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밍후이왕통신원 지린성보도) 많은 사람들은 모두 파룬궁수련생이 중국 대륙에서 박해를 당한 일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주변 모두와 내 신변에서 발생한 진실한 이야기, 18년 동안 지속됐고 또 연속되고 있는 비참한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이 ‘18년’은 이 일가족에게 있어서 어린이가 청년으로 변하고, 부모님이 만년에 들어선 것뿐만이 아니다.
18년 전, 왕훙옌(王洪岩)의 부모님은 안정적인 직업과 건강한 신체가 있었으며, 그들 남매도 적어도 걱정이 없고 평온한 어린 시절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체는 1999년 7월 20일에 멈췄다. 그날은 중국공산당이 하늘땅을 뒤엎을 듯 파룬궁을 탄압한 날이다. 이때부터 진선인(眞善忍) 신앙을 포기하기를 원치 않는 대량의 파룬궁수련생들은 불법 납치, 가택 수색, 심지어 학살을 당했다.
18년 동안, 진선인을 굳게 지키는 것을 선택한 이 가족은 끊임없는 납치, 소란, 노동교양, 징역형 등 악몽 같은 박해를 당했다. 박해가 발생해 9년 만에 이 가정은 철저히 흩어졌다. 2007년 3월 28일, 왕훙옌의 아버지는 결국 지속적이고 처참한 시달림을 견디지 못한 채 지린(吉林) 감옥에서 억울하게 사망했다. 향년 47세였다. 10년 후인 2017년 3월 7일, 그와 어머니, 누나도 함께 거듭 납치됐다. 그날은 마침 2월 11일인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인간세상의 애통함은 생리사별(生離死別)’임을 말한다면 이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왕훙옌(王洪岩)은 올해 31세이고, 누나는 왕훙얀(王洪豔)이라고 부르며 33세다. 어머니는 쑨스잉(孫士英)이라고 부르며 57세다. 그리고 아버지는 왕치보(王啟波)라고 부르는데 47세 때 박해로 사망했다.
오늘날 그의 회상에 따르면 가장 행복한 나날은 대략 바로 1999년 전 한 시절이다. 그때 그들 전 가족은 지린시 눙안현(農安縣) 양수린향(楊樹林) 뉴웨이바(牛尾巴) 산골에서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양수린향 신용사(信用社) 대출 직원이었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파룬궁을 수련하기 전, 부모님은 갈등이 심했다. 어머니는 또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등 질병을 앓았는데 오랫동안 치료해도 효과가 없었다. 1997년 4월에 전 가족이 잇달아 수련에 들어선 후 그들은 ‘진선인(眞善忍)’의 준칙으로 모순이 있으면 자신을 찾아 가정은 나날이 화목해졌고, 어머니 질병은 치료하지 않고 저절로 완쾌됐다. 아버지는 원래 비가 오는 날이면 피부가 민감한 증상, 위염 등이 있었는데 그것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근무 중에서 직책을 다할 수 있었다. 전 가족이 파룬따파(法輪大法)에서 이로움을 얻은 이 진실한 사례는 친지 10여 명이 또 연이어 수련에 들어서게 했다. 전반 집안은 온통 평화롭고 아늑한 분위기 속에 푹 빠졌다.
아버지의 최후의 날, 7, 8년 동안 자유 상실
시간을 되돌려오면, 왕훙옌의 아버지 왕치보는 2002년 7월 13일에 납치돼 7년의 징역 판결을 당했는데 옥중에서 학대로 사망했다. 그럼 1999년 7월 20일부터 2002년 7월 13일까지 이 3년 사이에 또 무엇을 경험했는가? 우리는 대체적으로 매번 박해 당한 시간을 추산했는데, 단순히 이 각도에서 박해 정책의 황당함과 박해 실시에 최선을 다했음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1999년 7월 20일-22일(파룬궁 청원으로 납치됐고 핍박에 못 이겨 합법적인 파룬궁 서적을 제출함)1999년 7월 27일-8월 10일(불법 구금을 당함)1999년 9월 16일-12월(강제 세뇌, 불법 구류 당함)2000년 2월 27일-2001년 2월 26일(1년 불법 노동교양 처분 받음)2001년 7월 6일-2001년 8월(20여 일 동안 불법 구류 당함)2002년 7월 13일-2007년 3월 28일(불법 판결당해 사망할 때까지 시달림을 당함)
감옥 정보가 엄밀하게 봉쇄되고 시신이 또 지린감옥에 의해 강제로 화장당한 이유로 왕치보가 생전에 도대체 무엇을 경험했는지에 대해 외부에서는 이미 알 수 없다. 다음은 기타 경로에서 알아낸 사소한 사실이다.
지린감옥 7감구(監區)에서
1, ‘바오자(감옥에서 불법적으로 지명해 파룬궁수련생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죄수)’가 24시간 동안 신변을 떠나지 않았음.
2. ‘좌반(坐板)’(강제로 한 가지 자세를 유지해 앉도록 함)으로 앉혔는데 14시간에 달함.
3. 강제 전향(즉 파룬궁에 대한 믿음을 포기함을 가리킴)
4. 고문 학대 사례
침대 판자를 빼내 왕치보의 둔부가 양편 널판에 끼게 하며 두 다리를 곧게 펴게 했는데, 다시 무거운 물건, 나무판자 등으로 짓눌러놓았다. 어떤 때는 나무판자를 세워 강제로 왕치보에게 앉도록 했는데 앉아 있지 못하면 곧 무치별 폭력을 당했다
교도관은 또 자오허(蛟河)의 죄수 옌(雁)씨를 지시해 막대로 왕치보의 팔과 허리를 후려쳤다.
왕치보가 감옥 규정을 외우지 않은 이유로, 교육과의 리융성(李永生)과 쑨얼샤(孫二匣, 별명)는 죄수 왕자오린(王兆林)에게 지시해 왕치보를 혹독하게 구타했다.
2005년 5월 13일, 감옥에서는 ‘왕치보가 감방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연공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그를 독방에 가둬넣고 2개월 넘게 박해를 가중시켰다. 그 기간에 왕치보는 좌반, 혹독한 구타, 늘이기 침대에 올리기(일종의 고문인데 사지가 매달림) 고문을 당했다. 직접 박해에 참여한 책임자는 교육국의 리융성, 리좡(李壯), 왕(王) 간사이다.
어머니 쑨스잉, 18년간 박해를 당하다
장쩌민이 혼자서 파룬궁을 박해하는 운동을 발동한 18년 사이에 왕훙옌의 부모인 왕치보와 쑨스잉이 직장에 의해 근무와 월급 지급 중지, 노동조합에서 퇴출을 당한 후 집안은 한때 어떠한 수입도 없었다. 이른바 ‘민감한 날’이 되기만 하면 현지 향 당위원회, 파출소, 직장 주임 등이 차를 타고 와서 소란, 감시, 가택 수색, 공갈 협박 등을 진행했다. 각종 압력 앞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누나는 핍박에 못 이겨 학업을 그만뒀다. 그리고 그녀가 대학시험에 합격된 그해에도 부모님은 모두 억울한 옥살이를 당해 학비가 어려웠다. 거듭 소란, 납치를 당했던 이유로, 핍박에 못 이겨 낮은 가격으로 집을 팔고 고향을 등지고 떠나 주거가 부정한 생활을 했다.
어머니 쑨스잉은 2차례 불법 구금을 당했고 2차례 납치돼 강제 세뇌를 받았으며, 4차례 구류, 1차례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다. 게다가 불법적으로 공직에서 해임됐다. 쑨스잉은 예전에 당시 박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적이 있다.
‘세뇌반에서 핍박에 의해 대법(파룬궁)을 비난하는 신문을 읽었고, 시멘트 바닥에 앉았으며, 교정에서 달리기를 했고, 저녁에는 잠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터우딩빠오룬(頭頂抱輪: 파룬궁 연공동작)’을 밤중까지 연마했다. 1999년 10월, 베이징으로 들어가 청원했다가 불법 구금당해 집으로 돌아온 후, 곧 학교 측에 의해 월급 지급을 중단 당했다. 학교 측에서는 전문적으로 세 명의 교사를 파견해 돌아가며 우리 집으로 출근해 감시했다. 2001년, 나와 남편은 불법적으로 공직에서 해임돼 출근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여태껏 정식 문서는 없다.
2003년 3월, 현지 파출소 경찰은 공구로 우리집 자물쇠를 비틀어 망가뜨리고 강제로 나를 납치했다. 집안은 온통 난잡하게 뒤져졌다. 공안국의 한 경찰이 고무몽둥이로 내 둔부, 두 다리, 두 발을 구타해 청자색을 띠었다. 그리고 또 내 등 뒤로 수갑을 채운 두 손을 앞을 향해 비틀었다. 구류소 안에서 계속 심문과 혹독한 구타를 진행했고, 머리칼을 잡아당겼으며, 또 슬리퍼로 나를 때려 넘어뜨렸다. 그 후 나는 단식으로 박해를 저지했으며 열흘 만에 풀려났다.
같은 해 11월, 현지 파출소에서는 또 나를 납치해 창춘(長春) 헤이쭈이쯔(黑嘴子) 노동교양소로 납치해 1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게 했다. 그후 또 불법적으로 5일 동안 형기를 연장했다. 노동교양소에 있던 기간에 핍박에 못이겨 매일 14, 15시간의 과부하 노역을 했는데, 일을 끝낸 후 수면을 허락하지 않았고 강제로 사상 변화를 보고하도록 했다. 강제로 나에게 믿음을 포기시키기 위해 대대장은 구둣발로 나를 걷어찼고 전기봉으로 번갈아가며 전기충격을 가했다. 오후 내내 전기충격을 가했는데, 줄곧 전기가 떨어질 때까지 가했다. 게다가 다른 대대로 가서 전기봉을 빌리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줄곧 며칠 동안 지속된 후, 내 두 다리, 발은 열이 오르고 전기충격으로 마비됐으며, 경직되고 아파 위층을 오르내리기도 힘들었다. 이로 인해 나는 나날이 수척해졌다.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생산대대장은 여전히 강제로 나에게 노동하도록 핍박했다.
이상은 비록 단지 왕훙옌의 부모가 당한 박해의 일부분을 기술했으나 두 아이가 그해 어릴 때 경찰에게 납치, 공갈협박을 당한 것도 한 차례 뿐이 아니었다. 게다가 직접 부모가 경찰에 의해 폭력적인 대우를 받음에 직면한 것도 한 차례 뿐이 아니었다. 기타 것을 그들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나는, 한 해 또 한 해 동안의 끊임없는 면회의 길에서 어려움과 난처함이 감당하기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경애하는 아버지를 잃은 그러한 고통과 비분은 감당하기 어려웠음을 생각할 수 있고, 그들이 19년 동안 걸어온 강인함이 일반인과 다름을 알 수 있다!
한 차례 구조, 한 차례 박해
사건의 시작은 2017년 2월 27일이다. 그날은 랴오위안(遼源)시 파룬궁수련생이자 62세인 뤼융전(呂永珍)이 9년 억울한 옥살이가 만기돼 석방되는 날이다. 하지만 랴오위안시 610은 오히려 법을 어기며 개입해 직접 사람을 지린 여자감옥 안에서 차로 납치해 데리고 나왔다[차량 번호: 지(吉)D10017)]. 그날에 또 소식을 아는 친구가 현장에 도착했는데 이 정경을 보고 마음이 급해 급히 차를 몰아 610의 차를 막고 사람을 억지로 데리고 돌아왔다.
그후 쑨스잉 여사 일가족은 압력을 무릅쓰고 뤼융전을 받아들였다. 그 후 2017년 3월 3일, 랴오위안시 610, 창춘시 공안청은 눙안현 황룽(黃龍) 파출소와 결탁해 기사이자 파룬궁수련생인 주하이타오우(朱海濤)를 납치했다. 게다가 운행 기록기와 핸드폰을 강탈했다. 뒤이어 사진을 들고 함부로 기타 파룬궁수련생을 납치했다. 그리고 지린 여자감옥 소재지인 창춘시 콴청구(寬城區) 공안분국은 2017년 3월 7일에 창춘시 차오양구(朝陽區) 관할 구역 하인 난후(南湖)대로 인근의 왕훙옌 일가 및 뤼융전을 납치했다.
지금 왕훙옌은 창춘시 제1구치소에 불법 감금돼 있다. 왕훙옌과 어머니 쑨스잉 및 뤼융전은 모두 창춘시 제4구치소에 불법 감금돼 있다.
‘한 자리에 모인다’는 말이 노인의 마음을 졸이는 매듭이 되다
왕훙옌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미 90세 고령에 가깝다. 그 몇 해 동안 둘째 아들 왕치보가 지린 감옥에 불법 감금당했을 때인 2003년 11월에 할머니는 두 아이를 데리고 가서 감옥에 어떻게 말해도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그때 아이의 어머니도 노동교양소에 불법 감금돼 있었음). 매번 힘껏 밀치고 욕설을 퍼붓고 거부해 매번 눈물을 훔치며 집으로 돌아갔는데 꼬박 1년이다!
왕치보가 박해로 사망하자 노인은 아들과 영원히 이별했다. 할머니는 구들 위에서 사흘 동안 통곡했다! 왕치보를 언급할 때마다 노인은 “둘째 아들이 그립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오늘날, 둘째 며느리와 손자, 손녀가 모두 감옥에 갇혀 있다.
시간은 18년이 지났으나 중국공산당이 ‘진선인’ 파룬따파에 대한 박해는 한시각도 멈추지 않았고, 만들어낸 인간세상의 참극은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나는 중국의 960만 평방킬로미터, 1억이 넘는 파룬궁수련생 중에서 도대체 얼마나 되는 가정에서 생리사별을 경험했는지 중국공산당 자신도 대략적인 것을 통계해 내기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원문발표: 2017년 3월 28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3/28/34483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