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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저우 소령 장교 왕유장이 박해로 사망

[밍후이왕](밍후이왕통신원 간쑤 보도) 란저우(蘭州) 군관구 통신부대 소령 장교 왕유장(王有江)은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해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으로 되려 했다가 2001년 7월에 10년의 불법 징역형을 당했는데, 박해로 ‘강직성 척추염’ 증상이 나타나 스스로 생활하기 어려웠다. 출소한 후 몸이 아직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지 않았고 2012년 6월에 친구 집으로 놀러갔다가 거듭 납치되어 또 불법 판결을 6년형 선고받아 란저우 감옥에서 교도관에게 학대, 구타, 전기봉에 의한 전기 충격, 강도가 높은 노동 등 학대를 당했다. 결국 2017년 7월 1일에 박해로 사망했고 향년 48세였다.

王有江
왕유장
(王有江)

2017년 6월 24일 아침 9시가 넘어서 왕유장의 아버지는 전화를 받았는데 왕유장이 두개 내 대출혈 증상이 나타나 이미 란저우 대학 제2병원으로 보내져 응급처치를 받았다며 가족에게 되도록 빨리 병원으로 가라고 말했다.

왕유장은 장자커우(張家口) 통신대학 본과를 졸업한 후 란저우 군구 통신본부에서 근무하다가 란저우 군구 27분부(分部)로 전출됐다. 1998년 음력 섣달 그믐날, 왕유장은 인연이 있게 되어 파룬따파 수련으로 들어서서 심신에 이로움을 얻었다. 그는 대법 법리 진선인을 가늠하는 표준으로 삼아 엄격히 자신에게 요구했다. 그는 정직하고 강인했으며, 선량하고 사심이 없었으며, 또 업무상에서 착실하게 잘 했고 기술이 훌륭해 동료 및 책임자의 호평을 받았다. 그가 파룬따파를 통해 체현해 내온 우수한 품성과 탁월한 재능은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모두 탄복시켰다.

억울한 10년 징역형, 박해를 당해 불구가 되다

1999년 7월 20일에 중국공산당 장쩌민(江澤民) 집단은 파룬따파를 박해하는 운동을 발기했다. 왕유장은 마음에 선념을 품고 수차례 베이징으로 가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는 한 마디 공정한 말을 했다가 경찰에게 납치됐다. 그는 차례로 란저우 시궈위안(西果園) 구치소, 란저우 시구쓰얼거우(西固寺兒溝) 구치소, 란저우시 다사핑(大砂坪) 감옥 등 곳에 불법 감금됐다.

왕유장은 2000년 1월 3일에 또 청원하러 베이징으로 갔다. 소속 부대에서 정치규율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2개월 넘게 비밀리에 불법 감금을 당하면서 부대의 사악한 ‘전문사건팀’에 의해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강온 양면책을 동시에 쓰면서 왕유장에게 진선인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2000년 12월 하순에 거듭 청원했는데, 도중에 닝샤(寧夏) 중웨이(中衛) 기차역 대합실에 하루 동안 갇혀 있었다. 그날 밤에 강제로 란저우시 타오수핑(桃樹坪) 수용소로 보내져 일주일 동안 불법 감금을 당했다.

직장 책임자가 상부의 사악한 두목의 책망을 당할 대로 당하자 그는 전업을 요구했다. 그러나 전업 관련 수속도 완전히 처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2001년 1월 6일, 왕유장은 란저우시 공안국 1처 경찰에게 납치된 동시에, 복사기 몇 대, 컴퓨터, 대량의 소모품과 자금을 강탈당했다. 2001년 7월 3일, 란저우시 청관구(城關區) 법원에서는 공개심리를 거치지 않은 채 위중(榆中)시에서 비밀 재판을 열어 왕유장에 대해 불법적으로 10년 중형 판결을 선고했다.

왕유장은 체포된 후, 2001년 1월 10일에 란저우 시궈위안 구치소 4대 4호에 불법 감금됐다. 그 기간에 악독한 경찰에게 무차별 폭력을 당했고, 핍박에 못 이겨 장시간 노역을 당했다. 그리고 수면 박탈, 독방에 가두기, 잔혹한 고문 박해를 당해 갖은 시련을 겪었다. 그가 란저우 시구쓰얼거우 구치소로 옮겨졌을 때는 이미 걸을 수 없게 됐다. 2001년 10월, 그는 다사핑 노동개조 병원으로 보내졌다.

왕유장은 란저우 감옥으로 납치됐다. 교도관은 각종 수단을 이용해 왕유장을 ‘전향’시키려고 시도했다. 어떤 교도관은 “이치를 따지면 우리는 파룬궁을 이길 수 없으므로, 파룬궁을 대함에 곤봉과 형구를 사용해야 합니다. 수단이 흉악할수록 효과적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극히 잔혹한 정신과 육체적인 학대 하에 2004년 5월에 이르러서 그는 구치소에서 박해로 손상을 입은 몸은 갑자기 심각한 병리상 변화가 일어났다. 척추는 심각하게 변형되고 굽어져 몸이 위축됐으며, 하지의 혈액이 잘 통하지 않아 차갑고 무릎관절에 기운이 없게 되어 앉으면 일어나지 못했고, 일어선 뒤에 손으로 물건을 잡고 의지하지 않으면 즉시 넘어졌다. 그리고 다리와 발도 말을 듣지 않아 한 걸음씩 움직일 때면 칼로 도려내듯 아팠는데 사실 이미 걸을 수 없었고 침대 위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어떻게 누워있든 지 시각마다 힘줄을 뽑아내고 뼈를 발라내는 것 같은 통증을 감당했다.

2004년 말에 이르러 그의 몸은 더욱 설상가상이었다. 두 손은 마비되기 시작했고 손에 기운이 없었는데, 심지어 밥을 먹는 젓가락, 물을 마시는 컵마저 잡을 수 없었다. 경추는 굳어지고 머리도 자유롭게 돌릴 수 없었다. 의사는 ‘강직성 척추염’ 진단을 내렸다. 이것은 현재 의학계에서는 아직 치료할 수 없는 난치병으로, 이 병을 열 사람이 걸린다면 아홉 사람은 마비되고 평생 치료할 수 없는 바, 죽지 않는 암이라고 불렸다. 원래 한창 때었던 왕유장은 장시기 무고하게 잔혹한 박해를 당한 상황에서 이미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됐고 생명이 위독해졌다.

이와 같이 잔혹한 박해에서도 왕유장은 여전히 차분하고 엄숙하게 악도에게 “대법제자는 모두 좋은 사람입니다. 당신들은 사리를 위해 양심을 배반해 사악함을 도와 나쁜 짓을 저질렀는데,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을 해치고 자신을 해쳤습니다. 선악에는 인과응보가 있음을 천리입니다. 사당의 사악한 교도원은 당신들의 손을 빌어 좋은 사람을 박해하고 있습니다. 부디 속임을 당하지 마시오. 만약 당신들이 권고를 듣지 않는다면, 제 목숨은 당신들이 수시로 가져갈 수는 있으나 대법을 수련하는 이 마음만은 누구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라고 엄숙하게 경고했다. 책임을 진 몇 명의 형사범은 긴장해서 사악한 경찰에게 보고했다. 이로부터 사악한 경찰은 그를 독방에 가둬 박해를 진행했다.

2008년 8월, 감옥 측은 또 ‘올림픽’이라는 구실로 감옥 안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했다. 왕유장은 두 차례나 독방에 갇혔는데, 한 차례는 보름 동안 갇혔다. 게다가 6개월 동안 가족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장시간 단식하고 각종 고문의 시달림을 당했던 이유로, 왕유장의 몸은 극히 허약해져 란저우 감옥병원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조금 호전되자 또 감옥으로 데려와 가뒀다. 왕유장의 아버지는 2009년 1월 8일에 아들을 면회하러 왔으나 또 면회를 거부당했다. 5감구의 교도원 샤오빈(肖斌)은 “형사범은 가능하지만 파룬궁은 안 됩니다. 왕유장은 더욱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전향(즉 믿음을 포기함을 가리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짧은 ‘자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박해는 꼬박 10년 동안 왕유장을 따랐다. 2011년 1월 9일에 이르러서야 악몽 같은 옥살이를 끝마쳤다. 연세가 이미 칠순인 아버지는 10년 동안 란저우 융덩(永登) 사이를 오가면서 면회하러 분주히 뛰어다니다가 고난과 압력으로 수차례나 병원에 입원했다.

왕유장과 그의 전처는 대학 동창이었고 그의 전처 역시 장교였다. 그녀는 왕유장의 수련을 통해 대법의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을 보았으며, 매우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왕유장이 10년간의 억울한 재판을 당해 고통의 시달림과 극심한 충격 하에 핍박에 못 이겨 이혼을 선택했다. 왕유장은 예전에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행복한 가정이 있었으나 오히려 공산사당의 박해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왕유장은 10년 동안의 비인간적인 학대 중에서 헤쳐 나와 출소한 후 융덩으로 돌아와 마침내 부모와 가족이 단란히 한자리에 모였다. 몸에 심한 손상을 입었던 이유로 왕유장은 출소한 후 여전히 걸음걸이가 느리고 목과 등 부위가 굳어지고 굽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손으로 물품을 잡을 수 없었고 끊임없이 떨었으며 몸이 허약했다. 끊임없이 파룬궁 수련을 거쳐 왕유장의 몸은 신기하게 점차 회복됐다.

하지만 중국공산당 악도는 그에 대한 박해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출소한 후 1년이 넘는 동안 현지(융덩현)의 사당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610’(중국공산당이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 불법 조직), 공안 국가보안, 파출소, 사법소 및 지역 사회 등 악인은 끊임없이 집으로 찾아와 교란, 공갈 협박, 강온 양면책을 다 쓰며 연속 그에게 파룬불법(法輪佛法)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도록 핍박했다. 이로 인해 그는 정상적인 상황에서 생활할 수 없었다. 특히 연로하신 부모님은 거듭 교란과 공갈협박을 당해 정신적으로 고도의 긴장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매번 이런 사람들을 보낸 후에야 비로소 심신이 피로함을 느꼈는데 앉으면 전신은 일종 허탈감이 느껴졌고 심신에 심한 손상을 입었다.

친구를 문안했다가 거듭 6년형의 억울한 판결을 당하다

2012년 4월 26일, 란저우시 중국공산당 정법위, ‘610’은 란저우 감옥의 사교과 등의 수 명의 사람과 결탁해 왕유장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그가 아직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회를 틈타 거듭 그에 대해 박해를 실시하려 시도했다.

2012년 6월, 왕유장은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란저우로 왔다. 6월 28일, 그는 파룬궁수련생 천제(陳潔)의 거처로 가서 방문했다. 오후 4시 경, 란저우시 청관구(城關區)분국 국가보안대대의 천즈카이(陳志凱)는 갑자기 20여 명 사람을 거느리고 천제가 세 맡은 집 앞으로 와서 유리를 박살냈다. 그리고 강제로 문을 열고 한꺼번에 밀려와 사납게 덮쳐들어 왕유장의 두 팔을 비틀어 그를 땅바닥에 눌러놓았다. 왕유장은 눌렸던 이유로 순간적으로 숨이 올라오지 않았다. 천수셴(陳淑嫻), 천제(陳潔) 자매는 경찰에 대해 “이 사람은 불구자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그를 대했다가 문제라도 나타나면 당신들이 책임지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왕유장은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현장을 지휘한 사람은 란저우시 청관구 국가보안대장 런(任) 씨였다. 그는 왕유장을 손가락질하며 흉악하게 “당신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두 팔을 몸 뒤로 비튼 뒤 또 허리띠를 뽑아내 그를 단단히 묶었다. 그런 다음에 테이프로 팔을 거듭 단단히 묶었다. 게다가 같은 방식으로 천제 두 자매를 묶었다. 그런 다음 악독한 경찰은 불법 수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는데, 집안을 뒤져서 온통 난잡하게 어질러놓았고 2천 위안의 현금, 5천여 위안의 저축 통장, 전화카드 및 컴퓨터, 프린터 등 많은 물품들을 강탈했다. 뒤이어 그들 세 사람을 란저우 청관분국 국가보안대대로 납치해 불법 심문을 진행했다.

연로하신 부모님은 사처로 가서 그의 소식을 문의했다. 8월 16일에야 통지를 받았는데, 란저우시 청관 검찰원에서는 이른바 ‘×교 조직을 이용해 법률의 실시를 파괴한 죄로 혐의를 받음’으로 왕유장에 대한 체포령을 비준했고, 그를 란저우시 문화궁 화린산(華林山) 제2구치소 제2감구로 납치해 박해를 진행했다.

왕유장은 고소장 중에서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청관구 공안분국 국가보안대대 경찰은 법을 위반해 민가에 들이닥쳐 불법적으로 가택 수색을 진행했다. 게다가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해 ‘폭력적으로 증거를 얻는’ 방식을 채용했다. 2012년 6월 28일 4시가 넘어서부터 7월 2일 저녁 7시가 넘을 때까지 나는 줄곧 청관분국 국가보안대대 경찰에 의해 ‘호랑이 의자’ 위에 묶여 시달림을 당했다. 3박4일 동안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당했는데, 심문을 진행한 사람은 네 명이 한 팀이 되어 두세 시간이면 한 차례 바꿨다. 경찰은 또 ‘아오잉(熬鷹)’ 고문을 사용해 그가 잠을 자고 휴식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고강도 조명을 사용해 왕유장의 얼굴과 두 눈을 비추고 뜨겁게 구웠다. 이로 인해 고혈압 병력이 없었던 나는 이때부터 혈압이 높아져 내려가지 않아 다사핑 신차오(新橋) 병원으로 보내져 75일 동안 입원했다.(간쑤성 란저우시 다사핑 노동개조 감옥병원임).”

2012년 10월 말 왕유장은 란저우시 청관구 법원의 기소장을 받았고, 중국공산당은 불법 재판을 즉시 감행하려 했다. 왕유장은 구치소에서 소식을 보내왔는데, 그에 대해 관심이 있는 친척과 친구들이 변호사를 선임해줄 것을 희망했다. 가족은 베이징의 변호사를 선임해 왕유장과 후이닝현(會寧縣) 파룬궁수련생 천제를 위해 무죄변론을 하기로 했다. 변호사가 의뢰인을 면회하려 하자 구치소에서는 각종 이유로 면회를 거부했다. 동시에 란저우시 청관구 공검법 기관에서는 난관을 설치해 거부했고, 황당하고 진실하지 않은 이유로 갖은 방법으로 변호사가 이 사건에 개입함을 거절했다.

11월 24일은 이틀 연휴였다. 란저우 청관구 법원 형사청에서는 변호사와 가족에게 통지하지 않은 상황에서 비밀 재판을 열어 왕유장, 천제, 거칭춘, 루웨링 등 4명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불법 재판을 진행해 대강대강 결말을 지었다. 가족이 무엇 때문에 피고인 가족에게 통지하지 않고 비밀 재판을 했는지 질문하자, 판사 류둥위(劉冬鬱)는 “형사 사건은 통지하지 않습니다. 기타의 것은 내가 모릅니다.” “당신들이 누구를 찾고 싶으면 찾고, 어디로 가서 신고하고 싶으면 신고하세요”라고 잡아뗐다.

2013년 9월 24일, 왕유장은 또 란저우시 청관구 법원에 의해 6년의 불법 징역형 선고받았다.

란저우시 청관구 법원 및 그 직원은 말끝마다 그들은 법률 절차에 따라 사건을 처리했다고 말했으나 오히려 변호사의 위탁서를 받지 않았고, 가족은 구치소 내에서의 상황 및 사건 진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며 또 면회를 허락받지 못했다. 1년 6개월 사이에 가족은 수차례나 법률 기관과 청관구 법원, 국가보안대대, 공안국, 청관구 법원, 검찰원을 분주히 오가면서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 경위를 문의했다. 그러나 거듭 그들의 저지와 속임수, 난처함을 당했다.

란저우 감옥에서 학대와 폭력적인 구타를 당하고 박해로 사망하다

2014년 3월 17일, 왕유장은 또 란저우 감옥 5감구에 감금됐다. 교도관은 왕유장을 핍박해 이른바 ‘전향’을 시키기 위해 역량을 늘려 박해를 진행했다. 늘 구타하고 밥을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잠을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세워두는 체벌을 세웠는데 한 번 세우면 일주일 동안 세웠다. 그리고 저녁에는 강제로 글을 쓰도록 핍박했고 독방에 가뒀다. 왕유장은 다음과 같은 박해를 당했다.

1. 악독한 경찰이 집단적인 구타, 무차별 폭력, 전기봉으로 데우기 고문을 진행해 왕유장은 대소변을 가누지 못하게 됐다.

2. 낮에 강제적으로 일하러 나가게 했는데, 노동 강도는 기타 죄수의 몇 배나 됐다.

3. 저녁에는 수면을 허락하지 않았고 강제로 감옥 규정을 외웠으며 사상 보고서를 썼다.

4. 매끼 찐빵 한 개만 주었을 뿐 반찬이 없었으며 하루 동안 물 한 컵만 주었다.

5. 화장실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용품 구매를 허락하지 않았고 반년 동안 가족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6. 목욕과 세탁을 허락하지 않았다.

7. 바오자 죄수는 24시간 동안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 엄밀하게 감시하며, 다른 사람과 어떠한 접촉이 있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순종하지 않으면 욕설을 퍼붓고 구타를 진행했다.

왕유장의 신체와 정신적 인내심은 거의 극한에 이르러 음식물을 씹을 수 없었고 대소변을 가누지 못했다.

2015년 7월 2일, 왕유장은 란저우 감옥에서 강압적인 박해로 뇌출혈 증상이 나타나 란저우 감옥병원으로 보내져 응급처치를 받았는데, 당시 가족에게 통지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위독 통지서를 내린 후 란저우 감옥에서는 8월 2일에야 급히 가족에게 통지했다. 가족인 란저우감옥 제5감구의 대장 장(張) 씨가 서명한 위독 통지서를 받았다. 이 대장은 가족을 속이며 “당신들이 이 종이 위에 서명하기만 하면 즉시 왕유장을 가서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가족이 서명한 후 이 대장은 종이를 갖고 떠났는데 또 가족에게 면회도 허락하지 않았다.

왕유장은 박해를 당해 왼쪽 몸이 마비되고 목이 뻣뻣했으며, 생활을 완전히 스스로 할 수 없게 됐다. 사람은 휠체어 위에 앉아있었는데 매우 수척했다.

2017년 6월 24일 아침 9시가 넘어서 왕유장의 아버지는 전화를 받았다. 말로는 왕유장의 두개 내 대출혈 증상이 나타나 이미 란저우대학 제2병원으로 보내져 응급처치를 받았다며 가족에게 되도록 빨리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파룬궁수련생 왕유장이 박해당한 상세한 상황은 밍후이왕 보도 ‘소령 장교가 란저우 감옥에서 처참하게 박해 당해’, ‘란저우 법원에서 소령 장교를 모함: 변호사를 회피해 몰래 개정을 진행’, ‘10년 재난을 경험한 소령 장교 왕유장이 또 재판 모함을 당해’ 등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17년 8월 13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8/13/35243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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