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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이 전해지니 학성에 가없는 은혜가 내리다

치치하얼 파룬궁 수련생, 17년의 비바람 역정(1)

[밍후이왕]

머리말

1993년 7월 16일, 파룬따파(法輪大法) 창시자 리훙쯔(李洪志) 선생님께서는 치치하얼에 왕림하셔서 법을 전하고 사람을 제도하셨다. 이로부터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파룬궁은 신속히 헤이룽장성과 내몽고 각 시, 현, 촌으로 전파됐고 각계에서 큰 찬사를 받았다.

파룬따파는 중국 고대의 불가 고차원 수련대법으로서 92년 5월에 리훙쯔 선생님께서 창춘(長春)에서 전파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미 세계 100여 개 국가와 지역(대만, 홍콩, 마카오 포함)에 전해졌다. 또한, 각국에서 3천여 개의 표창장을 받았으며 파룬궁 서적은 30여종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각지에서 발행하고 있다. ‘진(眞)·선(善)·인(忍)’의 정신은 민족과 국경을 초월해 전 세계에서 보편적인 찬사를 받고 있다.

99년 7월, 이러한 고덕(高德) 대법에 대해 장쩌민은 전국 각지에서 집단학살 정책을 실시했다. 장쩌민은 파룬궁수련생을 ‘때려서 죽으면 자살로 취급하며 신원을 조사하지 않고 직접 화장한다’고 지시를 내렸다. 치치하얼시 파룬궁수련생들은 17년 비바람 속 이 검은 토지 위에서 선혈로 우주의 진리를 수호하는 위대한 역사를 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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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대법이 전해지니 학성에 가없는 은혜가 내리다

제2부: 매서운 겨울 서리와 얼음 속에서 북부 변경에 매화가 피어나다

제3부: 세인이 잇따라 각성해 수련대열에 들어서다

제4부: 맺음말

부록

제1부: 대법이 전해지니 학성에 가없는 은혜가 내리다

파룬따파 북부 강변에 널리 전해지자

큰 호수에 용과 학이 날고

선이 전파되니 도덕은 고상해져

성왕의 은택에 학의 도시 복을 받네

1. 사부님께서 치치하얼에서 법을 전하고 사람을 구도하다

치치하얼, 그 의미는 천연목장으로 아름다운 초원을 뜻한다. 청나라 강희제 시대에 별점을 치는 복규역참(卜奎驛站)을 이 도시에 설치했으며 당시 문인을 귀양 보내던 곳이기도 하다. 치치하얼은 이전에 헤이룽장성의 소재지이고 요충지다. 이 도시는 명성이 널리 알려졌는데 위치는 하늘이 높고 땅이 넓은 송연(松嫩, 송화강과 연강) 평원에 자리 잡았다. 우위얼강(烏裕爾河)이 여기서부터 세차고 호방하게 변해 큰 호수와 습지로 흘러들고, 학이 날고 인걸과 지방이 신령스럽고 기묘해 학의 도시라는 뜻의 ‘학성(鶴城)’, 또는 학의 고향이라는 뜻의 ‘학향(鶴鄕)’이라고 부른다.

이 검은 토지에서 순박하면서도 마음이 높고 크며, 의협심이 강하고 호방한 동북인들이 대대손손 자손을 널리 번성시키며 생활했다. 이 역사 깊은 땅과 여기에 살고 있는 동네 어르신과 고향 사람들, 그리고 이곳에 함께 살아가는 파룬따파 수련생들은 대법과 어떠한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일까? 자비로우신 리훙쯔(李洪志) 선생님께서는 1993년 7월 16일 치치하얼에 왕림하셔서 법을 전하고 사람을 제도해 학성에 가없는 은혜를 내려주셨다.

리훙쯔 선생님께서는 치치하얼시 뎬예(電業)문화궁에서 법을 전하셨다. 설법은 솔직하고 담백해 알아듣기 쉬웠다. 매번 공법을 가르칠 때마다 선생님께서는 아래로 친히 내려와 수련생들의 동작을 교정해주셨다. 선생님께서는 어떤 신분의 사람도 모두 동등하게 대하셨으며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참답고 자애로우며 정해진 틀이 없으셨다. 그 해 리훙쯔 선생님은 센트럴 광장 서쪽에 위치한 51호텔 301호실에 투숙하셨다. 리훙쯔 선생님은 흰 와이셔츠와 남색 바지를 입으셨는데 항상 깨끗하고 맑고 상쾌한 느낌을 주셨다. 매번 호텔 직원에게 방문을 열어달라고 하실 때면 항상 겸손하고 간단하게 “번거로우시겠지만 제 방문을 열어주세요”라고 하셨다. 호텔 직원은 이 기공대사가 체격이 웅장하고 기질이 비범하니 꼭 위대한 분일 것으로 느꼈다. 리 선생님은 누구에게나 모두 편하고 가까이 하기 쉬운 분이셨다.

'齐齐哈尔市电业文化宫。一九九三年七月十六日至二十三日,李洪志老师曾在此传法、传功。'

리훙쯔 선생님께서는 치치하얼 뎬예문화궁에서 1993년 7월 16일부터 23일까지 법과 공을 전수하셨다.

51호텔은 리 선생님께서 법을 전수하신 문화궁 근처이며 룽사(龍沙) 공원과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리 선생님은 매일 아침 룽사 공원에서 산책하셨고 수련생들의 아침연공을 지도해주셨다. 하루는 리 선생님이 공원에서 한 여성이 12,3세쯤 되는 남자아이를 업고 있는 것을 보았다. 리 선생님이 앞으로 다가가 물어보셨다. “이 아이는 왜 이런가요?” 그녀는 아이가 반신불수라고 대답했다. 리 선생님은 “아이를 내려놔 보세요”라고 하자 그녀는 “반신불수입니다”라고 다시 말했다. 리 선생님은 또 한 번 “아이를 내려놔 보세요”라고 하셨다. 그녀가 아이를 내려놓자 리 선생님께서 손으로 두 번 그를 건드렸으며 아이는 곧 일어섰다. 많은 사람들이 단번에 몰려와 에워쌌다. 모두들 놀라서 말했다. “일어섰다! 일어섰다!” 그 여성은 격동해 “저 분은 신선입니다. 감사합니다!”하며 뒤돌아 금방 감사하다는 말을 하려 했는데 그 은인은 이미 떠나버린 뒤였다.

 '龙沙公园正门、二号门'

룽사 공원 정문, 2호문

치치하얼 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룽사 공원 2호문 앞에는 언제나 한 사람이 나와 이를 뽑고 약을 파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의 약 주위에는 뽑은 이가 한 무더기 쌓여있었다. 리훙쯔 선생님께서는 ‘전법륜’ 7강의에서 여기에 대해 논술하셨다. ‘내가 치치하얼(齊齊哈爾)에서 학습반을 열 때, 한 사람이 거리에 노점을 차려 놓고 사람들의 이를 뽑아주는 것을 보았다. 보니 이 사람은 남방에서 왔는데 동북사람과 같은 옷차림이 아니었다. 오는 사람을 거절하지 않고 누가 와도 그는 모두 뽑아 주었는데, 뽑은 이가 그렇게 한 더미나 되었다.’ ‘중국 고대의 과학은 우리의 현대 서방에서 배운 과학과는 같지 않으며, 그것이 걷는 것은 다른 한 갈래 길로서 다른 상태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현재의 이런 인식방법으로 중국 고대의 과학기술을 인식해서는 안 된다. 중국 고대의 과학은 인체ㆍ생명ㆍ우주를 겨냥하여 직접 이것을 향해 연구했기 때문에 걷는 것은 다른 한 갈래 길이었다.’

이 선생님은 그 해 치치하얼에서 법을 전수하실 때 많은 파룬(法輪)을 내보내 인연 있는 사람을 찾으셨다. 한 수련생은 학습반이 시작되기 전에 파룬이 신체에서 도는 것을 느꼈는데 리훙쯔 선생님의 설법을 듣고서야 어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리 선생님은 또 친히 치치하얼에 보도소와 연공장을 설립해주셨다. 설법 마지막 날,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이 자신을 기차역까지 바래다주지 못하게 하셨다. 수련생들은 오직 뎬예문화궁 밖에서 사부님께서 지나가실 길목을 지키며 기다렸다. 사부님과 작별할 때 수련생들은 눈에 눈물을 머금고 못내 아쉬운 심정으로 사부님 일행이 망망한 밤비 속에서 점차 멀어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九九年以前,齐齐哈尔市法轮功学员在祥和宁静的炼功'

99년 박해 전, 치치하얼 파룬궁 수련생들의 평화롭고 조용한 연공 장면

사부님께서 학습반을 시작하실 때 400여 명 정도가 참가했다. 그 후 1년이 지나자 치치하얼에서는 대략 2천여 명이 파룬따파를 수련했다. 동시에 주변 내몽고 자란툰, 하얼빈, 다칭, 헤이허, 다싱안링 등 각지 시와 현, 촌으로 전파됐다. 수련생들은 ‘진(眞)·선(善)·인(忍)’을 지도로 심신이 정화되고 승화되었다. 이런 물결은 흐르는 물처럼 좋은 사람과 좋은 일이 끝없이 나타나게 했고 세인의 찬사를 받았다.

2. 51호텔 직원이 사부님께서 치치하얼에서 법을 전파하던 날을 회상

(치치하얼시 파룬궁 수련생 회고) 1993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51호텔이 막 영업을 시작했을 때 나는 호텔 직원으로 일했다. 그 때 나는 23살이었고 파룬따파를 수련하지 않았다. 당시 전국에서 기공 열풍이 대단했는데 우리 호텔에도 곧 몇 명 기공사가 와서 학습반을 개최하며 투숙했다. 하지만 인상이 최고로 깊고 가장 잊지 못하는 분은 엘리베이터 근처 301호실에 머무셨던 대기공사 리 선생님이시다. 매번 리 선생님을 만났던 행복한 시기를 생각할 때면 내심에서 기쁨이 벅차오른다.

리 선생님은 키가 크고 젊으시며 흰 와이셔츠에 남색 바지를 입으셨는데 깨끗하고 시원한 느낌을 주셨다. 줄곧 미소어린 얼굴이셨고 온화해 가까이하기 좋은 분이셨다. 다양한 연령과 직위 사람들에게 모두 똑같이 평온한 표정이셨다. 매번 내게 문을 열어달라고 하실 때면 항상 겸손하고 간단하게 말씀하셨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제 방문을 열어주세요.” 리 선생님의 방은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고 리 선생님은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셨다. 우리끼리 이 분은 대단히 높으신 분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고급 관료 같은 그런 자세가 없으셨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 리 선생님은 “여러분, 앉으세요”하시는데 사람들은 앉지 않고 공손하게 리 선생님이 앉아야 그 후에 앉았다.

하루는 야간 근무를 하게 됐는데, 아침 8시에 리 선생님 방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 몇 사람이 어떤 일로 토론하고 있었는데 나는 리 선생님께 제 몸이 좋지 않아 여기저기 아프다면서 여러 증상을 말씀드렸다. 리 선생님은 겸손하게 “조금 기다리세요. 잠시 후 조정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하셨다. 나는 한 20분 정도 기다리다가 빨리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에 가고 싶어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는 다시 문을 두드리고 선생님 방에 들어갔다. 리 선생님은 내가 조급해하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저 분을 도와 신체를 조정해드리게.” 그 제자는 나를 따라 빈방 안에 들어온 뒤 나와 마주보고 섰다. 그는 병의 원인을 보고 말했다. “나이도 어린데 생각이 너무 많네요. 어떤 일이나 너무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넓게 먹어야 합니다.” 그러더니 어떤 좋지 못한 물건이 있다고 말하면서 손으로 잡아냈다. 그는 또 “이렇게 젊으니 이후에는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생활하세요”했고 나는 “네”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한 7, 8분 지나자 갑자기 온 몸이 가벼워지고 심정이 유쾌해졌다.

이튿날 내게 몸을 조절해준 분을 찾아 돈을 얼마 드려야하는지 묻자 그는 “우리는 돈을 받지 않으니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그들이 돈을 받지 않자 나는 감격해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 다음, 집에서 수확한 토마토 등 과일을 가져다드리려 했다. 그러자 그 제자는 “괜찮아요. 당신의 마음은 우리가 받았어요. 우리는 예물을 받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7, 8일이 지나고 리 선생님 일행은 호텔을 떠났다.

1996년 고모가 나에게 법공부를 하게 했고 호텔에도 배우는 사람이 있었다. 모두 이 법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당시 내 몸도 좋지 않아 나도 대법 수련을 시작했다. 나는 편두통에 시달려 온 몸에 힘이 없고 제대로 앉지 못하고 항상 누워있었으며 빗자루도 들기 힘들었다. 하지만 수련하면서 이런 증상이 나도 모르게 없어져 나는 더욱 법에서 정진하기 시작했다. 연공장에서 단체 법공부와 연공을 하면서 나는 우주대법의 홍대한 법리에 탄복했다.

2001년 12월 30일 전날 밤에 나와 수련생은 사람들에게 파룬궁이 박해받는 진상을 말하다가 현지 파출소에 납치돼 불법으로 하룻밤 구류당했다. 당시 나는 두려움 없이 계속 발정념을 했다. 마음속으로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니 사부님께 나를 가지해주시어 나간다고 생각했고, 동시에 경찰에게 진상을 말했다. 이튿날 가족이 나를 위해 여러 방면으로 방법을 찾아 밖에서 보석 처리를 했다. 경찰은 나보고 서명하라고 하면서 내가 ‘3서나 보증서(수련 포기 각서)’를 쓰지 않고 서명하지 않으면 바로 노동교양소로 보내겠다고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3서’를 쓰지 않는다고 정했다. 내가 확고한 일념을 내보내자 갑자기 기록하던 경찰이 즉각 일어나 재빨리 필기 책을 덮으며 짜증내면서 “가!”라고 말했다. 나는 가족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매번 사부님의 미소 띤 얼굴을 떠올리면 비할 바 없는 행복에 잠긴다. 지금 나는 억에 달하는 파룬궁 수련생과 함께 대법 중에서 정진하고 중생구도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계속)

원문발표: 2016년 12월 10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대륙종합소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2/10/3387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