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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옥살이 만기된 취광이, 더후이 ‘610’에 의해 감옥에서 직접 납치당해

[밍후이왕](밍후이왕통신원 지린성 보도) 창춘(長春) 더후이(德惠)시 파룬궁수련생 취광이(曲廣義)는 4년 6개월의 불법 징역 판결을 선고받아 지린 감옥에서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2017년 1월 12일, 취광이의 억울한 옥살이가 만기된 후 가족은 차를 몰고 지린감옥으로 그를 마중하러 갔다가 더후이 ‘610’ 등 인원에게 둘러싸였다. 취광이는 ‘610’에 의해 납치돼 갔는데 지금 행방불명 상태다.

‘610’은 장쩌민(江澤民)이 1999년 6월 10일에 만든 불법 기구로 나치의 게슈타포와 흡사하다.

图1:吉林省监狱

지린성 감옥

图2:去接人的家属被围住

마중하러 간 가족이 610에 둘러싸이다

2012년 9월 13일 아침 6시가 넘어서 취광이가 막 문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데 문밖에 숨어있던 악독한 경찰 먀오신(苗新)과 ‘610’은 한 무리 사람을 거느리고 그를 강제로 납치했다. 경찰은 취광이 집의 모든 물품을 한 번 다 뒤져 강제로 개인 재물과 저축통장(대략 10여 만 위안)을 강탈했다. 현장은 온통 난잡하게 어질러졌다. 본 사람마저 “도둑떼에 못지않습니다”라고 말했다.

2013년 6월 18일, 취광이는 창춘시 경제개발구 법원에 의해 불법적으로 4년 6개월 억울한 징역 판결을 당해 지린성 지린시 감옥에 불법 감금돼 박해를 당했다. 지린 감옥에서는 장시간 동안 앉혀놓기 고문을 가했고 돈을 사용함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휴지를 구매할 수 없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전향하지 않은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했다. 게다가 수련생을 고립시켰다.

2017년 1월 12일, 취광이의 억울한 옥살이가 만기된 후 가족은 차를 몰고 지린감옥으로 마중하러 갔는데, 더후이 ‘610’, 향 정부 등 7명 쯤 되는 사람이 취광이를 강제로 납치해 이른바 ‘수속’을 이행하게 하도록 요구했다. 가족은 동의하지 않고 3시간 넘게 맞섰다. 더후이 ‘610’ 등은 가족이 창춘에서 가져간 차량을 둘러쌌다. 게다가 강제로 기사의 면허증을 찍은 후 두 명의 경찰이 올라가서 취광이를 납치했다.

예전에 여러 차례 납치 박해 당해

취광이(남, 50여 세)는 더후이시 다팡선진(大房身鎭) 파룬궁수련생으로, 예전에 여러 차례 납치 박해를 당했다. 2002년에 창춘 국가보안지대에 의해 납치돼 창춘시 차오양거우(朝陽溝) 노동교양소로 납치돼 2년 박해를 당했고, 2006년 8월 23일에 납치당한 후, 더후이 국가보안대대에 의해 2년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아 지린성 주타이(九台)시 인마허(飲馬河) 노동교양소로 보내져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1) 창춘시 차오양거우 노동교양소에서 당한 잔혹한 박해

2004년 12월 1일 오전 9시 경, 창춘시 차오양거우 노동교양소 6대대 3중대 부대장 판성뤼(範勝碌)와 경찰 팡쯔룽(彭子龍, 모두 직접 3중대를 책임졌음), 그리고 1중대와 2중대의 경찰은 한 무리의 노동교양 인원—탄구이푸(譚貴富, 반장), 바오싱전(包興振) 등을 거느리고 노동현장에서 마치 한 무리 야수처럼 취광이에게 덮쳐들어 주먹과 발로 그를 구타해 땅바닥에 넘어뜨리고 광적으로 한바탕 구타를 진행했다. 그런 다음 끌고나가 또 혹독하게 무차별폭력을 가했다. 취광이는 늑골이 판성뤼에게 걷어채여 부러졌다. 강제적으로 음식물 주입을 진행할 때 취광이는 치아가 비틀려 전부 흔들렸다. 3주 이전에 취광이는 배가 불편해 노동할 때 늘 화장실로 갔다. 취광이는 펑쯔룽(彭子龍)에게 휴식 신청을 제기했는데 허락받지 못했다. 취광이의 몸은 줄곧 좋지 않아 몹시 허약했다.

2005년 3월 29일, 취광이는 창춘시 차오양거우 노동교양소에 의해 웨이쯔거우(葦子溝) 노동교양소로 옮겨져 박해를 당했다. 4월 18일 가족이 그를 면회했을 때 그는 구타로 온몸에 상처투성이였고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여 걷는 것마저 매우 힘들었다. 경찰 및 모든 인원은 모두 그에 대해 압력을 가하며 그에게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10여 명의 배신자들이 그에 대해 학대를 진행했다. 4월 22일, 가족이 취광이를 보러 갔는데 노동교양인원은 어쨌든 간에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말로는 취광이가 만약 전향하지 않으면 10여 일 후에도 면회를 허락하지 않고, 만기가 되어도 풀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취광이는 사악의 박해를 저지하기 위해 단식으로 항의했다.

(2) 주타이시 인마허 노동교양소에서 잔혹한 박해를 당하다

2006년 8월 23일, 취광이는 둥스다오가(東十道街) 1동 2층으로 가서 사용자에게 가스버너를 수리해주었다. 화장실로 가는 길에서 흰색 차 위에서 갑자기 3~4명의 사복경찰이 뛰어내리더니 취광이를 잡고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취광이가 취 씨라고 말하자 악도는 “당신은 취 씨가 아니고 쑨(孫)씨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강제로 몸을 수색했는데 호주머니에서 8백 여 위안을 찾아냈다. 취광이는 온힘을 다해 몸부림치며 “무엇 때문에 내 돈을 빼앗습니까?”라고 말했다.

원래 이 몇 사람은 더후이시 국가보안대대의 악독한 경찰들이었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취광이에 대해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특히 차를 모는 사람은 필사적으로 취 씨의 급소를 쳤다. 취광이가 높은 소리로 “사람을 때려요!”라고 외치자 악도는 계속 잔혹한 수법을 사용해 취광이를 구타했다. 차를 몰던 그 사람은 너무 구타해 온몸이 땀투성이 되어 지쳐서 헐떡거렸으나 여전히 폭행을 멈추지 않았다. 악도는 곧 대중이 빤히 쳐다보는 상황에서 연속 폭행을 저질렀다. 에워싸고 구경하던 군중마저 “공산당은 너무 잔인해. 좋은 사람만 괴롭히네”라고 말했다.

취광이는 구타를 당해 중상을 입어 이미 반항할 수 없게 됐다. 악도는 곧 비닐주머니를 사용해 취광이의 머리에 씌우고 강제로 차안으로 끌어들였으며 곧 떠났다. 취광이는 납치된 후 국가보안의 악독한 경찰에게 잔혹한 학대를 당해 머리부위, 전신이 상처투성이가 됐다.

취광이는 주타이시 인마허 노동교양소로 불법 납치당했다. 노동교양소에서는 취광이를 직접 엄관(엄격한 관리) 대대로 가둬 강제 전향을 진행했다. 매달아 채우기, 구타, 수면 박탈, 불고문 등 박해를 진행했다. 이로 인해 취광이의 심신은 학대를 당했으며 건강하던 몸은 중병 상태가 나타났다.

2007년 5월, 취광이는 ‘중노동팀’ 벽돌공장에 배치돼 강제로 과부하 노동에 시달렸다. 정신적 손상, 가축에게나 줄 만한 음식이 취광이의 병세를 가중시켰다. 신장결석 진단이 내려졌는데 병이 도질 때면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노동교양소에는 조금 치료해주고 또 계속 노동시켰다. 가족이 면회할 때 악독한 경찰은 취광이에게 “잘 하시오”라고 위협했다. 말 밖의 뜻은 가족에게 안에서 박해를 당한 상황과 본인의 병세를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가족은 취광이에게 어머니가 노동교양소 안의 아들이 그리워 온종일 식음을 전폐하고 우울증에 걸려 사망했다고 전해주었다.

노모가 사망하고 취광이가 중병에 걸린 상황에서 노동교양소에서는 하루 동안의 휴가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강제로 취광이에게 중노동을 시켰다. 취광이는 학대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으나 감옥 측에서는 치료해주지 않았다. 취광이는 박해로 몸이 몹시 허약해지고 신장 결석, 피부염 등 질병에 걸렸지만 여전히 경찰과 바오자(수감자로 이뤄진 감시원)는 그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고 이른바 ‘5서(五書: 수련 포기각서)’를 쓰게 했는데 수단이 매우 비열하고 사악했다.

원문발표: 2017년 3월 15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3/15/3443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