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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 억울한 판결, 20여 년 억울한 옥살이

-백발 부모님의 어려운 청원의 길

[밍후이왕](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보도) 진저우(錦州) 감옥에서 사람들은 이러한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면회실 로비에서 고희에 가까운 한 노인이 아들을 면회한 후 마음이 아파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나의 아들아, 나의 아들아! 엄마는 마음 아파 죽겠다!”라고 했다. 마찬가지의 한 장면은 베이징 민원사무실의 민원실 로비에서 발생했다. 이 노인은 청원 자료를 청원을 가로막는 사람에게 빼앗긴 후 대성통곡했다. 어떠한 억울한 사정이 있기에 본래 신체를 보양하며 장수해야 할 이들 노인 부부가 이렇게 몹시 슬피 울었을까?

몇 년 이래 차오양(朝陽), 선양(瀋陽), 베이징의 각 정부 부서에는 모두 이 두 노인의 비틀거린 그림자가 남아있다. 그들은 여러 번 고난을 겪었고 공갈 협박과 위협을 당할 대로 당하며 사방으로 분주히 뛰어다녔는데, 심지어 유치장에 갇혔다.

루펑전(陸風珍, 여, 올해 76세)은 랴오닝성 젠핑(建平)현 톄난가(鐵南街)에서 거주하며 남편은 올해 83세다. 2004년부터 두 고희 노인은 끊임없이 현지 공검법(공안, 검찰, 법원)과 중앙 사법기관에 청원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10여 년 동안 노인은 차오양시, 랴오닝성, 중앙의 공검법 등 기관을 다 두루 뛰어다니며 2백여 통의 민원 편지를 우편으로 부쳤다. 그러나 오히려 바꿔온 것은 조소, 공갈 협박과 문전박대다. 심지어 청원 때문에 유치장에 갇혀 고생을 겪을 대로 겪었다. 하지만 노인은 조금도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그녀는 확고하게 아들의 누명을 하루라도 빨리 벗겨 주지 않는다면 계속 신고하며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루펑전의 아들은 자오훙리(趙宏莉)라고 부르며 올해 48세다. 나이가 많지 않았으나 오히려 운명이 기구했다. 1994년부터 연속 3차례 무고한 판결을 당했는데 누계로 24년에 달하며 이미 21년간 감금당해 있다. 첫 번째는 억울한 10년형 판결을 당했고, 두 번째는 8년형 판결을 당했으며, 세 번째는 6년형을 당했다. 3차례 억울한 판결을 당했는데 같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다. 자오훙리는 아름다운 청춘을 모두 감옥에서 보냈다.

현재 자오훙리의 아이는 이미 16세이지만 오히려 거의 부친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이 엄청난 억울한 사정은 원래 행복하고 즐겁던 이 가정에 깊은 충격을 입혔다. 가족들은 날마다 눈물로 보냈다. 자오훙리는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으나 시종 굴복하지 않아 몸과 정신적으로 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감당했다. 두 고희 노인은 본래 인륜의 즐거움을 누려야 할 때인데 오히려 고향을 등지고 떠나 매우 어려운 청원의 길에 올랐다. 이로 인해 집안에는 사방의 벽밖에 없었고 눈에 보이는 것은 상처 입은 사람들뿐이었다. 온전한 가정이 이렇게 무정하게 짓밟혔다.

1. 첫 번째 억울한 재판: 선량한 아들이 ‘절도범’으로 모함당해

1994년 1월, 젠핑(建平) 공안기관에서 ‘절도죄’로 자오훙리를 납치

당시 자오훙리는 얼굴이 참하고 성격이 수줍어 말 한 마디만 하면 얼굴이 붉어지는 총각이었다. 그는 예전에 장화(張華), 짱주첸(藏久軒)과 장사를 했는데, 장화와 짱주첸은 자오훙리를 불러 농촌으로 내려가 문화재를 구입하도록 했다. 자오훙리는 그들이 사기꾼임을 알고 난 후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려 했다. 자오훙리는 자신의 2만 위안을 돌려달라고 했는데 짱주첸은 돈을 자기 집 벽 위에 걸어놓았다며 자오훙리에게 스스로 가서 가져가라고 말했다.

자오훙리가 돈을 가져간 후, 짱주첸은 오히려 공안국에 자오훙리가 그의 집의 돈을 훔쳤다고 신고했다. 공안이 사건에 개입한 후, 세 사람은 구치소에 감금됐다. 젠핑현 검찰원에서는 이것은 한 차례 문화재 사건이라고 인정했다. 가오(高) 검사는 체포령을 내린 문서 위에 ‘문화재를 철저히 검사하고 나서 함께 처리한다.’라고 주명했다. 하지만 공안국에서는 그날 저녁에 몰래 장화와 짱주첸을 풀어주고 단지 자호훙리 한 사람만 남겼다. 검찰원에서는 사건을 현 공안국 예심과로 반송했다. 그 후 사건은 우여곡절을 겪고 전전하다 또 법원에 도착했다. 법원에서도 증거가 부족하고 사실이 똑똑하지 않다며 문화재를 철저히 검사하고 나서 함께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12월 17일, 젠핑현위원회 부서기 궈밍룬(郭明倫)은 오히려 법원에 강제 명령을 내려 연말 전에 판결을 끝내도록 했다. 법원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재판을 진행했다. 재판 과정 중 법원은 문화재 사건에 대해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고 장화와 짱주첸도 법정에 나서지 않았으며 단지 자오훙리에게만 절도죄로 판결을 내렸다. 2만 위안의 돈을 절도했다며(이 2만 위안은 자오훙리의 것이며 짱주첸에게 모함당한 것임) 1심에서 억울한 6년형 판결을 내렸다. 가족이 항소하자 항소하면 더 중형을 내리겠다고 통지했다. 결국 2심에 정말 형기를 더 보태 10년으로 고쳐 판결했다. 법률에는 명문으로 항소로 인해 형기를 추가하지 않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루펑전 노인이 베이징에서 청원하는 과정 중 그녀의 불행은 베이징 정법대학의 한 정의로운 인사의 동정을 일으켰다. 그는 차오양시 검찰원의 한 부서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 책임자는 “이 사건을 당신은 절대로 착수하지 마시오. 마구 뒤얽혀 복잡하고 흑막이 너무 많습니다. 나는 책임자입니다. 나도 이 사건 서류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여태껏 사본이 없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2. 두 번째 억울한 재판: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 하다가 오히려 모함당해 입감되다

자오훙리는 어릴 때 병원에 의해 선천성 심장병 진단이 내려졌다. 그에게 수술해 줄 돈이 없는 가정 형편 때문에 부모님은 늘 그의 병을 걱정했다. 첫 번째 억울한 재판을 당한 후 불행 중 천만다행으로 자오훙리는 감옥에서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기 시작했는데 심장병은 치료를 받지 않고 완쾌됐다. 그들 전 가족은 모두 놀라고 기쁘게 파룬따파의 초범성을 목격했다.

2004년, 자오훙리는 랴오닝 차오양시 솽타구(雙塔區) 법원에 의해 이른바 파룬궁 선전품을 인쇄 제작했다는 이유로 불법적인 8년형 판결을 선고받아 판진(盤錦) 감옥으로 보내졌다.

차오양 솽타구 법원에서 속임수를 쓰다

자오훙리는 친구 집으로 놀러갔다가 붙잡혔다. 그가 붙잡혀 구금당하고, 체포령을 받으며, 기소와 판결을 당함에 어떠한 부서에서도 자오훙리의 가족에게 통지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오훙리가 감옥으로 보내졌어도 가족은 몰랐다. 판진 감옥에서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서야 가족은 사실을 알게 됐다.

솽타구(雙塔區) 법원은 판결문 위에 이 사건에 대해 증거를 제공하고 대질 등을 거쳤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원에서 재판할 때 증인 한 사람도 현장에 도착하지 않았고, 또 어느 한 증거로도 당사자 자오훙리가 뒤집어쓴 죄명을 증명할 수 없었다. 증거 제공, 대질은 어디서부터 말한 것인가? 법정에서 자오훙리는 재삼 검사에게 증거를 제출하도록 강력히 요구했으나 오히려 재판장에게 저지를 당했다. 재판장은 자오훙리의 진술을 허락하지 않았고 또 변호사 선임도 허락하지 않았다.

2심의 죄명은 ‘절도죄’라고 인쇄됐다. 그야말로 법률을 어린애 장난으로 여긴 것이다.

자오훙리가 감옥에서 당한 고문 학대

1)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

자오훙리는 판진감옥 제8중대에 불법 감금됐다. 이 사건이 극히 억울했던 이유로, 그는 감옥에서 항소 자료를 썼다. 그는 자신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교도관이 “당신의 항소는 무리입니다”라고 말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자오훙리는 자신의 자료를 가져오라고 했으나 교도관은 자료가 없다며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자오훙리는 한 국민의 항소권마저 없음을 느꼈다. 그래서 단식으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자오훙리가 6개월 넘게 단식했을 때 판진 감옥 제5감구 의사 가오(高)씨는 그에게 강제로 음식물 주입을 진행했다. 그들은 자오훙리의 두 손을 침대의 양측에 고정하고 두 발을 묶어놓고 호스를 콧구멍에 꽂아넣고 음식물 주입을 진행했다.

酷刑演示:野蛮灌食

고문 재연: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

음식물 주입을 당한 후 자오훙리는 일어서서 걸을 수 없었고 말할 기운도 없었다. 그리고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었는데,(30kg만 남았음) 주입한대로 다 토해냈고 숨만 붙어있었을 뿐이다. 이때의 자오훙리는 링거를 맞는데 의거해 생명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가오 의사는 대부분 혈관이 주사를 찌를 수 없게 되어 링거를 맞기도 상당히 어렵다고 했다.

누가 봐도 만약 기적이 없다면 이 사람은 절대 살 수 없다고 말했다. 노인이 아들의 건강 상태를 문의하자 의사는 일체가 정상이며 무슨 질환이 없다고 말했다. 노인이 검진 보고서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자 가오 의사는 “당신이 봐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책임자가 비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노인은 몰래 아들에게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았는지 물었다. 자오훙리는 그들이 단지 채혈만 하고 종합 검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자오훙리는 어릴 적에 선천성 심장병을 앓았는데 또 6개월 넘게 단식했다. 일단 도지면 곧 심근경색 증상이 나타나고 기력이 극도로 쇠약해 응급처치도 미처 받지 못할 상태였다. 감옥과 병원에서는 그가 죽고 사는 것을 전혀 상관하지 않았는데 완전히 사람의 생명을 어린애 장난으로 여긴 것이다.

아들이 사망한 소식을 듣기 두려운 이유로 노인은 딸의 전화번호를 감옥에 남겼고 통곡하며 감옥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감옥으로 가서 아들이 살아있는 것을 본 두 노인은 너무 기뻐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파룬따파가 사경을 헤매던 아들을 구했다고 말했다.

2) ‘사인(死人) 침대’ 고문

酷刑演示:死人床

고문 재연: ‘사인 침대(死人床)’

그 후 자오훙리는 선양 감옥으로 이송됐다. 이 기간, 자오훙리는 진선인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인 침대’ 고문을 당해 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받았다. 중국 법률에서는 ‘육형은 없다. 죄수의 몸도 역시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중국 감옥 안에서 교도관들은 파룬궁수련생을 함부로 고문하고 죄수에게 지시해 함부로 수련생을 구타했다. 죄수들은 구타를 혹독하게 가할수록 반대로 감형 등 ‘우대’를 받는다.

3. 세 번째 억울한 재판: 재차 모함당해 수감

2013년 9월 7일 저녁, 5~6명의 공안 사복 경찰이 자오훙리의 집에 들이닥쳐 두 발로 문을 걷어차 열고 한꺼번에 몰려들어 자오훙리를 구타해 땅바닥에 넘어뜨리고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당시 얼굴은 구타로 전혀 볼품없이 됐고 자오는 비명을 질렀다. 11세 딸은 놀라움을 당해 엉엉 큰소리로 울었다. 젠핑현 국가보안대대 대장 장제(姜傑)는 날뛰면서 “때려라, 때려, 파룬궁은 때려 죽여도 괜찮아”라고 외쳤다. 자오 씨의 아내가 방 안에 뛰어들어가 큰 소리로 “당신들 뭘 하는 거야? 그야말로 도둑떼네!”라고 외쳐서야 경찰은 손을 멈췄다. 경찰은 자오훙리를 문밖으로 끌고 가서 경사지에 던져버렸다. 자오훙리는 또 한 차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경찰은 그의 집을 한 번 다 뒤졌고 자오훙리의 호주머니 안의 돈 2천 위안을 훔쳐갔다.

9월 22일, 자오훙리는 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 공안은 자오훙리가 핸드폰으로 파룬궁 정보를 전파했다는 이유로 자오훙리에 대해 불법 체포를 진행했다. 그 후 자오훙리의 가족은 또 국가보안대장 장제를 찾아 석방을 요구했다. 장제는 “당신들 가족이 도처로 가서 신고하려 한다면 나는 당신 아들로 하여금 후반생에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하게 만들겠소. 당신이 어디까지 신고했다 하더라도 모두 나에게 결정권이 있소”라고 말했다.

자오훙리가 구치소로 보내졌을 때 얼굴 및 몸 위의 상처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구치소의 가오 소장은 “누가 당신을 이 지경으로 구타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자오훙리는 그를 납치해온 경찰을 보면서 “당신은 그들에게 물어보시오”라고 말했다.

가족이 변호사를 선임해 자오훙리를 면회하려 했는데 변호사는 난처함을 당했다. 구치소에서는 공안국으로 가도록 했고 공안국에서는 또 차오양 공안국으로 가도록 했다. 그 후 또 성 공안청에서 비준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어서야 변호사는 겨우 자오훙리를 만날 수 있었다.

재판을 진행하기 전, 재판장 리옌(李岩)은 변호사 궈롄후이(郭蓮輝)에게 “당신이 만약 법정에서 자오훙리가 구타당한 일을 언급하면 나는 당신의 변호권을 박탈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궈 변호사는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었지만 변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타협했다.

법원 판결문 위에서는 MMS를 발한 수량을 10개에서 77개로, CD 34장을 37장으로 고쳤다. 경찰이 납치한 시간은 오후 2시 55분으로 고쳤는데 그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변호사는 ‘전자 증거로 법정 감정을 대체함은 우리나라 사법부 제95, 96호 명령을 위반했고,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결정을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재판장 리옌은 기어이 이것들을 판결문에 써넣어 증거로 삼아 그럴듯하게 꾸미려 했다. 증거를 마음대로 지우고 고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법을 집행하는 법률과 직업 도덕을 위반한 것으로 이 같은 비열한 수단으로 자오훙리를 모함한 것이다.

파룬궁수련생이 진상을 전파함은, 헌법이 부여한 언론과 신앙 권리를 행사한 것이며 민중의 알권리를 수호한 것이다. 그리고 MMS를 발송하고 CD를 발행한 수량이 더 많다고 해도 모두 합법적이다.

하지만 공검법에서 서로 결탁한 상황에서 자오훙리는 거듭 6년 불법 판결을 선고받았다.

4. 백발 부모가 어려운 청원 길에 오르다

2심 후, 구치소는 가족에게 자오훙리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고 재정서도 가족에게 통지하지 않고 다만 원 판결을 유지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가족은 자오훙리가 어느 감옥으로 보내졌는지 몰랐다. 가족은 그를 대신해 항소하려 했지만 재정서를 받을 수 없었다.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고 가족은 그제야 자오훙리가 진저우 감옥에 불법 감금당했음을 알게 됐다. 가족이 세 차례나 가서야 감옥 측은 자오훙리를 만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노인은 자신의 아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오훙리가 감옥에서 구타로 얼굴이 부어올라 이미 원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인이 아들에게 어찌된 일인지를 묻자 자오훙리는 “어머니, 묻지 마세요. 이곳은 사람이 있을 곳이 못됩니다”라고 말했다.

가족은 자오훙리 손에 있는 재정서를 달라고 했으나 감옥 측은 거부했다. 어찌할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자오훙리의 어머니는 두 차례 최고인민법원으로 가서 입건을 요구했으나 수리를 거절당했다. 어머니는 단념하지 않고 또 4차 베이징으로 가서 청원했다가 두 차례나 베이징 주재 차오양시 규찰대에 의해 붙잡혀 돌아왔다. 각급 기관부서에 1백 통이 넘는 편지를 썼지만 모두 감감무소식이었다. 재정서가 없는 가족은 항소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중앙 사법국, 랴오닝 사법청, 감옥관리국 이 부서들로 분주히 오가면서 청구했다. 맨 마지막에 진저우감옥 옥정과에서는 2015년 2월에 차오양 중급인민법원의 재정서를 복사해 한 부 주었다. 노인으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이 재정서의 죄명이 ‘절도죄’인데 1심 죄명과 완전히 달랐다.

가족은 이 모함한 재정서를 위해 꼬박 10개월 동안 뛰어다녔다.

가족이 항소한 후인 2016년 3월, 랴오닝성 고급인민법원에서는 자오훙리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 심문이 ‘정확하다’고 인정했다. 이 결과에 직면해 자오 씨 가족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분명히 억울한 사건이며 원 심문 중에 위법적인 곳이 그렇게 많고 뚜렷했으나 성 고급인민법원에서는 보고도 못 본체 하며 근본적으로 조사를 진행하지 않고 황급히 항소를 기각했다.

이렇게 큰 중국이지만 어디에 국민이 이치를 말할 곳이 있는가? 그러나 자오훙리의 부모는 아들이 1994년부터 줄곧 억울함을 당했음을 깊이 알고 있다. 그는 전후 합해서 20여 년 동안 억울함을 당했는데 사람 일생에 20년이 몇 번 있겠는가? 아들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두 노인은 서로 부축하고 노숙하며 인간세상의 괴로움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번에 그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들은 아들이 누명을 벗는 그 날을 기다릴 것이다.

2015년, 자오훙리는 전전하여 감옥 안에서 파룬궁수련생에게 쓴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 중에는 “나는 늘 사부님께서 가호해 주심과 파룬따파의 초범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떠한 고문과 시달림을 당할지라도 절대 ‘전향’하지 않겠습니다. 내심에는 단지 ‘확고’라는 두 글자만 있습니다. 수련생 여러분, 나는 꼭 날이 밝아오는 그날까지 견지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사건에 참여한 일부 인원:

장제(姜傑, 남, 57세): 젠핑현 공안국 국가보안대대 대대장. 핸드폰: 15566792186, 13842168008 사무실 전화: 0421-7829155(아내: 리구이이(李佳藝) 푸산(富山) 중학교 정치 교사, 핸드폰: 13942155262(집은 시환다오(西環島) 신성가원(馨盛家園)에서 거주)

장리후이(張立慧, 남)는 젠핑현 공안국 국가보안대대 부대대장. 집은 중국은행 인근에서 거주. 핸드폰: 15566792562, 687962, 13500412155, 677566 사무실 전화: 0421-7829650

장핑(張平), 공소과 부과장 0421- 7813094 13898239231

원문위치: 2017년 2월 3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 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2/3/34262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