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밍후이왕통신원 산둥보도) 2월 29일, 산둥성 더저우(德州)시 치허현(齊河縣) 파룬궁수련생 황위핑(黃玉萍), 웨이러성(魏樂生)은 시골 재래시장에서 사람을 구하는 진상자료를 배포할 때, 신청(新城)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돼 더저우시 유치장에 감금됐다. 원래 3월 16일 즉 보름 후에 석방한다고 정했으나, 3월 16일 가족이 면회하러 갔을 때에 황위핑과 웨이러성은 오히려 3월 15일에 더저우시 구치소로 보내졌다. 4월 21일에 그들은 불법 체포령을 받았다.
파룬궁수련생 황위핑(여, 대략 61세)은 원래 치허현 농촌 신용합작사 직원으로, 원래는 행복한 가정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한 17년 동안 그녀는 납치, 가택수색, 세뇌, 갈취, 강제로 이산가족이 된 고통을 당했고, 또 3차 노동교양처분 및 각종 고문 박해를 당했다.
2월 29일, 황위핑과 웨이러성이 납치당한 후, 황위핑이 거주하는 집의 자물쇠가 열려져 방안이 아수라장이 됐는데, 국가보안경찰의 행위로 짐작된다. 구치소로 가서 불법 심문을 진행한 경찰 두 명 중 한 사람은 천하오(陳浩)라고 부르고 다른 한 사람은 위원빈(余文彬)이라고 부른다.
3월 16일, 가족은 더저우시 유치장으로 마중하러 갔다가 성사하지 못한 후 치허현 신청 파출소로 급히 돌아가 책임자 천하오에게 “무엇 때문에 만기가 되어도 석방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구치소에 옮겨 감금했는지” 물었다. 쑨하오 등 경찰은 그들에게는 석방 결정권이 없다며 이것은 완전히 ‘상부의 의견’이라며 책임을 미뤘다.
1개월 넘은 후인 4월 21일, 황위핑과 웨이러성은 치허 검찰원에 의해 불법 체포령을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더저우 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해 있다. 그 기간, 이 경찰들은 또 여러 차례 웨이러성의 누나 집으로 가서 소란을 피웠는데 심지어 그의 누나를 납치하려 했다. 그의 누나 가족의 강력한 저지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파룬궁은 심신을 건강하게 하고 도덕성을 향상시킨다
1996년 말, 한 우연한 기회에 황위핑은 친척 집에서 ‘전법륜(轉法輪)’ 책을 보았다. 파룬궁은 사람에게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도덕이 고상한 사람으로 되고, 일을 함에 다른 사람을 배려해 주며, 일에 마주치면 안으로 찾도록 가르친다. 이 법리는 그녀에게 이것이야말로 사람으로 되는 바른 길임을 깨달게 했다. 이 시끄러운 속세에서 그녀는 마침내 정토를 찾아냈다.
황위핑은 원래 치허현 둥팡(東方) 가구공장에서 공장장을 맡았을 때 공장의 인테리어 재료를 사용해 자신의 집을 꾸미고도 돈을 지불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오늘날 사회에서 흔히 있는 현상이다.
대법을 배운 후 이 일은 돌처럼 황위핑의 마음을 눌렀다. 그녀는 마땅히 대법의 요구에 따라 좋은 사람으로 되어야 하며, 작은 이익을 탐내 공공 이익에 손해를 끼쳐 자신에게 이롭게 하는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서 6~7천 위안의 돈을 꺼내 전 직장으로 가서 금액을 지불했다.
근무와 생활 중에서든지를 막론하고 황위핑은 ‘진선인(眞ㆍ善ㆍ忍)’을 동화함을 모든 작은 일과 관통시켰다. 상대방 각도에서 더욱 많이 배려하고 남편을 선하게 대하며 아들을 매우 사랑했으며 시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었다. 그녀의 위장병과 산후풍으로 생긴 요통은 연공 중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두 나아졌고 일가족은 행복했다. 이 일체의 개변은 모두 대법에서 이로움을 입은 것이었는데 그녀에게 생활의 아름다움과 심령의 승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공법, 이렇게 좋은 사람은 오히려 장쩌민 집단에게 ‘육체적으로 소멸하고, 명예를 더럽히며, 경제적으로 파산시키는’ 각종 비인간적인 학대를 당했다.
좋은 사람은 박해를 당하고 가정은 강제로 이산가족이 되다
1999년 7월 20일 박해 후, 황위핑은 감시당하고 전화도 감청당했으며, 차례로 1만1천 위안을 벌금으로 내야했다. 황위핑의 남편은 현 정부에서 근무하는데 정법위를 맡은 쉬(許) 현장이 마침 그의 책임자였다. 현 대회에서 쉬 현장은 몇 차례나 그녀 남편을 비난하며 압력을 가했다. 게다가 집안에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아이가 대학교에 다니고 입대함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등으로 협박했다. 이로 인해 남편은 극심한 압력으로 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심신이 지쳤다. 결국 어찌할 방도가 없게 되자 이혼을 제기했다.
1999년 10월 18일 아침밥을 다 먹고 황위핑이 집에서 집안일을 하고 있었는데 공안국의 둥창(董強), 장궈펑(張國峰) 등이 차를 몰고 그녀 집으로 왔다. 공안 인원이 협박 하에 황위핑은 경찰차로 민정국으로 끌려가 이혼협의서에 강제 서명했다.
둥창, 장궈펑 등은 이어서 그녀를 유치장으로 보냈다. 3일 후 황위핑은 또 직장, 공안에 의해 현 복무루(服務樓)로 납치돼 7일 동안 강제 세뇌를 당했다. 그 후 쉬 현장의 생질녀는 쉬 현장과 다른 사람과의 중매 하에 황위핑의 남편과 결합했다. 이렇게 되어 황위핑의 원래 행복하고 화목하던 가정은 억지로 이산가족이 됐다.
3년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아 매달아 채우기, 냉동 박해를 당하다
2000년 10월 1일, 황위핑은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위해 청원하러 베이징으로 갔다가 치허현 공안국에 의해 현지 구치소로 압송됐다. 11월 3일, 산둥 제2여자노동교양소로 납치돼 3년간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황위핑은 왕춘(王村)노동교양소 3대대에 감금됐고 그곳의 지옥 같은 나날에 황위핑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박해를 당했고 그녀의 심신은 큰 손상을 입었다.
2000년 11월 4일 점심, 운동장은 온통 혼란했는데 많은 파룬궁수련생이 그곳으로 납치돼 한 사람씩 전기 충격을 당했다. 전기봉의 전류는 ‘지직’ 소리를 내며 파룬궁수련생의 육체를 고문했다. 기타 대법수련생은 평화롭고 이성적으로 운동장으로 납치된 파룬궁수련생을 석방하도록 요구했다. 여경 샤오아이화(肖愛華)는 무척 화가 나서 전기봉으로 가져다 직접 나섰다. 강압 전기봉은 푸른색 불꽃을 뿜으며 파룬궁수련생의 몸을 지졌는데 전기충격으로 상처투성이가 되고 피부가 전기에 타서 눌러 붙은 냄새가 방안에 자욱했다. 이때의 여소장 왕쥔(王君)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또 남자 경찰을 불러와 계속 빈주먹인 여성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잔인무도한 유혈 폭행을 실시했다. 여러 명 수련생이 격리실로 끌려갔는데 온통 전기봉 소리였다. 황위핑도 격리실로 끌러갔다. 그녀의 윗옷 단추, 윗옷 소매와 옷깃이 찢겨졌다.
12월에 아침 연공을 한 것 때문에 황위핑은 또 영창실에 갇혀 박해를 당했다. 영창실은 임시 시공한 작은 단층집이었다. 방안마다 2평방미터도 되지 않았고 문과 창문에는 유리가 없어 한겨울에 물방울이 떨어지면 바로 얼음이 됐다. 영창실 내에는 특수 제작한 고문 침대가 있었는데 1미터 쯤 높이로 침대 위에 쇠고랑으로 땜질해 놓았다. 당시 큰눈이 내리고 북풍이 윙윙 불었다. 그녀는 솜옷도 입지 않고 솜신도 신지 않았으며 손은 거꾸로 고문 침대 주변에서 높이가 1미터쯤에 있는 쇠고랑에 채워졌다. 이렇게 손을 채워놓으면 발끝만 땅에 닿을 수 있고 뒤꿈치는 들려 있어 체중이 전부 발끝 위를 눌렀다. 만약 뒤꿈치를 땅에 붙이면 손목은 수갑에 조여져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팠다. 심지어 뼈까지 조여졌다. 머리는 지면에서 거의 40여 센티미터인 거리까지 숙여졌고 발끝과 매달린 손은 잡아당겨져 한 갈래의 직선을 이루었다. 더군다나 추위에 떨어 잠시 후 전신은 지각을 잃는다.
황위핑은 이와 같은 강압적인 환경과 고문 학대 하에 정신이 흐리멍덩한 상황에서 이른바 ‘연공하지 않는다’는 보증서를 썼다. 그러나 엄격한 관리실을 떠나 이어진 것은 더욱 잔인무도한 정신 학대였다. 매일 장쩌민 집단이 꾸며낸 대법을 모독한 동영상을 보게 했는데 한편을 보면 곧 한 차례 ‘사상 보고서’를 쓰도록 핍박했는데 반드시 사악이 규정한 의미에 따라 써야 했다.
그 경찰들은 매번 폭력을 사용한 후 사람에게 정신적으로 극심한 공포감이 들게 했다. 사악한 중국공산당의 세뇌와 정신적 통제는 황위핑에게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하게 했다. 내심의 고통은 더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밤낮 늘 악몽 속에서 놀라서 깼다.
2002년 3월 14일, 황위핑은 마침내 이 인간지옥에서 걸어 나왔다. 노동교양소 그 소굴은 떠났으나 직장(치허현 합작사)에서 무리하게 해고당했다. 그녀는 현 후관향(胡官鄉)합작사에서 임시공으로 일할 때 직장에 의해 연금당했다. 그 후 황위핑은 현 공안국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직장의 불법 행위와 왕춘 노동교양소에 있던 기간에 자신이 당한 각종 비인간적인 학대를 하소연했다. 뜻밖에 이로 인해 공안국에 의해 더저우시 궈타이(國泰) 세뇌반으로 납치돼 정신적인 학대를 당했고 그들은 ‘진선인(眞善忍)’ 믿음을 포기하도록 핍박했다. 그 후 또다시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당했다.
거듭 1년 6개월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받아 노역, 세워두기 고문, 구타를 당하다
2003년 4월 7일, 황위핑은 지난(濟南)사 장수이취안로(漿水泉路) 20호에 위치한 산둥 제1여자노동교양소로 납치돼 1년 6개월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처음에는 3대, 2대에 감금돼 강제 세뇌를 받았다. 그 후에는 5대대에 감금당했다. 제5대대는 또 ‘엄관(嚴管) 집중훈련대대’라고 불렀는데, 이 대대에는 매음, 도둑을 한 자 및 대법을 굳게 수련하는 수련생을 감금했다. 우두머리는 왕수전(王淑貞)이고 부대대장은 왕웨야오(王月瑤)와 장훙(張宏)이었다. 그녀들은 늘 감형을 미끼로 노동교양 인원을 조종하고 지시해 대법수련생을 학대하고 모욕했다.
황위핑은 핍박에 못 이겨 악랄한 환경 하에 노예 노동에 종사했는데, 게다가 노동 강도가 극히 컸다. 아침 6시부터 저녁 10시, 12시까지 심지어 더욱 늦게까지 일했다. 장시간 박해를 당했던 이유로 2004년 3월 초 어느 날, 황위핑은 갑자기 매우 괴로웠다. 의료인이 심전도를 검사했는데 심장 박동이 120이고 혈압은 110/160에 달했다. 경찰 왕수전은 황위핑이 앉은 자세가 좋지 않다는 구실로 노동교양 죄수 쑨샤오훙(孫曉紅)을 지시해 구타했다. 황위핑의 머리는 강제로 땅에 눌려졌는데 머리에는 순식간에 큰 혹이 생겨났고 목은 비틀려 삐었으며 코는 구타로 피가 흘렀다. 경찰 마원쥐안(馬文娟)은 바로 한편에서 쑨샤오훙이 악행을 저지름을 보고 있었다. 게다가 쑨샤오훙을 지시해 테이프로 황위핑의 입을 봉했다.
5월 중순, 황위핑이 있는 팀은 집단적으로 영창실에 갇혔는데 4개월 넘게 갇혔다. 그 기간 잠을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밥을 먹고 물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대소변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워두는 고문을 가해 차렷 자세로 서있게 했는데, 다섯 손가락을 한데 모아 바지 솔기위에 놓이게 했다. 매일 아침 6시부터 저녁 10시 이후까지 세워두었다. 황위핑은 바로 이러한 환경에서 심신의 학대와 노예노동 박해를 당했다. ‘진선인’을 굳게 믿었다는 이유로 3개월 동안 불법적으로 기한을 초과한 감금을 당했고 2004년 12월 15일에야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다.
세 번째로 2년 3개월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하다
2008년 3월 31일, 황위핑은 치허현 정부 소재지 훙웨이(宏偉) 과일가게에서 가게 주인에게 진상을 알리다가 가게 주인의 딸에 의해 악의적인 신고를 당했다. 황위핑은 당시 현 공안국으로 납치당한 후 더저우 구치소로 납치돼 감금당했다. 점심 12시 30분, 현 국가보안대대 황지룽(黃吉龍), 쉬페이융(許培勇)은 ‘사회법률 실시를 어지럽힌 죄로 구류된 증명서’를 꺼내보이고 불법적으로 가택 수색을 진행했다.
4월 14일, 황위핑은 지난 장수이취안 노동교양소로 보내져 2년 3개월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해 거듭 박해를 당했다. 그 기간에 가족에게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노동교양소에서는 단지 그녀 가족이 돈을 보내는 것만 허락했을 뿐인데 말로는 황위핑에게 병을 치료해 준다고 했다. 황위핑은 파룬궁을 수련한 후 건강을 얻어 몸은 줄곧 건강했었다. 이것은 모두 노동교양소에서 황위핑에 대해 실시한 박해로 조성된 것이다.
문장발표: 2016년 7월 16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7/16/33142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