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쓰촨(四川) 신진현(新津縣)의 올해 60세인 가정주부 린주량(林久良)은 2015년 4월 8일, 다이현(大邑縣)법원 1심에서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다. 린주량은 파룬궁을 수련한 뒤, 온몸의 병이 모두 나았고 다른 사람을 더욱 선하게 대했으며, 과거 그녀를 온갖 방법으로 못살게 하고, 스스로 생활이 어려운 시어머니를 보살펴 드렸다. 그러나 오히려 수련을 견지하고 진상을 알렸다는 이유로, 중공(중국공산당) 당국의 각종 박해를 당했다.
린주량은 그녀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나는 린주량이다. 올해 60세이며 쓰촨성 신진현의 일반적이고 평범한 가정주부이다. 만약 파룬궁을 수련한 것 때문에 박해당하지 않았다면, 나는 한평생 ‘경찰’이거나 ‘정부’ 이런 것과는 연관될 수 없었을 것이다.
파룬궁을 수련해, 죽을 고비에서 다시 살아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체질이 약하고 잔병이 많았다. 나는 가정에서 남존여비 사상의 영향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오랫동안 우울하고 억울한 마음에 성격이 괴팍하고 이기적이었으며 어린 나이에 온몸에 병이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류머티즘 심장병인데 병이 재발할 때면 어지럽고 온몸이 아파 몸을 뒤척이지도 못했다. 그리고 주사를 맞는 횟수도 많아 근육마저 딱딱해져 주사 약물마저 들어가지 않았다. 결혼 후에도 몸이 좋지 않아 일이 느린 데다 또 딸을 낳았기 때문에 시어머니에게 대우를 받지 못했다. 게다가 남편은 성질이 무척 급해 생활면에서 뜻대로 되지 않아, 예전에 여러 차례 목숨을 끊을 생각도 했다. 그러나 어린 딸이 마음에 걸렸다. 90년대 초에 기공 열풍이 불었는데, 생활의 희망은 하나하나의 기공 속에서 불탔다가 또 실망 속에서 꺼졌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몸도 점점 좋지 않아져, 30일 중의 25일은 모두 감기에 걸렸다. 무더운 여름에도 냉수를 먹지 못했고, 조금만 운동하면 눈앞이 어둡고 하늘땅이 빙빙 돌아 호흡마저도 어려웠다. 40세도 되지 않은 사람의 얼굴에 온통 주름, 기미, 마른버짐 투성이었다. 약값도 적잖게 썼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당시 의사가 진단을 내린 결론은 20여만 위안을 들여 구체적인 명칭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심장 수술을 받든지, 아니면 많이 산다 하더라도 48세까지인데, 수술을 받더라도 잠시 생명을 연장할 수밖에 없다. 다시 이후는 어떨지 의사도 보증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여만 위안은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이 수술은 영원히 할 수 없다. 이어진 나날은 여전히 시어머니가 이유 없이 욕설을 퍼붓고 남편의 거칠고 급한 성질과 병고, 그리고 슬픔과 억울함, 빈곤 속에서 겨우겨우 48세까지 견뎌왔다. 장래는 어떻게 될지? 아이는 어떻게 할지? 나의 이 일생은 이렇게 끝날 것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는가? ……때때로 나는 늘 이런 문제를 생각했으나, 나에게 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98년 어느 우연한 기회에 파룬궁을 접했는데, 연공음악은 매우 상화하고 동작도 간단하고 보기 좋다고 느꼈다. 많은 기공을 경험한 탓도 있겠지만, 처음에는 그다지 그렇게 큰 희망을 품지 않았다. 그 후 다른 사람이 또 나에게 동작만 하면 안 된다며, 또 책대로 해야 병을 없애는 효과에 도달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책은 ‘전법륜(轉法輪)’이었다. 그렇게 두꺼운 책은 몇십 위안은 될 거로 생각하며 돈지갑을 열었는데, 가격이 겨우 8위안임을 알았다. 소개하는 사람은 또 “이 책은 지금 다 팔려 없어서 잠시 살 수 없어요. 당신이 배우시려 한다면 제가 먼저 당신에게 빌려 드리지요. 그러나 당신은 꼭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마음대로 선을 긋는 것은 안되며, 책을 보시기 전에는 손을 씻어야 합니다……”고 말했다.
어떤 책인데 다 팔려 없을까? 어찌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 권의 책에 대해 이렇듯 존경할 수 있을까? 호기심을 가지고 나는 첫 페이지 ‘논어(論語)’를 펼쳤다. 첫 구절 ‘불법(佛法)’은 가장 정심(精深)하며, 그는 세계 모든 학설 중에서 가장 현오(玄奧)하고 초상(超常)적인 과학이다.’까지 읽었을 때, 바로 이 간단한 한 마디가 오히려 내게 영문 모르게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게 했다. 천백만 년을 기다렸던 일종 감수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밖으로 솟구쳐 나왔다. 기쁨이었을 수도 있고 감동이었을 수도 있으며, 또 진동이었을 수도 있고 고생을 끝내는 수도 있었다……언어로 내심의 복잡한 심경을 표출할 수 없어서, 눈물은 이렇게 흘렸다. 일이 발생한 뒤, 나는 매우 신기해서 그 수련생에게 어찌 된 일인지를 물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당신은 계속해서 보세요. 이 책을 다 보시고 나면 당신은 무엇 때문인지를 깨달을 겁니다.”고 말했다.
이어서 발생한 일은 더욱 불가사의했다. 막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사부님께서, 병을 치료하는 마음을 품으면 병을 치료할 수 없는바, 전부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을 병으로 여겨서는 안 되는데, 이것은 수련이라고 말씀하신(원 말씀이 아니라 당시 개인의 이해였음) 것을 보았다. 당시 나의 온 얼굴에는 마른버짐이었는데, 어떻게 치료해도 완쾌되지 않아 수시로 얼굴에 약을 발랐다. 책을 본 뒤, 급히 멈췄는데, 이번에는 대단했다. 약을 멈춘 며칠 사이에 온 얼굴에는 새하얀 마른버짐, 그리고 분홍색 핏발을 띤 새살이 드러났는데, 이런 얼굴로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딸은 조급해 나에게 약을 바르도록 압박했다. 나는 사부님에 대한 그 믿음으로 약을 바르지 않았다. 일주일 뒤, 피부는 새롭게 변했는데, 이것은 나와 전 가족을 놀라게 했다. 정말 너무 신기했다.
대법의 책에 대해 나는 볼수록 더욱 보고 싶었다. 짬만 나면 잠시라도 보려고 했는데,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는 감기에 걸리지 않았고, 추운 겨울에도 아무 때나 냉수를 먹을 수 있었다.
그때는 마침 나의 시어머니가 마비되어 자리에 몸져눕게 되고 노인성 치매에 걸려 하루 24시간 끊임없이 목소리를 높여 욕했다. 있는 일 없는 일을 마구 욕하고, 또 힘을 쏟아 물건을 찢었는데 그녀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아도 원한의 마음이 없었다. 단지 동정과 가련함을 느꼈을 뿐이다. 수련한 뒤, 나는 주동적으로 시어머니를 보살피는 책임을 감당했다. 집에는 종이 기저귀를 살 돈이 없어서 나는 반드시 30분 간격으로 50여 kg 되는 그녀를 침대에서 안아내려 소변을 보게 했다. 이렇게 해도 수시로 침대를 소변으로 적셨다. 남편은 근무해야 했기 때문에 기저귀를 깨끗이 빨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시어머니에게 밥을 해드린 외에 또 때맞춰 시어머니의 소변을 받아내고 기저귀를 씻고 약을 발라드렸다. 장시간 운동을 하지 않아 시어머니는 변비가 심했다. 나는 또 장갑을 끼고 약을 바른 뒤 긁어냈는데, 그 1년 넘는 동안 제대로 휴식할 시간이 없었다. 하루 24시간 동안 나는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은 4시간도 되지 않았다……이웃들은 반은 탄복하고 반은 우스개로 나에게 “당신은 전생에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빚졌는지를 모르지요.”라고 말했다. 나는 단지 웃기만 했을 뿐이다. 사람은 정말 인연이 있는 것이다. 빚진 것이 얼마나 되든지를 막론하고 끝내는 갚아야 한다.
시어머니가 세상을 뜬 뒤에야 우리는 놀랍게 발견했다. 그렇게 많은 근무량에 그렇게 적은 수면에도 나의 심장병은 발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몸은 오히려 점점 좋아져 원기가 왕성하고 얼굴색이 좋았으며 피부는 점점 부드러워졌다. 나는 모든 게 변했다. 몸은 더없이 건강해지고 마음이 넓어져 다시는 다른 사람의 무심한 한마디 말에 화를 내고 따지지 않았다. 이러했을 뿐만 아니라, 나는 또 주동적으로 다른 사람과 인사를 건네거나 다른 사람을 도와주었다. 남편과 딸은 나의 변화를 보고 모두 수련을 매우 지지했다.
진상을 알려, 거듭 박해당하다
비용도 내지 않고 무료로 공을 가르치며, 가고 싶으면 가고 시간이 있으면 연마하고 시간이 없으면 연마하지 않는 이렇게 좋은 공법에, 나는 사람을 만나면 그들에게 ‘나는 진심으로모두 다 건강한 몸이 있고 행복한 가정이 있기를 바랍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 일체는 99년 7월 20일 후, 전부 변했다. 먼저 텔레비전방송국, 신문에서 끊임없이 파룬궁을 모독하는 사실과 부당한 보도를 했고, 그런 다음 주민 위원회, 파출소, 정부의 인원이 돌아가면서 집으로 찾아와 책을 수색하고 책을 태웠으며, 구류, 가택 수색, 공갈 협박을 감행했다. 우리 일가족에 대해 그것은 바로 악몽이었다.
아래는 불법적인 박해 기록이다.
2000년 4월 16일, 신진현공안국에 의해 보름 동안 구류 당했는데, 이미 단속한 사회단체의 명의로 활동을 진행했음이 그 이른바 ‘죄명’이었다.
2000년 5월 30일, 신진현공안국에 의해 보석 되었는데, 사교 조직을 이용해 법률 실시를 파괴한 혐의를 받는다는 것이 그 이른바 ‘죄명’이었다.
2000년 7월 3일, 신진현공안국에 의해 보름 동안 구류 당했는데, 이미 단속한 사회단체의 명의로 활동을 진행했다는 것이 그 이른바 ‘죄명’이었다.
2000년 7월 18일, 신진현공안국에 의해 보름 동안 구류 당했는데, 이미 단속한 사회단체의 명의로 활동을 진행했다는 것이 그 이른바 ‘죄명’이었다.
2010년 11월 1일, 신진현공안국에 의해 5일 동안 구류됐는데, 파룬궁 선전하는 것을 배포했다는 것이 그 이른바 ‘죄명’이었다.
2014년 7월 14일, 다이 둥창(董場) 농업무역시장 문앞에서 중화 전통문화를 홍양한 션윈 시디를 배포해 다이현공안국에 의해 14일 동안 구류 당했는데, 파룬궁 선전하는 것 배포했다는 것이 그 이른바 ‘죄명’이었다.
2014년 7월 28일, 다이현공안국에 의해 형사 구류 당했고, 같은 해 8월 8일 다이현검찰원의 비준을 거쳐 다이현공안국에서 체포를 집행했다. 줄곧 다이현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2015년 4월 8일, 변호사가 여러 항목에서 증거 부족을 제시한 상황에, 다이현인민법원 1심에서 3년의 노동교양 처벌을 내렸는데, 610 사무실의 결정에 의거했다고 말했다.
윗면에서, 전체 2000년을 내가 거의 유치장에서 보냈는데 그것들은 사건에 기록되어 있어 찾기가 어렵지 않다. 사건에 기록돼 있지 않은 것은, 또 내가 신진현 우진진(五津鎮) 정부에 의해 사무실 건물 차고 안에 6일 동안 불법 감금돼 휴식할 수도 없고 단지 걸상 위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집은 여러 차례 불법적인 가택수색을 당하고 벌금이 부과됐다. 처음에는 대낮에 한 무리 경찰이거나 주민위원회의 사람이 와서 다짜고짜 집안에 들이닥쳐 한바탕 뒤졌는데, 후에는 군중의 질책과 항의를 받은 뒤 또 밤중에 왔다. 이로 인해 나의 가정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남편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도 매우 큰 압력을 감당했다. 처음에 나는, 그들이 이 공법이 정말 매우 좋다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인내심 있게 나와 만난 모든 경찰, 책임자에게 내가 연공한 감수를 말했고, 내 가족이 이로움을 얻은 좋은 점을 말했다. 하지만 한 차례 또 한 차례의 불법 가택 수색, 공갈 협박, 감금으로 돌아왔다. 가족이 극심한 압력을 감당함을 보면서, 어찌할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나는 청원하러 베이징으로 갔다. 결국, 민원실도 가지 못해 또 붙잡혀 돌아와 계속 감금당했는데, 2001년 내가 멀리 타향으로 떠날 때까지였다.
이 일체를 나의 딸은 모두 보았다. 그녀는 자기 어머니가 무고하고, 그녀 어머니의 믿음이 정확함을 믿었다. 왜냐하면, 파룬궁이 그녀에게 건강한 어머니, 행복한 가정을 주었기 때문이다. 딸은 2000년 6월, 당시 마침 연합고사를 앞두고 학업을 중단하고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가서 파룬궁을 위해, 어머니를 위해 수많은 어머니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공정한 말 한마디를 하려고 했다. 모든 사람에게 파룬궁은 모독당한 것이며, 우리가 가혹한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알려주려 했다. 결과는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붙잡혀 돌아왔고 핍박으로 퇴학당했으며, 또 하마터면 구류처분을 받을 뻔했다. 그 기간에 또 위협과 공갈 협박당했으며, 누구도 그녀가 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신진 진싼자오(金三角)광장으로 가서 연공했다. 그런 다음 또 붙잡혔다. 가장 무더운 여름날, 우진 파출소의 정원 뙤약볕에 온종일 묶인 채, 물을 주지 않고 밥을 주지 않았으며, 앉을 수도 없고 화장실로 갈 수도 없었다. 당시 나는 여전히 신진현유치장 안에 불법 감금당해 있었는데, 연루 당한 딸을 생각하는 나의 심정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이렇게 대하는지? 우리는 단지 건강한 몸, 평범하지만 즐거운 가정을 가지려 했을 뿐이다. 우리는 단지 좋은 사람, 심지어 더욱 좋은 사람이 되려 했을 뿐, 우리는 누구의 이익도 방해하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정부는 국민을 위해 고려함이 마땅하지 않는가? 줄곧 국민의 ‘복리를 도모한다’고 찬양하지 않았는가?
파룬궁을 수련한 뒤부터 건강해지고 마음이 넓어졌으며, 나는 온갖 방법으로 난처하게 구는 시어머니를 보살펴드렸다. 차례로 그녀와 나의 시아버지 또 나의 부모에게 생전에도 사후에도 효도를 다 했다. 나에게도 형제자매가 있는데, 그들이 효도를 다 하지 못한 데 대해 나는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내게 환골탈태하게 한 공법, 내게 새로운 생명을 준 공법이 모독과 불공정한 대우를 받을 때 내가 어찌 회피할 수 있는가?! 어찌 침묵할 수 있는가?! 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꼭 모든 사람에게 사실 진상을 알려야 하며 파룬궁의 결백을 밝혀야 한다.
문장 발표: 2015년 5월 16일
문장 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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