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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다칭시 노동국 취업과 과장 리바오수이, 박해로 사망한 상황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 보도) 전 다칭(大慶) 파룬궁 보도소 소장 리바오수이(李寶水)는 1999년 7월 22일에 어떠한 죄증 자료가 없고, 어떠한 법률 수속이 없는 상황 하에 다칭시 구치소에 갇혀, 이른바 ‘격리 심사’를 받았는데, 7월 26일에 박해로 사망했다. 그때 나이 겨우 39세였다. 현재 18년이 되는데, 그의 가족은 문의할 곳도 찾을 수 없고 응대하는 사람도 없으며 또 답변하는 사람도 없다.

'李宝水'

리바오수이(李寶水)

소식에 따르면, 다칭 공안국의 어느 한 경찰이 치치하얼(齊齊哈爾)로 ‘사건 처리’를 하러 갔는데, 치치하얼시의 경찰과 함께 술을 마실 때, 그는 그 동행한 사람에게 “우리 다칭의 리바오수이는 건물에서 떨어져 사망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밀어뜨린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경찰이 그에게 무엇 때문인지를 묻자, 다칭 경찰은 당시 우리는 그에게 ‘위임장(委任狀)’(경찰은 리바오수이가 소장을 맡은 것은 사부님께서 직접 임명하신 것이라고 들었는데, 무슨 위임장 따위의 것이 있는 줄로 여겼음)을 요구했는데, 그가 말하지 않아 우리가 그를 괴롭혔습니다. 맨 마지막에 우리는 그를 건물 아래로 던졌습니다.”라고 말했다.

리바오수이는 생전에 다칭시 노동국 취업과 과장으로, 과거 여러 해 동안 선진공직자였다. 그는 가정에서, 사회에서, 친척과 친구 중 각 방면에서 좋은 사람이었다.

1999년 7월 20일, 장쩌민(江澤民)을 우두머리로 한 중공(중국공산당) 정치깡패 집단에서는 모든 국가 기구를 움직여 대법을 비난, 모독하여 원한을 선동했고, 억만 명이 넘는 파룬궁수련생을 잔혹하게 박해했다. 일순간에 적색 공포는 중국 대지를 뒤덮어 사람이 질식하게 했다. 겨우 4일 만에 리바오수이는 박해로 사망했다.

다음은 리바오수이의 생전의 일부 상황이다.

1994년 12월 21일, 리바오수이와 4명의 친구는 광저우시 인체과학연구회에서 파룬궁학습반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알았다. 그들은 아주 먼 길을 거쳐 광저우로 와서, 리훙쯔(李洪志)사부님의 파룬궁학습반에 참가하려고 했다. 그들은 광저우 체육관으로 왔는데, 체육관 밖에 많은 수련생이 회의 장소에 들어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문의해서야 안에 이미 6천 명이 꽉 차 입장권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회무팀의 수련생을 찾아 상황을 설명했다. 수련생은 즉시 사부님께 다칭 유전에서 5명의 수련생이 학습반에 참가하려고 요청한다고 말씀드렸다. 사부님께서는 빈자리가 없는 것을 보시고 단지 한 사람만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셨다.

소식을 들은 후, 이 5명은 사부님께서는 단지 한 사람만 허락하셨는데 우리들 중에 누가 들어갈지 보자며 밖에서 상의했다. 다른 몇 사람도 리바오수이가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럼 바오수이가 들어가세요. 우리 다칭을 대표해 들어가세요. 우리가 밖에서 기다리지요.”

바오수이의 심정은 비할 데 없이 격동되었다. 그는 모두가 자신에게 양보한 이번의 드문 기연을 소중히 여겼다. 후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 강단 위에 앉도록 배치되었는데, 바오수이는 바로 사부님의 신변에 앉았다. 12월 29일, 사부님의 설법이 끝나자 리바오수이는 다른 4명의 수련생을 대표해 사부님께 종이쪽지를 올려 진실하게 사부님을 요청하여 다칭으로 오셔서 설법하시길 바랐다. 그러나 이것이 사부님께서 국내에서의 맨 마지막 법을 전수하신 학습반일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학습반이 끝날 때, 사부님께서는 리바오수이에게 그들이 다칭의 수련생을 이끌 수 있도록 당부하셨다. 돌아온 후 바오수이는 주동적으로 다칭시 보도소 소장을 맡았다.

바오수이의 신변의 수련생의 말에 의하면, 수련에서 그는 절대 자신을 소홀하지 않고 매우 정진했다고 한다. 그때 모두는 다들 도처에서 홍법했는데, 대규모의 신 수련생이 눈덩이를 굴리는 듯이 파룬궁에 들어섰다. 바오수이는 직장인인 데다가 모두를 조직해 연공하여 특별히 바빴다. 그는 기본적으로 저녁 11시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매일 걸려오는 전화가 있었는데, 그의 그만한 월급으로는 부족했다. 그의 집에는 층집 두 채가 있었다. 한 채는 세를 놓았는데, 임대 수입은 기본적으로 모두 전화비용을 내는 데 사용했다. 시간과 경제적인 면에서 그는 많은 것을 지불했다. 그러나 그는 누구와도 말하지 않고 말없이 했다. 비록 매일 집에 매우 늦게 돌아갔지만, 반드시 정공(靜功)을 연마한 후에야 잠을 잤다.

바오수이는 차분한 사람으로, 얼굴 피부색은 마치 갓난아이 같았다. 말하는 목소리도 높지 않고 소박해 사람에게 모두 친절하고도 존경스러운 감을 느끼게 했다.

1995년부터 1999년 7월 전, 다칭 지역의 수련생의 인원수는 이미 2만 5천여 명에 이르렀고, 좋은 사람, 좋은 일과 수련의 기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파룬궁수련생은 다칭에서 많은 시민과 정부 공무원의 인정을 받았다. 다칭의 수련단체 중에는 직위가 높고 학력이 높은 수련생이 전 성에서 가장 많이 살고 있었다.

1999년 7월, 파룬궁수련생 인원수는 이미 7천만 명에서 1억 명에 달했다. 이것은 속셈이 음흉한 소인배 장쩌민 부류의 사람에게 심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 많아지면 이미 권력을 잡고 있는 그에 대해 무슨 좋은 점이 없다고 인정하며, 반대로 그 본인과 정권에 대해 막대한 위협이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기타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적극적인 반대 하에 남의 충고를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파룬궁에 대해 이유 없는 탄압을 선택했다. 게다가 스스로 나치스 게슈타포와 같은 불법 조직 ‘610’ 전문 박해기구를 설립했다. 1999년 7월, 전국 범위에서 대면적으로 각지의 파룬궁 보도소 책임자에 대해 불법 체포라는 악행을 시작했다. 리바오수이는 당연히 다칭시 공안국의 중점박해대상이 되어 몰래 감시당하고, 전화가 감청당하고, 거주지가 감시당해 기본적으로 신체의 자유를 잃었다.

7월 22일, 리바오수이는 다칭시 구치소로 납치됐는데, 그에 대해 이른바 ‘정식 격리 심사’를 실시했다. 24일, 리바오수이의 사무실, 집안은 모두 수사를 당했다. 불법적인 가택 수색을 당하고 동시에 리바오수이 본인도 구치소에서 다칭시 공안국으로 압송됐다. 치안대대 대장 주(褚)모가 직접 사람을 거느리고 벼락치기로 심문했는데, 마치 강적과 맞닥뜨리고 있는 것 같았다.

대대장 주 모의 현장 지휘 하에 그들은 리바오수이에게 ‘문제’를 자백하도록 핍박했다. 리바오수이는 솔직하게 그들에게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수련이며, 절대 조직이 없고 명단이 없으며 사회에 대해 완전히 공개적입니다. 모든 연공자는 오기를 원하면 오고 가기를 원하면 갑니다. 대도는 무형(大道無形)한 것으로, 약간의 비밀도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26일 오후, ‘안’에서 전해온 말에 의하면, 리바오수이가 그의 가족에게 물을 가져오도록 했다는 것이다. 점심때, 리바오수이의 아내는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고 마침내 마시는 물과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공안국에 들어섰다. 대대장 주 모는 물건을 내려놓고 가도록 했는데, 한마디 말을 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의 리바오수이는 이미 시달림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초췌했는데, 거의 눈꺼풀조차 들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공안경찰이 연속 사흘 동안 주야로 ‘벼락치기 심사’로 고문을 진행해 자백을 강요한 결과이다. 이 짧은 면회는 뜻밖에 두 부부의 맨 마지막의 말 없는 결별이 되었다.

리바오수이의 아내는 집으로 돌아온 후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공안국에서는 다급하게 또 그의 아내에게 현장으로 빨리 오라고 했다. 아내의 시야에 안겨온 리바오수이는 이미 조용히 다칭 공안국의 그 고층 빌딩의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누워있었다.

현재 리바오수이는 가족을 떠난 지 이미 18년이 된다. 그의 가족은 예전에 여러 차례 청원하러 가서 공정한 평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중공의 이른바 ‘법률’은 단지 휴지화된 문서로 억울함이 있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고 고소할 곳도 없다. 가족은 줄곧 리바오수이의 엄청난 억울한 사정이 천하에 환히 드러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원문발표: 2017년 2월 15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2/15/3431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