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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궁수련인 2명, 새해 전 청두 女감옥의 박해로 사망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쓰촨보도) 파룬궁수련인 2명, 옌훙메이(嚴紅梅)와 후샤(胡霞)가 새해 전에 청두(成都) 여자감옥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옌훙메이는 2017년 12월 28일에 박해로 사망했는데, 감옥 측은 직접 화장한 후 유골을 가족에게 집으로 가져가라고 했다. 충저우시(崇州市) 양마진(羊馬鎮)의 선량한 부녀자 후샤는 2017년 12월 19일에 박해로 사망했다.

청두 여자감옥의 전신은 촨시(川西)여자감옥인데, 그 후 청두 빈장(濱江)감옥으로 바뀌었다. 2007년에는 청두 여자감옥으로 개명했다. 2003년 5월, 야안시(雅安市) 루산현(蘆山縣) 훙야(洪雅) 먀오시(苗溪) 노동개조 농장에서 청두시 룽취안이구(龍泉驛區) 훙안진(洪安鎮) 룽훙로(龍洪路) 200호로 옮겨졌다. 이곳은 여성 파룬궁수련자를 감금하는 쓰촨성의 한 소굴로, 파룬궁수련인에게 혹독한 구타, 전기 고문, 매달기 고문, 뒷짐결박, 헝겊 끈으로 묶기,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 약물 박해, 바늘로 찌르기 고문, 벽에 부딪치기, 영창에 가두기, 추위에 떨게 하기, 뙤약볕에 쪼이기, 세워 두기 고문, 군대 자세로 앉히기, 강제 피검사 진행, 면회권 박탈 및 생활면에서 학대 등의 고문을 진행했다.

밍후이왕의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7년 6월까지 청두 여자감옥에서는 전후로 도합 여성 파룬궁수련인 109명을 감금했다. 그중 연령이 가장 많은 사람은 쑤이닝시(遂寧市) 다잉현(大英縣)의 76세인 후옌순(胡延順)이고, 형기가 가장 긴 사람은 러산시(樂山市)의 뤄팡(羅芳), 시창시(西昌市)의 가오더위(高德玉)로 12년이다. 청두 여자감옥에서는 파룬궁수련인 주이팡(祝藝芳), 천스캉(陳世康), 리멍수(黎孟書), 리위화(李玉華), 허차오펀(何朝芬) 등에게 박해를 가해 사경을 헤매게 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집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돼 억울하게 사망했다.

1. 청두 여 교사 옌훙메이가 박해로 사망하다

옌훙메이는 2017년 12월 28일 오전 10시 45분에 청두 여자감옥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가족은 진탕(金堂) 장의사로 가라는 통지를 받았다. 감옥 측은 직접 화장한 후, 유골을 가족에게 집으로 가져가라고 했다.

12월 25일, 옌훙메이의 가족은 진탕감옥 201병원으로 가서 옌훙메이를 만났다. 그녀의 전신은 이미 부종 증상이 나타났으나, 감옥 측은 여전히 병보석 수속을 해주지 않았다. 그가 거주한 곳의 지역 사회-청두시 진뉴구(金牛區) 사허위안(沙河源)가도 취안수이(泉水) 지역사회 및 호적 소재지인 청두시 진뉴구 톈후이진(天回鎮)가도 다완(大灣) 지역사회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말로는 옌훙메이는 정치범이기에 살인보다 더욱 심각하다고 했다.

감옥 병원에서는 옌훙메이가 죽는다 해도 감옥의 그 자리에서 화장할 수 있을 뿐, 시신을 가져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옌훙메이는 청두시 톈후이 제2실험초등학교 미술 교사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리고, ‘9평공산당’ 시디를 틀어놓았다. 이러한 이유로 학부모에게 무고를 당했다. 2014년 8월 4일, 톈후이진 파출소 및 전문사건팀 관계자는 옌훙메이의 집으로 가서 그녀를 납치했다. 게다가 일부 진상 자료 및 션윈 시디를 강탈했다.

소식에 따르면, 진뉴 국가보안은 ‘증거’를 그러모으기 위해 뜻밖에 옌훙메이의 학생을 찾아가서 한 명씩 물어봐, 7~8세 아이에게 아이가 좋아하는 교사 옌훙메이가 유죄임을 지목하게 했다. 그 아이들은 아직 어리다. 그들은 모두 옌훙메이가 좋은 교사란 것을 알고 있고, 학생들도 그녀를 매우 좋아했다. 그러나 국가보안이 이 아이들에게 자신의 교사가 유죄임을 지목하도록 핍박했을 때, 아이들은 한 사람씩 피동적으로 문의, 기록, 서명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똑똑히 알지 못했다. 법률의 규정에 따르면, 미성년을 증인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증언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 만약 특수 상황이어서 반드시 미성년이 증언을 해야 한다면, 반드시 그의 후견자가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015년 3월 7일, 진뉴구 법원에서는 옌훙메이에게 불법 법정 심문을 진행했다. 판사 왕핑(王萍, 여)은 3월 11일에 그녀를 징역4년형에 선고했다. 옌훙메이는 불복해 3월 14일에 상소장을 제기했다. 옌훙메이의 2심 변호사는 여러 차례 청두 중급인민법원에 가서 서류를 조사하겠다고 요구했으나 오히려 이 사건이 없다는 고지를 받았다. 변호사가 거듭 문의했을 때, 중급인민법원에서는 다시 조사하겠다고 말하고는 소식이 없었다. 변호사는 일이 처리된 후에야 중급인민법원에서 이미 이 사건을 판결해 종결한 것을 알게 되었다.

1999년 7월, 중공(중국공산당)이 광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한 후, 옌훙메이는 수련의 환경을 떠났다가, 2011년쯤 새롭게 대법수련에 들어섰다. 그녀와 남편은 사이가 매우 좋았다. 그러나 2012년쯤 남편은 압력 때문에 그녀와 이혼했다. 옌훙메이의 남편은 그녀와 이혼했지만, 또 감옥으로 가서 그녀를 면회했다.

옌훙메이는 청두 룽취안 여자감옥에서 심각한 박해를 당했다. 소식에 따르면, 한번은 옌훙메이가 작업실에서 연공을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발견됐는데, 경찰이 이를 알고 그녀를 묶어놓고 박해했고 목욕도 못하게 했다. 경찰 톈리(田麗)는 그녀가 목욕하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목욕 대야를 아주 멀리 걷어 차버렸다. 감옥의 노예노동은 임무가 매우 힘들었다. 아침 7시 반에 일하러 나가면 저녁 7시에 일을 끝냈는데,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감옥의 규정대로 앉혀 놓았는데, 9시 반, 10시 반, 11시 반까지 그들 마음대로 했다.

옌훙메이는 박해로 암 증상이 나타나 2017년 9월 2일에 감옥 병원에 입원했다. 주소는 진탕감옥 201병원이었다. 가족은 치료받을 수 있도록 병보석 수속을 밟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감옥 측의 말에 따르면, 옌훙메이의 부모가 거주하는 곳[둥쯔커우(洞子口)168호 위안상진푸(源上金府)3동 2단원 405)]의 지역사회에서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후 또 옌훙메이의 부모님의 호적지(톈후이진 다완 지역사회 6조)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옌훙메이는 감옥에서 이른바 ‘전향’을 저지했는데, 감옥 측에서는 돌아간 후 직장에서의 감독 관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옌훙메이는 병세가 심각했으나, 감옥 측은 오히려 직장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줄곧 시간을 끌면서 병보석 수속을 밟아주지 않았다. 게다가 옌훙메이를 면회할 수 있는 사람은 부모님과 딸, 전 남편 뿐이었다.

2. 충저우시 양마진 선량한 부녀자 후샤, 박해로 사망하다

쓰촨성 충저우시 양마진 파룬궁수련생 후샤(약 55세)는 2017년 12월 19일 새벽 5시에 청두 여자감옥의 박해로 사망했다. 시신은 이미 화장됐다. 소식에 따르면, 그녀의 딸은 유골을 가지고 돌아갔다.

후샤는 현모양처로서, 그녀는 부지런하게 집안일을 처리했고 남편, 딸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다. 또한 직접 소매점을 차려 일가족은 안정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후샤는 1998년 5월에 운 좋게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해 진. 선. 인(真, 善, 忍)의 원칙에 따라 엄격하게 자신을 요구했고, 각 방면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고려해주었고, 각종 질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으며 장사도 점점 번창해졌다.

1999년 7월 후, 중공(중국공산당)이 광적으로 파룬궁에 박해를 진행했다. 이로 인해 후샤의 가족은 반목하고 가정이 파괴되었다. 후샤는 혼자 청빈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충저우시 양마진 정부, 파출소, 지역 사회, 신진(新津)세뇌반의 중공 악인(惡人)은 여전히 그녀를 가만두지 않고 여러 차례 후샤의 거처로 가서 위협하고 동영상을 찍는 등 소란을 피웠다. 게다가 또 그의 전 남편을 불러와서 후샤를 위협하고 구타했다.

2015년 7월 18일, 후샤는 자기 집에 차린 가게에 있다가 충저우시 양마진 파출소에 납치됐다. 그리고 프린터 한 대, 컴퓨터 한 대, 대법 책 그리고 진상자료를 강탈당했다. 2016년 3월 21일에 충저우시 법원에서 불법 법정 심문을 받았다.

2016년 5월쯤, 후샤는 쓰촨 룽취안 여자감옥으로 납치됐는데, 강압, 공갈 협박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4서(四書)’에 서명하여 ‘전향’하는 것을 거부했다. 살인범이자 옥졸인 장리(姜利)는 악독한 경찰의 지시로 감옥에서 후샤에게 물로 숨을 못 쉬게 하는 고문을 진행했다. 장리는 감독 관리당한 형사범 몇 명에게 명령을 내려 후샤의 머리카락, 팔을 붙잡고 그녀를 물을 가득 채운 큰 플라스틱통 안에 넣어 숨이 막히게 했다. 그런 다음 또 화장실에 밀어 넣고 폭력적으로 구타했다.(그때 화장실에는 아직 감시카메라가 없었음)

中共酷刑示意图:水缸闷水
중공 고문 설명도
: 물항아리로 숨 막히게 하기 고문

후샤의 전신은 온통 상처였고 구타를 당해 이미 설 수 없었는데, 장리는 여전히 후샤의 다리를 한 바탕 거칠게 걷어찼다. 후샤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크게 외치자, 장리와 그 외 죄수가 팬티를 야만적으로 후샤의 입안에 밀어 넣어 앞니가 한 대 부러졌다. 그들은 후샤를 감방 입구로 끌고 가서 물을 뿌렸다. 머리끝부터 발까지 전신이 흠뻑 젖었는데, 말로는 ‘관정(灌頂)’이라고 말했다. 옷이 약간 마르면 또 뿌렸다.

中共酷刑示意图:浇凉水
중공 고문 설명도
: 냉수 끼얹기 고문

2017년 2월 10일쯤, 후샤는 감옥에서 박해에 반대하며 매주 있는 단체 세뇌를 저지했고, 적발, 비판 글을 쓰지 않았다. 명령을 받은 다른 죄수는 후샤가 입장해 발정념을 발한다고 트집을 잡았다. 교도관은 감방에 들이닥쳐 즉시 자료를 보고해 올려 형기를 늘리겠다고 큰 소리를 질렀다. 후샤는 사무실로 끌려가 사람이 보지 못하는 창문 난간에 채워졌다. 밖에 있는 사람은 안에서 탁탁 패는 소리를 들었는데, 뒤이어 후샤는 6층으로 끌려가 엄한 관리 학대를 당했다.

2감구역 6층은 엄한 관리 구역이었다. 더욱 처참하고 더욱 모진 학대는 그곳에서 비밀리에 진행됐다. 6층으로 끌려가 엄한 관리를 당한 파룬궁수련인이 무슨 고문을 당했는지는 매우 알기 어렵고, 약간의 상황을 알기가 쉽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 후샤가 6층으로 끌려간 후, 한 형사범은 감방으로 가서 원래 후샤가 자던 침대에 깔던 솜, 이불을 6층으로 가져갔다. 6층에는 침대가 없었기에 땅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형사범은 또 감방으로 와서 후샤의 침대에 깔던 솜을 가져갔고, 또 감방의 다른 사람한테서 솜옷, 보온 속옷 하의를 가져갔다.

어떤 사람은, 솜, 깔던 솜 및 옷은 분명 전부 젖었거나 핏자국이 얼룩덜룩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렇게 추운 날, 그곳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모른다. 그 후 후샤는 6감구역으로 옮겨졌는데, 누운 채 움직일 수 없었다. 예전에 후샤에게 접근한 적이 있는 사람이 몰래 폭로한데 따르면, 후샤가 입은 그 검은 색 털옷은 목둘레, 가슴에 전부 피가 있었고, 팔뚝, 손등은 많은 곳이 긁혀 혈흔이 있었는데 스스로 긁은 것이었다. 후샤가 무슨 독성이 있는 약물을 맞았는지는 모른다. 2감구역의 한 교도관은 예전에 한 파룬궁수련인에게 “‘전향’하지 않으면, 강제로 당신에게 독극물을 주입하겠으니 잘 생각해 보시오.”라고 말했다. 그 후 어떤 사람이 병원에 갔다가 후샤가 병원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는데, 안대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감옥에서는 파룬궁수련인 후샤에게 장기간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박해를 진행했다. 이로 인해 후샤의 심신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결국 2017년 12월 19일 새벽 5시에 룽취안 병원에서 사망했다.

관련 박해 기관과 관련자의 정보는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17년 12월 31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2/31/3588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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