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파룬궁에 대한 중공(중국공산당)의 박해 중, 파룬궁수련생 자오궈안(趙國安)은 진상을 알린 것 때문에 2003년 8월에 납치를 당했고, 아울러 허난성(河南省) 제3노동교양소에 불법 감금당했다. 12월 말에 노동교양소의 사악한 경찰 자즈강(賈志剛) 등에게 잔혹한 박해를 당해 사망했는데, 온몸에 상처를 입었다. 향년 54세였다. 이 4개월 동안 자오궈안은 믿음을 견지해 단호히 ‘전향’하지 않아 매일 노동교양소에서 정신과 육체적인 이중학대를 감당했다.
자오궈안은 허난성 뤄허시(漯河市) 우양현(舞陽縣) 허우지향(侯集鄉) 시이리(西一里) 자오좡촌(趙莊村)에서 거주했다. 자동차 기사이고 퇴역 군인으로, 부대에서 병역에 복무한 기간에 여러 차례 포상을 받았다. 퇴역한 후 광저우(廣州)에서 차를 몰았는데, 장기간 쌓인 피로로 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올 때면 늘 약 한 자루를 지니고 왔다. 가족의 관심 하에 그는 1998년 10월부터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병은 하루하루 없어지고 몸이 건강해졌다. 평소 그는 ‘전법륜(轉法輪)’ 책에서 말씀하신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일을 처리했고, 누구에게나 다 잘 대했으며, 각 방면에서 먼저 다른 사람을 위해 고려해 주었는데, 그를 언급하면 누구나 모두 그는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2003년 5월 23일, 자오궈안과 아내 장구이룽(張桂榮)은 민중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린 것 때문에 우양현 공안국 정보과 경찰에게 납치, 가택 수색을 당했다. 그리고 두 부부는 우양현 구치소로 납치돼 감금당했다. 공안국과 구치소에서 그들 부부는 줄곧 접촉했던 사람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려주어 박해를 제지했다. 자오궈안은 구치소에서 단식으로 무리한 박해를 저지했다. 불법 감금된 지 대략 3개월쯤, 자오궈안은 불법으로 1년 9개월의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2003년 8월 7일에 쉬창시(許昌市) 제3노동교양소로 보내졌다.
여러 차례 ‘끈으로 묶기’ 학대를 당하다
2003년 8월 7일 오전, 자오궈안이 막 노동교양소로 납치되자, 3대대 1중대 자즈강은 곧 자오궈안을 찾아 얘기를 하여 그에게 믿음을 포기하는 ‘3서(三書)’를 쓰도록 핍박했다. 자오궈안은 거부한 동시에 파룬궁 진상을 진술했다. 자즈강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화를 내면서 오후에 지도원 류톈쉰(劉天勛)과 함께 자오궈안을 숙소 2층의 교실 안으로 끌고 갔다. 자 씨는 대법 사부님을 욕하며 한편으로는 자오궈안을 끈으로 묶었다. 게다가 흉악하게 “네가 이 끈을 감당해 낼지 두고 보겠다. 네가 ‘3서’를 쓰지 않는다고 믿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류 씨는 한편으로 위선적으로 권고했다.
2003년 9월의 어느 날 오전, 자즈강과 쉬주성(徐祖盛)은 자오궈안을 작업실에서 사무실로 끌고 가 끈으로 묶고 전기충격을 가했다. 자 씨는 전기곤봉을 사용해 자오궈안에게 ‘전법륜(轉法輪)’ 중의 사부님의 법신 상을 찢어내어 소각하도록 핍박했다.
2003년 11월 시험 중, 자오궈안은 사악의 요구에 협력하지 않고 요구에 따라 답변하지 않아 끈으로 11 바퀴 묶여져 팔마저 들 수 없게 돼 밥을 먹을 때 사발을 드는 것마저 어려웠다. 게다가 며칠 동안 감금당했다.
2003년 12월 28일 저녁, 자즈강 등 악독한 경찰이 자오궈안을 연속 끈으로 10 바퀴 감았다. 10 바퀴까지 감고는 1시간이 넘도록 끈을 풀어주지 않았다. 자오궈안에게 생명 위험이 나타나서야 부득이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쉬창에 위치한 허난 제3노동교양소는 사악의 소굴이었는데, 매달 5일은 면회일이었다. 자오궈안의 가족이 몇 차례나 갔으나 면회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2003년 9월 5일, 자오궈안의 아내 장구이룽과 아들, 며느리가 그를 면회하러 가자 노동고양소에서는 사람마다 10위안(약 1,700원)을 바치도록 하여 면회증 수속을 밟아주었다. 제3노동교양소에는 세 개의 문이 있었는데, 두 개의 문을 지나 세 번째 문은 대법과 사부님을 욕하지 않으면 지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2003년 10월 5일, 장구이룽과 남동생은 또 갔으나 여전히 들어감을 허락하지 않았다. 장구이룽은 멀리서 뼈만 앙상한 남편의 얼굴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이번에 단호히 대법과 사부님을 욕하지 않는 사람이 7명이 있었다.
2003년 12월 10여 일은 면회일이 아니었으나, 노동교양소에서는 오히려 자오궈안의 아들 며느리에게 그의 아버지를 면회하도록 하여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게 했다. 떠나가기 전에 아들은 전화번호를 남겨주며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화를 해달라고 말했다. 사실상 이것은 노동교양소에서 이른바 ‘육친정’으로 자오궈안에게 전향하도록 핍박한 것이었다.
악독한 경찰이 마약복용죄수를 부추겨 박해를 진행하다
자오궈안은 처음에는 1중대의 3팀에 감금됐다. 팀장은 마약복용죄수 류웨이(劉偉)였다. 형기를 줄이는 장려와 사사로이 담배를 피우고 마약을 하는 편리를 얻기 위해, 류웨이는 악독한 경찰의 요구에 협력해 여러 차례 자오궈안에 대해 혹독한 구타, 학대를 진행했다. 어느 날 오후는 일을 끝내고 저녁에 일하러 나가지 않았다. 어렵게 휴일을 만났는데, 막 저녁을 먹자마자 류웨이는 곧 자오궈안을 교실 옆의 담화실로 끌고 가서 그에게 ‘3서(三書)’(반성문, 결렬서, 보증서)를 쓰도록 핍박했다. 문 앞을 지날 때 류웨이가 소파에 앉아있고, 자오궈안이 땅바닥에 반쯤 쭈그려 앉아 있음을 매우 똑똑히 보았다. 류웨이는 손가락으로 자오궈안을 가리키면서 위협하는 말을 했다.
한 번은 자오궈안이 3서를 쓰는 것을 거부하고 ‘대법을 끝까지 굳게 수련하며, 죽는다 해도 유감이 없다’라는 한 마디 말을 썼는데, 마약복용죄수 류웨이는 악독한 경찰에게 신고했다. 악독한 경찰은 곧 자오궈안을 마구 두들겨 팼다. 악독한 경찰 대장 자즈강(賈志剛)은 저녁에 퇴근 후 죄수를 시켜 자오궈안을 이른바 ‘담화실’로 끌고 가 혹독하게 구타했다. 자오궈안이 지탱하지 못해 땅바닥에 꿇어 엎드릴 때까지 구타했다. 매번 밤 11시가 넘어서 일을 끝내고 돌아왔는데, 류웨이는 자오궈안을 2시까지 벽을 마주해 서 있도록 핍박했다. 그리고 4시에 다시 일어나 벽을 마주하게 하여 그를 휴식시키지 않고, 또 낮에 일을 하게 했다. 저녁에는 또 이렇게 했다. 이와 같이 그를 2주간 학대했다.
류웨이는 여러 차례 암암리에 자오궈안을 혹독하게 구타한 외, 또 작업실에서 일 하는 게 늦다는 구실로 악독한 경찰 앞에서 자오궈안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3소에서 불법 감금당한 파룬궁수련생은 매달 두 번이나 이른바 ‘테스트’ 시험을 진행했다. 답변이 요구에 맞지 않으면 고문을 가했는데, 적으면 끈으로 세 바퀴 감았고 많으면 10여 바퀴를 감았다. 자오궈안은 원래 1중대 3팀에 있었는데, 11월에 시험을 칠 때, 사악에게 협력하지 않고 요구에 따라 해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해 끈으로 11 바퀴를 감겼다. 팔도 들 수 없게 되어 밥을 먹으려 해도 어려웠다. 며칠 동안 영창에 갇힌 후, 1팀으로 배치되었다. 1팀은 엄한 관리팀이었던 이유로, 전 중대에서 무릇 믿음을 견지한 사람은 모두 1팀에 두었다.
1팀 팀장은 마약복용죄수 천궈칭(陳國慶)이었다. 천궈칭과 바오자 리샤오뉴(李小牛)는 정신, 육체적으로 자오궈안에게 이중박해를 진행했다. 각 방면에서 그의 인신 자유를 제한했을 뿐만 아니라, 또 때때로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구타했다. 어느 날, 악독한 경찰은 천궈칭에게 자오궈안을 불러내도록 했다. 자오궈안이 당시 이미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게 되어, 천궈칭에게 목을 잡혀 단번에 땅바닥에 눌려 졌는데도, 또 “뭘 꾸미는 거냐?”라는 말을 꺼냈다.
2003년 12월 29일, 자오궈안이 고문을 당해 사망한 후, 박해진상을 감추기 위해 천궈칭은 곳곳에서 거짓말을 꾸며 “자오궈안은 병이 있어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미 보석 수속을 밟아 나갔다.”라고 말했다.
자오궈안이 사망한 후, 그 기간에 그의 카드에는 여전히 돈이 있었다. 악독한 경찰은 천궈칭에게 자오궈안의 카드로 물건을 사서 그들에게 먹으라고 암시했다.
악독한 경찰의 눈에 천궈칭은 박해에 공로가 있었기에 그의 형기를 매우 많이 줄여서 앞당겨 노동교양을 해제시켜 주었다. 떠나던 그날, 천궈칭은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6개월도 되지 않는 사이에 천궈칭은 마약을 복용할 돈이 없어 절도를 했다가 붙잡혔다. 구치소에서 그는 중공의 노동교양소에서 자오궈안을 박해해 사망케 한 것이지, 병원에 입원했다가 병보석으로 나간 것이 아님을 승인했다.
박해로 사망한 진상
2003년 12월 24일 오전 9시 쯤, 작업실에서 당시 대대 교도원 마화팅(馬華亭)과 1중대에서 생산을 관할하는 두정타오(都正濤)가 문어귀의 사무용 책상 옆에 앉아있었다. 자오궈안이 일어나서 “마 교도원, 나는 당신을 찾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하려 합니다.”라고 말하자, 마화팅은 머리를 들더니 “기다리시오.”라고 말했다. 마화팅이 작업실에서 걸어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자즈강이 사람을 배치해 작업실로 가서 자오궈안에게 소리를 치며 데리고 나갔다. 옆의 담화실(실질적으로 고문실임)에서 자오궈안은 마화팅에게 자신은 전향을 반대하며 대법 수련을 견지하겠다고 성명했다가 야만적인 혹독한 구타를 당했다.
자오궈안은 작업실에서 돌아왔을 때, 자신의 좌석에서 “그래, 나는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믿는다.”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의 뒤까지 따라왔던 바오자 리샤오뉴는 그가 구호를 외쳤다고 말하며, 몸 뒤에서 자오궈안의 입을 막았다. 게다가 그에게 덮쳐들어 땅에 넘어뜨렸다. 그래서 자 씨는 자오궈안에게 죄명을 뒤집어씌워 호랑이 의자 위에 앉도록 강요했는데, 바로 1중대 교실 옆의 담화실 안이었다. 담화실 앞을 지나갈 때 본 적이 있는데, 자오궈안은 가는 끈에 묶여 있었다. 두 손을 뒷면에 묶여 한 걸상에 앉아 있었는데, 두 발은 의자에 묶였고 아래에 깐 것은 벽돌이었다. 박해에 참여한 마약복용죄수는 밥을 먹고 화장실 갈 때도 풀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오궈안이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면 곧 뺨을 때리거나, 혹은 손을 뒷면으로 들어 올려 가는 끈으로 위를 향해 잡아당겼는데, 자오궈안은 아파서 큰소리를 질렀다. 밥을 먹을 때, 대충 두 입을 먹이고는 밥을 화장실에 쏟아 넣었다. 그들은 사사로이 말하고 또 하하거리며 웃었는데, 자오궈안을 박해함을 즐거운 웃음거리로 여기며 떠들었다.
12월 28일 오후, 3대대에서는 목욕을 배치했다(1년에 이번 한 번밖에 목욕을 못했음). 목욕탕 문 앞에서 대대 교도원 마화팅이 파룬궁수련생 리진커(李進科)에게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일을 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리진커는 “자 대장이 지시한 몇 명의 바오자가 매일 나를 구타하고 욕합니다.”라고 말했다. 마화팅이 “저녁에 내가 당신을 찾아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옆의 3대대 비서 옌레이(閆磊)가 “저녁에 당신은 시간이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마화팅은 즉시 문득 깨달으며 “저녁에 일이 있습니다. 하루지나 이야기 합시다.”라고 말했다. 나는 당시 옆에 서서 옌레이를 보았는데, 말하는 표정이 매우 이상했다. 그들은 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12월 28일 밤 10시 반에 일을 끝내고 돌아오다가 숙소 문어귀까지 걸어갔을 때, 부 소장 장칭타이(姜清泰)와 관리과, 교육과의 몇 명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표정이 매우 엄숙했다. 막 건물에 들어서자 마치 강적과 맞닥뜨리고 있는 듯 분위기가 다름을 느꼈다. 자즈강은 얼굴색이 창백해진 채 사무실 문어귀에 서 었었고, 옌레이는 복도에 서서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들어가서는 곧 잠을 자시오.”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각 팀의 문어귀의 당직을 서는 인원에게 “잘 지키시오. 누구도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교대했다. 당시 자오궈안이 박해로 사망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옌레이가 저녁에 ‘일이 있다’고 말한 것은 원래 고문으로 자오궈안을 박해하려고 일찍이 배치해 놓은 것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후에야 연간의 ‘전향’ 지표를 완수하기 위해 소장 옌전예(閆振業), 부소장 장칭타이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미친듯이 자오궈안을 잔혹하게 박해했음을 알게 되었다. 3대대에서 11명의 악독한 경찰을 뽑아 노동교양소안의 악독한 경찰과 결탁해 자오궈안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 때문에 자오궈안은 생명 위험이 나타나 외부 병원으로 보내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2003년 12월 29일에 억울하게 사망했다.
이번에 자오궈안에게 고문을 가한 사람은 대대장 스바오룽(師寶龍), 마화팅(馬華亭)이고, 참가자는 류톈쉰(劉天勛), 자즈강(賈之剛), 탄쥔민(譚軍民), 리신제(李新傑)이다. 이 흉수들은 모두 제 3노동교양소에서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는 두목이었다. 그후 스바오룽은 ‘당시 자오궈안을 끈으로 열 바퀴를 감았는데, 열 번째를 감았을 때, 뜻밖에 1시간 넘게 풀어주지 않았다. 자오궈안이 생명이 위험해져서야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라는 약간의 박해 내막을 털어놨다. 악독한 경찰 내부 규정에 따르면, 끈으로 최대 9바퀴를 감을 수 있고, 한 바퀴를 감을 때 5분이면 반드시 끈을 느슨하게 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불구가 되고, 심지어 생명이 위험할 것이다.
자오궈안이 박해로 사망한 참상
자오궈안의 아내는 자오궈안이 박해로 사망한 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2003년 12월 31일 오전 10시 넘어서 노동교양소에서 사람을 파견해 아들이 출근하는 곳으로 가서, 궈안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사망했고, 시간은 2003년 12월 29일 저녁이라고 말했다. 노동교양소 측은 우리를 한 호텔에 배치했고, 마 씨, 자오 씨라고 부르는 사람, 그리고 노동교양소의 위생원 장 씨를 파견했다. 자오 씨는 궈안이 말을 듣지 않고 작업실에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쳐 사흘 동안 영창실에 갇혔고, 또 쇠 의자에 묶여져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영창실에서 밥을 먹게 했는지를 묻자, 그는 얼버무리면서 똑똑히 말을 하지 못했다. 응급처치를 받게 했는지를 묻자, 전화를 걸어 응급차를 불렀으나 차가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몸에 상처가 있는지를 묻자, 아래턱이 부딪혀 살가죽이 좀 문드러졌다며 단지 그에게 작은 압력을 사용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밤중에 우리에게 시신을 보여주겠다고 했으나 우리는 가지 않았다.
12월 31일(이튿날), 우리 10여 명은 쉬창 제3병원으로 갔다. 3층은 하나의 큰 방안이었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말로는 특수 인원이라며 경찰이 말을 하지 않으면 누구도 문을 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방안에 들어가서 보았는데, 궈안은 옷이 이미 다 입혀져 있었고 얼굴은 성형했고 두 팔 소매 끝도 천 조각으로 묶여 있었다. 내가 남편의 옷을 열어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것을 보았다.
전체 턱 밑, 목 피부와 살이 전부 없어지고 온통 새빨갛게 되어 있었으며, 가슴 상부는 주먹만큼의 크기로 피부와 살이 없었다. 그리고 어깨 앞에는 손가락만큼 굵은 끈에 조여져 문드러진 푹 패인 흔적이 있었고, 아랫배는 전부 자색이었다. 헝겊 조각으로 묶은 팔을 열어보니, 두 손은 두 개의 만두만큼 부어올라 있었다. 다시 아래를 보았는데, 두 발목에는 허리띠 너비만큼의 자색띠가 있었다. 손가락으로 누르자 궈안의 이마는 아래로 움푹 꺼졌는데, 또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까지 있었다. 나는 남편을 부축해 일으켰다. 목 뒤에는 아주 굵은 끈의 흔적이 있었는데, 귀로부터 전체 등까지 전부 자색을 띠었다.
“급성 심근경색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전신에 온통 상처입니까?” 내가 울면서 큰소리로 질문하자, 노동교양소 사람은 피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은 노동교양소의 구타로 사망했습니다.”라고 울면서 억울하게 사망한 남편에게 외쳤다. 병원 사람은 피해자를 동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안정에 영향을 끼친다고 질책하며 강제로 나를 끌어냈다.
오후, 쉬창 검찰원에서 두 사람이 와서 공무를 대응했다. 말로는 노동교양소로 가서 조사를 했다고 했으나, 오히려 5시에 발견했다고 말했다가 또 7시에 발견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그가 조사한 책을 가져다 보려 했을 때, 그는 즉시 빼앗아가며 조사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기회를 틈타 우리의 일을 관할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노동교양소의 자오 씨가 이를 보더니 기운이 나서는 검찰원에서 관할하지 않으면 자신들도 관할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의 사위가 막 몇 마디를 하자, 나의 사위를 조사하려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누가 다시 더 말을 하면 그 사람이 참여함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젊은 아들과 가족에게 서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관할하지 않겠다고 공갈협박했다. 공갈협박을 받은 데다 또 후사를 처리할 돈이 없었던 이유로, 억지로 참고 노동교양소에서 지불해 준 7천 위안(약 120만 원)을 받았다.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죄책을 벗어나기 어렵다
자오궈안이 박해로 사망한 후, 노동교양소에서는 온 힘을 다해 덮어 감추었다. 이 소식이 폭로된 후에야 자쯔강의 중대장 직무를 취소하고 3대대장 비서를 맡게 했고, 류톈쉰은 1대대로 옮겨졌다.
자쯔강 이 사람은 허난 쉬창현 위린향(榆林鄉) 사람으로, 노동교양소의 ‘4대 악인’ 중 한 사람이었다. 3대대로 옮겨가기 전에 두 차례나 사람을 불구로 만들어 처분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중 한 번은 하마터면 판결당할 뻔 했다. 2002년 여름에 3대대로 전근되어 지도원을 맡았다. 이 사람은 본성이 흉악해 대법제자를 박해함에 특별히 악독해 매우 빨리 1중대 중대장 류톈쉰의 직무를 대체했다. 몇 년 래, 자쯔강은 직접 손을 대어 본 중대의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고문 학대에 참여해 10여 명을 불구로 만들었다. 비교적 돌출한 것은 지위안현(濟源縣) 대법제자의 팔이 불구가 된 사건, 신양(信陽) 대법제자 리빙(李炳)이 청각을 잃은 사건, 상추(商邱) 대법제자 웨차이윈(岳彩雲)이 불구가 된 사건, 안양(安陽) 대법제자 왕위쿤(王玉昆)이 하반신 불구가 된 사건, 난양(南陽) 대법제자 리진커가 불구가 된 사건, 우양현(舞陽縣) 대법제자 자오궈안이 사망한 사건 및 그 외 대법제자 왕례이(王雷, 정커우시(周口市)), 우쥔칭(吳軍慶, 뤄허(漯河) 솽후이(雙彙)집단의 간부), 자오융중(趙永忠, 자오쭤(焦作) 멍저우시(孟州市)), 싱웨이웨이(邢偉偉, 쉬창현(許昌縣)), 류쥔탕(劉俊堂, 산둥 관현(山東冠縣)), 예훙춘(葉紅春, 타이캉현(太康縣), 차오구이원(曹桂文), 레이중창(雷中長), 왕쥔(王俊) 등이 불구가 된 사건 등이다.
자쯔강은 일 년 내내 병을 앓아 약을 떠나지 못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각 병원을 모두 다 두루 돌아다녔고, 또 각종 민간 처방을 경험해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어느 날, 그는 작업실 문어귀에서 악독한 경찰 쉬주성(徐祖盛)에게 “다른 사람이 민간 처방을 소개했는데, 중약을 먹으니 효과가 괜찮은 감이 듭니다.”라고 말했다. 쉬주성은 비위를 맞추며 “만약 성공한다면, 이것은 경찰이 민간 처방을 사용해 병이 완쾌된 본보기입니다.”라고 말했다.
여러 차례 자오궈안을 박해함에 참여했던 쉬주성은 어느 날 저녁, 당직실에서 하마터면 숨이 쉬어지지 않아 숨 막혀 죽을 뻔 햇다. 이튿날 아침, 노동교양소 정원에서 달리기를 할 때, 자쯔강은 쉬주성에게 “지금 감각이 어떠세요?”라고 물었다. 쉬주성은 “별일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2004년 6월의 어느 날 점심, 광풍이 몰아치고 천둥번개가 쳤다. 비가 작업실에 뿌려 들어 올까봐 대문은 닫아놓았다. 비가 멈춘 후, 대문을 열었는데, 작업실 맞은편의 큰 나무 한 그루가 벼락을 맞아 죽어 있었다. 그 시기는 바로 노동교양소에서 팡량(龐良), 왕쥔(王俊), 우쥔칭, 리진커, 웨차이윈(岳彩雲) 등을 박해함이 가장 심각했던 시기였다.
사람이 병에 걸리고 재난을 입음은 실제적으로 모두 악보를 입은 것이다. 노동교양소 내의 이른바 사망 지표는 비호 세력이 아니며, 당신에게 건강을 줄 수 없고, 또 당신의 미래의 평안을 보우할 수 없다. 보응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기가 되지 않은 것이다. 큰 나무가 벼락 맞아 죽은 경고에 직면해도 여전히 흐리멍덩해 있으면, 악보가 떨어질 때에 후회해도 늦게 된다.
원문위치: 2017년 5월 22일
문장분류: 대륙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5/22/34855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