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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가장 진실한 사람이 되고, 가장 아름다운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밍후이왕] -세실리아(CECILIA)는 미국에 거주하는 중국대륙의 전직 공직자로, 미국에 오기 전 파룬궁(法輪功)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었지만 깊이 있게 알지는 못했다. 그는 의혹과 호기심을 갖고 그녀가 평소 마음에 품고 있던 선(善)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뉴욕에서 전 세계파룬궁수련생 1만여 명이 참가한 ‘2016년 5.13퍼레이드’에 참가했다.

그녀는 많은 파룬궁수련생과 직접 접촉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감동시킨 대법과 선념을 글로 썼으며, 그 글을 자신처럼 ‘가장 진실한 사람이 되고, 가장 아름다운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메시지로 보냈다.-

글/ 세실리아(Cecilia)

그대 가장 진실한 사람이 되고, 가장 아름다운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나는 뉴욕에 온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이번에 파룬궁수련생들과 만났던 일을 회상하면 아직도 마음이 설렌다.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대법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자를 차별대우하지 않았으며 또 그들을 박해하는 공범자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퍼레이드 대오에서 수천수만의 원위(文宇) 오빠처럼중국대륙에서 이유 없는 박해를 당한 선량한 영혼들을 마주 대했을 때, 몹시 괴로웠고 또 몹시 부끄러웠다.

나는 다른 사람의 사랑 이야기 때문에 슬퍼했고, 또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인터넷을 통해사연을 알고 기꺼이 도와주는 사람 때문에 감개무량했고, 심지어 고속도로에서 식당에 팔려가려는 고양이와 개들을 보고 화를 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과 이상을 품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한 적이 없고, 심지어 그런 (중공의) 거짓말들을지금까지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모든 일에 개의치 않았고 중립을 지키는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냉담함 역시 살인을 할 수 있는 예리한 무기라는 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침묵을 선택한 것은 살인자와 함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바이런(百忍)을 죽이지 않았지만, 바이런은 오히려 나 때문에 죽었다”는 이런 슬프고 처참함이 금방 내 가슴을 메웠다……

우연히 알게 된오빠

내가 최초로 파룬따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을 회상하려면 2013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당시 나는 중국에서 오전 9시에 출근하고 오후 5시에 퇴근하며 밥이나 먹으며 때로는 바쁘게 살아가는 그런 평범한 삶을 살아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훌륭한 한 오빠를 알게 됐다. 나는 아직도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온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게 어려 봄바람이 스쳐가는 듯 했으며, 길을 걸을 때는 발아래에서 바람이 이는 듯 했다. 그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 2013년 션윈공연 시디를 주면서 재삼재사 꼭 보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당시 나는 그 만남이 대법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를 아는 사람은 모두 내가 문학소녀라고 알고 있었다. 그때 션윈 시디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바빠서 즉시 보지 못했다. 그걸 본 것은 2013년 말이었는데,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심한 스모그 현상 때문에 집안에 있을 때였다. 그날 오후 선녀 같은 무용수의 난이도 높은 무용동작의 사진을 보고 불현듯 보고 싶었다. 즉시 이웃집에서 DVD를 빌려다시청했는데 참으로 흥미진진했다. 다 보고 나서 시디 뒷면에 기재돼 있는 안내문을 보고 인터넷에 접속하려고 했지만 놀랍게도 404개의 차단벽이 설치돼 있었다. 온갖 시도 끝에 방화벽을 돌파하고 나서야 그것이 파룬궁(法輪功)임을 알게 됐다.

나는 ‘파룬(法輪)’을 알고 나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파룬궁을심하게 탄압했던 그 몇 년간의 시기는 마침 내가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때여서 많은 숙제의 부담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한 인생행로의 바쁜 시기였고,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매체의 보도를 즐겨보지 않았던 관계로 세상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다만 당시 언론매체가 하늘땅을 뒤덮을 듯이 파룬궁을 모독중상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으며, 또 그런 언론보도를 보고 사람들이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어떠하다”고 늘 하는 말을 들었을 뿐이고, 또 중학교당위원회서기가 파룬궁을 연마했다는 이유로 면직됐지만 그는 광적이거나 타인을 해칠 수 있는 무슨 거동을 하지 않은 매우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누구에게 완전하게 세뇌됐거나 광적인 행동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션윈 공연 시디를 시청하고도 차분하고 냉정했으며, 그 냉정함이 결국 감탄으로 변했다. 어렸을 때 몇 년간민속무용을 배운 적이 있기 때문에 무용에 대한 감수가 남아 있었다. 중공이 국내에서 대법말살정책을 펴는 가운데 이렇듯 큰 규모의 순회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온갖 간난신고를 겪었을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법은 이런 형식으로 진경(真經)을 전파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불요불굴의 저항이 사람에게 힘과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존경심이 일어났다.

나는 이 기간 내내 그 오빠와 개인적으로 좋은 교제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에게 대법과 관련된 내용의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진정한 교제는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고 상대방의 일체를 존중하는 것이다. 어느 날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니 문손잡이에 분홍색 주머니가 걸려 있었다. 주머니를 열어보니 안에는 2014년 션윈공연 비디오가 들어 있었다. 여러 차례 오빠에게 “그걸 보냈느냐?”고 물었지만 그때마다 “내가 아닙니다. 아마 신의 뜻일 것입니다.”라고신비한 대답만 했다. 나는 오늘날까지 겪은 여러 가지 수수께끼 중의 하나는 바로 그날그 분홍색 주머니 속의 비디오였다. 누가 보냈든지 간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누군지 모를 그의 호의를 저버리지 않고 그 비디오를 시청했다.

캘리포니아 햇빛 아래의 한 무리 사람들

나는 지난 해 9월 홀로 미국에 왔다. 얼마 안 되어 로스앤젤레스에서 대법활동이 있게 되자, 오빠가 미국 동부지역에서 항공편으로 로스앤젤레스에로 왔다(그는 이미 미국에 온 지 1년 됨). 대법활동이 끝난 후 그와 만났다. 당시 내가 먼발치에서 그를 발견했는데, 그는 무슨 부침개 같은 걸 먹으면서 여러 수련생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온 몸에 캘리포니아의 햇빛을 받으며 열정, 낙관, 선량함, 감미로운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순간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파룬궁은 이런 것인가?!’

여전히 어리둥절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오빠가 다가와서 말했다. “아직 식사 안 하셨죠? 우리 어디 자리를 찾아 앉읍시다.” 우리는 부근의 간이음식점을 찾아 들어가 음식을 주문하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에게는 아마 아주 훌륭한 어떤 묵계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대법 옷을 입은 것을 처음 봤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 역시 내가 왜 아무 것도 묻지 않는지 궁금해 하거나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대법에 관한 여러 가지를 나에게 말해주기 시작했다.그는 나에게 어떻게 파룬궁을 정확히 대할 것인가를 알려주어 설복시키려는 시도가 아니라, 사실의 진상을 알려 주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나의 마음속에는 많고 많은 호기심이 있었으므로 그 자리에서 많은 것을 물었고, 그래서 그로부터 많은 해답을 들었다. 대법은 도대체 어떤 법인가? 톈안먼 분신자살사건은 어찌된 일인가? 대법은 또 어떤 중상모략을 당했는가? 수련생들은 모두 어떤 박해를 당했는가? 그런 해답들은 인터넷방화벽을 돌파해서 우연히 본 적은 있지만, 아는 사람에게서 직접 진실하게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또 그의 지나간 과거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 가닥 파장도 없이 아주 차분하게 말했는데 마치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듯이 그렇게 차분하게 말했다.

예전에 중국의 한 공직자였던 나는, 국가폭력기관(중공교과서에서 국가는 폭력기구라고 했다)이 어떻게 운영되는 가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므로 관리들이 어떻게 죄수를 잔혹하게 괴롭혔는가를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친구와 친지가 일명 호랑이의자와 전기고문으로 밤낮을 고통 받으며 자백을 강요당하는 그 참혹함은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이 죄수복을 입은 모습까지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감옥은 정녕 범인을 수감하는 곳이 아니란 말인가? 오빠는 나라의 동량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는 낙관적이고 굳세며,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면서 공익을 위하고 남을 위해 도와줌으로 인민에게는 해가 없고 오직 사회에 유익한 사람인데, 도대체 그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잡혀가 감옥에 갇혀 그런 혹독한 고문학대를 받았단 말인가!’

그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마음이 너무 무거워 한 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많은 중국내 사람들의 말로 한다면, “대법은 ‘괴물’이고,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은 모두 ‘정신병자’다.” 하지만 나는 바로 이 시각에 확실하게 알게 됐다. 적어도 내가 보았고, 내가 생각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렇지 않았다.

그 후 오빠는 나에게, 불성이 있고 좋은 인연이 있어서 보통사람과는 다르다고 했다. 그는“짬을 내어 대법 책을 읽으면 수확이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뉴욕의 수천수만의 ‘오빠들’

눈 깜짝할 사이에 금년 2016년 4월이 다가왔다. 어느 날 오빠로부터 “5월에 뉴욕에서 대법 활동이 있는데, 시간을 내어 참석하면 감수가 있을 것이다.”란 메시지가 왔다. 나는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하고 일찌감치 항공권을 예약한 후 조용히 5월 13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나는 5월 13일 아침 일찍 UN광장에 와 대기했다. 당시 광장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는데, 많은 무리는 광장 앞에서 연공을 하고 있었고, 많은 무리는 잠시 후에 있을 퍼레이드 준비를 하고 있었고, 또 많은 무리들은 한담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서양인의 모습도 많았다. 나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구경했는데, 마치 외할머니가 화려한 곳을 찾아들어가신기한 구경을 하듯이 어디를 보아도 모두 신선했다.

 

퍼레이드 대오 중의 꽃 차

배불리 먹어야 힘이 나니까 우선 아침식사부터 든든히 해야 함으로 인근에서 식사를 했다.중간에 한 언니를 만나게 되어 그에게 일회용 휴지 몇 장을 건네주자, 거듭 고맙다고 하는 바람에 너무 작은 일에 그런 사례를 받게 되어 오히려 부끄러웠다. 그녀는 연공하면서 얻게 된 심득을 들려주면서 나를 격려해줬다. “두려워말고, 의심하지 말며, 더욱이 기다리지 말라. 파룬따파는 좋습니다(FALUNDAFA IS GOOD). 미국에서는 누구도 당신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그것이 좋다고 여겨지면 당신은 곧 연마하고, 당신에게 아직도 의혹이 있다면 그럼 당신은 답안을 찾아 의혹을 풀라. 자신에게, 사람에게, 천하에 모두 좋은 점이 있다”

솔직히 마지막 말인 “자신에게, 사람에게, 천하에 모두 좋은 점이 있다”는 말이 나를 진동시켰다. 그렇다. 마음에 포부를 지닌 어떤 사람이든지 모두 곳곳에서 천하의 일을 먼저 걱정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민족이 번영하며, 외적의 침략을 받지 않기를 바라는 지조 있는 어떤 사람이든지 모두 자신에게, 사람에게, 천하에 모두 이로운 사명감이 있게 하는 게 아니었던가?

잠시 후에 오빠가 왔다. 인사말을 나눈 후 그의 뒤를 따라 나가며 비로소 세상을 구경했다. 오빠는 칭화대 졸업생이었으므로 나는 늘 그가 말하는 칭화와 관련된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 날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칭화의 학우들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대오 중의 파룬궁 수련생 일부

특별히 말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퍼레이드 진행 중에 원위 오빠가 뉴욕 현지 언론매체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됐다. 내내 그의 옆에 있었으므로 그가 말한 한마디 한마디를 빼놓지 않고 다 들을 수 있었다. 그가 3년 동안 옥중생활을 이야기 하는 것도 들었고, 전 아내와10년 동안의 괴롭고 슬프고 안타까워했던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만면에 광채가 나는 그런 사람의 입에서 비인간적인 각종 박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그런 사람이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을 연계시키기가 무척 어려웠다. 나는 그의 견강함에 감동했고,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그의 의지에 감동했다.

나는 대단히 정통적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조부 때부터 가족은 모두 공부를 한 집안이었다.아버지세대는 모두 나에게 정직하고 선량하되 당당함을 잃지 말라고 가르쳤고, 사람답고, 정의와 진리를 추구해야한다고 가르쳤다. 나는 늘 스스로 대선지인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허풍 떨었다. 지나간 몇 십 년 동안, 나의 친척 친구들에게 우애 있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나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낯선 사람에 대해서까지 선하게 대했다. 그리고 나와 다른 견해를 갖거나 개인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했다.

나는 일찍부터 스스로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나는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박해하는 공범자가 되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퍼레이드 대오 속에서 수천수만의 원위(文宇) 오빠처럼 대륙에서 이유 없이 박해를 당한 선량한 영혼들을 마주 했을 때, 몹시 괴로웠고, 또 몹시 부끄러웠다.

나는 다른 사람의 사랑 이야기 때문에 슬퍼했고, 또 인터넷 상의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신속히 도와주는 사람을 보고 감개무량했으며, 심지어 고속도로에서 막 식당으로 팔려갈 고양이와 개들을 보고 화를 냈었지만, 그러나 마음속에 아름다운 이상을 품은 이 한 무리 선량한 (파룬궁)사람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한 적이 없다. 심지어 (중공이)그들에 대해 거짓말 한 것에 대해 지금까지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일찍부터 ‘중립을 선택한 것은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여겼지만 원래 냉담함 역시 살인하는 예리한 무기임을 오히려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신이 침묵을 선택한 것은 살인자와 함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바이런(百忍)을 죽이지 않았지만, 바이런은 오히려 나 때문에 죽었다”는 이런 슬프고 처량함이 순간적으로 가슴을 메웠다. 30여 년 이래 줄곧 자랑으로 여겼던 나의 방패막이가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나는 퍼레이드에서 칭화 팀의 뒤를 따랐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퍼레이드 규모는 대단했는데, 그들은 모두 확고했고, 자랑스러워했고, 아주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길가에서 가던길을 멈추고 구경하는 시민들을 향해 미소로 답례했다. 퍼레이드가 끝난 후 집결지에 모여모두 함께 서로 격려하며 인사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 하나하나의 생생한 생명과 자유의 영혼들은 시종일관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행운아다. 나는 잔인무도한 그런 시달림을 당하지 않고서도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운이 좋았다. 그들은 지금 이 시각에 여전히 살아서, 자신의 믿음을 위해 계속 항쟁하며 자신의 의지를 나타낼 수 있으니 얼마나 행운인가? 그러나 이상을 위해 생명을 잃은 사람들, 아직도 국내에서여러 가지로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는 그런 사람은, 그들의 권익을 누가 쟁취해 줄 것인가? 그들은 어느 때 가서야 근심걱정 없는 정상적인 사람다운 생활을 할 것이며, 더는 중상모략을 당하지 않고, 조소를 당하지 않고, 박해를 당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갑자기 슬펐지만, 오히려 고무되고 격려되는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유태인은 길고 긴 오랜 시간 어려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광적인 종족학살의 수난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게으름 없는 노력과 불굴의 항쟁으로 드디어 자신의 성스러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연꽃

오늘 날 해외에서 떠돌고 있는 파룬궁수련생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이 여전히 많게는 국내에 있다. 누군들 그런 괴로움이 하루 빨리 종식되어 고향에 돌아가 가족과 만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현실적인 암흑과 잔혹함을 우리가 발걸음을 빨리하고 분발해서 광명을찾자는 격려를 할 뿐이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가 가장 진실한 사람이 되고, 가장 아름다운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순진 순선하는 매 하나의 영혼마다 모두 신불이 가호하는 창공 아래 꽃망울이 활짝 피는 것을 믿어마지 않는다.

문장발표 : 2016년 6월 4일
문장분류: 중국소식>정의 작은 이야기>인심이 인심이 점차 밝아지다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6/4/32962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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