추위에 떨었다. 동시에 박해당한 파룬궁 수련생은 또 허춘화(賀春華), 왕화(王樺), 왕파쥐안(王法娟), 왕수샤(王淑霞), 쉬샤오웨이(徐小微), 왕구이리(王桂麗), 판칭리(潘慶麗), 류야친(劉亞芹), 천윈샤(陳雲霞), 천웨이쥔(陳偉君), 리둥쉐(李冬雪), 관펑란(管鳳蘭), 정훙리(鄭宏立), 리징웨이(李景偉), 왕수팡(王淑芳), 왕진웨(王金月) 등이다. 박해에 참여한 경찰은 샤오린(肖林, 감옥의 610 사무실 주임), 탕야전(康亞珍), 추이옌(崔豔), 우쉐쑹(吳雪松), 린자(林佳), 장웨이(姜微)이며, 박해에 참여한 죄수는 웨거(岳革), 장위(張宇), 추이쉐(崔雪), 푸슈링(付秀玲), 장쉬안(張璇), 양수화(楊淑華), 리웨친(李月芹)이다.

2003년 12월 4일, 경찰 우쉐쑹은 작업실에서 파룬궁 수련생에게 명찰을 달고 있는지 하나하나씩 물었다. 먀오샤오루에게 물었을 때 그녀는 평온하게 “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먀오샤오루와 리둥쉐, 관펑란은 탕야전의 사무실로 끌려갔다. 캉야전은 한 사람씩 힘껏 뺨을 때렸다. 그런 다음 캉씨는 죄수 스차오보(石朝波)에게 지시해 관펑란, 먀오샤오루, 리둥쉐를 끈으로 꽁꽁 묶어 감방으로 압송해 가도록 해 그녀들을 감방의 급수실에 감금해 세워 두기 고문을 가했다. 묶인 사람이 많아 수갑이 부족한 이유로, 어떤 사람에게는 끈으로 묶었다.

당시 납치당한 파룬궁 수련생은 먀오샤오루, 왕파쥐안, 천웨이쥔, 천옌메이, 천윈샤, 쑨구이즈, 리둥쉐, 왕수샤, 정진보, 선징어, 우리쥔, 정훙리, 관펑란이다. 급수실에서 뒷짐결박으로 세워 두는 고문을 당한 사람은 먀오샤오루, 천웨이쥔, 천옌메이, 천윈샤, 리둥쉐, 정훙리, 관펑관이 있는데, 24시간 동안 세워 두는 고문을 당했다. (납치된 기타 파룬궁 수련생은 사복 창고에 갇혔음) 그녀들은 단식으로 항의했다.

세워 두기 고문으로 당한 넷째 날 저녁, 당시 먀오샤오루의 왼쪽 발과 아래 다리는 매우 심각하게 부어 단단했고 굵고도 투명했다. 급수실 지면은 온통 물이었다. 먀오샤오루는 졸리고 지쳤으며 몸이 극한까지 감당한 이유로 기절했다. 정훙리와 리둥쉐도 연이어 기절했다. 잠을 잘 곳이 없어서 너무 졸리면 축축한 바닥에 쓰러져 자야 했다. 천웨이쥔은 수조에 쓰러져 잠을 잤는데, 어느 한 감시원 죄수는 고의로 수련생의 솜옷을 모두 축축하게 적셔 놓았다. 한겨울에 그녀들은 자신의 몸으로 솜옷을 말렸다.

그 후 수련생들은 낮에는 급수실에 갇히고, 저녁에는 사복경찰 창고의 바닥 벽돌 위에서 잠을 잤다. 손과 팔은 뒷짐을 지게 했는데, 밥을 먹고 시간을 정해 화장실로 가는 것을 제외하고 모두 쇠고랑을 채웠다. 어느 한 번, 죄수 양수화는 천으로 이름을 써서 명찰로 삼아 수련생의 옷 위에 꿰맸는데 그녀들은 찢어버렸다. 양수화가 화가 나서 정신을 못 차리며 바늘을 들고 그녀들의 머리를 찔러 놓아, 쑨구이즈의 머리는 찔려서 큰 혹이 났다. 리둥쉐가 찌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그녀는 구두로 다리를 힘껏 걷어찼다.

2004년 2월 7일 저녁, 먀오샤오루, 왕파쥐안, 천윈샤, 리둥쉐, 정훙리, 정진보, 쑨구이즈 일곱 명은 사복 창고에서 법공부를 했는데 감옥장 류즈창(劉志強)이 발견했다. 경찰은 대법 사부님의 경문을 강탈하고 먀오샤오루와 쑨구이즈, 리둥쉐를 ‘독방’에 가둬 박해를 진행했다. ‘독방’에 들어가자마자 곧 먀오샤오루와 리둥쉐의 솜옷, 솜바지를 벗겨버렸다.

그때는 바로 정월 17일이었으나 ‘독방’ 안에는 어떠한 난방 설비도 없었다. 음침하고 찬 맨 판자 침대 위에서 24시간 동안 ‘지환 뒷짐결박(地環背銬)’ 쇠고랑을 찼다. 지면에서 약 한 자 떨어진 판자 침대 위에 굴렁쇠를 용접해 놓고, 파룬궁수련생의 두 손을 등 뒤에 뒷짐 지게 해서 수갑을 고정된 굴렁쇠를 뚫고 들어가서 다시 손 위에 채워 놓았다. 그녀들은 얇은 솜옷과 솜바지만 입고 있었는데, 악독한 경찰은 고의로 창문을 열고 차디찬 북풍이 불어 들어오게 하여 그녀들을 추위에 떨게 했다. 독방 안에서 옥수수 겨(닭 사료)로 만든 죽을 먹었는데, 하루에 두 끼만 먹었다. 입안에 먹으면, 옥수수 겨가 목구멍에 붙어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 기간에 탕야전, 추이옌은 ‘독방’으로 가서 먀오샤오루 등 세 명에게 관리에 순종할지 물었다. 먀오 씨는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려 했습니다. 나는 죄수가 아니므로 복종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먀오샤오루는 ‘독방’에서 19일 동안 박해를 당한 후 감방으로 돌려 보내졌다.

演示:关小号
고문 재연
: 독방에 가두기 

2004년 4월 6일, 캉야전은 단독 면담을 진행한다는 이유로 먀오샤오루, 쑨구이즈, 왕파쥐안, 리둥쉐, 천윈샤, 정진보, 정훙리 7명을 차례로 한 사람씩 사무실로 불러갔다. 탕야전은 명찰을 달 수 있을지, 감옥의 관리에 복종할 수 있을지 물었다. 그녀들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감방에서 ‘큰 괘에 올리기(上大掛)’, ‘배검(背劍)’ 두 가지 고문으로 박해했다. 먀오샤오루의 다리는 매달려 설 수도 없고 쭈그려 앉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한쪽 손은 어깨에서 등 뒤로 지게 하고, 다른 한쪽 손은 아래에서 다시 등 뒤로 지게 해 판자 침대의 사다리에 채웠는데, 잠깐 후 메스꺼워 허탈 증상이 나타나 쓰러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신이 모두 땀에 흠뻑 젖었다. 왕파쥐안은 박해를 당해 한편의 다리, 발, 팔과 손이 모두 나른해 제대로 쓰지 못했다. 정진보도 ‘배검’ 고문을 당해 심장병이 도졌다가, 그 후 응급처치를 받고 정신을 차렸다. 기타 네 명 파룬궁수련생은 박해를 당해 수갑이 손목 살 속까지 패여 들어가 한 줄 한 줄의 상처 흔적이 나타났다. 어떤 이는 4~5일 동안 매달렸다. 그 후 그녀들은 모두 작업실로 보내져 전문 인원이 감시했다.

酷刑演示:大背铐
고문 재연
: 뒷짐결박 

죄수 우두머리 쑹샤오레이(宋小磊)는 또 모욕적인 언어로 먀오샤오루에게 “잘했다고 생각해? 당신 남편마저 당신과 이혼을 원해.”라고 욕했다.

2004년 7월 27일, 캉야전, 우쉐쑹, 추이옌, 린자는 단식하고, 출석을 부르지 않고, 명찰을 달지 않고, 죄수복을 입지 않은 약 30명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잔혹한 박해를 진행했다. 죄수 리리(李立), 후샤오리(胡小麗), 장칭메이(張慶梅), 쑹샤오레이(宋小磊), 추이쉐(崔雪), 스차오보(石朝波)에게 지시를 내려 먀오샤오루 등 출석을 부르지 않고, 명찰을 달지 않은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거듭 잔인무도한 박해를 진행했다. 죄수 후샤오리 리리, 장칭메이는 지난번에 ‘큰 괘에 올리기, 배검’ 고문을 당한 적이 있는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거듭 악랄한 계책을 쓰려고 계획했다. 그녀들은 차례로 쑨구이즈, 리둥쉐, 스수위안에 대해 큰 괘에 올리기 고문을 가했다. 그중 리둥쉐가 박해를 당한 것이 매우 처참했다. 넷째 날, 그녀들은 또 이미 단식을 나흘 동안 진행한 먀오샤오루, 천윈샤, 류야친, 한싱리, 정훙리, 허춘화(賀春華), 바리장(巴麗江), 왕예(王燁) 등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잔혹한 박해를 진행했다. 그리고 지난번에 이미 ‘큰 괘에 올리기, 배검’ 고문을 당한 적이 있는 먀오샤오루, 천윈샤에 대해 박해를 가중했다.

中共酷刑示意图:吊挂
중국 공산당 고문설명도
: 달아매기(吊掛

먀오샤오루는, 두 손은 거꾸로 채우고 발끝은 땅에 닿게 해 달아매기 고문을 당해, 두 손은 아파 이미 무감각해져 감각이 없었다. 이때 한 죄수는 “좋지 않아. 빨리 그녀를 풀어 내려놓아.”라고 말했다. 먀오샤오루의 팔은 이미 수갑에 의해 살 속까지 패여 들어가 피가 줄줄 흘렀다. 그녀들은 먀오샤오루를 안아 올려서야 수갑을 떼어낼 수 있었고 그녀는 땅에 눕혀졌다. 그녀는 땀투성이가 되었는데, 모두 허탈로 인한 끈적한 땀이었다. 머리카락마저 물로 감은 것 같았다. 땅에 누워있었는데 박해로 소변을 가리지 못해 바지가 오줌에 젖었다.

당시 먀오샤오루는 이미 나흘째 밥을 먹지 않았다. 그녀들은 먀오샤오루에게 강제 음식물 주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두 차례 호스를 꽂아도 꽂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피와 끈적한 물질이 가득 되돌아 나와 온몸에 전부 묻었다. 그녀들은 매우 긴장했다. 의사, 간호사마저 복도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먀오샤오루가 생명이 위험할 수 있어 24시간 동안 수시로 응급처치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들은 또 정맥 주사를 진행했는데 먀오샤오루는 열이 나는 증상이 나타나 또 나가 엑스레이를 찍었다. 그 후 먀오샤오루를 환자를 감시하는 곳으로 보내 계속 박해를 진행했다. 이곳에서 먀오샤오루는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어 온종일 침대에 누워있었다.

酷刑演示:野蛮灌食(绘画)
고문 재연
: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 

집으로 돌아온 후, 먀오샤오루는 비로소 알게 됐는데 그녀가 불법으로 감금당한 5년 사이에 가족은 그녀가 고생을 적게 하고 일찍 집을 돌아오게 하려고 적잖은 돈을 썼음을 알게 됐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박해는 이로 인해 줄어들지 않았다. 그녀가 잔인무도한 박해를 당한 상황을 가족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동시에 그녀의 가족, 가정에서는 또 중국 공산당의 악독한 경찰에게 정신과 경제적인 이중 박해를 당했다. 먀오샤오루는 2008년 3월 11일에 억울하게 사망했고 당시 나이는 겨우 43세였다.

원문발표: 2019년 10월 6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 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0/6/39422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