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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저우시 웨푸링, 7년의 억울한 판결 당하고 남편은 박해로 사망해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간쑤 보도) 란저우(蘭州) 파룬궁수련생 웨진링(岳普玲), 마푸란(馬福蘭)은 란저우시 청관구(城關區) 법원에 의해 7년의 억울한 판결을 당했다.

주심 판사 왕하이빈은 2016년 12월 20일에 란저우시 제1구치소로 가서 파룬궁수련생 웨푸링, 마푸란에 대해 불법 판결을 내려 란저우시 청관구 인민법원(2015) 청형초자 제1758호 형사판결서를 송달했다. 웨푸링, 마푸란은 따로따로 7년의 불법 판결을 받았다.

12월 29일, 웨푸링, 마푸란의 변호사는 베이징에서 란저우로 와서 청관 법원에 웨푸링, 마푸란의 서면 고소장을 건넸다.

마푸란은 12월 초에 란저우 제1구치소에 의해 감옥 노동개조 병원으로 보내져 수술을 받았다. 병의 원인은 상세하지 않다.

병원에서 돌아온 후, 구치소에서는 또 마푸란에게 매일 저녁 당직을 서도록 배치했다. 몸이 불편한 마푸란은 저녁에 5일 동안 당직을 선 후, 구치소 측에 저녁 당직을 서면 자신의 몸이 감당할 수 없다고 제기했다. 구치소에서는 그제야 마푸란이 저녁에 당직을 서는 것을 중지했다.

소식에 따르면, 마푸란, 웨푸링은 구치소에서 또 강제 노동을 하고 있다.

다음은 웨푸링, 마푸란이 납치당한 것과 웨푸링의 남편이 박해로 사망한 과정이다.

2015년 7월 1일 저녁7~8시 무렵, 웨푸링과 마푸란은 란저우시 청관구 철도국 광위안(光源) 빌딩 아래 층의 공공버스 역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 란저우시 공안국 26처(이하는 시국 26처라고 부름)의 사복 경찰에 의해 납치됐다.

동시에 웨푸링의 남편은 집안에서 시국 26처의 경찰에게 시국으로 납치됐다. 시국 26처의 다른 한 패의 경찰은 저녁 8시가 넘어서 란저우시 청관구 쥬다루(舊大路) 길목에서 웨푸링의 아들을 납치해 시국의 한 단층집으로 끌고 가서 줄곧 이튿날 저녁 6~7시까지 불법적으로 구금했다. 이 기간, 줄곧 웨푸링의 아들에게 파룬궁 진상 현수막의 출처에 대해 심문했다.

웨푸링의 남편과 아들은 란저우시 공안국에서 걸어 나올 때에야 상대방을 보았다. 그제야 두 부자는 온종일 모두 시국에 있었고, 시국에 의해 불법 구금, 불법 심문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단지 란저우시에서 5월 13일 전야에 걸어놓은 파룬궁 진상 현수막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문의하기 위해서였다.

부자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안은 이미 전혀 딴판으로 되었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사람이 집안에서 밖으로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

사정을 아는 사람이 알려준 데 의하면, 웨푸링의 남편과 아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경찰은 이미 그들의 집안에서 물건을 한 차나 되게 가져갔다고 한다. 이 사람들이 언제 집에 도착했고, 집안에서 어떤 물건을 가져갔는지에 대해 웨푸링의 남편에게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기간에 가족이 현장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 제3자도 현장에 없었다. 단지 시국의 성씨를 폭로하지 않은 사람이 오가면서 단지 밖으로 물건을 옮겼을 뿐이다.

이 사람들은 떠나기 전에 어떤 사람이 주머니 하나를 들고 웨푸링의 남편과 아들에게 안에 8만여 위안(약 1,400만 여 위안)이 있는데 가져다가 검사를 한다며 만약 사건과 관계없다면 가족에게 돌려준다고 말했다. 당시 오히려 웨푸링의 남편과 아들 앞에서 직접 지폐를 정확하게 조사하지 않고 직접 가져갔다.

당시 웨푸링의 아들은 “그것은 집안의 생활비인데, 가져가면 집에서는 어떻게 생활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 사람은 곧 웨푸링의 아들에게 단지 천 위안(약 17만 원)만 남기고 떠났고, 시종 수색영장을 꺼내 보이지 않았다.

2주가 지나서 경찰은 그제야 웨푸링의 아들과 남편을 심문한 것을 보충했고, 또 한 장의 압수 명세서를 보충했다. 웨푸링의 아들에게 서명시켰고, 가족의 그 몫은 오히려 가족에게 주지 않았다. 웨푸링이 납치당한 후, 웨푸링의 남편 왕리허(王立河)는 법에 의거해 최고인민검찰원, 최고인민법원에 박해 원흉 장쩌민(江澤民)을 고소한 형사고소장을 제기했다. 그러나 자소장이 양고에 도착한 후, 웨푸링의 남편은 곧 간쑤성 ‘610’, 훙구구(紅古區) ‘610’에게 끊임없이 교란을 받았다. 왕리허의 직장은 란저우시 훙구구에 있다.

‘610’은 장쩌민이 1999년 6월 10일에 규합한 불법 조직으로,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했는데, 나치스 게슈타포와 흡사하다.

먼저 훙구구 ‘610’에서는 왕리허의 직장에 압력을 가했다. 그의 소송을 철회하도록 요구하며, 철회하지 않으면 뭔가를 글로 쓰겠다고 했다. 훙구구 ‘610’에서는 왕리허의 직장을 찾았으나 직장에서는 관여하지 않았다. 간쑤성 ‘610’에서는 직접 사람이 개입해 직장에 끊임없이 압력을 가했고, 직장에서는 끊임없이 왕리허를 찾았다.

직장의 압력, ‘610’의 압력, 아내가 불법 감금돼 구출해야 되는 압력, 수련하지 않는 가족에게서 오는 압력은 왕리허의 정신과 몸에 극심한 상해를 입혔다. 2015년 10월, 병으로 26일 동안 입원했는데 암이라는 진단이 내려져 수술을 받았다. 3개월 후 다시 검사를 받았는데 의사는 또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2016년 1월, 설을 쇠기 20여 일 전에 두 번째로 수술을 받아 20여 일 동안 입원했다.

왕리허가 입원, 수술을 받는 과정 중, 웨푸링이 모함당한 사건은 공안국에서 청관구 검찰원에 도착했다. 그 후 또 청관법원에 불법적으로 기소당했다. 왕리허는 병중에 여전히 변호사와 연계해, 법에 의거해 웨푸링을 위해 무죄 변호를 진행하여 무죄로 아내 웨푸링을 석방하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간쑤성 ‘610’, 훙구구 ‘610’의 압력은 줄곧 끊임없었다. ‘610’은 시각마다 직장을 독촉했고, 직장은 곧 며칠에 한 번씩 왕리허에게 전화를 걸어 직장으로 돌아와 장쩌민을 고소한 일을 해결하라며, 왕리허에게 장쩌민을 고소함을 철회하도록 요구했다. 철회하지 않으면 곧 뭔가를 글로 쓰겠다고 했다.

매번 찾고 매번 압력을 가한 상황 하에 왕리허는 자신이 파룬궁을 수련해 심신에 이로움을 얻는 과정을 썼다. 직장에서는 본 후, “당신이 이렇게 쓰면 상부에 보고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왕리허는 “나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습니다. 기타의 것은 나는 쓰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2016년 10월 20일쯤까지 직장에서는 ‘610’의 압력 때문에 여전히 왕리허에게 압력을 가했다. 몸, 정신, 심리적인 압력이 극한에 달했을 때, 왕리허는 “만약 또 쓰라고 하면 나는 (근무)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2016년 11월 7일 새벽 3시, 웨푸링의 남편 왕리허는 각종 압력하에 억울하게 사망했다.

1999년 7월 후, 아내 웨푸링이 파룬궁을 수련한 것 때문에 왕리허의 직장에서 왕리허에게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공작을 하도록 요구했는데, 그 과정 중에서 그는 차츰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접촉했고, 그 후에는 자신도 대법수련에 들어섰다.

왕리허는 직장에서 업무 핵심으로 늘 외출했다. 그러나 시간이 있기만 하면 다그쳐 법공부를 하고 연공을 했으며, 또 신변의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그리고 또 아내 웨푸링이 대법을 수련하고 대법을 실증함을 매우 지지했다.

그러나 웨푸링이 납치당한 후, 집의 80여 세인 노 모친은 이 잔혹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왕리허는 모친과 수련을 하지 않는 가족의 의혹에 대해 설명해주어야 했고, 또 직장과 ‘610’에서의 압력, 시국 26처의 불법적인 가택 수색, 거주지 침입, 국민의 합법적인 재산 박탈, 또 좋은 사람을 장기간 불법적으로 감금함에 직면해야 했다. 그리고 법률적인 의거가 없는 이른바 소송 절차를 걸어야 했는데, 이는 왕리허로 하여금 줄곧 근심.걱정을 털어버릴 수 없게 했다. 더욱이 외부에서 에워싼 압력은 혼자 감당해야 했고 또 노 모친을 이해해야 했으며, 또 세상 경험을 깊이 쌓지 못한 아들이 압력이 없게끔 해야 했는데, 결국 몸을 지탱하지 못한 채 억울하게 사망했다.

세상을 떠나던 그 날 새벽 1시, 왕리허는 또 방안에서 서성거렸다. 모친이 그에게 관심을 갖자, 그는 모친에게 “어머니가 잘 주무시면, 저는 잠을 잘 자요.”라고 말했다. 바로 이 말을 하고 2시간 후, 왕리허는 그를 가장 걱정하는 어머니, 아들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줄곧 일찍이 아내를 무죄로 석방해 주기를 희망했다. 왕리허는 세상을 떠날 때 겨우 53세였다.

세상을 떠나기 전, 직장 동료가 왕리허를 문안하러 왔을 때, 왕리허는 직장에서 나서서 웨푸링을 집으로 한 번 돌려 보내주어 부부가 맨 마지막 한 번을 만날 수 있도록 청구했다. 직장 책임자는 성 ‘610’을 찾아 이 일을 협상했는데, 성 ‘610’에서는 만약 도망가면 어떻게 하느냐며 서명하고 담보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웨푸링이 납치당한 이 단락 나날에, 왕리허와 자신의 80여 세인 모친은 함께 청관구 ‘610’ 주임 가오리나(高麗娜)를 찾아 석방을 요구한 적이 있다. 가오리나는 처음에는 태도가 매우 강경했다. 그 후에는 웨푸링의 호구가 청관구에 없고 훙구구에 있으므로, 훙구구 ‘610’에서 담당한다며 그녀가 담당함에 속하지 않는다고 책임을 미루었다.

왕리허도 여러 차례 시국 26처를 찾아갔으나, 오히려 문밖에서 막혀 들어감을 허락받지 못해 시국 26처와 이야기할 수 없었다.

2016년 3월 25일, 웨푸링, 마푸란에 대해 불법 심문을 진행하기 이틀 전, 시국 26처에서는 왕리허에게 7만 여 위안(약 1.200만 원)을 되돌려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돈은 말로는, 웨푸링의 본인의 것이 아니라며 돌려주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웨푸링은 불법 감금됐고 남편은 박해로 사망했다. 집안에는 단지 80여 세인 시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굳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온 세상이 함께 513을 경축한다’는 하나의 진상 현수막 때문에 간쑤성 ‘610’, 훙구구 ‘610’, 시국 26처, 청관 검찰원, 청관 법원에서는 협력해 박해를 가해 웨푸링의 가족으로 하여금 참혹한 불행을 당하게 했다.

이 사건은 여전히 상소 중이다.

박해 참여 단위 및 개인 정보는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17년 1월 8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8/34060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