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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닝 안산시 위바오팡 박해로 사망, 남편은 여전히 감금돼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보도) 랴오닝(遼寧) 안산시(鞍山市) 파룬궁수련생 위바오팡(於寶芳)과 남편 왕뎬궈(王殿國), 아들 왕위(王宇) 일가족 세 명은 2017년 7월 4일 저녁, 문을 부수고 방안으로 들이닥친 경찰들에게 납치, 강탈을 당했다. 위바오팡은 안산시 여자구치소에 불법 감금돼 7월 17일에 박해로 사망했고, 남편 왕뎬궈는 줄곧 불법 감금돼 있다.

위바오팡이 사망한지 1시간 후에야 불법 직원은 아들 왕위가 병원으로 가서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또 그가 시신을 검사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8월 8일, 가족은 왕뎬궈가 불법 체포령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으나, 또 집으로 돌아와 후사를 치르지 못했다.

책임진 주임 관(關) 씨는 구치소 사람이 위바오팡을 창다(長大)병원으로 보내 관찰하고 응급처치를 했다며, 정상적인 사망에 속해 구치소에는 책임이 없으므로 배상할 필요가 없으며 또 1~2만 위안(한화 약 173만원~345만원)을 보상해야 한다고 공언했다. 왕뎬궈와 아들 왕위는 모두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위바오팡이 구치소에서 감금당한 기간에 사망했으므로 구치소에는 책임을 지고 있다. 만약 그녀에게 중병이 있었다면, 구치소에서는 무엇 때문에 수감했는가?! 병이 생겼는데 무엇 때문에 때맞춰 가족과 소통하지 않았는가? 무엇 때문에 더욱 일찍 병원으로 보내 치료를 받게 하지 않았는가? 병원에서는 병이 위급해 응급처치를 진행하는 중에 무엇 때문에 때맞춰 가족에게 통지하지 않았는가?!

위바오팡의 아들 왕위는 일가족이 이번 박해를 당한 비참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하소연했다.

문을 부수고 방안에 들이닥쳐 납치하다

나는 왕위라고 하며, 나의 어머니는 위바오팡, 아버지는 왕뎬궈라고 한다. 2017년 7월 4일 저녁 8시가 넘어서 한 무리 사람이 나의 집 대문 열쇠를 부순 뒤 들이닥쳤다. 그 사람들은 방안으로 간 후, 즉시 나의 아버지, 어머니와 나 및 우리 집에 온 고모를 식사하는 방의 소파위에 앉도록 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함부로 우리 집안의 모든 물건을 뒤졌다.

전체 과정에 그들은 경찰증, 수색 영장을 우리에게 꺼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 집을 아수라장으로 뒤졌다. 내가 경찰복을 입은 한 남자에게 “당신들은 어디 사람들입니까?”라고 묻자, 그 경찰은 “우리는 톄시(鐵西) 분국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우리 집안의 물건을 뒤져 강탈하지 말며, 그들이 불법적으로 민가에 들이닥친 것임을 알려주었으나, 그들은 듣지 않고 여전히 함부로 한바탕 뒤졌다.

그 무리 사람들은 5명 이상이었는데, 그중 두 사람은 특수 경찰복을 입고 손에 전기봉을 들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우리 집안에 있는 네 사람에게 수갑을 채우려 했다. 나와 아버지가 그들이 채우지 못하게 하자, 그들 몇 사람은 나를 땅 위에 눌러 놓고 나의 손을 강제로 몸 뒤로 갈라놓아 나는 손이 매우 아팠다. 그들은 나에게 수갑을 채웠다. 나는 또 그들 몇 사람이 아버지를 땅 위에 눌러 놓고 강제로 수갑을 채우는 것을 보았다(뒷짐 결박). 동작은 매우 난폭했는데, 아버지는 줄곧 아프다고 외쳤다.

대략 그날 저녁 9시가 넘어서 우리 네 사람은 그들에 의해 아래층에 정차해 놓은 한 대의 경찰차로 끌려가 융러(永樂)파출소로 끌려갔다. 우리 네 사람이 집안에서 아래층으로 끌려갈 때, 그들 네 사람은 여전히 계속 우리 집안의 물건을 뒤져 강탈하고 있었다.

고문에 의해 강제 자백

아버지는 혼자 파출소의 한 방안에 갇혀, 손과 발에 쇠고랑을 차고 땅 위의 한 의자 위에 고정돼 앉아 있었다. 나는 다른 한 방안에 갇혔는데, 역시 손발에 쇠고랑을 차고 한 의자 위에 고정됐다. 어머니와 고모는 파출소의 한 철창 안에 갇혀 있었다.

그 후 밤중에 내가 졸릴 때, 파출소 경찰은 나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말을 종이 위에 기록했다. 내가 물어보는 말에 대답하지 않을 때, 경찰복을 입지 않은 한 남자가 손으로 나의 머리카락을 잡고 힘껏 뒤로 잡아당겨, 나의 머리는 뒤로 젖혀져 치켜들었고 얼굴은 윗면을 향하게 됐다. 나는 호흡하기가 어려움을 느꼈다. 나의 두 발과 두 발목, 아래 다리는 일이 발생하기 며칠 전에 부어올랐다. 당시 나의 왼쪽 발의 큰 발가락은 생안발 증상이 나타나 어떤 때에는 발가락 부위가 아팠다. 그 사람은 힘껏 나의 왼쪽 발등을 밟았고, 경찰복을 입은 다른 한 남자는 나의 오른 쪽 발의 발등을 밟으면서 나에게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파출소와 유치장에서 경찰은 모두 두 차례 불법적으로 구두 자백을 기록했다. 그들이 종이 위에 기록한 내용은 내가 말한 내용과 여러 곳이 같지 않다. 그들은 내가 말한 내용을 왜곡했다. 파출소에 있을 때, 나는 당시에 졸리고 두려워, 나에게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해 진행한 구두자백 위에 나의 이름을 써서 지장을 눌렀다. 구치소에 있을 때, 나는 또 핍박에 못 이겨 마음을 어겨 지장을 누르고 서명했다.

파출소에서 줄곧 이튿날 7월 5일 오후에 이르러서야 그들은 우리 네 사람에게 소량의 음식을 먹게 하고 물을 조금 마시게 했는데, 빵(100g) 하나, 생수 한 병(500ml)을 주었다.

7월 5일 대략 저녁 6시 이후, 우리 네 사람은 경찰에 의해 경찰차로 끌려갔고 안산시 구치소로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신체검사가 끝나서 아버지는 제2구치소에 불법 감금됐고, 어머니는 안산시 여자구치소에 갇혔으며, 나와 고모는 안산시 유치장으로 보내졌다. 나는 보름 동안 불법 구류처분을 받았다.

7월 5일 저녁, 우리 네 사람이 경찰에 의해 파출소에서 끌려 나왔을 때, 나는 나의 고모 등 가족이 파출소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서로 상대방을 보았고 아울러 말을 했다. 7월 18일, 나는 유치장에서 나왔는데, 고모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7월 5일 저녁에 그녀는 우리 네 사람을 파출소에서 끌어간 후, 그날 저녁에 그녀의 핸드폰 번호를 파출소 경찰에게 알려주었다. 이튿날 7월 6일 낮에 경찰은 나의 고모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로 하여금 파출소로 가서 톄시분국에서 내린 나의 부모님의 구류통지서를 찾아가도록 했다. 7월 7일 낮에 고모는 파출소로 가서 이 2부의 통지서, 그리고 어머니의 옷을 찾아왔다. 당시 또 파출소 경찰과 나를 구류 시킨 통지서를 달라고 했는데, 경찰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불법 구금인 것이다.

7월 5일 저녁, 나는 안산시 유치장 안에 불법 구류를 당했다. 며칠이 지나서 나는 유치장 안의 전화로 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나를 보러 오겠다고 말했으나 오지 않았다. 내가 7월 18일에 구류 기한이 만기 되어 유치장에서 나와 그녀를 보았을 때에 그녀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주었다. 그녀는 나와 전화통화를 하고 며칠 후 나를 보러 왔는데, 그녀의 신분증과 전화번호가 유치장의 사람에게 기록됐다. 그러나 유치장 직원은 오히려 고모가 나를 면회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날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박해로 사망, 시신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다

7월 17일 오후 4시 30분이 넘어서 나는 유치장안에서 밥을 먹으려 준비했다. 이때 한 여경이 와서 나에게 “당신의 어머니는 병원으로 갔는데, 가족 중에서 누가 당신의 어머니를 돌볼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나의 막내 고모가 우리 어머니를 돌볼 수 있습니다. 고모는 아버지의 친여동생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막내 고모의 전화번호를 그녀에게 알려주었는데, 나는 또 그녀가 핸드폰 번호를 그녀 핸드폰 안에 기록해 넣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떠나갔다.

잠깐 지나서 허(何) 소장은 나를 사무실 안으로 끌고 갔다. 그는 나에게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를 보고 싶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어머니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허 소장은 두 명의 남자 경찰과 함께 나에게 쇠고랑을 채워 경찰차에 압송해 올렸다. 그들 세 명의 경찰은 나를 안산시 창다 병원으로 끌고 갔다.

내가 어머니를 보았을 때, 그녀는 창다 병원의 ICU병실의 한 침대 위에 있었는데, 얼굴은 위로 향해 반듯하게 누워있었고 얼굴색은 잿빛을 띠고 있었으며, 목 부위에는 호흡기의 호스를 연결하고 있었다. 이때 한 여성 의사는 손으로 어머니의 두 눈까풀을 벌렸다. 나는 그녀의 동공이 확대되었음을 보았다. 나는 의사에게 어머니의 가슴 부위가 여전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그녀에게 아직 호흡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지를 문의했다. 의사는 이것은 호흡기의 작용인데, 가족에게 사망자의 맨 마지막 한 번을 보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때 나는 어머니의 시신을 더 많이 보고 그녀의 손을 만지려고 했다. 왜냐하면 나는 영원히 다시는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경찰들은 내가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강제로 나를 ICU병실에서 데려갔다. 내가 어머니의 시신을 보면서부터 강제로 병실에서 끌려 나옴에 단지 짧은 몇 분 동안의 시간이었다.

병실에서 끌려 나온 후, 나는 의사에게 생전에 어머니의 병원에서의 상황을 문의했다. 그 여성 의사는 나의 어머니는 오후에 병원으로 끌려왔고, 그날 오후 2시 50분에 갑자기 병이 위급해져 즉시 또 그녀를 ICU병실로 보내 응급처치를 받게 했는데, 40분 동안 응급처치를 받아도 효과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2017년 7월 17일 오후 3시 30분에 사망했다. 나는 또 어머니의 사망 원인을 문의했는데, 그녀는 현재 사망 원인을 확정할 수 없다며, 다만 어머니의 사망 원인은 심장 박동이 멈춘 것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일을 책임진 감관지대(監管支隊)의 주임 관 씨는 나에게, 잠깐 후 그들이 책임지고 나의 어머니에게 옷 한 벌을 사서 입힌 후, 시신을 장의사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나는 유치장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와 면회하여 어머니의 후사를 처리하는 일을 상의하겠다고 제기했다.

7월 18일 오후, 관 주임은 나는 앞당겨 석방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단지 휴가를 신청해 어머니의 후사를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나는 제2구치소로 끌려가서 아버지와 면회했다. 나와 아버지는 모두 관 주임에게 법의관이 나의 어머니의 시신에 대해 해부하여 사망원인을 확정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와 아버지 중 한 사람이 동의하지 않아도 무효다. 오직 나와 아버지가 법의관이 어머니의 시신을 해부하는 것을 동의해야 만이 유효했다. 그런 다음 나는 석방됐다.

그날 오후 나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대문의 손잡이는 이미 외측에서부터 파괴되어 자물쇠 심이 없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대문은 매우 단단히 닫혀져 열리지 않았다. 그날 납치돼 끌려갈 때, 아버지가 옷과 바지를 입으려 해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는 또 열쇠와 돈을 지니는 것마저 허락 받지 못했다. 나는 막내 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깐 후 그녀가 왔다. 우리는 함께 파출소로 가서 사람을 찾아 우리 집 대문을 열어 달라고 했으나, 파출소에서는 관여하는 사람이 없었다. 파출소 사람에게 우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서 열쇠를 여는 사람을 불러다가 열쇠를 열 때 증인으로 되어주고, 방안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방지해 달라고 했으나 파출소 사람은 가지도 않고 관여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나의 막내 고모는 어쩔 수 없이 500위안(약 9만원)의 돈을 써서 사람을 찾아 자물쇠를 열고 자물쇠를 바꿨다. 안 측의 문은 파괴되지 않았고 자물쇠도 움직인 적이 없었는데, 그날의 현장은 그래도 완전하고 손상이 없음을 설명했다. 나와 막내 고모는 방안이 아수라장으로 되고 많은 물건마저 돈을 포함해 톄시분국의 사람에게 강탈당하고 도둑맞은 것을 보았다. 게다가 방안에는 맡기 어려운 이상한 냄새가 풍겼는데, 원래 집안의 냉장고 전원 플러그를 그들이 전원 콘센트에서 뽑아냈던 것이다. 냉장고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고 안의 밥, 반찬, 물고기, 고기 등 음식물은 모두 썩어 고약한 냄새를 뿜었다. 음식물 위에는 많은 큰 구더기가 있었고 땅위에도 온통 구더기가 기어 다녔다. 냉장고도 옆으로 밀려갔고 방안의 침대 판은 들어 올려져 있었으며, 소파도 들어 올려졌고, 소파의 천도 잘렸으며 많은 열쇠는 경찰에게 강탈당했다. 아버지의 바지안의 돈과 어머니 가방안의 돈 및 방안, 침대 안에 놓아두었던 돈마저 경찰에게 강탈당했다.

많은 의문점이 있다

우리는 어머니의 이 일을 책임진 감관지대(監管支隊)의 관 주임을 찾아갔다. 이튿날 구치소의 한 방안에서 관 주임은 아버지와 막내 고모의 앞에서 어머니의 사망 원인은 당뇨병 고칼륨 모 종합증(糖尿病高鉀某綜合症)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이 결과에 동의하지 않자, 관 주임은 서명에 거부했다고 그가 종이 위에 쓸 수 있다며, 우리에게 동의하는지를 물었다. 우리는 동의했다. 관 주임은 나의 아버지, 나의 친척에게 어머니의 구치소 안에서의 녹화 영상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7월 5일 저녁에 감방에 보내져 들어간 것만 보았을 뿐이다. 7월 6일 오전, 그리고 7월 16일 낮, 7월 17일 오전부터 대략 9시 15분까지 어머니가 어떤 사람에게 감방에서 부축당해 가는 녹화영상을 보도록 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7월 5일 저녁에 감방에 보내져 들어갔고 7월 6일, 오전, 그리고 7월 17일 오후부터 대략 9시 15분까지, 어머니가 다른 사람에게 부축당해 나가는 녹화 영상만 보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당시 그들은 이미 퇴근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책임진 주임 관(關) 씨는 구치소 사람이 위바오팡을 창다(長大)병원으로 보내 관찰하고 응급처치를 했다며, 정상적인 사망에 속해 구치소에는 책임이 없으므로 배상할 필요가 없으며 또 1~2만 위안을 보상해야 한다고 공언했다. 우리는 모두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구치소에서 감금당한 기간에 사망했으므로 구치소에는 책임을 지고 있다. 업무 담당 기관에서 어머니를 제2구치소로 보내 신체검사를 받게 했는데, 합격되어 감금 조건에 부합되었으며, 구치소에서 비로소 사람을 수감한 것이다. 만약 당뇨병이 있어 신체검사에서 불합격이 되었으면 무엇 때문에 수감했는가?! 병이 생겼는데 무엇 때문에 때맞춰 가족과 소통하지 않았는가? 무엇 때문에 더욱 일찍 병원으로 보내 치료를 받게 하지 않았는가?! 병원에서는 병이 위급해 응급처치를 진행하는 중에 무엇 때문에 때맞춰 가족에게 통지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어머니가 사망한지 한 시간 후에야 나에게 통지를 내려 병원으로 가서 어머니의 맨 마지막을 보게 했는가?! 나의 어머니가 병원으로 보내진 후의 관련 치료, 응급처치를 진행한 시간에 관한 녹화 영상 증명이 없다. 이런 표현들은 근본적으로 정상적인 논리에 부합되지 않은데다 또 많은 의문점이 있다.

2017년 8월 8일에 아버지가 불법 체포령을 받았음을 알았고,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후사를 처리할 수 없게 되었다.

근근이 보름 사이에 나는 인간의 생사이별의 고통과 곤혹을 겪었다. 멀쩡하던 집이 파괴되고 가족이 사망했다. 이 갑작스럽게 닥친 이상한 사망에 직면해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다. 도대체 누가 이 인간비극의 피해자이고, 누가 또 이 인간비극의 제조자이며, 누가 나의 어머니의 사망을 조성한 진정한 흉수인가?

관련 박해 기관과 직원의 정보는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17년 9월 19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9/19/3538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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