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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연변 파룬궁수련생이 박해당한 약술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지린 보도) 밍후이왕에서 보도한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2015년에 연변 지역의 각 현과 시에서 불법적인 납치를 당한 파룬궁수련생은 연인원 60명이다. 그중 장쩌민(江澤民)을 고소한 것 때문에 납치돼 보복당한 파룬궁수련생은 대략 22명이다. (교란 전화를 받았거나 집으로 찾아와 교란한 건은 포함하지 않음) 세뇌반으로 납치당한 파룬궁수련생은 대략 14명이고, 불법 판결 당한 파룬궁수련생은 1명이며, 박해로 사망한 파룬궁수련생은 3명이다.

1. 불법 체포 통계 상황

2. 세뇌반을 이용해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다

2015년 8월, 화룡(和龍) 지역에서는 서성(西城) 아동수고(亞東水庫)에서 세뇌반을 조직했는데 이미 10여 명의 파룬궁수련생을 납치했다. 이미 알고 있기로는, 8월 10일에 고소장을 우편으로 부친 것 때문에 화룡에서 납치당한 파룬궁수련생 리(李) 씨와 김영실(金英實), 왕시펑(王喜鳳), 박일화(樸日華) 등 4명의 파룬궁수련생은 강제로 아동수고 세뇌반에 감금당했다.

和龙亚东水库洗脑班

화룡 아동수고 세뇌반

2015년 12월 2일부터 12월 15일까지 화룡시 팔가자 임업국 정법위원회, ‘610’은 임업국 접대소에 보름 동안 세뇌반을 조직했는데, 세뇌반에 납치당한 파룬궁수련생은 정무즈(鄭慕芝), 류화잉(劉華英), 장신셴(張信賢), 청수전(程淑珍)이다. 박해에 참여한 사람은 팔가자 임업국 공안국 국가보안 자오바오린(趙寶林), 왕차오뱌오(王超彪), 새로 임명된 국가보안대대 대대장 궈빙장(郭炳江)이다. 유다(배신자)는 연길시의 쑹슈친(宋秀芹), 쓰핑(四平)의 리샤오옌(李曉燕), 도문의 가오옌(高燕), 가도 지역사회의 저우옌핑(周豔萍), 녜리메이(聶麗梅), 류수화(劉淑華), 왕야제(王雅傑)이다. 박해에 참여한 사람은 또 임업국 ‘610’ 주임으로 새로 임명된 예스궈(葉世國),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서기 리허우셴(李厚先), 연변 주 임업관리국 ‘610’의 장이리(張毅力)이다. 이번 세뇌반이 끝난 뒤, 팔가자에서 파룬궁을 박해한 악도는 또 한 기의 세뇌반을 조직하여 파룬궁수련생을 납치했다. 구체적인 상황은 상세하지 않다.

八家子林业局招待所洗脑班

팔가자임업국 접대소 세뇌반

3. 불법 판결

지린성(吉林省) 연길시 파룬궁수련생 리호철(李虎哲)은 2014년 10월 8일 오전에 직장 공사장에서 진상을 알리다가 악의적인 신고를 당해, 연길시 신흥(新興) 파출소와 북산(北山) 파출소 9명의 경찰에게 강제 납치돼 연길시 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 대략 2015년 12월, 리호철은 1년 6개월의 불법 판결을 당했다. 이는 2015년에 연변지역의 파룬궁수련생이 불법 판결 당한 현재 알고 있는 유일한 사례로, 상세한 상황은 조사해야 한다.

4. 박해를 당한 전형적인 사례

도문시 최명숙 여사가 6차례 납치·박해를 당하다

밍후이왕 통계에 따르면, 2015년 5월에 지린성 도문시(圖們市) 파룬궁수련생 최명숙(崔明淑)이 현지 국가보안에게 납치됐다. 2015년 10월 15일, 최명숙은 연길시 기차역에서 신분증을 검사할 때, 거듭 불법 납치를 당했는데, 호주머니 속에 ‘전법륜(轉法輪)’ 한 권이 있었다. 최명숙은 연변 공안국에 의해 블랙리스트에 올려졌고 연길 북대 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

최명숙, 여, 62세, 조선족. 파룬궁수련생 최명숙은 1999년 7월부터 중공(중국공산당)이 전국 범위로 파룬궁을 박해한 이후에도 믿음을 견지하며 이른바 수련을 하지 않는다는 ‘보증서’를 쓰는 것을 거부했다. 1999년 11월, 직장이던 연변 정유공장(延邊煉油廠)은 공공연하게 그녀를 해고했다. 최명숙은 파룬궁을 수련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납치를 당했고, 세뇌반, 유치장, 노동교양소에 감금당해 세뇌, 공갈 협박, 체벌을 당한 적이 있다. 심지어 잔인한 고문과 시달림을 당했다. 최명숙은 6차례 납치에서 당한 경험들을 다음과 같이 자술했다.

(1) 2000년, 나는 도문시 세뇌반으로 납치됐다. 그곳에서 우리는 강제로 파룬궁을 모함한 ‘초점 거짓말 취재(焦點謊談)’를 보았는데, 우리에게 이른바 ‘결렬서’를 쓰도록 핍박했다. 쓰지 않으면 모욕, 공갈·협박과 체벌을 당했다.

(2) 2000년 12월, 정부에 상황을 반영하기 위해 나는 많은 파룬궁수련생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비용으로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 그러나 베이징의 한 구치소에 일주일 동안 불법 감금당했다. 단식으로 항의했다가 음식물 주입, 세워두기 고문, 잠을 못 자게 하는 등의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7일 뒤, 베이징에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공장 책임자는 오히려 사람을 파견해 우리 집으로 와서는 내 가족으로부터 2,000여 위안(약 36만 원)을 갈취했다. 그들은 내가 집에 없는 것을 보자 가족에게 “별일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나를 집에 돌아오게 하라고 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온 그 날 저녁 파출소 경찰은 집안에 들이닥쳐 나를 납치했고, 1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내렸다. 노동교양 기간에 몸에 심각한 상황이 나타나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다.

(3) 2001년, 나는 한 수련생의 집에 있다가 집안에 들이닥친 경찰에게 납치돼 거듭 1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창춘(長春) 헤이쭈이쯔(黑嘴子) 여자 노동교양소에서 세워두기 고문, 강제 세뇌, 노예노동 등의 박해를 당했는데, 노동시간은 대부분 아침 5시부터 저녁 10시까지였다.

(4) 2004년, 나는 농촌으로 가서 파룬궁 진상 자료를 배포한 것 때문에 납치됐다. 훈춘(琿春) 유치장에서 잔혹한 고문과 강제 자백의 박해를 당했다. 그들은 나의 목에 무거운 물건을 걸었는데 매우 무거웠다. 얼마 동안 세워져 있었는지 모르지만, 경찰이 밖에서 들어오며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정말 대단하다.”라고 말했다. 그 후 나는 2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는데, 뇌일혈(腦溢血) 증상이 나타났던 까닭에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러했으나 도문 경찰은 여전히 가만두지 않았고 나를 집에서 도문 구치소로 거듭 납치해 몇 개월 동안 감금한 뒤에야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파출소에서는 여전히 나를 교란했다. 어찌할 방도가 없었던 나는 1년 넘게 유랑생활을 하고 그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지 겨우 1개월이 지난 2006년 3월, 나는 집안에서 도문 안산(鞍山) 구치소로 또 납치당했다. 나는 100여 일 동안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했다. 그들은 나에 대해 강제로 음식물 주입을 진행하는 과정에 여러 차례 독극물을 투입해 넣었다. 이로 인해 나는 설사 증상과 전신 마비 증상이 나타났다. 여위고 허약해져 단지 뼈만 남고 숨이 붙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도문시 공검법(공안, 검찰, 법원)은 나의 안위를 돌보지는 않은 채, 여전히 나에게 4년형을 언도했다. 게다가 창춘 여자감옥으로 보냈다.

창춘 여자감옥에서 나는 인간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여러 가지 고문 박해를 당했다. 처음에는 장시간 동안 세워두기 고문을 가했다. 아침 7시부터 저녁 10시까지 밥을 먹는 시간 이외에는 같은 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며칠이 되자 발은 부어올라 신을 신을 수 없었고 몸은 허약해져 머리칼이 계속 떨어졌다. 저녁 10시 전에는 잠을 못 자게 했는데 극히 고통스러웠다. 신체적 고통에다 정신적인 박해는 더욱 심각했다. 매일 무작정 파룬궁을 모독한 거짓말을 주입했다.

박해를 반대하기 위해 나는 다시 단식했다. 이로부터 그들은 나를 병원에 가둬 넣고 4명의 바오자가 주야로 감시하며 매일 3차례 음식물을 주입했다. 어떤 때에는 주입한 음식물 중에 소금이거나 절인 오리알을 넣었다. 그런 다음 나에게 물을 마시도록 재촉했다. 음식물을 주입하는 과정 중, 일부러 호스를 위 속에 꽂지 않고 폐 속에다 꽂아 넣었는데, 숨이 막혀 매우 괴로웠고 코에서는 늘 피가 났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과 말을 하지 못하게 했고, 온종일 욕을 해대고 모욕을 가했으며 머리를 구타했다. 가장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은 몇 개월 후 나를 끈으로 묶어 매다는 고문이었다. 두 손과 두 다리를 묶은 뒤에 나보다 키가 더 큰 침대 가름대에 매달았는데(두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게 했음) 이러한 고문을 몇 시간 동안 유지했다. 그 후에는 다시 사인 침대(死人床)에 묶어놓고 매일 다리와 팔을 네 방향으로 힘껏 잡아 늘인 뒤 침대의 네 모서리에 묶어놓았다. 가장 오랜 시간은 연속 4일 동안 풀어주지 않았는데 대소변을 보고 먹는 것도 전부 침대에서 치렀으며 또 이를 닦아내지도 못하게 했다. 이런 고문은 완전히 사람의 극한을 초월하는 것이며 극히 고통스러웠다. 정신과 육체적인 이중 박해로 인해 나는 정말 감당할 수 없게 됐고 핍박으로 인해 수련하지 않는다는 가짜 보증서를 썼다. 2009년에야 감옥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酷刑演示:吊铐

고문 재연:매달기 고문

(5) 2014년 3월, 나는 진상을 알린 것 때문에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돼 도문시 국가보안대대로 보내졌는데, 전용철(全勇哲)은 나에게 자료의 출처를 물었다. 내가 말하지 않자 호랑이 의자에 묶고는 담배 연기를 코에 불어 넣었는데 나는 즉시 토했다. 그날 잠을 자지도 못하게 했다. 이튿날 나에게 이름을 물었는데 내가 협력하지 않자 두 주먹으로 나의 팔을 때렸다. 팔은 온통 부어오르고 어혈까지 생겼다. 지금도 그 부위가 움푹 꺼져 들어가 있다. 그리고 또 귀뺨을 때려 얼굴도 부어올랐다. 보름 뒤에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다.

酷刑演示:老虎凳

고문 재연:호랑의 의자 고문

(6) 2015년 5월, 나는 거듭 도문시 국가보안대대에 의해 납치됐다. 국가보안대대에서 병원으로 보내져 검진을 받았을 때, 심각한 상황이라는 진단이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뒤, 국가보안대대의 전용철 등 2명 경찰이 우리 집으로 와서 나와 남편을 국가보안대대로 한번 나오라고 했다. 나는 이 일 때문에 경찰에게 거듭 박해에 참여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또 가족에게 거듭 상해를 입게 하고 싶지도 않아 집을 떠나 간난신고의 유랑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집에 없는 것을 발견하자 수련을 하지도 않는 남편을 끌고 갔는데, 한나절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려보냈다.

파룬궁수련생 덩리쥐안, 천슈윈이 돈화시 경찰에게 고문 학대를 당하다

밍후이왕 2015년 12월의 보도에 따르면, 지린성 돈화시(敦化市) 공안국 순경 장즈창(張志強), 왕페이위(王飛宇)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으로서 오히려 법을 위반하며 파룬궁수련생 덩리쥐안(鄧麗娟), 천슈윈(陳秀雲)에게 고문·학대를 자행했다. 게다가 불법적인 자료를 꾸며내 돈화시 검찰원에 보내고 박해를 가중시키려고 도모했다.

2015년 8월, 위수시(榆樹市) 파룬궁수련생 덩리쥐안과 천슈윈은 도문으로 친척을 방문하러 갔다. 8월 4일 저녁, 두 사람은 돈화시 모 주택 단지에서 대법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가 감시 카메라에 포착돼 미행을 당했고 도문시 홍기(紅旗) 지역 사회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됐다. 경찰 장즈창, 왕페이위는 불법 심문을 자행하며 잔혹하게 두 부녀자를 학대했는데 ‘아오잉(熬鷹)’고문, 강제로 쇠 의자에 앉히기 고문, 장시간 동안 잠을 못 자게 하는 고문을 했는데 잠이 들기만 하면 냉수를 끼얹어 깨웠다. 그리고는 귀뺨을 때리고 머리칼을 잡아 뽑았다. 덩리쥐안의 머리칼은 한 줌씩 뽑혔고 학대로 혼절했는데, 악인은 그래도 냉수를 끼얹었다. 줄곧 8월 6일까지 계속 고문하며 그녀들을 학대했다. ‘창(強)형’(強哥)이라는 사람이 선두에서 고문 학대를 했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을 유치장에 가뒀다.

그 후 두 사람은 연길시 공안국 경찰에게 끌려갔다. 천슈윈은 신체적 원인으로 가족이 3천 위안(약 54만 원)의 보증금을 내고 보석됐다. 덩리쥐안은 여전히 연길시 구치소에 여태껏 불법 감금당해 있다. 악독한 경찰은 고문 학대로 얻어낸 불법 자료를 증거로 하여 돈화 검찰원으로 보내 ×교 조직을 이용해 법률의 실시를 파괴했다는 명의로 체포령을 내렸다. 공안국에서 모함한 이 억울한 사건은 하급까지 연장되어 진상을 똑똑히 알지 못하는 검찰원, 법원의 사람들에까지 죄를 저지르게 하려고 시도했다. 덩리쥐안의 노 부친은 석방을 요구하러 갔으나 딸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현재 덩리쥐안, 천슈위안을 모함한 불법 자료는 여전히 도문시 검찰원에 있다.

 酷刑演示:铁椅子

고문 재연:쇠 의자 고문

덩리쥐안(여, 1968년 출생)은 위수시 칭산향(青山鄉) 싼싱촌(三興村) 사람이다. 몸이 좋지 않은 것 때문에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에 들어섰고 대법 중에서 적잖은 이로움을 얻었다. 질병은 짧은 20여 일 사이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일가족 세 식구는 대법 속에 푹 빠져 즐겁게 생활했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이 탄압을 시작하며 파룬궁을 박해했는데, 텔레비전방송국에서는 천지를 뒤엎을 듯이 유언비어를 날조해 대법을 모독했다. 덩리쥐안의 남편 정푸샹(鄭福祥)은 창춘 웨이쯔거우(葦子溝), 펀진(奮進), 차오양거우(朝陽溝) 노동교양소에서 고문·학대를 당했고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손상을 입어 2004년 4월 7일 결국 사망했다. 당시 덩리쥐안은 핍박을 피하고자 유랑생활 중이어서 남편의 마지막 모습도 볼 수 없었다. 덩리쥐안의 아들은 겨우 13세로, 어린 나이임에도 자신의 먹을거리를 위해 일하러 나가 돈을 벌어야 했다. 그는 불행하게 차 사고로 사망했다.

5. 3명의 파룬궁수련생이 박해로 사망하다

밍후이왕의 보도에 따르면, 2015년 연변 지역에 김창수(金昌洙), 림봉련(林鳳蓮), 츠야오차이(遲耀才) 등 3명의 파룬궁수련생이 10여 년 동안 지속돼온 중공의 파룬궁 박해로 심신에 극심한 상해를 입고 결국 억울하게 사망했다.

고문 박해로 인해 츠야오차이가 한창 나이에 사망하다

도문시 파룬궁수련생 츠야오차오(남, 한족, 1960년 출생)는 도문시 석현 종이공장 노동자로, 사람됨이 열정적이고 시원시원하며 동료들에게 존경받는 큰 형이다.

迟耀才

츠야오차이(遲耀才)

2011년 9월 2일 오전, 도문시 ‘610’은 시 공안국 국가보안대대의 악독한 경찰에게 지시를 내려, 기동차 몇 대를 몰고 가서 츠야오차이가 거주하는 건물 아래를 에워싸고는 강제로 문을 열고 츠야오차이를 납치하려고 시도했다. 국가보안대대 부대장 저우훙(周宏)은 전화로 계단이 있는 소방차를 불러다가 창문을 부수고 불법적으로 츠야오차이를 납치했다. 게다가 그의 집 창고 안에서 이미 파손된 것을 강탈했는데, 듣기로는 신탕런(新唐人) 텔레비전을 접수하는 위성안테나라고 했다. 그날 오전 10시쯤, 츠야오차이는 시 신화(新華) 변방 파출소로 납치당해 건물 안의 극히 음폐된 비밀 심문실에 감금당했다. 그날 전용철(전영철(全永哲)) 등 7명 악독한 경찰은 츠야오차이에 대해 폭력적인 구타를 진행했는데, 그로 하여금 ‘큰 가마(위성수신안테나)를 설치’ 한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먼저 츠야오차이에 대해 이른바 ‘발 마사지’를 진행해 괴롭혔다. 강제로 심문 쇠 의자 위에 앉혀놓고 두 발을 둔부와 맞춰 수평선까지 되게 하고 신과 양말을 벗기고는 경찰봉으로 미친 듯이 발등과 발바닥 등에 충격을 가했다. 츠야오차이는 악독한 경찰의 문제에 대답하지 않았는데, 두 발은 구타로 부어오르고 청자색으로 변했다. 이번 고문으로 츠야오차이는 거의 3일 동안 정상적으로 걷지 못했고, 일주일 후에야 청자색은 가라앉았다.

中共酷刑示意图:人为窒息

고문 설명도:인위적으로 질식시키다

그 후 악독한 경찰 청 모는 또 비닐 주머니로 머리를 씌워 츠야오차이를 박해했는데, 반복적으로 5~6차례 진행했다. 츠야오차이는 거의 질식할 뻔하여 얼굴이 청자색으로 되었는데 한나절이 되어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뒤이어 악독한 경찰은 츠야오차이의 얼굴, 가슴을 생수병으로 구타했는데, 전체의 과정은 광적이고 잔인했다. 츠야오차이는 그것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악독한 경찰의 모든 문제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저우훙은 곤드레만드레 술에 취해 다가와서는 츠야오차이에게 누가 그의 사진 자료를 인터넷에 올려 폭로했는지를 물었다. 츠야오차이가 대답하지 않자, 저우훙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성을 내며 욕설을 퍼붓고 광적으로 귀뺨을 때렸다. 전혀 얻은 결과가 없자 상스러운 욕을 퍼부으며 떠났다. 악독한 경찰 전용철은 전기 봉으로 끊임없이 츠야오차이의 두 팔을 구타했는데, 그의 팔은 청자색으로 변해 일주일 동안 부어올라 있었다.

전용철, 정문용(鄭文勇) 등 여러 명의 악독한 경찰은 고문 의자에 묶여 있는 츠야오차이에 대해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그리고 무릎으로 츠야오차이의 양측 늑골 부위를 들이박았는데 끊임없이 학대했다. 츠야오차이는 늑골을 받혀 숨을 쉬기 어려웠고 억지로 아픔을 참으며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그는 여러 차례 각혈했다. 이번의 고문에 의한 강제자백으로 츠야오차이는 위장, 간, 담, 신장, 심장, 췌장 등 여러 곳의 내장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9월 3일 저녁, 청 모와 전용철은 쇠 의자를 풀어주고 또 무릎으로 츠야오차의 허벅지 양측을 들이박으며 광적으로 혹독하게 구타했다. 1박 2일 동안의 고문 학대로 츠야오차이는 쇼크, 허탈,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증상이 나타났다. 악독한 경찰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곧 그날 저녁 10시가 넘어서 츠야오차이를 도문시 유치장으로 보냈다.

9월 14일, 15일, 츠야오차이는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했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렸다. 국가보안의 악독한 경찰은 츠야오차이의 입에서 그들이 요해하고 싶은 상황을 조금 얻어내려고 했던 이유로, 부끄러운 나머지 성을 내며, 오히려 그에게 2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내렸고 9월 20일 창춘시 차오양거우 노동교양소로 보냈다. 보내기 전, 규정대로 검사하는 중에 츠야오차이의 혈압이 195에 달해 노동교양조건에 부합되지 않음을 발견했다. 국가보안 악독한 경찰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생수에 혈압을 낮추는 약을 넣었다. 츠야오차이가 물을 한 모금 마시자 물이 매우 쓴 것을 알고는 국가보안 악독한 경찰에게 질문했다. 악독한 경찰은 서로 책임을 미루며 얼버무렸다.

츠야오차이는 창춘시 차오양거우 노동교양소로 납치돼 3대대에 불법 감금돼 박해를 당했다. 2012년 정월 초사흘부터 정월 16일까지 츠야오차이는 감금당한 다른 파룬궁수련생과 함께 줄곧 죄수복을 입지 않고 박해를 반대했다가, 3대대 악독한 경찰 가오젠후이(高建輝), 교도원 류샤오위(劉曉雨), 부대대장 장웨이(張偉), 교도관 지원취안(紀文權), 판성루(范勝錄), 쑨(孫) 모 등에 의해 심각한 박해를 당했다. 독방에 갇힌 기간, 츠야오차이는 20여 대의 귀뺨을 맞아 얼굴이 부어올랐고 이튿날 고혈압 상황이 나타났다. 차오양구 노동교양소에서 검진을 받았는데, 진단에 따르면 츠야오차이가 위급한 상황임이 입증됐다. 가족은 츠야오차이에 대해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노동교양소에 의해 거부당했다.

2012년 3월 22일 오전, 츠야오차이의 딸은 차오양거우 노동교양소 3대대 가오 대장의 전화를 받았는데, 겨우 50여 세인 츠야오차이가 노동교양소에서 고혈압(220-230) 병 증상이 나타나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도 변화가 없는지 이미 보름이 된다며 가족에게 노동교양소로 가서 협상해 병보석 수속을 밟도록 하라고 말했다. 가족은 밤새 차오양거우 노동교양소로 갔다. 대장 가오 모와 기타 몇 명의 경찰은, 츠야오차이를 노개 병원(勞改醫院)으로 보내 치료를 받게 하라며 그런 다음 다시 병보석 수속을 밟자고 말했다. 게다가 현지 지역 사회, 파출소, 츠야오차이의 가족이 담보해야 (수속을) 밟을 수 있으며, 비준을 받을 수 있을지는 노동교양소 측에서도 보증할 수 없다고 했다. 악독한 경찰은 가족에게 이전에 쓴 의약 비를 감당하도록 하고 츠야오차이가 연공을 하지 않겠다는 것에 서명해 보증하도록 했다. 가족은 법에 따라 이 일체는 모두 노동교양소에 도착한 뒤 조성된 것이라고 이치에 맞게 강력히 항의했다! 의약 비와 서명을 요구하는 불법적 행위를 거부하며, 노동교양소가 무조건 츠야오차이를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2012년 4월 27일, 가족은 츠야오차이를 노동교양소에서 마중했다. 고문 학대를 당했던 이유로, 츠야오차이는 위장, 간, 담, 신장, 심장, 췌장 등 여러 곳의 내장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집으로 돌아온 뒤, 그의 전신의 피부는 누렇게 뜨고 흰자위가 누렇게 됐으며, 몸이 허약해서 한 종지의 밥도 넘기기 어려웠다! 츠야오차이는 예전에 여러 친구에게 2012년 4월, 그는 고혈압으로 위험한 상태가 나타났는데, 차오양거우 노동교양소에서는 그가 갑자기 사망할까 두려워 감로 주사(甘露針) 두 병을 주사하겠다고 속여 말했다. 그러나 병 상황으로 미뤄보면 당시에 독침을 주사했다.

2013년 초, 츠야오차이는 집으로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아 온몸이 누렇게 뜨고 퍼렇게 되는(눈도 황록색을 띠었음) 병세가 나타났다. 동시에 전신이 가렵고 체내에 열이 올라 견디기가 어려워 늘 얼음덩이를 마셔서야 내열을 완화시킬 수 있었다. 츠야오차이는 원래 몸무게가 75kg이 넘었는데, 그 후 여위고 허약해져 35kg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복부가 북만큼 부풀어 올랐다. 병이 도진 기간에 매일 여러 차례 검은 물 상태의 물건을 설사해 냈는데, 줄곧 임종 전까지도 끊임없이 검은 물 상태의 물건을 토했다.

2015년 2월 11일, 파룬궁수련생 츠야오차이는 억울하게 사망했다. 당시 나이 겨우 5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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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발표: 2016년 3월 11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3/11/32521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