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최고인민검찰 국립검찰대학 여교수, 생전(生前) 고소

[밍후이왕]

1. 나는 리리(李莉)라고 부르며 1954년 9월 27일에 출생했다. 원래는 최고인민검찰 국립검찰대학 종합연구실 부교수였다. 나는 1992년에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 후, 심신이 건강했고 근면성실하게 업무에 임했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수업을 중지당한 채 격리되어 심사를 받았다. 검찰대학 책임자가 나를 공직에서 해고했다. 근무한지 24년이 된 나는 학교에서 쫓겨나야 했다. 우리 집은 몰수당해 우리 가족은 살아나갈 경제적 기초마저 없게 됐다. 2001년 1월, 나는 핍박을 견디기 어려워 유랑생활을 했다. 경찰은 나를 찾기 위해 몇 차례나 우리 아들을 파출소로 연행해 잠을 재우지 않고 심문했다. 우리 친정집과 친척도 교란 당했다. 전화는 감청당하고 우편물을 뜯어서 조사했다. 친척의 월급과 진급도 이로 인해 영향을 받았다.

2. 나는 광둥(廣東) 선전(深圳)으로 가서 유랑하면서 세인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리기 위해 나는 그곳에서 진상자료를 배포하기 시작했다. 2001년 1월 1일에 나는 납치됐고, 1개월 후 베이징으로 납치돼 돌아왔다. 스징산(石景山)구치소에서 한 경찰은 나의 뺨을 때렸고, 한 사람은 구두로 나의 다리를 사납게 걷어찼다. 내가 구타를 당한 흔적을 다른 사람이 볼까 두려웠던지 그들은 또 나의 부어오른 얼굴을 힘껏 문질렀다. 얼굴의 부기가 내린 후에야 나를 감방으로 돌려보냈다.

3. 2004년 3월, 나는 불법적으로 9년형을 선고받아 베이징 여자감옥 10감 구역으로 납치됐다. 들어간 그날부터 감옥 측은 침대에서 잠을 자지 못하게 해 나는 낡은 탁자 위에서 자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감옥장과 검찰원에 편지를 쓰려고 맘먹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가로막으며 나의 편지 발송을 허락하지 않았다.

4. 나는 매일 감방 안에서 작은 걸상에 앉는 고문을 당했다.

5. 나는 핍박을 이길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하오리라이(好利來) 월병 곽을 만들었다. 4층에서 종이박스 상자를 가져와 나 혼자 두 사람의 일을 해야 했다. 7~8월의 혹독하게 더운 날, 나의 옷은 젖어서 비틀어 물(땀)을 짜낼 수 있었다.

6. 감구역장 정위메이(鄭玉梅)는 전 감구역의 수감자들을 동원해 일상적으로 회의를 열고 나를 비판하고 투쟁했다.

7. 어느 한 번, 나는 1층 빈 건물로 끌려갔다. 교도관은 감시기를 뜯어 내리고 나에게 폐쇄식 ‘공견(攻堅)’ 박해를 진행했다. 내가 막 방안에 들어서자, 죄수들은 곧 벌떼처럼 달려들어 나를 침대 판자 위에 넘어뜨렸다. 교도관은 죄수에게 지시해 나의 등에 대법을 모독하는 글자를 쓰고, 나의 팬티 안에 대법을 모독하는 종이쪽지를 밀어 넣었다.

8. 나를 감금한 방안의 벽, 바닥, 화장실에마저 검은 먹물로 대법을 모욕하는 말을 가득 썼는데, 경찰과 죄수는 나에게 윗면의 글자를 밟도록 했다. 내가 밟지 않자, 두 명의 죄수는 곧 나의 팔을 끼고 나를 끌면서 걸었다.

9. 감구역장 정위메이(鄭玉梅)는 굽 높은 신발로 나를 밟으면서 욕설로 모욕하고 조소하며, 나에게 수련을 포기하라고 핍박했다.

10. 나는 세워두는 고문을 당했다. 두 죄수는 경찰에게 줄 털옷을 짜면서 한편으로는 나를 감시했다. 나의 다리, 발과 손마저 만두만큼 부어올라 누르면 움푹 패여 들어갔다. 255미리 신마저 나는 신을 수 없었고 오른발은 감각이 없었다. 나는 기절해서 땅에 쓰려졌다. 정신을 차려 일어나면 곧 서야 했는데, 그렇게 14일간 서 있었다. 나는 정신이 흐리멍덩해지고 방향감이 없어져 단번에 또 땅에 쓰려졌다. 넘어져 태양혈에는 큰 혹이 생겨났고 혈액이 눈을 적시고 흘러 들어갔다. 두 눈은 판다 모습처럼 되었다.

11. 죄수는 고깔모자를 만들고 윗면에 모욕하는 구호를 써서 억지로 나에게 씌웠는데, 문화대혁명 때와 똑같았다.

12. 그 후 나는 마귀 감구역 4구역으로 옮겨졌다. 4구역 복도의 벽에는 각종 법률 조목이 붙어있었다. 게다가 4구역에서는 또 불교를 크게 외쳤고, 텔레비전 중에는 모모 스님이 말한 이른바 설법을 방송했다. 그리고 도서실에는 불상을 걸어놓고 향을 피웠다. 감구역장 류잉춘(劉迎春)은 파룬궁수련생에게 강제로 불교를 믿도록 핍박했다. 나에게 불교 지식을 베껴 쓰도록 요구하여, 나는 낮에 하루 동안 베꼈다. 저녁에 모두 잠을 자게 되어 불을 껐는데도 계속 베껴야 했다. 어떤 때에는 밤을 새워 베껴 썼는데, 손이 뻣뻣해지고 마비되었다. 마지막에는 팔마저 마비되었다. 어떤 때에는 정신이 흐리멍덩해져 막 눈을 감으면 곧 벽에 부딪혔다.

13. 그 후 나는 핍박을 이길 수 없어 노예 노동—젓가락을 포장하는 일을 했다. 마치 기계처럼 끊임없이 했는데, 감히 태만하지 못했고 감히 물도 마시지 못했으며, 또 감히 화장실도 가지 못했다. 나의 얼굴색은 누렇게 떴고 혈뇨하기 시작했으며 몸에는 부종 증상이 나타났다.

14. 출소한 후, 나는 퇴직금이 없고 최저 생활보증금도 없었다. 거주할 곳이 없게 되어 나는 또 유랑생활을 했다. 9년의 감옥살이와 1년 넘는 유랑생활은, 나로 하여금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게 했다.

(주해:2015년 11월 6일 점심, 리리는 베이징 창핑(昌平)의 임시 셋집 방안에서 사망했는데, 향년 62세였다.)

문장발표: 2016년 8월 15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8/15/33281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