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치하얼 파룬궁 수련생, 17년의 비바람 역정(2)
[밍후이왕]
제2부: 매서운 겨울 눈서리와 얼음장 속에서 북부 변경에 매화가 피다
바른 믿음을 박해하는 미친 듯한 홍마(紅魔)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져 늑대 울부짖고 귀신이 곡하네
눈서리와 얼음 속 겨울 매화 꽃 아름다워
피 흘린 흑토 세상풍파 정도(正道)로 향하네!
고덕대법인 파룬따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국대륙에서 가장 참혹한 박해를 받고 있다. 장쩌민은 질투심과 개인 이익을 위해 공개적으로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발동했다. 1999년 6월 10일, 장쩌민은 국가 헌법 위의 파룬궁을 박해하는 전문 불법기구인 ‘610사무실’을 만들었다. 1999년 7월 20일에는 각지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를 파탄시키며 육체를 소멸하라’는 소멸정책이 실시됐다. 이로 인해 치치하얼 시에는 적어도 파룬궁 수련생 64명이 박해로 사망했다. 많은 수련생들이 불법 징역형과 노동교양을 받았고, 유랑했으며 무수한 가정이 뿔뿔이 흩어졌다. 동시에 각 감옥의 노동교양소는 치치하얼시 제1병원과 결탁해 파룬궁 수련생을 대상으로 강제로 장기를 적출해 고가에 팔아넘기고 시신을 화장해 흔적을 없앴다.
하지만 진리는 강압적인 권력과 폭력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파룬따파를 믿는 수련생들은 거짓말에 속지 않았고 고문과 학살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17년 이래 치치하얼 시 수련생들은 강권과 폭력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고 시종 강인하고 바른 믿음과 초범적인 의지로 이성적인 반박해를 진행했다. 시민들에게 파룬궁 박해 진상 알리기를 줄곧 견지하는 동안 불굴의 정신이 천지를 비췄다.
목록
1. 역사시기, 99년 7월 22일 그날
2. 적어도 치치하얼시 파룬궁 수련생 64명이 중국공산당에게 참혹하게 학살됨
3. 불법적으로 판결 받은 사례
4. 불법적으로 노동교양소로 납치된 사례
5. 고난 중의 어린 대법제자
6. 인성을 소멸하는 성(性) 박해
7. 죄악의 세뇌반
8. 파룬궁수련생이 받은 각종 고문
9. 치치하얼시 파룬궁 수련생 강제 장기적출조사 보고서
10. 경제 박해 사례
1. 역사 시기, 99년 7월 22일 그 날
프랑스인 ‘노스트라다무스’가 그의 『제세기(諸世紀)』 예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1999년 7월 공포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오리라.’ 1999년 7월 장쩌민 집단은 파룬궁 박해를 발동했다. 이 기간 전 중국은 검은 구름에 뒤덮였고 정말 공포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사람을 체포하고, 때리고, 판결내리며, 노동교양소로 보내고, 고문에 시달리는 등, 각종 비방과 모함이 천지를 뒤덮을 기세로 달려왔다.
1999년 7월 22일 오후 4시쯤, 치치하얼시 라디오와 TV방송국은 연속 중앙 라디오와 TV방송국의 파룬궁을 먹칠하는 ‘중요 신문’을 방송했다. 방송에 나온 피가 낭자한 장면은 파룬궁 수련생의 평화적인 수련 상태와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더욱이 파룬궁 창시자에 대한 각종 모함은 추호의 근거도 없는 거짓말과 속임수였다. 사람들은 공기가 정체되고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은 ‘문화대혁명’이 또 왔다고 느꼈다.
치치하얼시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며 많은 혜택을 입었던 수련생들은 자각적으로 자원해 치치하얼 시 시정부 건물 앞(지금의 센트럴광장)에서 평화적으로 청원하고 정부에 진실한 정황을 반영하면서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려 했다. ‘국민은 신앙자유’가 있다고 헌법에서 규정했는데, 국가가 언론매체를 이용해 파룬궁 창시자와 수련생의 행위를 모함하는 것은 ‘헌법’을 위반한 것이다. 당시 시정부 건물 앞에는 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단정하게 앉아있었고 큰길 건너편 시 중심 광장에는 인산인해의 관중들이 이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시정부 건물 앞에는 계엄령이 내려졌고 큰길에는 무장 경찰과 경찰, 정부 공작인원이 가득 찼다. 시공안국의 국안(국가정보원)들은 인파 속에서 파룬궁 수련생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뒤 두 대의 차량이 갑자기 오더니 무장군인들이 뛰어내려와 파룬궁 수련생들을 포위했다. 그들은 얼룩무늬 군복을 입고 철모를 쓰고 있었으며 손에는 기관총을 들었다. 시정부 안에서 큰 소리로 방송이 나왔다. “파룬궁 수련생들은 신속히 철수하고 그렇지 않으면 결과는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그 뒤 파룬궁 수련생들은 한 사람씩 큰 객차에 오르게 됐다. 당시 무더운 여름이라 차 안의 무장경찰들은 온 얼굴에 땀을 흘리고 의복은 다 젖었다. 수련생들은 앉는 자리를 그들에게 양보해주었고 연세가 많은 수련생은 손수건으로 그들의 땀을 닦아 주었다. 당시 무장경찰들의 눈에는 적의가 없었고 일종의 말없는 감동이 담겨져 있었다.
점심부터 저녁까지 수송차 몇 대가 파룬궁수련생을 방학기간이라 텅 빈 남쪽 시교의 교실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각 지방으로 나눠 각 교실에다 가뒀다. 파룬궁 수련생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공안에게 진상을 알렸다. 한 경찰이 “당신들의 연공은 어떤 것이죠?”라고 하자 한 남자 수련생이 당장 몇 가지 연공동작을 시범 보였다. 경찰은 평화롭고 온화한 공법을 보더니 말했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고 무술도 없구만.” 그 뒤 일률적으로 수련생들에게 자신의 성명을 밝히고 회사 전화번호를 남기라고 했다. 그리고 계속해 각국 공안국에 가서 보증서를 써야 집으로 돌려보낸다고 말했다. 이로부터 모든 수련생들은 추적당하고 전화도 도청 당하는 등 교란이 끊이지 않았다.
2. 최소한 치치하얼시 파룬궁 수련생 64명이 중국공산당에게 참혹하게 학살당하다
치치하얼시는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엄중하게 박해한 지역 중 하나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1999년 7월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이후부터 현재 2016년 10월 25일까지 박해로 사망한 파룬궁수련생이 적어도 64명 이상이라고 밝혀졌다. 그 중 연세가 가장 많은 파룬궁수련생은 치치하얼시 건설은행 간부학교의 퇴직간부인 황징쿤(黃景昆, 78)이고, 가장 젊은 수련생은 겨우 23세 된 파룬궁수련생 왕웨이화(王偉華)다. 그러나 이 몇 년간 실종되거나 생체 장기적출당한 파룬궁 수련생들은 소식을 봉쇄당해 통지할 방법이 없다.
박해로 치사한 부분 파룬궁수련생.(상하 5줄, 좌에서 우 방향): 1. 張桂芹, 尹淑雲, 焦振省, 王偉華, 陳偉君 2:潘洪東, 潘本余, 徐宏梅, 沈子力 3:王娟, 張雲芝, 趙亞珍, 孟繁玉, 劉鳳玲4:徐林山, 劉晶明, 王寶憲, 朱金瑞, 梁金玉 5:馬文盛, 付志宇, 黃景坤, 李季秋, 慈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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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명의 생명을 구했던 판번위(潘本余)를 중국공산당이 고문으로 살해
(2) 파룬궁수련생 쉬훙메이(徐宏梅)와 선즈리(沈子力)가 박해로 사망
(3) 파룬궁수련생 판훙둥(潘洪東)은 타이라이 감옥에서 고문으로 사망
(4) 중의원 우수 직원이었던 류징밍(劉晶明)이 타이라이 감옥에서 학살돼
(5) 쐉허 노동교양소, 하얼빈 여자감옥에서 고문당한 파룬궁수련생 천웨이쥔(陳偉君) 사망
(6) 파룬궁 수련생 왕웨이화, 하얼빈 감옥에서 살해돼
(7) 박해로 사망한 치치하얼시 파룬궁 수련생 명단의 일부
(1) 6명의 생명을 구했던 판번위를 중국공산당이 고문으로 살해
6명의 생명을 구했던 판번위(潘本余)는 파룬따파 신앙을 견지해 진선인(眞善忍)에 따르는 좋은 사람이 됐다. 하지만 그는 중국공산당 당국의 노동교양 박해를 2번 받고, 2번이나 불법판결(각각 2004년, 2007년)과 각종 잔인한 박해를 받았다. 판번위는 2011년 7월 17일 밤 1시에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서 작성한 사망증명과 병원 이력서는 모두 조작됐다.
판번위는 진선인 신앙을 견지한 좋은 사람인데 여러 차례 중국공산당 당국의 박해를 받았다. 99년 7월 그는 자거다치(加格達奇) 당교(당 직속 교육기관)로 납치당했고 강제 세뇌박해를 2달간 받았다. 그 후 치치하얼시 잔즈산 노동교양소(철로 노동교양소)에서 불법 노동교양을 1년을 받았다. 공안은 플라스틱 호스로 그의 머리를 2~30번 때리고 추운겨울에 그의 몸에다 1~2시간씩 호스로 물을 끼얹어 그는 온몸이 떨리고 움직이지 못했다. 혹독하게 구타해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없었고, 배고픈 줄도 모르고 잠자는 것도 인식하기 힘들어 멍한 상태로 앉아만 있게 됐다. 2000년 7월 그는 또 푸위 노동교양소에서 공안 자웨이쥔(賈維軍)에게 심각하게 매를 맞고 전기봉으로 감전을 당했다. 또 지시를 받은 범죄자가 그를 돼지우리에 끌고 가서 때렸으며 그의 정신이 혼미해지자 끓인 물을 몸에다 부었다. 그는 화상을 입어 온 몸에 물집이 생겼다. 밥도 적게 주었으며 화장실도 가지 못하게 했다.
2001년 7월 5일, 악독한 경찰은 수련생 왕바오셴(王寶憲), 장샤오춘(張曉春)이 박해로 사망한 진상을 숨기기 위해 또 그에게 4년 징역형을 내렸다. 북안감옥으로 그를 보낸 뒤 살인멸구하기 위해 작은 방에 70여 일을 가뒀다. 그는 범죄자들에게 맞아 머리가 피투성이가 됐다. 팔다리를 땅에 박힌 쇠사슬에 연결해놓았으며 이불도 주지 않았다. 피 오줌을 누고 피를 토했으며 손목과 두 팔은 수갑과 쇠사슬에 강하게 결박돼 살이 썩었고 뼈가 보이며 쇠 틈새로 살이 삐져나왔다.
2006년 4월 30일, 공안이 또다시 집에 찾아와 문을 부수고 쳐들어왔다. 그는 핍박 아래 유랑하다가 부모 집에서 베이쥐자 파출소에 납치됐다. 철봉구 ‘610’ 왕 대장이 보일러 파이프에 그를 묶어놓고 때려서 기절했다. 그는 혈변을 봤고, 심장과 간, 신장이 모두 쇠약해졌다. 게다가 철봉구 법원에서는 억울하게 7년 판결을 내렸다. 판결을 내릴 때 감옥에서는 그에게 고문필기장에 손도장을 찍게 했다. 2007년 4월 18일, 그는 타이라이 감옥으로 납치당해 계속 박해를 받았다.
판번위는 타이라이 감옥에서 박해로 복수가 찼고 심근경색에 시달렸으며 피를 토했다. 그는 심장병으로 혼자 생활하지 못했다. 2011년 7월 31일 2번째로 타이라이 감옥에서 보석 치료를 받았는데, 그는 온 몸이 붓고 가려웠으며, 전신의 근육에 쥐가 나서 끊임없이 신음했다. 2011년 6월 28일, 타이라이 감옥 측 간사와 한 공안이 판번위를 강제로 끌고 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게 했다. 7월 8일 판번위의 생명이 위독해지자 그의 가족들은 그를 치치하얼시 제 3병원으로 데려가 응급처지를 했다. 그 날 몇 공안들이 암암리에 판번위의 상태를 조사했고 입원기간 동안 그의 상태를 적은 병원기록을 수정해놓았다. 판번위는 갈수록 상태에 나빠져 7월 17일 밤 1시가 넘었을 때 호흡을 멈췄다.
(2) 파룬궁 수련생 쉬훙메이와 선즈리가 박해로 사망
헤이룽장 치치하얼시 파룬궁수련생 쉬훙메이(徐宏梅)와 선즈리(沈子力)는 칭윈가(靑雲街) 파출소의 경찰 이잔휘이(衣湛暉) 등에게 납치됐다. 그들은 5일 밤낮동안 가혹한 고문을 받아 피를 토하고 밥을 먹지 못했다. 온 몸은 붓고 떨렸으며 심각하게 혼미한 상태가 되자 2007년 2월 13일에 발목에 족쇄를 채운 채로 제2병원 내과병실에 보내졌다. 치치하얼시 민룽사구의 610, 정법위, 공안분국에서 사람이 나와 떠들썩하게 왕래하면서 가족들에게 2만 위안을 내놓아야 사람을 내놓겠다고 했다. 가족들이 돈이 없다하자 그들은 사람이 죽어도 내보내지 않겠다고 말했다.
쉬훙메이는 37세 나이로 2007년 2월 27일 16시 30분에, 선즈리는 49세 나이로 같은 날 20시 50분에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심신에 극도의 고통을 받으며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2007년 1월 13일 오후 4시, 박해로 유랑하던 파룬궁 수련생 쉬훙메이, 선즈리, 허우야첸(侯雅倩)이 거처에 도착했다. 그때 치치하얼시 칭윈 파출소 공안 이잔후이(衣湛暉) 등이 문을 부수고 들어와 그들을 칭윈가 파출소로 납치해갔다. 경찰들은 그들을 고문으로 박해했다. 각종 형벌을 받았으며 4번이나 거꾸로 달아매기를 당했고 한번은 바로 매달리기도 했다. 또 각종 형구로 쉬훙메이를 고문해 혼미한 상태로 만들었다. 경찰 이잔후이는 찬물을 얼굴에 내리치며 깨어나게 했고, 계속 고문으로 시달림을 주었다. 이후에는 또 철장 안에 가두어 놓았다. 선즈리는 경찰이 테이프로 의자에 묶어놓자 폭도가 그의 머리를 잡고 벽에다 세게 박아 정신이 혼미해졌다. 다시 깨어나자 계속 고문하면서 형벌로 진술을 강요했다.
1월 18일, 경찰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마지막 숨만 남은 선즈리와 쉬훙메이를 발목에 족쇄를 채워 치치하얼시 간수소로 데려가 불법 구류했다. 2007년 2월 13일 오후, 생명이 위급해진 쉬훙메이와 선즈리는 족쇄가 채워진 채로 치치하얼시 제2병원 내과 병실 423호와 424호실로 보내졌다. 칭윈가 파출소 경찰 이잔후이와 저우환위(周環宇)가 형벌과 고문으로 신체에 내상을 심각하게 입혀 수시로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치하얼시 610, 공안국, 정법위, 룽싸구 610, 룽싸구 공안분국, 룽싸구 정법위, 칭윈 파출소는 이런 지경인데도 수련생들을 내보내지 않았고 억지로 가족들에게서 2만 위안을 받아 쥔 후에야 사람을 놓아주었다.
(3) 파룬궁수련생 판훙둥이 타이라이(泰來) 감옥에서 고문으로 사망
2001년 9월 4일, 치치하얼시 파룬궁수련생 판훙둥(潘洪東)은 치치하얼시 철봉구 신공지파출소 경찰에 납치당했다. 호랑이 의자에 앉게 하고 생식기를 전기에 연결해 고문했다. 판훙둥이 단식으로 항의하자 3일 후 치치하얼시 제2간수소로 납치해 계속 박해했다. 2002년 말, 판훙둥은 불법 판결을 10년 받았고, 2003년 중국 설날 후에 또 타이라이 감옥으로 압송됐다. 그리고 2005년 5월 15일 아침 8시 18분에 박해로 세상을 떠났다.
판훙둥(남, 37)은 헤이룽장 치치하얼시 파룬궁 수련생이다. 원 주소지는 랴오닝 창투현이고 쓰촨대학 컴퓨터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외모와 내면이 모두 충실하고 지혜로웠으며 학식이 있었다. 하지만 박해로 신체 반응이 느리고 눈길도 멍하게 변했다.
타이라이감옥에서 판훙둥은 매일 강제로 농사짓기 노역을 당했는데 귀도 세게 맞아서 터졌다. 2004년 8월 26일, 타이라이 감옥 9감구(현재는 동력감구) 2분감구의 대대 부교도원 차오민장(曹閔江)은 그에게 수련을 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쓰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판훙둥을 골조로 된 틀에 묶어놓고는 두 손과 발을 ‘공(工)’자 모양의 네 틀에 잠가 놓고 앞가슴은 쇠막대기에 씌워 놓은 뒤 밤낮 온종일 시멘트 바닥에 앉아 있게 했다. 인성 없는 공안은 전기봉으로 그의 생식기를 충격했고 낮에는 밖에 나가 군중들에게 시위하면서 못살게 괴롭혔다. 3일 후 판훙둥은 단식으로 사악의 박해에 항의했다.
2004년 11월부터 감옥은 가족의 면회를 막았다. 박해받은 판훙둥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몰골이 되어 어떤 형사범은 가만있기 힘들어 슬그머니 앉을 방석을 내어주었다. 이 광경을 보고 사악한 경찰은 악독하게 고함쳤고 여러 명이 그를 때려 죽였다. 당시 감옥에서는 판훙둥의 비명과 신음소리가 오래 동안 들렸다. 이 때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때려 죽였다!”고 외쳤고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지면서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판훙둥은 2005년 5월 15일 아침 8시 18분에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시신 여러 군데에 상처가 있고 입과 귀, 코 등 구멍마다 혈흔이 남아있었다. 흉부에는 원형 상처가 있고, 다리와 허리, 등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있었다.
(4) 중의원 우수 직원이었던 류징밍이 타이라이감옥에서 살해돼
헤이룽장성 파룬궁수련생 류징밍(劉晶明)은 치치하얼 시 중의원의 우수 직원이었다. 2007년 2월 8일 타이라이 감옥에 압송당하여 46일 만에 박해로 치사했는데 나이는 겨우 39세였다.
파룬궁 수련생 류징밍은 1968년 7월 23일에 출생했고 치치하얼시 중의원에 취직한 우수 직원이었다. 그는 1995년부터 파룬궁 수련을 시작해 진선인(眞善忍)을 원칙으로 자신에게 요구하고 일마다 타인을 위해 생각했다. 그는 일을 하면서 한 번도 탐오하거나 독단적이지 않았고 사람들을 선하게 대해 전 병원에서 공인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95년에 병원 보위과를 위해 그가 발명한 ‘2단봉’은 특허국에서 비준한 특허를 취득했다. 2010년 중의원은 여러 개의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내려 병원에서 많은 돈을 써도 수리할 방법이 없었다. 선량하고 총명한 류징밍은 어떤 보수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정성으로 일한 끝에 전 병원의 수도와 호스를 잘 수리해 놓았다. 이렇게 병원은 매년마다 물을 정상적으로 사용하면서 인민폐 몇 만 위안을 절약했다. 2002년에는 여가 시간에 무상으로 중의원을 위해 병원마크를 만들어주었고 이것은 지금까지도 병원 사무실에 걸려있다.
이런 어질고 너그러우며 선량한, 진선인(眞善忍)을 원칙으로 수련하는 좋은 사람을 99년에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에 여러 번 불법 구류와 불법노동교양을 당했다. 돈과 재산을 빼앗기고 불법판결로 박해로 사망할 때까지 고통을 받았다.
2007년 3월 22일, 소위 ‘순회 연설단’이 타이라이 감옥에 연설하러 왔을 때 경찰은 파룬궁 수련생에게 고문으로 비인간적 박해를 실시했다. 2007년 3월 24일 저녁7시, 타이라이 감옥의 합동훈련대 공안 지헝타이(紀恒泰)가 류징밍 집으로 전화를 걸어 류징밍은 3월 24일 1시 40분에 건물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다고 통보했다. 이는 근 8년 동안 중국공산당 정부인원들이 파룬궁수련생을 박해로 사망하게 한 뒤에 둘러대는 습관적인 핑계일 뿐이다.
그의 아내는 극도의 고통을 느끼며 타이라이 감옥을 찾아갔다. 비분에 찬 가족이 물었다. “당신들이 그를 때렸지요? 류징밍이 새벽 1시 40분에 사망했는데 왜 밤 19시에 가족에 통지하나요? 이 18시간 동안 당신들은 무엇을 했나요? 류징밍의 두 다리와 무릎 부위가 자흑색이 띄고 멍과 상처 자국이 있어요!” 감옥정치과 부과장 메이지밍(梅繼明)은 구타를 부인했다. 가족이 잇따라 물었다. “류징밍 시신 넓적다리 외측에 있는 직경 6cm 구멍은 어떻게 생긴 것인가요?” 그들은 검찰원이 이미 조사했다는 핑계를 대며 대답하지 않았다.
(5) 쐉허 노동교양소, 하얼빈 여자감옥에서 고문으로 파룬궁수련생 천웨이쥔(陳偉君)을 학살
천웨이쥔(여, 49)은 넌장(嫩江)현 둥펑가(東鳳街) 출신 파룬궁 수련생이다.
2000년, 천웨이쥔은 베이징에 청원하러 기차역에 가다가 불법 체포됐다. 2000년 4월 5일, 노동교양소에서 불법적으로 1년 판결을 받았다. 천웨이쥔을 치치하얼시 쐉허 노동교양소의 작은 방에 가두자 그녀는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했다. 범죄자 허제(何傑)는 그녀에게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을 하며 천웨이쥔의 입을 젓가락, 숟가락으로 마구 쑤셔 입술은 크게 갈라졌다. 또 바닥 걸레를 천웨이쥔의 입에 밀어 넣어 3, 4시간 후 천웨이쥔은 두 번이나 혼수상태에 빠졌다. 2000년 7월 이후, 한 동안 쐉허 노동교양소는 사악의 요구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발과 주먹질을 하고 등 뒤로 수갑을 채우고 바닥에다 수갑 고리를 채웠다. 얼굴을 주먹으로 치고 머리카락을 당겨 나뭇가지에 밀어 넣었다. 다른 수련생과 하나의 노끈에 묶어 매달고 손을 등 뒤로 수갑을 채워 빗자루로 밀어 넣고는 대소변도 못 보게 했다.
2001년 11월 천웨이쥔은 넌장 공안국에게 불법 체포됐고 2002년에는 불법판결 11년을 받았는데 그녀의 남편(수련생이 아님)도 불법 지역 판결을 7년을 받았다.
하얼빈 여자 감옥에서는 그녀를 추운 겨울날 문밖으로 끌고 가 때렸다.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 정도까지 밖에 서있는 벌을 7일이나 받았다. 물이 있는 방에서 자게하고 강제로 음식을 주입했다. 또 등 뒤로 족쇄를 채워 서 있는 벌을 연속 24시간 가했고 또 이렇게 한 달간 고문했다. 생리 기간 차가운 ‘작은 방’에서 땅바닥 수갑 고리에 10일 동안 묶어놓고 박해했다. 또 뒤로 2층 침대 높은 곳에 매달고 발가락 끝만 땅에 닿게 걸어놓고는 혼수상태에 빠지면 풀어놓았다. 또 복도에 묶어서 하루 밤낮을 지내게 했고, 손발을 꺾고, 당기고, 차고, 짓밟고, 꼬집었다. 그녀가 죄수복을 입지 않는다고 범죄자 샤쥔리(夏俊麗)는 무릎으로 그녀의 배를 눌렀다. 당시 천웨이쥔은 생리 중이었는데 이때부터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병원에 보내 검사하니 자궁암 말기로 수술하기 어려우며 살아도 3개월을 넘기지 못한다고 했다. 감옥은 책임을 회피하려고 보석으로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2006년부터 하얼빈 여자감옥은 대량의 마늘, 파, 맵고 짠 반찬 등을 손으로 부수고 믹서로 가루로 만든 뒤 혼합해서 고의적으로 이런 자극성 음식을 공복에 먹였다. 그러면 위와 창자, 내장이 상한다. 또 자주 한 무리 범죄자들이 천웨이쥔을 둘러싸고 고함을 질렀다. 그들의 이런 행동은 원장 자오잉링(趙英玲)이 명령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녀를 이 침대에서 들어서 저 침대로 던졌는데 이를 두고 ‘공중에서 사람이 난다’고 불렀다. 이런 박해는 다리가 부러지게 하거나 청흑색 멍이 들게 했다. 2006년 10월 7일 오후, 천웨이쥔의 왼손에 맥이 없어지고 오른손 맥은 특별히 빨랐으며 몸의 절반을 침대에 기대 지탱하고 있었다.
2007년 6월 3일, 천웨이쥔은 박해로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당일 하늘은 울부짖듯 밤새 큰비가 내렸다.
(6) 파룬궁 수련생 왕웨이화(王偉華)가 하얼빈 감옥에서 살해돼
헤이룽장 치치하얼시 파룬궁 수련생 왕웨이화는 2003년 6월 16일 하얼빈 감옥에서 학살당했다. 검시에서 그의 몸에서 모두 19군데 큰 상처가 발견됐다.
파룬궁 수련생 왕웨이화(남, 1979년 7월 출생)는 3차례나 불법 체포됐다. 겨울에 의복을 벗기고 맨 몸에 차가운 물을 부었으며 매달기, 쇠의자에 앉기, 전기봉 충격, 고환 꽉 잡기, 혹독한 구타 등 각종 혹형을 당했다. 불법 징역판결을 4년 받았고, 24세 나이로 하얼빈 감옥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왕웨이화 집은 치치하얼시 건화구이고 어릴 때부터 어머니 우쑤제(吳淑傑)와 생활했다. 왕웨이화와 어머니는 99년 10월 베이징으로 가는 열차에 있다가 어머니가 납치됐다. 99년 12월초, 왕웨이화는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가서 내심으로 우러나는 “파룬따파 하오! 우리 사부님은 결백하다!”라고 높이 외쳤다. 그는 천안문 파출소에 붙잡혀갔고 치치하얼 제2간수소로 납치됐다. 그는 파출소 공안들에게 옷이 몽땅 벗겨져 팬티 하나만 입은 채 널판자 침대에 던져졌다. 추운 겨울날, 공안은 세수 대야의 찬물을 그에게 열 번 퍼부었고 창문을 전부 열어놓았다.
석방된 후 2001년 1월 8일, 치치하얼시 씬쟝루(新江路) 파출소가 젠화(建華)형사경찰대와 연합해 또 왕웨이화를 불법 체포했고 그의 집을 수색했다. 젠화구 형사 경찰대는 그를 혹독하게 인성 없는 고문을 하며 강제 자백을 하게 했다. 매달기, 쇠의자에 앉기 등을 실시했고, 또 경찰은 고환을 손으로 꽉 쥐는 고통을 주기도 했다. 그의 아내가 알게 됐을 때 그의 흉부는 물이 찼고 고온에 두 눈은 벌겋게 부었고 곪기 시작했다. 한쪽 눈은 이미 곪아 구멍이 생겼고 호흡이 곤란해 작은 숨만 쉬었다……. 6월 말 완자(萬家) 노동교양소에서 석방된 어머니가 친척들과 강력하게 응급 치료를 요구했다. 공안은 가족을 협박해 보증금 2만 위안을 받고서야 보석으로 병원으로 가게 했다.
병원에서 퇴원한지 2달도 안된 2001년 9월 22일, 몸이 회복되지 않은 왕웨이화를 씬쟝루 파출소 공안이 집에서 어머니와 같이 납치해 강제로 감옥으로 보냈다. 2002년 1월 왕웨이화는 불법판결을 4년 받고 하얼빈 감옥에 감금됐다.
2003년 6월 27일, 왕웨이화의 고모(당시 어머니는 하얼빈 여자감옥에 불법 감금됨)가 감옥의 통지를 받았다. 가족들은 하얼빈에 도착해 감옥이 지정한 소방대대 초대소에 가서 하얼빈 감옥 옥정과 과장 류시민(劉希民)을 만났다. 그는 “왕웨이화는 어제 형사범 장수유(張樹友, 28세, 고의적인 살인, 강탈, 도둑질로 20년형 판결)가 철기로 때려 상처를 입었고, 병원에 응급치료를 하러 보냈지만 치료도 못하고 사망했습니다”고 말했다.
이후 검시에서 왕웨이화의 몸에서 19군데 큰 상처가 발견됐다. 입, 관자놀이, 머리 위, 앞가슴, 등, 사지, 내장……. 중국공산당 악당의 파룬궁수련생 소멸 정책 하에서 왕웨이화가 박해로 사망한 구체적인 상황은 더욱 깊은 암흑과 내막이 있으며 이는 아직 폭로되지 못한 것이다.
(7) 박해로 치사한 치치하얼시 파룬궁 수련생 명단의 일부
徐宏梅, 沈子力, 劉晶明, 馬文盛, 潘洪東, 張桂芹, 尹淑雲, 張雲芝, 趙亞珍, 付志宇, 梁金玉, 黃景坤, 徐林山, 焦振省, 孫洪文, 王偉華, 高德勇, 王寶憲, 劉曉玲, 李雪蓮, 郝治美, 甘秀雲, 李 紅, 繆小露, 李桂芹, 高 華, 譚秀娜, 高性蓮, 曹良義, 岳會民, 邱文斌, 李桂勤, 林令梅, 程玉蘭, 張豔芳, 郭秀珍, 黃玉晶, 於淑蘭, 柯鳳蘭, 宋梅英, 王與恒, 李佩生, 孫殿順, 於忠柱, 蔡 勇, 王左華, 嶽玉芳, 王桂芹, 王 娟, 崔 榮, 張立榮, 劉鳳玲, 朱金瑞, 孟繁玉, 丁亞傑, 潘桂英, 李桂芹, 張寶芝, 宋梅英, 韓鳳蘭, 劉亞芳, 王華蓮, 葉蓮萍, 馬紅表姐……
원문발표: 2016년 12월 11일
문장분류: 대륙소식
원문출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2/11/33870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