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밍후이왕통신원 후난 보도) ‘네 명의 우람한 체격의 사내가 내 옆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자를 메고 지나갔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내 남편이었다. 당시 나는 즉시 기절했다.’ 이 글은 후난성 자허현(嘉禾縣) 초등학교 교사 리쥐메이(李菊梅)가 작년 6월 최고인민검찰원에 제출한 장쩌민에 대한 ‘형사고소장’ 중에 남편이 박해로 사망한 정경을 서술한 것이다. 4개월이 지난 후 리쥐메이는 다시 납치됐고 불법적인 7년 징역 판결을 받았다.
리쥐메이는 자허 주취안완(珠泉完) 소학교 교사인데 남편 궈후이성(郭會生)과 함께 파룬궁을 수련했다.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에 대한 17년 동안의 잔혹한 박해 중에서 리쥐메이는 여러 차례 납치, 감금당했다. 2009년, 남편 궈후이성은 경찰의 고문과 학대로 사망했다. 리쥐메이는 2015년 6월 1일에 최고인민검찰원에 ‘형사고소장’를 제출하여 원흉 장쩌민을 고소했고 그의 책임을 추궁하라고 요구했다. 소식에 따르면, 사당(邪黨) 천저우(郴州)시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부서기 리야빈(李亞斌)은 부끄럽고 분개한 나머지 리쥐메이를 감옥에 가둬넣겠다며 소란을 피웠다.
2015년 10월 23일 오후, 리쥐메이는 거리에서 경찰에게 납치됐다. 자허현 법원에서는 차례로 2015년 11월 17일, 12월 10일, 2016년 5월 27일에 세 차례나 재판을 진행했고 이후 리쥐메이에 대해 불법적인 7년형 판결을 내렸다. 리쥐메이는 천저우시 중급인민법원에 항소했다.
리쥐메이는 ‘형사고소장’ 중에서 박해당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장쩌민의 파룬궁 박해는 중국 법률을 위반했다. 형법 규정에 근거하면 장쩌민은 직권남용죄, 모함죄, 비난죄, 국민의 신앙을 불법적으로 박탈한 죄, 감옥관리장소 학대죄를 저질렀다. 이 때문에 나는 최고인민검찰원이 범죄 혐의자 장쩌민을 기소할 것을 신청하며 그를 법에 따라 추궁하도록 고소하는 바이다.
2000년 8월 19일, 국가보안대대 왕서칭(王社淸)은 한 무리 경찰을 거느리고 밤중에 우리 집에 들이닥쳐 나를 구치소로 납치한 다음 40일 동안 박해했다. 그리고 가족에게 생활비 400위안을 내라고 강요했고 4천 위안을 갈취했다. 같은 해 강제로 보름 넘게 파출소에서 조직한 세뇌반에 감금했고, 아울러 1천 위안의 벌금을 부과했다.
2000년 10월 말, 나와 샤오얼펑(肖二鳳)은 천저우의 친구 덩궈쥔(鄧果君)의 집에 손님으로 갔다. 저녁 8시,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이었는데 소름이 엄습했다. 천저우 공안 무리 악인들은 덩궈쥔의 집에 들이닥쳐 어떠한 증명서도 꺼내 보이지 않은 채 불법적으로 가택을 수색했다. 게다가 우리 세 사람을 천저우의 어느 파출소로 납치해 따로따로 박해했다. 나를 철창에다 매달아 채워놓고 몸에 지닌 3백 위안밖에 없는 돈을 강탈했다. 밤중이 되자 자허 국가보안대대의 왕서칭은 나를 천저우에서 자허 파출소로 납치해 박해했다. 두 손을 복도 창턱에 채워두었는데 살을 에는 북풍이 불어와 차디찬 빗물이 얼굴과 몸으로 흩날렸다. 이렇게 덜덜 떨면서 하룻밤을 보냈다. 전신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팠고 두 손은 수갑이 채워져 붉게 부어올랐고 게다가 새빨간 피와 살을 볼 수 있었다. 이튿날 간부들이 출근하자 나를 조리돌림했다. 국가보안대대 왕서칭은 또 군중 앞에서 나를 모욕했다. 오후 나를 구치소로 납치해 계속 박해했는데 6개월 동안이나 박해했다. 6개월 동안 월급 지급을 중지 당했고 5천 위안의 벌금을 부과 당했다. 같은 해 남편도 창사(長沙) 신카이푸(新開鋪) 노동교양소로 보내져 2년 동안 박해를 당했다. 가련한 두 딸은 보살펴 줄 사람이 없었다.
2002년 10월, 나는 교실에서 수업을 하는 중에 ‘610’직원에게 유치장으로 납치돼 40일 동안 박해를 당했다. 동시에 남편도 직장에서 유치장으로 납치돼 1개월 넘게 박해를 당했는데 치욕을 당할 대로 당했다. 남편은 1개월 넘게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했다.
2004년 2월 1일,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계속 나를 핍박하는 것을 피하려 부득이 유랑생활을 시작했다. 9월 27일, 판장(盤江)에서 세인에게 진상을 알리다 판장 파출소에 의해 판장향 진정부로 납치돼 박해를 당했다. 쾅펑(鄺峰)이라고 부르는 간부에게 구타를 당해 코가 시퍼렇게 되고 얼굴이 부어올랐다. 밤중에 자허 국가보안대대 왕서칭은 ‘610’ 간부 리젠밍(李建明) 등을 거느리고 판장 향진(鄉鎭)으로 와서 나를 현 ‘610’사무실로 납치했다. ‘610’ 주임 리런싼(李任三)은 명령을 내려 나를 나무 의자에 채우게 했다. 저녁에 나를 검고도 좁은 어두운 방으로 보내서 고문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연속 3박3일 동안 잠을 못 자게 하고 72시간 동안 세워두는 고문을 가했으며 내 인생을 공격하며 악담했다. 꼬박 3일 동안 나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마시지도 못해 몸은 매우 허약했다. 넷째 날 아침, ‘610’ 부주임 레이옌샤오(雷衍孝)는 나를 구치소로 납치해 1개월 넘게 박해한 후 후난 바이마룽(白馬壟) 노동교양소로 납치해 1년 6개월 동안 박해했다. 노동교양소로 보내기 전, 구치소의 부소장 허투스(何土石)는 나에게 수갑과 무거운 족쇄(육체 학대를 실행했음)를 채웠다. 노동교양소에서는 노역으로 상품을 생산했는데 매일 임무는 심히 과했다. 그리고 24시간 동안 바오자(수감자로 이뤄진 감시원)에게 감시를 당했다. 박해 기간에 전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동교양을 연장’하는 처벌을 받았고 삼복 무더위에 뙤약볕을 쪼이게 했다.
2007년 7월, 나는 ‘610’, 국가보안인원에게 강제로 구치소로 납치돼 불법 감금을 당했다. 6개월 후 직접 노동교양소로 보내져 1년 6개월 동안 박해를 당했다. 노동교양소에 도착하자 직접 ‘공견대(攻堅隊)’로 보내져 잔혹하게 박해 당했다. 먼저 나를 화장실에 가두고 108일 동안 박해했는데 밤을 새우며 세워두는 고문을 가해 잠을 못자게 했다. 감시원은 바르게 서지 않았거나 눈꺼풀을 감는 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 기간에 온몸이 심하게 여위었고, 하반신은 부종 증상이 나타났으며, 발바닥은 충혈되고 파열돼 피가 흘렀다.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어 10분을 서있기도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녁에 두 시간 잘 수 있었는데 또 계속 세워두는 고문을 가했다. 이렇게 화장실에 가두고 108일 동안 박해한 후에는 방안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박해했다. 24시간 동안 감시원이 지켰는데 일말의 자유도 없었다. 방안을 반걸음도 떠나지 못하게 하고 화장실 가는 것마저 통제했다. 사악의 어떠한 요구에도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견대’에서 꼬박 1년 넘게 박해를 당했다. 형기가 만료돼 집으로 돌아가자 가족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2009년 8월 6일 저녁, 나는 수련생 랴오훙추이(廖紅翠)와 함께 자허 빙쉐(丙穴) 공원에서 놀다가 국가보안에게 파출소로 납치돼 불법 심문을 당했다. 국가보안대대 후융후이(胡永輝)와 ‘610’간부는 내 집을 수색했는데 집안에서 11만 위안의 저축 통장, 현금 3천여 위안, 자전거 두 대, 컴퓨터 한 대, 프린터 한 대, CD-RW 한 대를 강탈했다. 게다가 남편 궈후이성도 파출소로 납치해 박해했다. 나와 랴오훙추이가 체구가 우람한 사내 네 명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자를 메고 내 옆을 지나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내 남편이었다. 당시 나는 즉시 기절했다. 세상에, 이것은 무슨 세상인가! 단지 ‘진선인(眞善忍)’을 믿어 좋은 사람이 되려 했을 뿐인데 이렇듯 잔학한 박해를 당하다니 참혹해 차마 볼 수 없었다.
이러했을지라도 경찰은 여전히 단념하지 않았다. 이튿날 이른 아침, 우리 두 부부를 구치소로 납치해 계속 박해했다. 구치소로 간지 2개월도 되지 않아 남편은 무참하게 살해됐다. 아들을 보낸 80여 세의 두 노인은 죽도록 울었고 두 딸은 자애로운 아버지를 영원히 잃었다. 구치소에서 나는 눈물을 줄줄 흘렸고 마음이 칼로 후벼파듯 아팠다.
심각한 정신적 학대로 짧은 2개월 사이에 나는 몇 번이나 위험해졌다. 갑자기 음부에서 큰 출혈 증세가 나타났다. 며칠 동안도 멈추지 않아 심각한 빈혈 상태에 빠졌다. 끝내 땅에 쓰러졌고 질펀한 핏물 속에 쓰러졌다. 병원으로 보내졌는데 자궁암 진단이 내려졌다. 법원에서는 그제야 나를 보석해 집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예전에 구치소에 5차례 납치당했고, 세뇌반에 두 차례 갇혔으며, 두 차례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1만 위안이 넘는 거액의 벌금을 당했고, 9년 넘게 월급이 지급중지 당했다. 2014년 11월에 퇴직 연령이 되었으나 또 ‘610’ 주임 장츠페이(張翅飛)에 의해 퇴직권을 박탈당했다.
우리 가정은 단지 ‘진선인’을 믿은 것 때문에 박해로 가정이 파괴되고 가족이 죽었다. 나는 위로는 80여 세 노인을 보살펴드려야 했고, 아래로는 가정을 이루지 않은 딸이 있는데 나는 생활력이 없다. 박해를 당한 10여 년 동안 우리 전 가족은 매우 곤궁하고 처참한 생활을 했다.
(역주: 관련 박해 기관과 직원 정보는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6년 7월 15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7/15/33139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