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허난 양메이(楊眉)는 15세 때 파룬궁(法輪功)을 위해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가납치되어 불법으로 감금당한 후 학적을 제적당하고, 대학수능시험자격도 박탈당했다. 양메이는2015년 8월 10일 최고인민법원에 박해원흉 장쩌민을 고소했는데, 고소장에서 “최고검찰원에 장쩌민을 고소하니, 정의를 바로 세워 국민을 위해 해악을 제거해 달라”고 요구했다.
다음은 현재 32세인 양메이가 ‘형사고소장’에 서술한 내용이다
1997년부터 엄마와 언니는 파룬궁(法輪功) 수련을 하게 됐다. 엄마는 파룬궁을 수련한 후 고질병이 사라졌다. 엄마는 ‘파룬궁의 ‘진선인(眞善忍)’은 아이를 가르치는데 가장 좋다고 생각하고 우리에게 파룬궁을 가르쳤다. 나는 13세였던 1998년에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해 아침저녁으로 엄마를 따라 파룬궁 책을 보며 연공을 했다. 파룬궁에서는 “성실한 사람이 돼야하며,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고 가르쳤다.
2000년 6월 나는 15세였고, 현(縣)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엄마가 베이징으로 파룬궁을 위해 청원하러 갈 때, 나는 ‘사람은 정정당당해야 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과서에서 고대 군자나 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현인도 모두 그랬다고 했다. 그러나 TV에서 말한 것은 모두 거짓말이었고, 그걸 알게 됐으니 마땅히 진실을 말해 정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3모녀는 몇 명의 다른 수련생과 함께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 진실을 알고 있는 나는, 정부에 “그들이 잘못했고, 파룬궁은 사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려고 했던 것이다.
6월 30일 베이징 지하철 서쪽 1번 출구 근처에서 어떤 사람이 엄마에게 물었다. “당신들 뭐 하러 왔나요?” 엄마가 “민원실이 어디예요?” 하고 물으니 “파룬궁인가요?” 엄마가 “네!”라고 대답했다. 그는 “나를 따라 와요” 그는 우리를 쉬안우취(宣武區) 파출소로 데려가서 경찰관에게 인계했다. 한 경찰관이 나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었지만, 난 실명을 말하지 않았다. 가족과 학교에 연루되지 않게 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저녁이 되자 우리는 쉬안우취 구치소로 넘겨졌고, 이튿날 아침 나는 허난(河南)지역 한 경찰관에게 심문을 받았다.그는 나와 함께 온 사람들의 이름과 그곳에 오게 된 경위를 말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의례적으로 그냥 묻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당시 나이가 어리긴 했어도 ‘마땅히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7월 2일 밤, 우리는 신샹(新鄉) 베이징주재 사무실로 이송됐는데, 공안국 부국장 리루루(李儒錄)와 각 단위별 대표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3일 아침 우리는 옌진 구치소에 감금됐고, 4일 우리를 들판으로 데려가 녹화를 했다(지역방송국 방송녹화). 녹화가 끝나자 다시 구치로 돌아왔는데, 우리를 죄인처럼 결박한 후 바닥에 꿇게 했다. 커우서우예(寇守業)는 우리를 향해 “사회질서를 교란한 범죄피의자”라고 했다. 엄마는 100일, 언니와 나는 한 달간씩 각각 감금처분을 당했다. 우리 세 모녀는 옌진 구치소에 감금되었다가 얼마 후 단독으로 이웃 현의 위안양(原陽) 구치소로 옮겨졌다.
옌진 구치소에서는 내가 어린 것을 보고 나를 하나의 ‘돌파구’로 삼으려했다. 밤이면 잠자는 나를 단독으로 불러내 심문했다. 즉 베이징에 청원하러 오게 된 경위와 그 세부적인 과정에 대해 물었다. 어린 내 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신상정보를 얻으려는 속셈이었다. 사실상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가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한 번은 구치소 여경이 나를 찾아와 단독적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내가 잘못한 것이 없으며, 내가 한 일은 틀리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나에게 “1중(현에 가장 좋은 고등학교)에서 너를 제적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만약 정직한 일을 하려는 사람을 제적한다면 그들의 손실이라”고 했다. 후에 내가 위안양구치소에 감금되었을 때 내 옆에 엄마와 언니는 없었다. 나는 구치소에서 17세의 생일이 되도록 지내게 됐다. 그간에 심문도 받았다.
구치소에서 나온 후 언니는 직장인 현 병원에서 제명됐고, 나는 현 1중에서 제적됐다. 당시 교장은 정순왕(鄭純旺)이다. 여름방학 후 개학하면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시기였다. 나는 집에만 있으면서 학교에는 가지 못했는데, 아빠가 아는 사람을 통해 원래 반으로 복학하게 했다. 그렇지만 나는 학적이 없으므로 미취학 상태였던 것이다. 학교 선생님은 무슨 민감한 날에는 나를 감시하며 지켜봐야했고, 평소에도 일부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이런 생활은 나에게 큰 심리적 상처를 주었다.
같은 해 엄마는 두 번째로 납치당해 신향(新鄉)시 구치소에 감금되어 혹독한 혹형을 당하면서 숨이 막 넘어갈 듯 했다. 엄마는 2001년 1월 8일 구치소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와 1개월간 감시당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의 1년간은 다른 학생처럼 공부에만 열심히 할 수 없었고, 경찰의 심문을 받으면서 고통당하는 엄마를 지켜봐야만 했다. 언니도 제명됐으므로 아빠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는데, 그해 외할머니는 세 모녀가 불법으로 감금되는 어려움을 당하면서 견디지못하고 결국 사망했다. 또 나는 대학입시철이 됐지만, 자격이 없으므로 모의시험수험표도 받지 못했고, 시험에도 참가할 수 없었다. 1년간 노력해서 공부 해 ‘성적이 상위에 있었는데도 왜, 수능시험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는가?’ 하는 절망감에 큰 고통을 느꼈다. 후에 아빠와 반 주임의 도움으로 옌진 제4직업고등학교에 지원하여, 9월에 서북대학에서 합격했고, 후에 동북대학 연구생시험에 합격했다.
엄마는 내가 대학 2학년 때 또 납치당했다
본인은 수련자라는 이유로 미성년자일 때 불법으로 감금 됐고, 학적을 제적당했으며, 대학입학시험자격도 박탈당했다. 10여 년간 참고 살면서 죄인처럼 머리를 들지 못했다. 다른사람들로부터 이해를 받지 못해 큰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수련인의 가족으로, 엄마가 불법으로 세 번씩이나 감금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됐고, 선천성심장병이 있는 언니는 구치소의 강제노역으로 죽음의 직전을 맞기도 했고, 외할머니가 임종할 때 딸은 곁에 없었다. 장례를 치를 때 우리 가족은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아빠는 아내가 감금되고, 장모가 쓰러지고, 아이가 학적을 제적당하고 직무에서 제명당한 것을 감당해야 했으며, 이웃의 눈총도 받아야 했다. 마땅히 행복하게 자라야 할 청춘시절 아이들에게 심리적으로 큰 상처를 받게 했다.
이 일체는 장쩌민이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일으켜 조성한 결과 때문이다. 본인은 최고검찰원과 최고법원에 장쩌민을 고소한다. 정의를 바로 잡고, 국민을 위해 해악을 제거하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5년 11월 17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1/17/31918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