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밍후이왕통신원 산둥보도) 산둥성 웨이팡(濰坊)시 한팅구(寒亭區) 주리진(朱裏鎭) 시둥포촌(選坡村) 파룬궁수련생 위수전(于素珍)은 ‘진선인(眞善忍)’ 신앙을 견지한 것 때문에 여러 차례 납치를 당해 유치장, 구치소, 세뇌반, 노동교양소에 갇혀 각종 시달림을 당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녀 남편 왕싱궈(王興國)는 경찰에게 독극물 주사를 맞는 박해로 사망했다.
올해 58세인 위수전은 2015년 8월 9일에 최고인민검찰원에 ‘형사고소장’을 우편으로 보내 박해 원흉 장쩌민이 파룬궁 박해를 발동했음을 고소했고, 장쩌민의 형사적 책임을 추궁하고 공개해 세인들에게 이번 박해를 똑똑히 가리도록 요구했다.
위수전은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생명을 구한 기적적인 일과 중국공산당의 박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나는 위수전이라고 부르며 올해 58세다.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전에 나는 유명한 ‘약 바구니’로 심각한 심폐병, 얼굴과 다리가 붓는 증상, 농사일을 조금만 해도 가슴이 떨리고 숨이 차는 증상이 있었다. 사방에서 치료를 받고 각종 민간 처방을 쓰고 각종 기공을 단련해도 병세는 좋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후 몸 한쪽이 마비되기까지 했다. 경제 사정이 나빠 치료할 수 없어 나는 거의 죽음까지 생각했다. 1998년 말, 다른 사람의 소개로 파룬궁이 병을 치유하는 신기한 효과가 있음을 들었다. 나는 시험 삼아 해보려는 생각을 품고 파룬궁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정말 신기했다! 한 동안 뒤 나는 진정하게 질병이 없이 온몸이 가벼운 느낌이 들었고, 아울러 좋은 사람이 되는 이치를 깨달았다. 또 심신이 건강한 상태를 경험했으며,성실하고 선량하게 변해 매일 싱글벙글했다.
연공한지 얼마 되지 않아 1999년 7월 20일, 장쩌민은 소인배의 질투로 전체 국가 선전기구를 이용해 대법 사부님을 모독하고 비난했으며, 전면적으로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박해를 발동해 많은 국민을 속였다. 이로 인해 나는 청원하러 베이징에 가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고 파룬궁의 아름다움을 증명하려고 결심했다.
2000년, 나는 세 차례 청원하러 갔다가 세 차례 붙잡혀 돌아와 각종 박해를 당했다. 두 차례는 유치장에 갇혔고, 한 차례는 구치소에 갇혔으며 가택 수색도 당했다. 집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허탄(河灘) 파출소 경찰은 문을 부수고 들이닥쳐 집안의 모든 값진 물건을 강탈했고 소 두 마리, 양수기, 녹음기, 밀 등을 가져갔으며 또 남편의 돈 1600위안을 속여 빼앗았다.
2001년 1월 17일(섣달 23일)에 허탄 파출소 경찰은 나를 속여 집에서 직접 지난(濟南) 노동교양소로 납치해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가했지만 건강 검사에서 불합격을 받아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2001년 2월, 경찰 3~4명은 또 나를 차안에 끌어들여 허탄 계획생육사무실의 온열기 위에 7~8일 동안 채워놓았다.
남편이 독극물 주사로 사망
2002년부터 2010년 사이에 나와 남편은 줄곧 외지에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남편 왕싱궈는 정직한 사람이다. 연공한 후 매우 빠르게 건강을 회복해 일을 할 때 젊은이처럼 빨랐다.
2010년 6월 20일 아침, 남편은 야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창이(昌邑)시 국가보안대대 및 두창(都昌) 파출소에게 납치됐다. 8일 뒤 6월 28일 오전, 친척이 허탄 민정국으로 와서 사람을 데려가라는 통지를 받았다. 남편의 형이 그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해 눈빛이 흐리멍덩하고 얼굴색이 검푸르게 변했으며, 전신의 피부는 검은 색을 띠었다. 그에게 물어도 아무것도 기억해 낼 수 없었다. 붙잡히기 전에 그는매우 건강해 안색이 좋고 기억력도 매우 좋았는데 집으로 돌아온 뒤 그는 거의 생존 능력을 잃었다. 집 밖에서 집을 찾지도 못했다. 어느 날 그는 갑자기 “경찰이 내 눈을 가리고 주사를 맞혔어”라고 말했다. 내가 그의 머리 부위를 살펴보니 주사를 맞은 붉은 자국이 세 군데 있었고 여전히 아파했다.
2013년 9월 15일 오전, 경찰 장창(張强)은 인터넷에서 문장 몇 편을 인쇄해 나에게 누가 글을 썼고 누가 인터넷에 올렸는지를 물었다. 나는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은 매우 화가 나서 강제로 나를 웨이팡(濰坊) 구치소로 보내 불법 구류를 진행했다. 게다가 그날 오전에 가택수색을 진행해 모든 대법자료를 강탈했고 왕싱궈도 붙잡아갔다. 7일 후, 나는 산둥(山東) 제1여자노동교양소로 보내져 노동교양처분 1년을 당했다. 왕싱궈는 한팅(寒亭) 난쑨(南孫) 세뇌반에 6~7일 동안 갇혀 있었다. 세뇌반의 류쭤바오(劉作保)는 친척에게 6백 위안을 갈취해서야 그를 석방했다.
노동교양소에서 그들은 강제로 나에게 파룬궁을 모독하는 언론을 듣게 했다. 두 사람이 나를 감시했는데 내가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3일 동안 기한을 연장해 수감했다. 그리고 허탄 파출소장 왕창장(王長江), 당위원회 부서기 짜이치화(翟奇花), 디팡쓰(地方寺) 대대 서기 천수샤(陳素霞)가 나를 마중하러 왔는데 그들은 나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직접 나를 주리(朱裏) 세뇌반으로 보냈다. 열흘 뒤 친척에게 1천 위안을 갈취해서야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내가 노동교양처분을 받은 기간에 독극물 주사를 맞은 남편은 스스로 살아갈 수 없어 하루 세 번 끼니를 잇기가 곤란했고 배고픔도 몰랐으며 춥고 더움도 몰랐다. 내가 출소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몰골이 말이 아니었으며 결국 1년 후 억울하게 사망했다.
문장발표: 2015년 9월 19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9/19/31589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