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 보도) 2017년 맨 마지막 하루인 12월 31일, 랴오닝성 진저우(錦州)시 장의사 안은 몹시 춥고 처량했다. 찬바람이 분상하러 온 사람들을 후려쳤는데 왕옌추 가족의 심정은 더욱 비통했다. 아들 왕커신(王可新)은 어머니 왕옌추의 사후 모습을 바라보며 지극히 비통해했다. “어머니, 어머니는 이미 자유로워졌는데 무엇 때문에 또 이렇게 일찍 떠나가세요?”
왕옌추(王彥秋)가 생전에 남긴 사진(왼쪽), 왕옌추의 선양 739병원 사진(오른 쪽)
이때 3년 전에 감옥 안에서 어머니에게 쓴 편지가 또 왕커신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머니, 제가 세상에 온 20여 년을 돌이켜 보면, 가장 행복한 시절은 바로 어머니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 몸이 건강해지고 제게 화를 내시지 않고 잔소리를 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가 어머니는 또 아버지를 선하게 대하셨는데 저는 어머니께 몹시 감격합니다. 저는 자신에게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하고 아름다운 어머니가 계심으로 인해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시간을 되돌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저는 자신이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다고 느끼는데 어머니의 가호가 있어 저는 매우 편안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머니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원래 건강하던 어머니는 자유를 잃은 지 겨우 1년이 넘어 10여 가지 병을 얻었는데,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어머니, 어머니는 꼭 몸 조심하셔야 하며 자신의 몸을 잘 돌보셔야 합니다. 만약 어머니께서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인정하신다면 그럼 더구나 비관하시지 마셔야 하며 마음이 넓고 낙관적이셔야 합니다.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꼭 건강하게 출소하셔야 합니다.”
이 편지는 2015년 설날 전에 왕커신이 랴오닝 여자감옥 마싼자(馬三家) 감구(監區)로 가서 그곳에 감금당한 왕옌추를 면회하고 그녀가 이미 10여 가지의 질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후 집으로 돌아와서 쓴 편지다. 그는 어머니에게 부쳤는데 미처 어머니께 아들의 편지를 받았는지 물어보기도 전에 어머니는 사망했다.
출소 1개월 전, 왕옌추는 랴오닝 여자감옥 마싼자 감구에서 박해로 혼미해져 줄곧 ‘식물인간’ 상태에 처했다. 5개월 동안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거친 후, 학대를 당할 대로 당한 이 선량한 여성은 2017년 12월 29일 7시 반에 향년 56세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감옥에서 상처를 입다
감옥에서의 왕옌추의 상황을 사정을 아는 사람과 목격자는 출소한 후 밍후이왕에 몇 차례 글로 적어 보내 폭로했다. 밍후이왕 보도에 따르면 2014년에 왕옌추가 랴오닝성 여자감옥으로 납치당한 후, 교도관과 수감자는 여러 차례 혹독하게 구타해 상처를 입혔다고 한다.
감옥 안 규정과 규율에서 수감자에 대해 구타하고 체벌을 가함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규정은 규정일 뿐 중국 감옥에서 구타는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구타당한 수감자는 출소 후 감히 고소하러 가지도 못하고 교도관도 역시 거리낌이 없었다. 교도관은 자신의 장려금을 위해 수감자에게 과부하 노역을 강요했는데 근본적으로 수감자의 생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들 중 아마도 아직 양심을 잃지 않은 자가 있을 지도 모른다. 특히 새로 온 젊은 경찰이다. 그러나 수감자 학대에 습관이 된 지옥에서 차츰 그들도 최저한도의 양심과 동정심을 상실했고, 또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악랄하게 변했다.
랴오닝 여자감옥의 이 리원보(李文博)가 바로 그런 사례다. 일부 수감자가 말하는데 따르면 리원보는 금방 왔을 때에는 젊은 처녀였다고 한다. 그녀는 8감구에 배치 받았는데 첫 번째로 감구장이 수감자를 혹독하게 구타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놀라 울면서 또 책임자에게 자신은 그들에게 손을 못 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몇 해 후 그녀는 8감구에서 가장 흉악한 교도관이 됐다. 2011년 여름 어느 한 일요일, 수감자가 감방에서 휴식하고 있었는데 리원보는 그녀 소대를 불러내 초과 근무를 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몇 명의 수감자는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해 나가지 않았다. 리원보가 그녀들을 불렀음을 알았을 때에는 감방 대문은 이미 닫혔다. 결국 이튿날 리원보는 곧 이 몇 명의 수감자를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리원보는 몇 개의 빨래판을 찾아와 그녀들에게 옷을 깡그리 벗으라고 명령했다. 단지 팬티만 입히고 그녀들에게 빨래판 위에 꿇어앉도록 핍박했다. 그리고 리원보는 플라스틱 몽둥이를 쥐고 수감자를 한 사람씩 혹독하게 구타했다. 리원보는 키가 170센티미터가 넘고 몸이 건장해 보기에도 매우 포악했다. 수감자의 피부는 그녀에게 구타당해 즉시 시퍼렇게 멍들었는데 잠시 후 곧 검은 자색으로 변했다. 구타하다가 지치면 그녀는 또 기타 수감자에게 구타하도록 지시했다. 어느 한 수감자는 구타로 대변까지 배설했다. 리원보는 수감자 관리에 ‘뛰어났던’ 이유로, 2013년 8월에 여자감옥 4감구로 옮겨졌다. 4감구를 또 ‘교정 치료 감구’라고 부른다. 이 감구는 전문적으로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강제 전향을 진행하는 감구다. 지금 리원보는 그곳에서 4소대 팀장을 맡고 있다. 밍후이왕 폭로에 따르면, 2017년 4월 그녀는 수감자를 지시해 파룬궁수련생 류옌핑, 후저후이(胡哲輝, 판진시)에 대해 무차별 폭력을 가하며 온갖 방법으로 학대했다고 한다.
월급보다 훨씬 높은 장려금을 얻기 위해 교도관들은 도덕의 최저선이 없이 수감자에 대해 노역을 시킬 수 있었고, 또 수감자를 지시해 기타 수감자에게 노역을 시킬 수 있었다. 심지어 원래 자기 몫인 일도 수감자에게 맡겼다. 그들은 수감자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신은 감형되고 싶지 않아?”라는 한 마디면 수감자는 비굴하게 굽실거리며 순순히 복종했다. 어느 수감자가 감형해 일찍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겠는가? 그래서 오직 교도관이 한 마디거나 눈짓 한 번이면 수감자는 즉시 곧 알아채고 즉시 집행했다. ‘집행’ 과정 중, 공을 세우고 교도관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은 뒤탈을 상관하지 않고 기타 수감자를 괴롭혔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했다.
파룬궁수련생은 자신이 무고하며 죄수가 아니라고 생각해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 중 절대 다수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견지해 사악에게 머리를 숙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당연히 또 감형을 위해 교도관에게 순종하고 그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이다. 중국공산당의 교도관과 수감자와 이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장려금’과 ‘감형’ 이 두 가지 이익은 서로 의지하며 교도관과 수감자를 단단히 한데 엉켜 놓았다. 양자는 서로 의기투합해 중국공산당이 선량한 파룬궁수련생을 대처하는 졸개와 도구가 됐다.
밍후이왕 보도에서는 말했다. 2014년 7월 17일, 왕옌추는 마싼자 감옥 2분감구 1소대 304호에 배치됐다. 당시 왕옌추는 이미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었다. 감옥 병원의 검사를 통해 혈압이 200이 넘고 대뇌와 소뇌가 위축된 증상이 나타났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이러한 신체로 여전히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교도관 대장 자오지화(趙敬華), 부대장 다이쉐메이(戴雪梅) 등은 수감자 쥐화(菊華), 왕샤오훙(王曉紅), 쩡췌밍(曾鵲明), 쑨메이샤(孫美霞), 장리쥐안(蔣麗娟), 주춘잉(朱春英) 등에게 왕옌추를 감시하게 했으며 그녀가 연공함을 허락하지 않았고 또 분규를 만들어 박해를 진행했다. 왕옌추가 눈을 감기만 하면 그녀가 연공한다고 말하며 즉시 대장에게 보고했다. 믿음을 수호하기 위해 왕옌추는 높은 소리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쳤다. 쥐화, 쑨메이샤, 왕샤오훙 등은 벌떼처럼 덮쳐들어 왕옌추를 눌러 넘어뜨리고 그녀의 입과 코를 잡았다. 왕옌추의 다리는 왕샤오훙에게 꼬집혀 시퍼렇게 됐다. 사건이 발생한 후 교도관은 이 사람들을 제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왕옌추를 한바탕 훈계했다.
7월 어느 날, 왕옌추는 또 파룬궁 박해를 주관한 부대대장 유옌(尤岩)에게 한 바탕 폭력적인 구타를 당했다. 목격자 말에 따르면 유옌은 갈팡질팡하며 구두를 신은 발로 왕옌추의 얼굴 위를 사납게 걷어찼다. 당시 왕옌추의 얼굴은 크게 부었다. 유옌은 이것도 끝나지 않았다며 또 왕옌추를 사무실로 끌고 가 한바탕 구타했다.
이 외에 밍후이왕 보도에 따르면 2014년 10월 9일, 마싼자 분감구 2분감구 1소대 대장 다이쉐메이(代雪梅)는 한쪽 손으로 왕옌추의 입을 막고 한쪽 손으로 왕옌추의 팔을 뒷짐 지게 해 2분감구 큰 작업실로 데려갔다. 이 외 1대대장 자오징화(趙敬華)는 물컵으로 왕옌추의 머리를 때리고 그런 다음 또 그녀의 얼굴을 구타했다. ‘짝, 짝’하며 20여 번 뺨을 때렸다. 당시 왕옌추의 얼굴은 붉게 부어올랐고 뚜렷한 손자국이 남았다.
이튿날, 자오징화는 왕옌추를 대장 당직실로 끌고 가서 그녀에게 파룬궁을 비난하는 녹화 프로그램을 틀어 놓았다. 왕옌추가 듣지 않자 자오징화는 곧 그녀의 손을 등 뒤에 거꾸로 채웠다. 자오 씨는 또 테이프로 그녀 입을 봉했고 아울러 목을 에워싸고 몇 바퀴를 감았다. 게다가 그녀를 발로 몇 십번이라 걷어찼는데 이로 인해 왕옌추는 다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고 퍼렇게 부어올라 1개월 동안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게 됐으며, 화장실로 가서도 쭈그려 앉지 못했다. 매일 오후 부대대장 유란은 또 자오징화, 다이쉐메이 2명과 함께 왕옌추를 다른 한 방으로 끌고 갔다. 그녀들은 파룬따파(法輪大法)와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께 악담을 퍼부었다. 게다가 왕옌추를 땅에 눌러 넘어뜨리고 그녀의 속옷에 파룬궁을 모독하는 말을 썼다. 왕옌추는 몸부림치며 악인을 저지했다. 자오징화는 손으로 왕옌추의 팔을 꼬집고 그녀를 핍박해 세워두기 고문을 가했다.
이 외에 왕옌추와 같은 감구 사람이 기술한데 따르면 왕옌추는 또 예전에 독방에 갇혀 박해를 당했다.
랴오닝 여자감옥의 마싼자 감구는 바로 원래 극히 악명 높은 마싼자 노동교양소였다. 당국은 노동교양소가 부득이 해체하지 않으면 안 되자 2013년 7월부터 10월까지 낡은 벽, 대문, 감방, 망루, 배전망 개조를 거쳐 선양 여자감옥의 한 분감구로 개장했다. 모두 3개의 분감구가 있었다. 경찰은 기본적으로 마싼자 노동교양소에 근무하던 인원이었고 여전히 잔혹하게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했다.
어려운 면회
2014년, 왕옌추가 감옥에 갇힌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아들과 조카는 그녀를 면회하러 감옥으로 갔는데 교도관은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2명의 아이는 실망한 채 돌아왔다. 왕옌추의 조카는 평소에 막내 이모와 사이좋게 보냈다. 두 사람은 매우 마음이 맞았는데 이번에 멀리에서 왔으나 오히려 막내 이모를 만나지 못해 아이는 매우 상심했다. 그 후 교도관은 ‘주동적으로’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왕옌추가 그들을 ‘협력하지 않았다’며 면회하러 오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의 어떠한 법률에도 감옥 면회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없다. 수감자는 모두 친족을 면회할 권리가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기본권이다.
2015년 중국 새해 전, 왕옌추의 가족은 두 차례나 왕옌추를 면회하러 선양으로 갔다. 이번에는 마침내 그녀를 만났다. 당시 그녀를 ‘동반’한 교도관(옥중에서 파룬궁수련생을 면회할 때 모두 두 명의 경찰이 ‘동반’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수련생의 신변에 서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가족 신변에 서있었다. 그의 책임은 파룬궁수련생이 가족과 대화하는 내용을 감시하는 것이다. 만약 신앙을 담론하거나 옥중의 박해를 폭로하는 내용이 있기만 하면 즉시 제지했음)은 병력서를 들고 가족에게 보여주며 왕옌추가 이런 병에 걸렸다고 말했다. 가족은 병력서 위에 10여 종류의 질병을 썼는데, 가장 심각한 것은 고혈압과 심장병이었다. 왕옌추는 불법 감금당하기 전에 집에서 멀쩡했고 몸이 건강했다. 그리고 일을 해 돈을 벌 수 있었는데 감금돼 겨우 1년 넘는 동안에 10여 가지의 질병에 걸린 것을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최후의 나날
2017년 여름, 랴오닝 여자감옥 마싼자 감구에 감금당한 왕옌추는 1개월만 있으면 출소해 4년 고난을 곧 끝마치게 됐다. 진저우(錦州)의 가족과 친구들은 날짜를 세면서 그녀와 단란히 모여 앉을 시각을 동경했다.
왕옌추의 형기는 2017년 7월 23일에 끝났다. 그러나 6월 22일 오전 10시에, 바로 왕옌추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1개월 남았을 때 가족은 갑자기 랴오닝 여자감옥 교도관의 전화를 받았다. 말로는 왕옌추가 그날 아침 6시에 뇌출혈에 걸렸는데 그녀들에 의해 선양 739병원으로 보내져 응급처치를 받았고 지금은 이미 깨어났다며 보러 가라고 했다.
가족은 즉시 진저우에서 선양 739병원으로 가서 응급처치를 받아 위험에서 벗어난 왕옌추를 만났다. 왕옌추는 당시 두 손에 수갑을 차고 있었는데 가족은 이 정경을 보고 마음속으로 화가 나서 속을 끓였다. 사람이 이 모습이 됐는데 아직도 수갑을 차고 있다니. 그때 왕옌추는 정신이 똑똑해 가족을 알아보았다. 단지 말을 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런 다음 그녀는 중환자실로 보내졌다. 중환자실에 있던 첫 이틀 동안 왕옌추는 여전히 명석했고 가족은 매일 그녀와 30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날, 왕옌추가 중환자실에서 밀려나왔을 때 가족은 그녀가 이미 의식이 없음을 발견했다. 의사는 가족에게 왕옌추를 밀고 가서 뇌 CT를 찍도록 도와달라고 했는데, 검사 결과 정상이었다. 가족이 의사에게 중환자실에 사흘 동안 있었고 지금 CT도 정상인데 왜 정신이 흐리멍덩한지 문의했다. 의사는 ‘정상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태에서 왕옌추는 일반 병실로 옮겨졌고 줄곧 그녀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깨어나지 못했다.
가족들은 환자가 이미 응급처치를 받아 위험에서 벗어났고 의식이 아주 또렷했는데 왜 중환자 간호실에 사흘 동안 있더니 혼수상태에 처했는지, 왕옌추가 중환자실에 있던 이 사흘 동안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 사흘 동안 단지 교도관만이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었을 뿐 가족은 단지 30분만 만날 수 있었을 뿐이다. 10여 일 후 가족은 고통스럽게 진저우로 돌아갔다.
왕옌추가 억울한 옥살이가 끝나기 하루 전인 2017년 7월 22일, 교도관은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왕옌추를 집으로 데려가는 일을 문의했다. 좋은 거처를 잘 배치하지 못한 이유로 가족은 7월 23일에 왕옌추를 마중하러 가지 못했다. 7월 24일, 랴오닝 여자감옥 마싼자 감옥 교도관 일행 3명은 진저우로 와서 왕옌추의 가족에게 난산(南山) 파출소로 가서 상담하도록 했다. 마지막에 왕옌추의 전 남편은 그녀가 출소한 후 그가 와서 간호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감옥 측에서는 1만 위안의 돈을 주겠다고 해서 각종 비용의 보상으로 삼았다. 이튿날인 7월 25일, 감옥에서 차를 내주어 왕옌추의 가족은 선양으로 가서 그녀를 마중해 집으로 돌아왔다. 출발할 때가 되어 가족은 감옥 측에 왕옌추의 병력서를 달라고 했는데 몇몇 교도관은 “병력서를 당신들에게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져다가 비용을 결산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며칠 후, 진저우시의 몇 명의 파룬궁수련생은 왕옌추의 전 남편의 집으로 가서 왕옌추를 문안하러 갔다. 그러나 왕 씨의 전 남편은 진상을 명백히 알지 못해 그들을 쫓아버렸다. 그리고 식칼을 들고 위협했고 아울러 그를 권고하는 한 파룬궁수련생의 왼쪽 손에 찰과상을 입혀 상처를 남겼다. 그 후 또 한 파룬궁수련생이 만나러 갔는데 그는 방안에 들어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또 파룬궁수련생이 왕옌추를 문안하러 갔으나 여러 차례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었다.
비록 ‘자유’를 얻었으나 왕옌추는 오히려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는 조용히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아들은 어머니가 때로는 얼굴을 찡그렸고 때로는 본능적으로 위장 부위(대략 위장 부위가 불편했을 것임)를 손으로 긁었다고 말 했다. 그러나 시종 깨어나지 못해 줄곧 ‘식물인간’ 상태에 처해 있었다. 5개월 동안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거친 후, 학대를 당할 대로 실컷 당한 이 선량한 여성은 결국 2017년 12월 29일 7시 반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억울한 옥살이 판결을 당한 후, 진저우시 노동국 사회보안과에서는 왕옌추의 5만 위안이 넘는 월급을 공제했다. 게다가 이 몇 해 동안 여전히 월급을 주지 않았다. 왕옌추는 임종 전 월급은 겨우 1천2백 여 위안이었다.
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염려하다
왕옌추는 떠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친척, 친구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
왕옌추는 1962년에 출생했다.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그녀의 어린 시절은 괴로웠다. 결혼 후 남편은 성격이 무척 급했고 알코올에 빠졌다. 한 번은 왕옌추는 남편의 발길질에 아주 멀리까지 굴러갔다. 그녀의 언니에 의하면 “(그는) 제 여동생을 차서 아랫목에서 윗목까지 날아가게 했어요”라고 말했다. 왕옌추는 늘 몰래 눈물을 흘렸다. 집을 떠나려 해도 또 어린 아들이 아쉬웠다. 아들도 늘 아버지에게 구타를 당했다. 1년 내내 우울했던 이유로 그녀는 자궁 근종을 앓았다. 그리고 심각한 빈혈 증상이 나타났다. 결국 왕옌추는 부득이 남편과 이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법원은 아이와 집을 모두 남편에게 주었다.
그때의 왕옌추는 진저우시 구타구(古塔區) 린시로(林西路) 종합상점에서 출근했다. 퇴근 후 직장에서는 단지 그녀에게 절반 월급만 주었는데, 겨우 1백 여 위안이었다. 생활이 옹색한 이유로 셋집을 맡고 생존하기 위해 왕옌추는 부득이 일을 해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었다. 아들도 아버지 폭력 때문에 일 년 내내 어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그러나 전 남편은 돈을 벌기가 어려워 아이에게 생활비나 학습비를 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어 왕옌추는 스스로 셋집을 맡고 생계를 유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 아들을 부양해야 했기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그리고 그녀는 또 질병을 앓았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왕옌추는 예전에 여러 방면에서 의사를 찾아 치료를 받았는데, 한약, 양약, 민간 처방 등을 모두 시험해 본 적이 있으나 호전을 보지 못했다. 당시 그녀의 수척한 몸은 바람이 불어도 쓰러질 것 같아 몹시 가련해 보였다. 그녀는 빈혈 증상이 나타나 안색이 늘 창백해 혈색이 없었다. 어느 날, 그녀가 길을 가는데 한 노년 남자가 그녀를 가로막으면서 “당신은 빈혈이 아닙니까? 나는 의사인데 당신을 봐줄게요”라고 말했다. 왕옌추는 완곡하게 사절했다. 병고의 시달림은 왕옌추로 하여금 심적으로 우울해지게 해서 어떤 때는 또 아들에게 화를 냈다.
1996년, 몇 명의 친구가 차례로 파룬궁을 수련했다. 왕옌추는 그녀들이 수련한 후 심신에 이로움을 얻은 것을 보고 자신도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파룬궁의 주요한 저서 ‘전법륜(轉法輪)’을 다 읽은 후 왕옌추는 심정이 확 트여 명랑해졌고, 순식간에 전도가 무한하게 밝은 느낌을 느꼈다. 그녀는 인생의 진정한 의의를 깨달았으며 또 인생의 고난의 근원을 깨닫고 전 남편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매일 연공장으로 가서 연공을 견지했다. 온몸의 병이 매우 빨리 나아졌고 일을 할 때도 기운이 났다. 이 때문에 왕옌추는 아주 행복해했다. 그녀는 성격이 명랑하게 변했고 좋아졌다. 아들은 어머니의 심신의 큰 변화를 보고 그녀의 수련을 적극 지지했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의 왕옌추는 진선인(眞善忍)을 기준으로 일을 행하고 좋은 사람이 되도록 요구했으며, 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염려해 누구나 다 잘 대해주었다. 친구는 그녀가 의협심이 강하고 은혜를 알고 보답하려 한다고 평가했다. 전 남편은 단층집을 철거한 후 다시 이사했을 때 돈이 없어 텔레비전을 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텔레비전을 즐겨 보았다. 왕옌추는 과거의 나쁜 감정을 잊고 전 남편에게 텔레비전을 사서 보내주었다. 매년 설날이면 그녀는 모두 전 남편 집으로 가서 그를 도와 방안을 정리해주었고 평소에도 그를 매우 관심했다. 몇 해 전에 왕옌추는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두 모자에게는 매달 겨우 몇 백 위안의 생활비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느 한해 전 남편의 근무 직장에서는 1년 동안 월급을 지급해주지 않아 그는 담배를 살 돈마저 없었다. 그는 왕옌추를 찾아와서 담배 살 돈을 달라고 했는데 왕옌추는 주머니를 털어서 주었다. 2012년과 2013년 기간에 전 남편은 두 차례나 수술을 받아 입원했는데 왕옌추는 가서 간호해주고 물품을 사고 돈을 주었다. 왕옌추는 오빠와 언니에 대해서도 매우 공경했다. 비록 모두들 경제 조건이 그녀에 비해 좋았으나 그녀는 늘 오빠와 언니를 염려해 늘 물품을 사서 문안하러 갔다. 어느 집에 큰 일, 작은 일이 있기만 하면 그녀는 모두 도와주었고 평소 가족과 모두 관대한 태도로 지냈다.
친구와 동료는 그녀의 생활이 어려움을 보고 어떤 때는 그녀에게 일부 물품을 주려 했다. 그러나 왕옌추는 차마 친구의 돈을 그냥 받을 수 없어 방법을 다 해 기타 물품을 구매해 보답해주었다. 어느 한 번, 한 친구가 친척에게서 새 양털 옷을 선물 받았는데 친구가 입어보니 작아서 곧 그녀에게 주었다. 며칠 후, 왕옌추는 커다란 갈비 한 덩어리를 보내왔다. 친구가 방문을 열었을 때 수척한 왕옌추가 커다란 갈비를 안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감동해 어떻게 말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왕옌추는 스스로 매우 절약했다. 장시간 자신에게 새 옷을 사주기도 아까워했고 무슨 맛있는 것을 사기도 아까워 일 년 내내 짠지만 먹었다. 겨울에 야채 가격이 비교적 비쌌던 이유로 그녀는 거의 야채를 먹을 수 없었다.
파룬궁을 수련하기 전 상점에 출근할 때 그녀는 늘 집으로 물건을 좀 가져갔는데 다들 모두 가져갔다. 수련 후 그녀는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 했고 이 방면에서 엄격하게 자신을 요구해 한 푼의 작은 이익도 점하지 않았다. 어느 한 번, 그녀는 어느 한 집에서 보모 일을 했을 때 조심하지 않아 노인의 밥그릇을 깼다. 이튿날, 그녀는 즉시 새 밥그릇을 사왔다. 생계를 위해 왕옌추는 차례로 몇 집에서 보모 일을 했다. 그녀는 노인에 대해 인내심이 있고 선한 마음이 있었다. 위생과 청결 면에서도 꼼꼼하고 깨끗해 집집마다 마음에 들어했고 집집마다 칭찬했다. 어떤 때 그 집 사람들이 그녀가 일을 잘하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돈을 더 많이 주어도 그녀는 받지 않았다. 어느 한 번 그녀는 일이 있어 노인을 돌보지 못하자 친구를 불러다가 대신해 일하게 했다. 그런 다음 월급을 액수대로 친구에게 주었다.
친척과 친구들은 왕옌추가 수련한 후 이와 같이 낙관적이고 너그럽게 변한 것을 보고 모두 아주 기쁘고 안심이 됐다. 그녀가 수련하자 아들도 따라서 이로움을 얻었다. 한 번은 아들이 허리가 아팠는데 왕옌추는 아들에게 ‘전법륜(轉法輪)’을 보여주었다. 아들은 “허리가 아파서 볼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곧 아들에게 ‘전법륜’을 읽어주었는데 아들은 열심히 들었고 듣다가 잠이 들었다. 아들이 깨어나자 허리 통증이 사라졌다. 아들은 “대법은 정말 신기해요”라고 감격해 말했다.
감금과 무고한 판결을 당하다
1999년 7월, 중국공산당의 전 당수 장쩌민(江澤民)은 질투심으로 인해 중국공산당과 서로 이용해 파룬따파에 대해 전면적인 박해를 실시했다. 심신에 이로움을 얻은 왕옌추는 파룬궁 수련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 ‘진선인(眞善忍)’의 보편적인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그녀는 수천수만 파룬궁수련생과 마찬가지로 민중에 대해 진상을 알리고 평화롭게 박해를 반대하는 비장한 역정을 시작했다.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에 대한 18년 동안의 박해 중, 왕옌추는 4차례 납치 감금을 당한 적이 있다.
첫 번째는 대략 2001년, 그녀는 파룬궁 진상 자료를 붙이다가 한 노부인에게 신고를 당했다. 왕옌추가 진저우 난제(南街) 파출소로 납치당한 후 진저우시 구타구 정보과 과장 쉐즈중(薛治忠)은 그녀에게 수 천 위안의 벌금을 부과했다. 왕옌추는 당시 그렇게 많은 돈이 없게 되어 둘째 오빠에게 빌렸다. 그 후 왕옌추는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아껴먹고 아껴 쓰면서 이 돈을 다 갚았다. 쉐즈중은 적극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해 업보를 입어 퇴직하지도 못하고 사망했다. 그리고 신고했던 그 노부인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왕옌추가 두 번째로 납치된 시기는 2008년 7월 2일 오전이다. 당시 왕옌추와 함께 셋집을 맡은 파룬궁수련생의 핸드폰이 경찰에게 감청당해, 그녀들은 셋집에서 진저우 룽장(龍江)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됐다. 진저우 구치소에 37일 동안 감금된 후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다.
세 번째는 2012년 여름에 구타 공원에서 진상을 알리다가 납치 감금을 당했으며 1개월 후 석방됐다.
맨 마지막 한 번 납치된 것은 2013년 7월 23일이다. 그날 저녁 무렵에 왕옌추와 진저우 파룬궁수련생 취웨이(曲偉)와 저우위전(周玉禎)은 진저우 어린이 공원 인근에서 민중에게 CD를 배포했다. 해외 션윈예술단에서 공연한 중국전통문화를 널리 알리는 내용인데 손오공이 백골요괴를 때리고 곤봉으로 13대를 쳐서 당나라 왕을 구한 등 내용이었다. 그녀들이 한창 배포하다가 구타구 사복경찰 양톄리(楊鐵利), 장정(張政), 왕진후이(王錦輝)와 왕쉬(王旭)에게 발견됐다. 장정은 진저우시 공안국 ‘610’지대에 악의적인 고발을 진행했다. 그 후 이 4명의 경찰은 즉시 시 ‘610’지대 경찰과 함께 그녀들을 납치했다. 당시 ‘610’지대 두목을 맡은 사람은 바이닝(白寧)과 리메이산(李媚珊)이다. 당시 이 3명 파룬궁수련생은 납치 과정 중에 모두 경찰의 불법 체포를 협력하지 않고 큰소리로 에워싸고 구경하는 군중에 대해 파룬궁 진상을 진술했다. 한 목격자는 “(그녀들 중) 어느 한 분이 큰소리로 ‘톈안먼분신 자살사건은 가짜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후 세 사람은 구치소에 감금됐다.
왕옌추가 납치된 후 그녀의 아들은 반×교지대 두목 바이닝과 리메이산에게 선을 권고하는 편지 한 통을 썼는데, 현지 파룬궁수련생 허타오(何濤)가 동반해 시 공안국으로 직접 가서 두 사람에게 보냈다. 아이가 이렇게 애걸했지만 그들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허타오는 또 그들에게 하루 동안 불법 구류를 당했다.
얼마 되지 않아 왕옌추와 저우위전은 구타구 검찰원에 의해 모함을 당했다. 검찰관은 원전위(溫震宇)였고 당시 맡은 검찰장은 왕스위안(王世元)이었다. 왕옌추와 저우위전의 가족은 그녀들을 위해 변호사를 선임했다. 취웨이는 구치소에서 박해를 당해 당뇨병에 걸려 석방돼 집으로 돌아갔다.(지금 이미 박해로 사망했음)
예전에 진저우 구치소에 감금된 사람의 말에 따르면, 구치소에 막 들어갔을 때 왕옌추는 자신이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수감자용 조끼를 입지 않았다. 교도관 스훙(石紅)은 수감자 댜오리리(刁麗麗)를 교사해 왕옌추를 구타했고, 또 왕옌추를 수갑으로 창문 위에 하루 반 동안 매달아놓았다.(두 손을 들게 하고 발을 땅 위에 있게 했음) 그 후 왕옌추는 고혈압 등 병적 상태가 나타났다. 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한 기간 왕옌추와 저우위전은 연공을 금지당한 데다가 심신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이유로 원래 건강하던 그녀들은 얼마 되지 않아 병적 상태가 나타났다.
2013년 11월 6일, 왕옌추의 언니는 소식을 들을 후 시 구치소로 와서 여동생에게 진찰을 받게 해주도록 요청했다. 감옥관리지대 기율검사위원회 서기 댜오(刁) 모씨는 왕옌추의 병이 심각하지 않다며 “그녀의 병세에 비해 심각한 사람도 병원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법원을 찾아가보시오!”라고 말했다.
12월 12일 오전 9시 반, 진저우시 구타구 법원에서는 파룬궁수련생 저우위전과 왕옌추가 건강이 극히 나쁜 것을 상관하지 않고 뜻밖에 진저우 구치소에서 사사로이 법정을 세워 그녀들에 대해 불법 재판을 진행했다. 재판장은 진저우 구타구 법원의 판리리(潘莉莉)였다. 시임 구타법원 원장은 황핑(黃萍, 이미 업보를 입었음, 뇌물을 받은 이유로 정직 심사를 받았음)이었다. 당시 왕옌추의 가족은 합해서 6명이 왔다. 그러나 구타 법원에서는 단지 두 사람만 들어감을 허락했을 뿐이다. 왕옌추의 언니가 초췌한 여동생을 보았을 때, 괴로워 눈물을 흘렸다. 한 법정 경찰이 다가오더니 왕옌추의 언니에게 만약 그녀가 또 정서가 격동되면 곧 그녀를 법정에서 쫓아버리겠다고 공갈 협박을 했다.
12월 12일 오전 9시 반, 진저우시 구타구 법원에서는 파룬궁수련생 저우위전과 왕옌추가 건강 상태가 몹시 나쁜 것도 상관하지 않고 뜻밖에 진저우 구치소에서 사사로이 법정을 세워 그녀들에 대해 불법 재판을 진행했다. 재판장은 진저우 구타구 법원의 판리리(潘莉莉)였다. 시임 구타법원 원장은 황핑(黃萍, 이미 업보를 입었음, 뇌물을 받은 이유로 정직 심사를 받았음)이었다.
불법적인 법정 심문에 직면해 저우위전의 변호사는 분연히 퇴정해 항의를 표했다. 왕옌추의 변호사는 법정에서 박해 진상을 폭로했고 아울러 신앙은 자유이며 법률 규정, 공소 기관에서 법률을 잘못 적용했고, 범죄 객체 등 방면에서 그녀를 위해 이치에 맞고 근거가 있으며, 정당하고 날카롭고 엄숙하게 무죄 변호를 진행했다. 재판장을 포함해 법정 내에 있는 모든 공검법 인원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2014년 1월, 왕옌추, 저우위전은 모두 진저우 구타 법원에 의해 4년 형 불법 판결을 선고받았다.
다섯 번째 시도 만에 수감돼
왕옌추는 억울한 판결을 당한 후, 차례로 네 차례 감옥에 들여보내려 했으나 결과가 없었고 결국 다섯 번째 시도 끝에 강제로 감옥에 수감됐다. 관련 부서 규정에 따르면, 판결당한 사람은 수감 전 현지에서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현지에서 지정된 병원은 진저우시 부속 3병원이었다. 때문에 수감인원은 진찰을 받고 신체검사를 받는 것을 모두 이 병원에서 진행했다. 사실 입감 신체검사를 받기 전에 왕옌추와 저우위전은 몇 차례나 응급차로 들것에 들려 진저우 부속 3병원으로 가서 응급 진찰을 받은 적이 있다. 어느 한 번은 205병원으로 가서 신체검사를 받을 때, 왕옌추는 저우위전에게 “205병원으로 끌려가면 우리가 나아질 수 있겠어요?”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여자 대대 소장 우옌(吳燕)의 남편은 205병원 마취사이기 때문이다.
205병원으로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을 지라도 두 사람은 모두 중환자에 속한 이유로 여전히 수감 조건에 부합되지 못했다. 왕옌추의 혈압은 270-280에 달했다. 그리고 또 뇌졸중 증상, 심각한 빈혈 증상이 나타나 혈색소가 5그램도 되지 않았으며, 경추 부위에는 또 적수 증상이 나타났다. 저우위전도 난소낭종, 결장암 등 중증 증상이 나타났다. 때문에 2014년 2월부터 4월까지 왕옌추는 4차례(저우위전은 3차례)나 선양 랴오닝 여자감옥으로 끌려갔으나 모두 감옥에 의해 수감을 거부당했다. 구치소에서는 부득이 사람을 진저우로 끌고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한 번, 신체검사하러 함께 간 여자 대대 소장 우옌은 “의사는 (왕옌추의)신체검사 결과를 쓰기 어려워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기간인 2월 26일 오후 3시, 왕옌추의 가족은 갑자기 진저우시 구치소의 여자 교도관 스훙(石紅)의 전화를 받았는데 대략 의미는, 왕옌추가 지금 ‘병세가 엄중하다’는 것이다. 구치소에서는 이미 상급에 보고해 올려 상황을 설명했고 만약 위험이 나타나면 구치소에서는 책임이 없다며 “우리는 지금 당신들 가족에게 통지를 내렸으나 당신들은 법원을 찾아가라”고 했다. 왕옌추의 언니는 즉시 구타 법원으로 갔다. 그러나 경비원은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감옥 규정에 따르면 두 사람은 감옥 외에서 집행하는 조건에 부합됐다. 그러나 진저우시 정법위 서기 장샤오광(張曉光)과 진저우시 구타 법원장 황핑(黃萍) 등 관련 인원은 근본적으로 석방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장쩌민의 박해 정책을 집행해 사람의 목숨을 우습게 알고 집요하게 그녀들을 수감시키려 했다.
상급 주관 부서에서 석방을 거부한 상황에서 진저우시 구치소에서도 공산당을 도와 나쁜 짓을 함께 했다. 그들은 있는 방법을 다해 그녀들을 감옥에 보내려 했다. 2014년 5월 중순에 거듭 신체검사를 진행한 후, 왕옌추와 저우위전에게 신체검사 결과를 알려주지 않았다. 5월 20일, 진저우 구치소 여소장 우옌은 직접 차를 이용해 선양으로 왕옌추와 저우위전을 호송했다. 랴오닝 여자감옥에 도착한 후 입감 심사 수속을 처리할 때 우옌은 사무실 사람을 한 사람씩 찾았다. 왕옌추가 이 상황을 보고 그녀에게 “당신은 누구를 찾아요?”라고 묻자 우옌은 “동창이 있는데 내가 보러 왔어요”라고 대답했다. 우옌은 수감을 주관한 사무실에서 오래 동안 있었다. 맨 마지막에 그녀들은 저우위전을 수감시키고, 왕옌추를 또 진저우 구치소로 끌고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옌 등은 다섯 번째로 시도해 마침내 왕옌추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중국공산당의 체재 내에서 많은 일은 모두 절차에 따라 행사한 것이 아니다. 법률은 법률이고 규정은 규정일 뿐, 오직 익숙한 사람이 있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든지 다 처리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인맥을 통하고 뒷거래를 하며, 처리하려는 일이 위법인지, 도덕이 결핍되지 않는지, 심지어 무슨 결과를 조성할지에 관해서 고려하는 사람이 없다. 자신에게 이로움이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랴오닝 여자감옥 마싼자 감구에 3년 넘게 지옥 같은 시달림을 당한 후 왕옌추는 결국 박해로 사망했다. 진저우에서는 또 선량한 아들딸을 잃었다. 왕옌추는 태어나서 자란 이 땅에서 50여 년 동안 생활했다. 그녀는 이곳 사람들을 위해 그녀가 응당해야 할 일을 했다. 아들 왕커신은 “(어머니)돌아오지 않았을 때에는 그래도 희망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 희망마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역주: 왕옌추 박해에 참여한 관련자 정보는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18년 2월 3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2/3/36036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