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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으로 네 차례 죽었다 살아난 가오둥, 결국 캉자산 감옥에서 살해당했다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보도)감옥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랴오허(遼河) 유전탐사국 전싱(振興) 회사 감리(엔지니어)인 파룬궁(法輪功)수련생 가오둥(高東)은 2013년 설 명절 이틀 전 선양(瀋陽) 캉자산(康家山) 감옥에서 고문박해로 사망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49세였다. 바오자(包夾-수감자로 다른 죄수 감시 임무를 맡은 자) 말이 “당시 설 준비로 꽃장식을 하고 있을 때 가오둥이 죽었는데 눈을 뜨고 있었고, 감옥에서 즉시 화장했다.”라고 했고, 어떤 교도관은 “가오둥은 허망하게 죽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가족은 다만 이전에 무슨 서류를 가져가기 위해 캉자산 감옥에 간 적이 있을 뿐이었다.

酷刑示意图:摧残性灌食

고문 설명도: 고문의 수단으로 음식물 강제주입

가오둥은 선양 캉자산 감옥 3감 구역에 감금돼 단식으로 항의하다가 호스로 야만적인 음식물 강제주입을 당했다. 전신을 침대에 묶어 놓고, 호스를 코를 통해 위까지 꽂아 넣고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했고, 주입 후 호스를 뽑고도 줄곧 침대에 묶어놓았는데, 가오둥은 그 상태에서 늘 주입 당한 묽은 음식물을 토했다. 그럼 옥정과의 판추이이(范垂義)는 판자에 대법 사부님의 이름을 써서 그의 앞에 놓고 거기에 토하도록 했다. 가오둥이 그런 고통 속에서도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등을 외치자, 감옥 주재 검찰관이 죄수들을 향해 “그래, 당신들은 그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없단 말인가?”라고 역정을 냈다. 그 말을 들은 쑨더즈(孫德志)라는 죄수는 그에게 잘 보여 자신의 형기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에 뜨거운 물병으로 묶여 있는 가오둥의 허벅지 안쪽을 지졌다.

가오둥은 이미 예전에 파룬궁 수련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중국공산당(중공)에 불법으로 납치되어 온갖 고문 학대를 받다가 4차례나 죽었다 살아난 적이 있다. 선양 캉자산 감옥에 수감되기 전 6차례나 납치되어 3차례 불법노동 교양처분을 받았고, 2차례 정신병원으로 보내져 고문을 당했고, 1차례 세뇌반에 감금돼 고문 박해를 받은 적이 있다. 그렇게 납치와 감금을 당하면서 온갖 고문과 박해로 시달림을 당했다. 그러므로 전신 부종 증상, 뇌경색, 기억력 상실, 사지 마비 증상, 하지마비,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등의 건강상 심각한 증상이 나타났다.

2009년 4월 13일경, 어떤 사람의 목격에 의하면, 가오둥이 판진시(盤錦市) 싱룽타이구(興隆台區) 모 채소 시장의 한구석에서 떨면서 움츠리고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는 그처럼 고문의 후유증으로 제대로 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어서 가난하게 생명을 부지할 수밖에 없었다. 몸에서는 역겨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구경하고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파룬궁을 수련하다가 중공에 잡혀 고문을 당해 그렇게 됐다.”라고 알려주자, 구경꾼들 모두 중공을 심하게 욕했다.

가오둥은 1990년 랴오허 유전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다. 그는 나중에 랴오허 유전탐사국전싱회사 감리직을 맡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다. 그는 아내와 아이 등 세 식구가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아내도 유전회사의 직원이었는데, 중공으로부터 받은 큰 충격과 정신적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 후 어린아이와 함께 떠났다. 가오둥은 생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96년 11월 나는 운 좋게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게 됐습니다. 대법은 나에게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좋은 사람으로 되도록 요구했습니다. 이로부터 나는 환골탈태(脫胎換骨)로 완전히 새로운 나로 변했습니다. 집에서는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 좋은 아들이 되려고 노력했으며, 사회와 직장에서는 좋은 국민, 좋은 직원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판진 노동교양소의 박해로 죽음에 직면하다

1999년 4월 25일과 7월 20일 가오둥은 두 차례 청원하러 베이징으로 갔으며, 같은 해 또 한 차례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위해 베이징으로 가서 청원을 호소하다가 유전 공안국에 납치되어 유치장에 감금됐고, 참혹한 구타를 당한 후, 판진 노동교양소로 이송되어 박해를 당했다. 그는 2009년 밍후이왕의 투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판진 노동교양소에 감금돼 있을 때, 대법제자가 한 사람씩 구타를 당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어떤 사람은 구타로 실신했다! 나는 맨 마지막에 침대에 묶인 후, 후(胡) 씨 성의 죄수가 먼저 나무 걸상 다리로 허벅지를 구타했고, 또 야만적인 음식물 강제주입 호스로 빈속에 술을 주입했다. 호스를 강제로 마구 쑤셔 넣어 콧구멍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또 빈속에 독한 술을 주입했으므로 위 점막이상해 토했는데 각혈 증상이 나타났다. 그 후 계속 고정된 침대에 채워져 시달림을 당했으므로 나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허벅지 양쪽은 모두 구타로 시퍼렇게 멍들었다! 그들은 그 후부터 매일 병원으로 끌고 가서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장기간 그런 고문 박해로 죽음에직면하게 되었는데, 무슨 물체이든지 흐릿하게 두 개의 그림자로 보였다!”

가우둥은 그래도 대법을 굳게 믿고, 사악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노동교양소의 악경(사악한 경찰)은 각종 수단의 고문으로 가오둥을 괴롭혔는데, 이른바 사인 침대(死人床), 위치 고정,전기봉 충격, 장시간 매달기, 고무 몽둥이로 머리 구타, 야만적인 음식물 강제주입 등으로 온갖 상처를 입혔으며, 또 추운 엄동에 옷을 벗겨(팬티차림) 눈밭에 눌러놓고 삽으로 두드리기, 죄수를 시켜 혹독하게 구타하기 등등으로 악행을 가했는데, 노동교양소의 모든 형구는 모두 가오둥에게 사용할 정도였다. 가오둥은 결국 계속된 고문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윈 모습이었는데, 병원에서조차 “살아날 가망이 없다.”라는 진단을 내렸다. 노동교양소 측은 책임 문제를 우려해서 죽음에 직면한 가오둥을 그의 고향 하이청(海城)으로 끌고 가서 신병을 넘기려고 했다. 가족은, 가우둥을 살릴 가망이 없고, 이미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가 악경을 대신해서 가오둥의 후사를 처리할 수 없다.”라고 신병접수를 거부하자, 그들은 가오둥을 판진으로 다시 끌고 돌아와서, 몰래 그의 직장 정문 입구 석대 위에 던져놓고 달아났다.

핍박에 못 이겨 정신이상이 되다

그렇지만 가오둥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는 건강이 다소 회복된 후 자신을 납치하고 고문하고 박해한 직장 보위과와 유전 ‘610’ 악인을 사직당국에 고소한 후, 직장의 관계자를 찾아가서 다시 출근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개인 물품을 되찾으려고 했다. 그러자, 유전 ‘610’ 두목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서기 위칭산(於慶山)이 사람을 동원해 가오둥을 다시 납치하여 유전 유치장에 감금시킨 후 더욱 야만적인 구타를 가했다. 구타당한 지 하루 만에 가오둥의 호흡이 멈추었다. 당시 마음씨 좋은 사람이 가오둥의 옷을 세탁해줬는데, 5회에 걸쳐 헹구어서야 핏물이 빠졌다고 했다. 혹심한 구타로 가오둥의 호흡이 멈추자, 당황한 악인들은 순간 두려운 나머지 20여 명이 응급처치를 했는데, 호흡을 멈춘 시간이 너무 길었으므로 뇌에 산소공급이 안 되어 뇌가 심한 손상을 입어 정신이상 증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악인들은 가오둥이 다소 건강이 회복될 조짐이 보이자. 다시 마싼자(三家等)의여러 노동교양소에 입감시키려고 했다. 가오둥의 몸 상태를 이유로 입감을 거부당하자, 유전의 악인들은 기만적인 수법으로 판진 노동교양소에 가오둥을 입감시켰고, 이에 가오둥은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했다. 그러자 판진 노동교양소는 가오둥을 번시(本溪) 노동교양소로이송시켜 그곳에서 혹독한 고문박해를 가했다. 가오둥이 그곳에서 야만적인 음식물 강제주입을 당할 때 굵은 주사관으로 위속에 공기를 넣거나 혹은 소금(죽에 넣었음)을 주입하는 박해를 가했다. 그런 고문 박해를 당해서 정신이상, 기억력 상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등등 심각한 증상이 나타났다.

2003년 가을, 가오둥은 판진 교양소에서 번시 교양원으로 이송됐다. 번시 교양소에서 악독한 경찰과 유다(전향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른바 ‘전향’을 시키기 위해 핍박했는데,야비한 말로 굴욕감을 주었고, ‘바오자(包夾)’를 시켜 감시하면서 핍박을 가해, 이미 심각한 상태로 손상을 입은 그의 심신은 더욱 상하게 되었다. 그는 2004년 봄 연속해서 여러 날 동안 잠을 이룰 수 없다가 정신이상 증상이 나타났다. 교양소 측은 책임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보석형식으로 풀어주고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노동교양소 마약중독자 재활원의 악경 유(劉) 소장은 “가오둥이 파룬궁을 연마해서 정신이상이 되었다.”라고 모함했다.

정신병원으로 납치돼 박해를 당하다

가오둥은 노동교양소에서 나온 후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직장을 찾아가 출근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시 납치돼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다시 고문 박해를 당한 것이다. 가오둥은 2009년 다음과 같이 하소연했다. 내가 판진 교양원소에서 풀려난 후 다시 직장을 찾아가서 출근하겠다고 했을 때, 직장의 악인은 또 위협하면서 내 가족까지 위협한 후, 즉시 현장에서 나를 납치한 후 랴오닝성 카이위안(開原) 정신병원으로 끌고 가서 온갖 박해를 가했다. 16개월 동안 감금당해 있으면서 매일 독극물 주사를 당했으며, 전기충격을 받았고, 야만적인 음식물 강제주입을 등등의 고문 박해를 당했다. 또 침대에 6개의 끈으로 묶여 온갖 고문을 당했다.

酷刑演示:打毒针(注射不明药物)

고문 재연: 독침을 주사하다(독극물을 주사하다)

어느 때는 침대에 계속 60일간 밤낮 묶여 있었다. 화장실도 갈 수 없었고, 뒤척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그런 고통은 참으로 끔찍한 것이었다. 아무리 정상인이라도 그런 고통 속에서는 정신이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시 나는 늘 간호사, 기타 사람에게 “나는 정신병이 없다.”라고 설명하면서 석방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들은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직장에서 파룬궁 박해를 주관하는 과장이 날 보러 왔을 때 그에게 “나는 정신병이 없습니다. 나를 풀어주어 돌아가게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당신이 파룬궁을 연마하지 않으면 우리는 당신을 데리고 돌아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나에게 정신병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단지 파룬궁을 수련하기 때문에 이곳에 잡아두고 있음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그들이 말하는 소위 치료라는 것에 협력하지 않았고, 성급(省級) 사법기관에 감정을 받게 해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 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사법기관으로 하여금 나를 감정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급 사법기관의 감정 결과 “근본적으로 무슨 정신병이 없다.”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나는 석방되었지만, 거주지는 물론 생활기반이 없었던 관계로 고향으로 돌아가 부친의 집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이 기간에 여러 차례 직장으로 찾아가서 근무하겠다고 요구했지만, 랴오허 유전 전싱(振興) 회사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납치되어 푸순시(撫順市) 세뇌반에 감금돼 60일 동안 박해를 당했다. 그곳에서 나온 후에도 기거할 곳이 없는 나는 다시 고향 부친의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생활 수단이 없는 데다가 부친은 고령이라, 나는 어쩔 수 없이 불구의 몸을 이끌며 쓰레기를 줍고, 품팔이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는데, 대부분 쓰레기장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수거해 생활했다. 겨울에도 난방을 못 한 초막에서 거주하다가, 마지막에는 모친의 묘지 옆 움막에서 거주했는데, 큰 눈이 내린 한겨울에 얼어 죽을 뻔한 적도 있다.

그 후 다시 판진으로 왔다. 그곳은 나의 호구 거주지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먹을 것도거주할 곳도 없었다.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폐가에서 잠을 자거나 길옆에서 또는 어느 구석진 곳에서 잠을 자다가 임시 거처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중공사당 악인들의 교란으로 오래 있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악경에게 납치되기도 했다. 그러는 중에 직장에서는 나에게 다시는 영원히 직장을 찾지 않겠다는 근로해지를 하라고 핍박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 납치해서 노동교양소나 정신병원 등에 감금시키겠다고 위협했다. 나는 다시 납치되어 그런 고문 박해를 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그들의 요구대로 그곳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문으로 불구가 된 몸으로 어쩔 수 없이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고문 학대로 두 다리가 마비되어 혼자서 생활할 수가 없다

2008년 중공은 ‘베이징 올림픽’의 안전을 이유로 “일체 압도”라는 구호 하에 전국 각지에서 파룬궁수련생을 납치해 감금하는 박해상황이 심해졌다. 랴오닝성에서도 각 시에 사람을 파견해 파룬궁수련생들을 잡아들이도록 독려했다. 가오둥도 5월 하순 현지의 30여 명의 파룬궁수련생과 함께 납치돼 ‘시삼소(市三所)’에 불법으로 감금되어 박해를 당하게 되었으며, 이에 가오둥은 단식으로 항의했다. 그러자 국가보안의 악경은 혹독한 구타와 능욕적인 박해를 가했는데, 일명 호랑이 의자라는 고문 형구로 고문을 당해, 5일 만에 스스로는 활동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랬어도 판진시 공안국 국가보안 ‘610’은 판진시 노동교양소에 감금시키려고 했지만, 수감을 거부당하자, 일단 노동교양소 측에 신병을 인수하게 한 후 버려도 좋다고 승인 하여, 노동교양소 측은 가오둥을 이송한 후 즉시 길옆에 던져버렸다.

가오둥은 2009년 또 납치당해 번시 노동교양소에 감금돼 두 다리가 마비되었는데, 어떤 때에는 기억상실 증상이 나타났다. 가오둥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2008년 5월 베이징 올림픽 전에 나는 파룬따파를 수련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났고, 이산가족이 되었으며, 거주할 곳이 없는데다 생활 수단까지 완전히 잃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불법으로 납치되고 감금되어 고문과 온갖 학대를 당해 불구의 몸이 되었으므로 현재 참혹한 궁지에 빠져 있다. 나는 베이징으로 가서 대법을 위해 또 자신을 위해 공정한 평가를 요구하는 청원을 하려고 결정했다.” “돈 한 푼 없기 때문에 걸어서 가기로 했다. 판진에서 출발해 102 도로를 따라 베이징 방향으로 걸어갔다. 진저우(錦州), 진시(錦西), 싱청(興城), 쑤이중(綏中), 친황다오(秦皇島), 산하이관(山海關), 허베이 첸안(河北遷安, 탕산제(唐山界))를 거쳐 10일 넘게 걸었는데, 노정은 5백 여 킬로였다. 가는 길에 주어 먹고, 노숙했는데, 어떤 때에는 진상을 분명히 알게 된 선량한 사람이 먹을 것을 주기도 했다. 첸안을 지나게 되었다. 당시 중공 정부에서 광적으로 올림픽을 이유로 대법제자를 납치할 때였는데, 일부 친척과 친구를 통해 공안국 등 관련 부서에 석방을 요구하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나도 그들을 따라 공안국으로갔지만, 박해에 참여하고 주동한 그들은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다시 납치되어 첸안시 노동수용소에 감금당했고, 그곳에서 혹독한 구타를 당해 열흘 동안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했다. 그러나 오히려 판진 유치장으로 이송돼 계속 감금됐다. 그래도 나는 계속 단식으로 항의했다. 그들은 정신병원 의사를 불러서 정신감정을 시켰는데, 의사는 내가 말한 진상을 다 들은 후 그냥 가버렸다. 10일 후 번시 노동교소로 이송됐다.”

中共酷刑示意图:长期捆绑

중공 고문 설명도: 장기간 침대에 묶이다

“번시 노동교양소에서 8개월 동안 박해를 당했는데 매우 잔혹했다. 고문 중에도 참으로 혹독한 고문은 ‘침대 늘리기’ 고문이라는 것이었다. 2인용 침대에 눕혀 놓고 사지를 잡아당겨 늘려 고정시켜놓고, 둔부 밑에는 공기방석을 깔았는데 말은 보호대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지를 곧게 늘리는 강도를 증가시키는 수법이다. 나는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고완전히 옷이 벗겨진 채 그 고문을 당했는데, 저녁에는 모기에게 뜯기게 했고, 추울 때는 찬바람을 쐬게 했으며, 몸에 냉수, 약물을 뿌렸고, 바늘로 겨드랑이를 찌르고, 칫솔로 손가락 끝을 솔질하고, 손가락을 튕겨 두 눈동자를 가격했고, 전기 봉으로 입안에 충격을 가하고, 배꼽과 유두, 아래턱, 겨드랑이에 전기충격을 가하고, 손과 발, 발바닥 등 민감한 부위에 모두 전기충격을 가하는 고문을 했다. 어떤 때에는 2명의 악독한 경찰이 2개의 전기 봉으로 동시에 충격을 가했는데, 충격이 너무 커서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혼절했다. 그런 고문으로2개월을 보냈으므로, 나는 전신이 상처투성이라 걸을 수도 없었다.”

酷刑演示:电棍电击

고문 재연: 전기충격 가하기

“저녁에는 두 손을 침대에 채웠는데, 매일 4명이 24시간 동안 지키고 있었다. 저녁에도 소변을 보는 자유마저 없었으며, 침대에 눕게 해놓고 구타를 했다. 그 후 대대로 이감된 후 감시자 3명을 고정배치 해 놓고 매일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했다. 전신은 전부 상처투성이였고, 핏자국으로 물들어 있었다. 몸은 피골이 상접하도록 말라서 둔부조차 뾰족했다. 상처 부위에 또 상처를 당해 가만히 있어도 고통이 심했다. 그런 중에도 악인은 걸핏하면 머리를 잡아 벽에 부딪혔고 땅에 부딪히는 등 폭력을 가했다. 저녁에 소변을 볼 때도 한쪽 손을 채워놓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할 수 없이 밥그릇과 컵에 소변을 받아야 했다.”

中共酷刑示意图:殴打

중공 고문 설명도: 구타

“2개월 동안 거의 매일 구타를 당했다. 세 사람은 서로 시합이라도 하는 듯이 나를 구타했다. 어떤 때에는 구둣발로 둔부를 걷어차고, 머리를 걷어차고, 머리를 잡고 벽에 부딪히고 땅에 부딪히어 코피를 흘렸다. 그리고 손가락에 못을 박기도 했다. 일반 죄수에게 구타하고 욕을 하면 처벌을 받아야 했으나, 대법제자를 구타하면 오히려 표창받고 감형을 받는다! 그렇게 해서 나는 걸을 수 없었고 왼쪽 팔도 쓰지 못했다. 사는 게 죽는 것만 못했다. 그런데도 계속 구타와 고문으로 누차 의식을 잃었다!”

“나는 번시 노동교양소에서 지속적으로 구타와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심장 박동이 거의 정지되었는데, 당시 혈압은 제로상태로, 시체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내가 삶을 포기했다면 즉시 사망했을 것이다(이러한 상태는 나에게 한 번뿐이 아니었음). 그런 나를 본 사람은 ‘살아날 가망이 없다.’라고 생각했다. 그런 상태라면 어떤 영약으로도 사람을 살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마지막으로 무엇이 필요하냐?’라고 물었다. 나는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법공부와 연공을 하는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들은 나에게 대법 책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곧 법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비록 내가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지만, 끊임없이 파룬따파의 책으로 학습했으므로, 얼마 되지 않아 또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대법 책을 빼앗아갔으며, 또다시 고문학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6개월이 경과 됐을 때, 원래 80kg였던 체중이 40kg밖에 되지 않았다. 장기간 비인간적인 고문 박해로 전신부종, 뇌경색 등의 증상이 나타났다. 그들은 그래도 나를 풀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를 번시 캉닝(康寧) 정신병원으로 옮겨 더욱 악독한 박해를 가했다. 간호사는 나를 침대 위에 묶어놓고 독극물을 주사하고, 음식물 강제주입을 시켰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으며, 다리가 마비되어 걸을 수 없게 되었고, 기억 상실과 흐리멍덩한 정신상태가 지속되기도 했다. 그곳 정신병원에서 20여 일 동안 있었다. 건강상태가 극히 좋지 않은 관계로 번시 노동교양소에서는 불구인 나를 하이청으로 끌고 가서 현지 파출소에 인계하려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들은 나를 내 여동생의 의류상점으로 업고 가서 던져버린 후 차를 몰고 도망쳤다.”

“나는 밖에 나가 죽을지라도 여동생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여동생의 집에서 기어나갔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딸이 그리워서였는지 하이청에서 판진으로갔다. 그러나 이미 몸은 완전히 마비 상태라 대소변마저 가릴 수 없는 처지이므로 어떻게 딸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갈 곳이 없었다. 중공의 연좌제 정책 앞에서 나를 받아들인다면 그들도 보복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밤에는 쓰레기통 옆에서 자고, 배고프면 쓰레기통을 뒤졌다. 시장 안의 쓰레기통을 찾기 위해 교외에서 1km 길을 한밤중까지 기어갔다. 다행히길에서 장인(이혼한 처의 친정아버지)을 만났다. 딸의 소식을 묻자, 모든 게 좋다는 것을 알았다. 불구의 몸으로 장인에게 절을 하며, 나의 딸을 보살펴 주고 있음에 감사를 드렸다.”

“내가 시장의 쓰레기통 옆까지 기어갔을 때는 조금도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도 배고팠기 때문에 쉴 생각도 못 하고 즉시 쓰레기통을 뒤졌다. 오리 뼈, 과일 껍질, 야채 잎 등은 모두 내 배를 채울 수 있는 것들이었다. 먹고 나면 쓰레기통에서 흘러나온 불결한 물에 더러워지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바지 안에 남긴 똥오줌도 처리하지 못한 채 쓰레기통 옆에서 기대어 밤을 지냈다.”

거듭 감옥에 들어가 박해로 사망하다

2009년 4월 13일경 가오둥을 알고 있는 사람의 목격에 의하면, 가오둥은 판진시 싱룽타이구의 모 채소 시장의 한구석에서 몸을 움츠리고 떨면서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몸은 매우 허약했으며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저 겨우 기어서 다닐 정도였는데,몸에서는 온통 고약한 구린내를 풍겼고, 많은 사람이 에워싸고 구경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가 파룬궁을 연마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아 저렇게 됐다.”라고 알려주자 모두 중공에 대해 욕설을 했다고 했다. 가오둥은 박해로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고, 스스로 혼자서는 생활을 유지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 후 몇 명의 파룬궁수련생이 그를 집으로 데려가서 보살펴 주었으므로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으므로, 2011년 설을 쇠기 전 하이청 고향으로 돌아갔다. 소식에 따르면, 가오둥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얼마 되지 않아, 판진의 세 들어 살던 집에서 ‘610’ 요원에게 가택 수색을 당했고, 셋집 주인과 함께 잡혀갔는데, 당시 ‘610’ 요원은 “여러분이10년 후에 다시 가오둥의 소식을 들을 수 있게 하겠다.”라고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밍후이왕의 보도에 따르면, 가오둥과 파룬궁수련생 궁언룽(鞏恩榮)은 예전에 랴오닝성 감옥 관리국 종합병원(總醫院)에서 박해를 당했다고 한다. 궁언룽은 랴오닝성 감옥 관리국 종합병원에서 2011년 12월 24일까지 박해를 당하고, 만기출소로 풀려났으므로, 추정해보면 가오둥은 2011년 12월 전에 이미 납치돼 감옥에 들어간 것으로 판명되었다. 가오둥은 선양 캉자산 감옥 3감 구역에 감금되어 단식으로 항의했으며, 계속 감옥의 위생실에 감금 돼 있었다고 한다. 감옥병원의 원장 후야오둥(胡耀東, 전출됨)은 전기 봉으로 가오둥에게 전기충격을 가했고, 교도관 왕칭후(王慶胡)는 구타를 하며 대법모독의 영상을 보도록 강요했다.

가오둥은 단식으로 항의했다가 야만적인 음식물 강제주입을 당했고, 사지는 늘 침대에 묶여 있었다. 그 상태에서 한 죄수는 교도관에게 미움을 사지 않으려고 직접 호스를 가오둥의 콧구멍에 꽂아 넣었다. 가오둥이 늘 주입 당한 묽은 음식물을 토해내게 되었고, 옥정과 판추이이(范垂義)는 판자에 대법 사부님의 이름과 대법을 모독하는 글자를 써서 그의 앞에 놓고그곳에 토하게 했고, 그들은 토해낸 음식물을 수거해 다시 주입시켰다. 어떤 때에는 음식물에 오줌을 섞어 주입하기도 했고 , 또 가오둥의 입에 비닐 주머니를 묶어놓고 토하게 하기도 했다.

가오둥은 언제나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등의 구호를 외쳤다. 감옥 주재 검찰관은 죄수들에게 “그래 당신들은 그의 입을 다물게 하지 못하는가?”라고 말했다. 교도관이 방임하고위협하고 감형 등의 유인책으로 죄수들에게 가오둥을 구타하고 괴롭히게 했는데, 특히 랴오중(遼中) 쑨더즈(孫德志)라는 한 죄수는 많은 감형을 받기 위해 더욱 심하게 괴롭혔고,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뜨거운 물병으로 가오둥의 허벅지 지지기까지 해서 큰 물집이 생기는 화상을 입히고도, 가오둥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라는 조롱과 학대를 했다.

가오둥이 단식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자, 캉자산 감옥에서는 선양 다베이(大北) 감옥병원(랴오닝성감옥 종합병원)으로 보내 10일이나 15일 동안 있게 했는데, 그곳에서도 역시 비인간적인 박해의 시달림은 더욱 심했다. 다베이 감옥 병원에서 돌아올 때는 매번 코가 시퍼렇게 멍들었고, 얼굴이 부어있고, 몸이 온통 시퍼렇게 멍들어 있는 모습이 참혹했다. 한 번은 가오둥이 다베이 감옥병원에서 돌아오자 캉자산 감옥에서는 만일의 사태를 감안해서 가오둥의 상처 부위를 촬영해 두기도 했다. 가오둥은 가족면회가 없었던 관계로 교도관과 죄수들의 박해는 거리낌이 없이 무자비했다.가오둥은 선양 캉자산 감옥에서 온갖 고문과 구타, 음식물 강제주입을 당하고, 2년 동안 침대에 묶여 있었으므로 결국 2013년 설을 쇠기 이틀 전에 사망했다.

2013년 선양 캉자산 감옥의 감옥장 류징(劉京)은 2013년 말에 사법국장으로 승진되었고, 정위 장한즈(張汗志)는 현재 감옥장이다. 부감옥장은 천밍창(陳名強), 옥정과장 마광후이(馬光輝), 3감 구역장은 멍샹위(孟祥宇) 등이다.

소식에 따르면 캉자산 감옥 제3구역에 불법적으로 감금당한 파룬궁수련생 자오청린(趙成林)이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외치고, 강제노역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추운 겨울날씨에 우물가로 끌고 가서 찬물을 끼얹었고, 파룬궁수련생 류훙쥔(劉紅軍)은 늘 3감 구역 생활담당 대장 쉬젠(許健)에게 전기 봉으로 충격을 가하는 고문을 당했다.

원문발표: 2016년 12월 31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2/31/33987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