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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2014년 지린성 연변 파룬궁수련생 박해사례 총론(5)

[밍후이왕](전편에 이어서)

5. 가족이 죽고 가정이 파괴되는 비극이 계속되다

장쩌민(江澤民), 뤄간(羅干)이 관련 부서를 조종해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육체를 소멸한다’, ‘때려죽이면 자살로 간주한다’라는 사악한 비밀지령 하에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15년간 연변 파룬궁수련생이 박해를 받아 사망한 사람은 72명이나 된다. 그 중 60세 이상 수련생 27명, 40세 이상 수련생 11명은 이미 신원이 확인됐다. 박해를 받아 사망한 파룬궁수련생 중 남성은 42%, 여성은 54%, 성별을 확인해야 할 사람은 4%를 차지했다. 이 파룬궁수련생들 중 믿음을 견지해 관련 부서의 고문 시달림을 받아 사망한 사례도 있고 중국공산당의 각종 박해 압력 하에 정상적으로 수련하지 못해 질병으로 사망한 사례도 있다. 1999년 ‘7.20’부터 중국공산당의 탄압이 시작된 후 이런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박해를 받아 세상을 떠난 파룬궁수련생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구체적인 상황은 어떨까? 아직도 진일보 찾아보고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图)被迫害致死的部分法轮功学员

박해를 받아 사망한 일부 파룬궁수련생

◇ 정쥔수(鄭君淑, 여, 24세, 연변대 대학생)는 지린성 지린시 판스(盤石)현 얼도강(二道崗)향 사람이다. 1999년 8월 베이징에 탄원신청을 하러 갔다가 학교 정치보위과에게 끌려왔다. 돌아오는 도중에 계속 베이징 관련 부서에 대법의 진상을 똑똑하게 알리려다 정쥔수는 강요에 의해 기차에서 뛰어내리게 됐는데 불행히도 사망했다. 사망 장소 공안국에서는 현지에서 그녀를 화장(火葬)시켰다. 그녀 주머니에 있던 3천 위안 넘는 통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것은 파룬궁수련생들이 탄원 기간에 쓰려고 모은 돈이었다.

◇ 김희범(金熙范, 남, 65, 조선족)은 왕칭(王淸)현 톈차오링(天橋嶺) 퇴직 노동자로, 1997년 3월부터 파룬궁을 연마한 후 신체가 건강해지고 많은 질병이 다 좋아졌다. 1999년 7월 20일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다방면에서 간섭하고 연공하지 못하게 하자 김희범은 지병이 다시 도져 2008년 8월에 세상을 떠났다.

◇ 위안쑤윈(袁素雲, 여, 73)의 집은 안도(安圖)현 바이허(白河) 임업국에 있다. 파룬궁을 수련해 신체가 건강하고 가정이 화목해져 여러 번 임업국에서 모범가정으로 선정됐다. 1999년 ‘7.20’부터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파출소, 주민위원회 주임이 자주 집에 찾아와 소란을 피우고 엄포를 놓아 위안쑤윈은 수련을 포기해 2000년 12월 17일에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원수친(溫淑琴, 여, 50, 왕칭현)은 2001년 1월에 진상자료를 배포하다가 연변주 정치보위과에게 불법적으로 체포돼 연길시 구치소에 수감됐다. 한 달 후 불법 노동교양 1년을 선고받았고 창춘(長春) 헤이쭈이쯔(黑嘴子) 여자 노동교양소에 수감돼 박해를 받았다. 노동교양에 수감된 한 달 후 유방암(붙잡히기 이전에는 건강했음)에 걸려 병보석으로 가족이 집으로 데려갔는데 2001년 9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 류훙(劉宏)은 연길시 한 학교 교사다. 2001년 11월에 경찰에게 불법 체포당했는데 그는 단호하게 악인들에게 협조하지 않았고 단식하고 물을 마시지 않는 것으로 박해에 항의해 경찰에게 강제 음식물 주입을 당했다. 12월 중순에 연길시 교도소 교도관이 야만적으로 음식물을 폐에 주입해 질식해 사망했다. 류훙이 납치당해서부터 박해로 사망할 때까지는 한 달 정도에 불과했다.

◇ 안도현 대법제자(남, 연령과 이름 불명) 사망 사례. 2001년 12월 20일, 또 한 명의 연변 파룬궁수련생이 박해를 받아 사망했는데 경찰이 그의 온몸에 책 종이로 둘러싸 박해했다. 부검 결과 피부에 상처가 없지만 내장이 전부 손상됐다. 사망한 사람은 지린성 안도현 사람이고 안도현 경찰에게 체포당해 연길 노동교양소에 수감됐었다. 그가 박해로 사망한 후 연길 노동교양소에서는 모든 불법 수감된 파룬궁수련생을 긴급히 주타이 인마허(九臺飮馬河) 노동교양소로 이감시켜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 왕톄쑹(王鐵松, 남, 32)은 안도현 바이허 임업국의 보일러 설치회사 직원으로 2000년 10월에 불법적으로 붙잡힌 후 연길 노동교양소에 수감됐다. 노동교양소에서 왕톄쑹은 진리를 고수하다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아 2001년 12월 4일에 박해를 받아 사망했다. 일이 발생한 후 연변주 관련 지도층과 공안기관, 노동교양소 등은 사망자가 박해당한 진상이 폭로될까 두려워 가짜 진료기록을 사후에 재발급했다. 병원으로 보낸 후 강제로 호흡을 시켰지만 당시 심장 맥박은 이미 그쳤다. 이렇게 됐는데도 강제로 11일 간인 12월 15일까지 호흡을 시켰다. 조사를 통해 이 병원에서 직접 목격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사망자의 상황으로 봐서는 그들이 들고 왔을 때 당연히 직접 영안실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때 그는 이미 호흡이 멈췄으나 공안국 사람의 협박 하에 억지로 호흡기를 달았는데 응급처치도 소용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당시 사망자의 두 눈은 떠 있었는데 한쪽 눈은 이미 동공이 열려있었고 다른 한쪽 눈은 움푹 들어갔으며 늑골이 부러지고 상처투성이였는데 매우 비참했습니다.”

◇ 박세호(朴世浩, 남, 60여세, 조선족)는 연변대학 의학원 노 교수다. 사람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리다 납치당했는데 연길 구치소에 몇 달간 구금됐고 시종 믿음을 견지하다 학대를 받았다. 내막을 아는 사람이 누설한 바에 의하면 박 교수는 연길 구치소에서 박해를 받아 신체가 극도로 쇠약해져 2002년 8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연길 의학원의 한 관리는 8월 20일 박 교수가 교도소에서 사망했다는 것이 확인됐고 시신이 이미 화장됐다고 말했다.

◇ 쉬시쥔(徐錫軍, 남, 29)의 집은 돈화(敦化)시 추이리거우(秋里溝)에 있고 창춘시에서 근무했다. 2000년 10월에 베이징에 탄원하러 갔다는 이유로 돌아온 후 창춘시 훙치(紅旗)로 파출소에서 불법 노동교양 3년을 선고받았고 잇따라 창춘시 펀진(奮進) 노동교양소와 차오양거우(朝陽溝) 노동교양소에 수감됐다. 노동교양소에서 쉬시쥔은 믿음을 견지했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괴로움을 당했다. 심신에 매우 큰 상처를 입어 식사를 할 수 없었고 폐에 음영이 관찰됐다. 노동교양소에서는 할 수 없어 2001년 10월에 ‘병보석’을 허락했지만 이 기간에 여러 번 그에 대해 소란을 피웠다. 쉬시쥔은 2005년 5월 세상을 떠났다.

◇ 양중팡(楊忠芳, 여, 37)는 원래 쓰촨성 청두 사람인데 친척에게 의지하기 위해 연길에 있었다. 양중팡은 근무시 일을 잘했고 연길시 옌시(延西)로 벽돌공장 부근의 시위안(西怨) 시장[지금은 밍리화위안(名莉花怨) 시장으로 개명]에서 조제식품 장사를 했다. ‘진선인(眞善忍)’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다 여러 번 박해를 받았다. 2001년 2월, 옌시 파출소의 경찰 왕롄창(王連强), 왕리궈(王莉國)가 시위안 시장에서 양중팡을 강제로 끌고가 옌시 파출소에서 주먹질과 발길질, 욕설을 했다. 이후에 구치소로 보냈는데 저녁에 구치소에서 당교(黨校)로 끌려갔고 또 당교에서는 스옌(石峴) ‘전향반(즉 파룬궁수련생을 강박해 믿음을 포기하게 하는 모임)’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붙잡힌 그날부터 매일 25위안씩 비용을 달라고 했다. 2002년 7월 1일 아침에 양중팡의 집은 연길시 젠궁(建工) 파출소 경찰의 포위당했고 수련하지 않는 아들, 딸과 남편마저 함께 잡아갔다. 양중팡이 잡혀간 이튿날, 바로 7월 2일 아침에 사람들은 양중팡이 젠궁 파출소 경찰에게 맞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경찰들은 ‘급성 질환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양중팡의 가족과 많은 사람이 도착했을 때 시신은 이미 강제로 화장소로 보내졌고 복부 내 장기는 이미 적출돼 검시관에게 부검이 요청됐다. 부검 결과가 나왔는데 10여 가지 병이 있었다고 했다. 친척과 친구들은 양중팡의 몸이 건강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민원 신청 증거를 남기기 위해 양중팡의 시신을 찍어 놓았었는데 사진에서 양중팡은 구타당해 상처투성이였고 얼굴도 변형된 것을 볼 수 있었다.

◇ 장위란[張玉蘭 혹은 장위지(張玉芝), 여, 48)은 안도현 얼도바이허진 사람으로 2002년 2월 4일 집에서 납치당했다. 창춘 헤이쭈이쯔 노동교양소에 수감돼 박해를 받았는데 악랄한 환경 속에서 매일 16시간 강제 노동을 하게 했고 저질 접착제에서 각종 발암성 가스가 증발하는 환경 속에서 노동해야 했다. 거기에 강제 세뇌의 고통을 당해 장위란은 백혈병 증상이 나타났고 스스로 생활하지 못할 지경이 됐다. 노동교양소에는 책임이 두려워 가족에게 그녀를 데려가라고 통지했다. 장위란은 2002년 10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 취안퉁쥐(全同擧, 남, 68)는 안도현 바이허 임업국 사람으로 1999년 7월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부터 그와 아내, 며느리, 딸이 모두 잡혀 구치소에 수감돼 박해를 받았으며 모두 불법 노동교양을 받았다. 당국은 취안퉁쥐가 놀라서 돌발성 이롱증이 되자 젖먹이 손녀를 돌봐주라고 풀어주었지만 자주 찾아가 소란을 피워 충격을 주었다. 2002년 11월 6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김명숙(金明淑, 여, 70)은 왕칭현 백화점 퇴직직원으로 1996년부터 파룬궁을 연마하기 시작한 후 이전에 있던 온몸의 병이 치료하지도 않았는데도 다 나았다. 파룬궁 박해 후 그녀가 수련을 견지했기 때문에 여러 번 공안국, 정치보위과와 ‘610’의 불법 소란과 협박을 받았다. 2002년 잇따라 3번 납치당하고 불법 심문을 받았다. 여러 차례 학대를 받아 김명숙은 중풍 증상이 나타나 2003년 2월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지휘문(池輝文, 남, 36, 조선족)은 연길시 사람으로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여러 번 박해를 당했는데 2001년 10월 기간에 두 번째로 이란(依蘭) 세뇌반으로 납치됐다. 세뇌반 두목 박남수(朴男洙) 등은 지휘문을 이틀이나 학대했으며 그가 세뇌반에서 죽을까 봐 풀어줬다. 이후에 파출소와 가도(주민센터)는 연합해 엄밀히 감시하고 소란을 피웠다. 지휘문의 건강은 하루하루 악화됐고 2004년 3월 12일에 이르러 완전히 반신불수가 됐으며 4월 1일부터 식사를 할 수 없게 됐고 4월 22일에 연길시 병원에서 극도의 고통 속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류보(劉波, 여, 45)는 연길시 사람이다. 2004년 8월 9일 연길시 경찰은 가족에게 류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통지했다. 가족이 류보의 시체를 봤을 때 머리가 부어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경찰은 자살이라고 하며 시신을 부랴부랴 화장시켰다. 중국공산당의 세뇌를 받아 양심을 잃은 가족도 다시 류보의 말을 꺼내기 싫어했고 “죽으니 오히려 안심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류보가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기간에 그녀 가족은 장쩌민 정치불량패 집단의 유언비어를 믿고 여러 번 경찰을 도와 류보를 정신병원으로 납치해 시달림을 받게 했으며 강제로 ‘진선인’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게 했다. 2003년 추석 전날 밤에 류보는 정신병원에서 도망나온 후 유랑하다가 박해 2개월 전에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 주위화(朱玉花, 여, 75)는 왕칭현 톈차아링 임업국 근로자 가족이다. 1998년에 파룬따파를 연공한 후 신체가 건강해졌다. 1999년 ‘7.20’ 이후 주위화 노인의 가족(파룬궁수련생)은 베이징에 탄원하러 갔다가 불법 체포를 당했고 구속됐는데 정념으로 뚫고 나온 후 유랑생활을 했다. 악인은 늘 주위화의 집을 찾아가 으름장을 놓고 가택 수색하고 노인을 협박할 뿐만 아니라 공안국으로 강제로 납치해 심문하기도 했다. 정상적으로 연공하지 못하고 가족이 박해당한 충격 하에 노인은 2003년 정월 8월 초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장구이룽(姜桂榮, 여, 70여세)은 연길시 사람으로 1995년에 법을 얻고 수련을 했는데 줄곧 매우 정진했다. 1999년 7월 20일 후 경찰은 늘 노인 집에 가서 소란을 피웠고 두 번이나 체포하기도 했다. 2002년 4월 12일, 노인이 불법으로 체포당한 후 가족은 노력해서 구출해냈는데 2003년 3월 2일, 노인은 또 붙잡혔고 연길시 차오양 파출소에 3일간 불법 수감됐으며 이 기간에 많은 학대를 받았다. 경찰은 노인을 구타했고 3일간 밥을 먹고 잠을 못하게 했다. 이후에 구치소로 보냈는데 가족은 노인을 구출해냈다. 당시 집으로 돌아온 후 노인은 줄곧 정신이 흐리멍덩했고 3개월 후인 2003년 6월 15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리창칭(李常靑)의 모친(연령 미상) 사례. 2000년 3월, 파룬궁수련생 리창칭 일가 네 식구는 함께 베이징 천안문에 가서 진상을 알렸는데 돌아온 후 모두 불법 수감됐다. 리창칭의 어머니가 석방될 때 관련 부서에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고 직접 또 세뇌반으로 보내 박해했으며 3000위안의 보증금을 내야 했다. 집에 돈이 없자 직장에서는 임금에서 직접 차압했다. 세뇌반에 수감되어 있는 기간에 그의 어머니는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 2003년 10월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한위메이(韓玉梅, 여, 안도현 바이허 임업국 사람으로 추정)는 법을 배우기 전에 황달성 간염, 유방암, 당뇨병, 뇌종양 등 질병이 있었는데 1998년에 파룬궁을 연마한 후부터 증세가 다 나았다. 1999년 ‘7.20’,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경찰은 여러 번 집에 찾아가 소란을 피워 한위메이는 정상적으로 법공부하고 연공할 수 없게 되어 지병이 도졌다. 2003년 음력 9월 12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쑹융화(宋永華, 여, 45, 연길시 사람)는 1999년 11월 9일에 베이징에 탄원하러 갔다가 15일간 구속당한 후 풀려나왔다. 계속 탄원하겠다고 표시하자 이후에 얼마 안 되어 또 불법 구속당했고 단식을 해서 풀려나왔다. 2001년 11월 23일, 쑹융화는 자료점에서 붙잡혔는데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듣는 말에 의하면 그녀의 팔은 오랫동안 쓰지 못했다. 쑹융화가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기간에 신체 상황은 줄곧 좋지 않았는데 심한 갑상선 기능항진증에 심장병 증세였고 신체가 매우 허약했으며 늘 혼자 생활할 수 없었다. 대략 2003년 봄에 화룡 구치소로 이송됐다. 그해 6, 7월 기간에 불법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2003년 10월 30일 화룡 구치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 류보이(劉波一, 여, 43)는 연길시 사람으로 류보이의 오빠와 사악한 ‘610’의 두목 샤오빈(肖彬)이 모의해 그녀를 연길시 정신병원으로 납치했으며 불법적으로 2년 동안 가뒀다. 당시 류보이는 오빠에게 “오빠, 전 정신병이 없어요. 경찰과 함께 저를 박해해서는 안돼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감금 기간에 그녀에게 이름을 모르는 약물 주사를 놓는 바람에 류보이의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자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녀가 집으로 돌아온지 한달 만에 또 ‘610’에게 납치당했다. 대략 2003년 말~2004년 사이에 박해를 받아 사망했다. 그녀의 남편은 세무국 공무원인데 그녀와 이혼한 후 남방으로 가서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 박길자(朴吉子, 여, 49)는 연길시 방역소 의사로 법을 얻기 전에 간성혼수 등 여러 질병으로 병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는데 파룬궁을 연마한 후 질병이 없어지고 온몸이 가뿐하게 됐다. 사악한 탄압이 시작한 후 그녀는 시종 대법을 확고하게 믿었고 대법을 실증하다가 4년 넘게 많은 박해를 받았다. 2001년에 연길시 공안국에게 납치됐으며 그해 9월에 불법 노동교양을 선고받은 적이 있었는데 몸에 심한 병색이 돌아 병보석으로 풀려나왔다. 집으로 돌아온 후 계속 진상을 알리자 공안국에서 여러 번 그녀를 붙잡겠다고 했다. 2003년 3월에 박길자는 할 수 없이 유랑하게 됐다. 경제가 어렵고 생활환경이 좋지 않으며 장기간 유랑이란 정신적 압력으로 박길자의 몸은 더는 지탱할 수 없게 됐다. 2004년 1월 8일에 병원에서 사망했다.

◇ 징수화(荆淑花, 여, 56)는 연길시 사람으로 2004년 4월 29일 오전에 룽징시 공안국에게 납치당했고 동시에 가택 수색을 당했으며 붙잡힌 후 줄곧 가족이 면회하지 못하게 했다. 가족은 징수화의 심장병이 재발했다는 것을 듣고 약과 옷을 가져갔는데 경찰은 받아주지 않았다. 5월 25일 징수화를 집으로 돌려보냈을 때 이미 박해를 받아 사경에 이르렀다. 가족은 즉시 병원으로 보내 응급 처치를 했지만 살려내지 못했고 27일 새벽에 사망했다.

◇ 샤오궈빈[肖國斌 혹은 샤오궈빙(肖國兵), 남, 31]는 안도현 바이허 임업국 두리(獨立) 고등학교 교사였다. 샤오궈빈은 믿음을 견지해 여러 차례 납치당하고 박해를 받았지만 세뇌반, 구치소, 노동교양소 등 사악한 소굴에서 그는 정정당당했다. 주타이 노동교양소에서 여러 차례 독방에 갇히고 형기가 늘어났으며 각종 고문 박해를 받았지만 사악한 자들에게 타협한 적이 없었다. 마지막에 교도관과 일반 노동교양수들도 매우 탄복했다. 샤오궈빈은 2003년 10월에 정념으로 주타이 노동교양소에서 뚫고 나왔지만 현지 ‘610’은 ‘5서(수련 포기각서 류)’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교로 돌아가 강의하지 못하게 했고 미행하고 소란을 피우며 박해 등을 진행했다. 2004년 5월 26일 오전에 샤오궈빈은 아이를 유치원으로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얼도바이허 임업국 제1파출소의 경찰에게 납치당했다. 7, 8명 불법 경찰은 아무런 합법적인 수색 수속이 없는 상황에서 강제로 샤오궈빈의 집으로 쳐들어와 불법 가택 수색을 하고 함부로 뒤졌다. 경찰들은 또 강제로 샤오궈빈을 데려가려고 했다. 가택수색 과정 중 샤오궈빈은 집 6층에서 떨어졌는데 병원으로 보내 응급처치를 했는데도 소용없이 사망했다. 경찰은 병원을 엄밀하게 통제했고 영안실에 경찰이 있었으며 경찰차가 단속했다. 당일 저녁에 검시관 페이스장(費世江)이 부검을 했다.

◇류슈란(劉秀蘭, 여, 60)은 도문시 파룬궁수련생이다. 2003년 5월에 경찰이 그녀 집에 쳐들어가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중풍 증상이 나타났고 2004년 8월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류전친(劉振琴, 여, 55)은 연길시 사람으로 1995년 파룬궁을 연마한 후 많은 질병이 나았다.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부터 그녀는 줄곧 세인에게 진상을 알리고 사악의 박해를 폭로했으므로 세뇌반으로 한 차례 납치됐고 또 3번 구치소에 수감돼 박해를 받았으며 몸과 마음은 극도의 상처를 입었다. 2004년 9월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허우페이신(候佩新, 여)는 연길시 사람으로 핍박에 못이겨 유랑하게 돼 심신이 심한 상처를 입어 2005년 세상을 떠났다.

◇ 김희복(金姬福, 여, 연령 미상)은 왕칭현 왕칭진 다웨촌(大月)의 농민이다. 김희복은 파룬궁을 수련해 왕칭현 허베이 파출소 최봉춘(崔鳳春) 등 경찰의 박해를 받아 사망했다.

◇ 한셴위(韓賢玉, 여, 연령 미상)은 연길시 옌난로 주민이다. 최근 몇 년에 파룬궁을 연마해 현지 중국공산당 악도들의 박해를 받아 사망했다.

◇ 우진선(吳金善, 여, 84)은 연길시 사람으로 1999년 7월 20일 이후 그녀의 두 딸이 파룬따파를 수련해 잇따라 여러 차례 불법 체포당했고 막내딸은 불법 노동교양을 선고받았다. 그 중 한번은 딸이 집에서 우진선에게 밥을 해주는데 불법 경찰에게 노인 앞에서 그녀의 딸은 잡아갔다. 이후에 우 노인은 중병에 걸렸는데 간병이 없는 상황에서 대법 사부님께 도와달라고 청하자 기적이 나타났다.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은 매우 순조로웠고 그날 저녁에 혼자서 화장실에 갈 수 있었다. 그 후로 우 노인은 진정으로 대법 수련에 들어섰고 암도 다 나았으며 10여 년의 자궁 하수, 백내장도 다 나았다. 그러나 이후 우 노인은 TV와 라디오에서 또 파룬궁을 모함하는 유언비어 소식을 접하자 딸이 붙잡힐까 봐 매우 두려웠다. 결국 심신에 상처를 입어 2005년 1월 19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 쑨위안우(孫元武, 남, 38)는 도문시 사람으로 10년 전에 교통사고로 하지가 마비됐다. 1996년 9월에 쏜위안우 일가는 운좋게 파룬따파를 수련했다. 1999년 7월부터 중국공산당 악도들이 파룬따파에 대해 전면적인 박해를 시작한 후 쏜위안우 집은 끊임없이 현지 정법위, ‘610’ 사무실, 주민센터, 파출소 등 불법 행위를 하는 자들의 소란과 박해를 받았다. 쏜위안우의 가족은 여러 번 불법 수감당하고 세뇌를 당했는데 기간에 약 1만 위안을 뜯어갔다. 쑨위안우의 부모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유랑하게 됐다. 쑨위안우의 행동이 불편한 것을 보고 정법위와 ‘610’은 그의 집에 전문적으로 ‘전향반’을 만들어 강제 세뇌를 시켰다. 2004년 여름, 쑨위안우 일가는 할 수 없이 이사를 갔다. 가정이 아직 안정되지 못했는데 악인은 또 애를 써서 그의 집을 찾아냈고 찾아가 소란을 피웠다. 원래 거주지 주민위원회 서기 멍차이샤(孟彩霞)도 여러 명의로 소란을 피웠고, 경찰 리진유(李金友)는 사람을 거느리고 그의 집에 찾아가 가택수색을 했으며, ‘610’ 사무실의 부주임 비원거는 사람을 데리고 그의 집에 가서 소란을 피웠으며 이후에 또 한 무리 악도들을 데리고 와서 ‘전향반’을 만들었다. 겹겹의 박해와 소란을 받아 쑨위안우의 심신은 심하게 상처를 입어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고 2005년 정월 초하루 저녁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위수칭(于淑淸, 여, 77)은 훈춘시 사람으로 이전에 여러 질병이 있어 항상 주사를 맞고 매일 약을 먹었다. 1998년 9월부터 파룬궁을 연마하기 시작했는데 심신은 혜택을 받았고 다시는 약을 먹지 않게 됐다. 1999년 ‘7.20’ 박해가 시작한 후 파출소 경찰은 그녀를 찾아가 소란을 피우고 대법서적을 빼앗아갔다. 노인은 두려워 감히 다시 연공하지 못했고 질병이 도지자 또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았는데 2005년 정월 17일에 사망했다.

◇구칭춘(顧慶春, 90)은 연길시 사람으로 1996년 봄인 81세부터 파룬궁을 연마하기 시작했는데 매우 정진했다. 1999년 ‘7.20’,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불법 행위를 하는 자들이 노인이 법공부하는 것을 심하게 방해했다. 가족 파룬궁수련생은 불법적인 체포를 당했고 가택수색당하며 노동교양을 선고받았다……. 노인은 큰 고난을 감당해 가슴이 몹시 답답했으며 2005년 2월 28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텅페이샹(騰沛香, 여, 51)는 도문시 안산촌 사람으로 법공부하기 전에 정신이 이상했고 질병이 많았다. 1997년 연공한 후 치료하지 않았는데 다 나았고 신체와 정신이 건강하게 됐다. 1999년에 베이징에 탄원하러 갔다가 불법 구속당했고 가택수색을 당했으며 2000년에 또 불법 가택수색과 구속을 당했다. 구치소에서 정신적, 육체적 심한 시달림을 받았는데 또 연길 정신병원으로 납치돼 계속 박해를 당하는 바람에 그녀의 정신은 심한 이상증세를 보였다. 가족이 그녀를 데려간 후 줄곧 정신이 희미했다. 그러나 박해를 해 사람을 이런 지경으로 만들어놓고도 경찰은 또 늘 찾아와 소란을 피웠다. 장기적인 소란과 정신적 시달림 속에서 텅페이샹은 2005년 3월 15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김금순(金今順, 여, 49, 조선족)은 용정시 사람이다. 1997년 파룬궁을 연마한 후 신체가 건강해졌는데 1999년 7월 20일 이후 여러 방면의 방해와 압력 하에 정상적으로 수련할 수 없게 됐다. 결국 2005년 3월에 왕청현 톈차오링(天橋嶺)에서 사망했다.

◇ 차오융더(曹永德, 남, 67) 지린성 연변예술학교(연변대학예술학으로 개명)의 퇴직간부다. 1995년부터 파룬궁을 연마하기 시작했고 2001년 수련을 견지하다 직장의 박해를 받았다. 장기적인 심한 박해 압력 하에 2005년 4월 7일에 원한을 품은 해 세상을 떠났다.

◇ 판수잉(潘淑英, 여, 67)은 연길시 사람이다. 2001년 6월에 진상을 알리는 과정 중 납치당했고 보름동안 불법 구류당했다. 2001년 8월에 집에서 아무 이유 없이 납치당했고 세뇌반에서 한 달간 박해받았다. 2002년 5월, 또 한번 집에서 납치당했는데 그녀는 비인간적인 고문의 시달림을 받았고 이후에 창춘 헤이쭈이쯔 노동교양소로 보내졌는데 중풍 증상이 나타나 한달 후 집으로 돌려보냈다. 노인이 집으로 돌아온 후 가족은 법을 배우지 못하게 했고 병원에 가서 치료하라고 했다. 장기적인 박해로 판수잉은 결국 2005년 7월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김철(金哲, 남, 30여세)은 용정시 더신(德新)향 룽옌촌 사람으로 1998년 법을 얻은 후 심신에 이로움을 얻었다. 1999년 7월 20일 이후부터 촌, 향, 시, 주(州)의 각계 610정부 불법 행위를 하는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며, 용정 구치소에서 보름 동안 구류됐다. 악당(惡黨) 요원들이 끊임없이 방해했기 때문에 김철은 장기적으로 집을 잃고 떠돌아다니게 됐으며 어려운 환경 중에서도 파룬궁 진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장기적인 박해로 신체에 병업상태가 나타나 2005년 9월 말에 세상을 떠났다.

◇ 왕슈칭(王秀淸, 여, 53, 미혼)은 용정시 라오터우거우(老頭溝) 타이양(太陽)촌 사람으로 1997년 운 좋게 파룬따파를 수련했고 수련한지 얼마 안 되서 원래 많은 질환들이 사라지고 몸이 가뿐해졌다. 1999년 7월 20일,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용정시 라오터우거우진 파출소 경찰은 왕슈칭에 대해 늘 소란을 피워 그녀의 정신과 육체에 이중 박해를 가했고 여러 차례 납치해 노동교양 1년을 선고했다. 헤이쭈이쯔 노동교양소에서 왕슈칭은 많은 고문과 모욕을 당했고 노동교양소에서 나온 후 신체는 이미 매우 허약해졌다. 그러나 라오터우거우진 파출소 경찰은 얼마 안 되서 또 그녀를 세뇌반으로 납치해갔는데 그녀는 합작하지 않고 단식하고 항의해 용정 구치소에 압송돼 불법 수감됐다. 왕슈칭은 구치소에서 생명이 위독해질 때까지 계속 단식 항의해 병원으로 보내졌다. 그 후부터 왕슈칭은 집이 있어도 집에 돌아갈 수 없었고 유랑 기간에 불법 경찰은 끊임없이 그녀의 행방을 조사했고 원래 주소로 찾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 한 악인은 왕슈칭이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고 신체가 매우 허약한 기회를 틈타 그녀를 강간했다. 이런 말하기 어렵고 견딜 수 없는 모욕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 하에 며칠이 지나지 않아 왕슈칭은 2005년 11월 3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리신(李新, 남, 40여세, 훈춘시 사람)은 파룬궁수련생 장리신(張麗新)의 남편이다. 2003년에 불법 노동교양 1년을 선고받았는데 주타이 노동교양에서 출소한 후 박해를 받아 심한 심장병이 생겼고 온몸이 부었다. 2006년 리신은 훈춘시 잉안광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사망시 온몸이 심하게 부었다.

◇ 김범룡(金范龍, 남, 52세, 조선족)은 도문시 과학원에서 근무했다. 2002년 3월 말, 김범룡은 진상자료를 배포하다가 도문시 경찰에게 납치돼 불법노동교양 2년을 선고받고 주타이시 인마허 노동교양소에서 참혹한 박해를 당했다. 경찰은 또 그가 파룬궁수련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감금기한을 불법 연장해 2004년 여름에야 석방했다. 노동교양소에 있던 기간에 작은 독방에 가둬 감금당한 적이 있고 2년 넘게 비인간적 학대와 고문을 당해 김범룡의 신체는 극히 허약해졌다. 원래 아무런 질환 없이 건강했던 그는 노동교양소에서 집에 돌아온 후 늘 토하고 음식물을 먹기가 힘들었다. 그 후 다리가 부어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는데 2006년 5월 11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하오잉창(郝迎强, 남, 49)은 전 연길시 식량비축창고의 보위과 과장이었다. 2001년 1월 9일에 하오잉창은 연길시 공안국에게 납치됐고 파룬따파 수련을 견지해 3개월 동안 불법 수감됐다. 9월 2일 하오잉창은 또 용정시 차오양진 파출소로 납치됐고 또 용정시 구치소, 연길시 구치소에서 8개월 넘게 수감 당했다. 2002년 5월에 하오잉창은 연길시가 날조한 죄명으로 비밀리에 징역 8년 중형을 선고받아 지린 교도소로 압송됐다. 하오잉창은 지린 교도소에 수감된 후 장기간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았다. 2003년 4월에 이르러 시달림을 받아 심하게 말랐고 몸무게는 40kg도 안됐으며 복부에 부종이 생겼다. 두 병원에서 간경화 간복수 말기로 3개월을 넘길 수 없다고 하자 지린 교도소는 병보석으로 출소시켰다. 2005년 3월 10일 쯤에 신체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는 하오잉창은 창춘시 헤이쭈이쯔 교도소로 아내 양밍팡을 면회하러 갔다가 또 다시 지린 교도소로 납치됐다. 12월 20일 하오잉창은 지린 교도소에서 28일간 단식으로 항의했다. 교도소에서는 가족에게 그가 병이 심하다고 통지했고 하오잉창은 두 사람에게 부축임을 받아 면회실에서 가족과 면회했다. 2006년 4월 30일, 하오잉창이 박해를 받아 생명이 위독해지자 교도소는 책임을 질까 봐 또 다시 하오잉창을 석방했다. 이때 하오잉창의 허리 부위 구멍 안에 뼈 하나가 바깥에서 보였고 왼쪽 광대뼈가 부러졌으며 폐에 물이 고여 호흡이 곤란했고 손톱이 퍼랗게 멍들었으며 눌려 부서진 흔적이 뚜렷했다. 오른쪽 귀는 들을 수 없었고 대변에 피가 섞였으며 간 부위를 구타당해 간기능을 상실했고 배가 부어 온몸에 부종이 생겼으며 매일 침대에 누워서 몸을 돌릴 수 없었는데 극히 고통스러웠다. 2006년 6월 8일 하오잉창은 고통스러운 비명 속에서 인간세상을 떠났다.

◇양충취안(楊洪權, 남, 36)은 원래 지린시 사람인데 아내가 연길시 사람이기 때문에 결혼한 후 아내와 연길시에서 살았다. 1998년 말 부부 둘은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수련한 후 양홍권 부부는 일마다 진선인의 표준대로 좋은 사람이 되었으며 거기에 오래된 요통과 다리 통증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1999년 7월 20일 박해가 시작된 후 양홍권은 여러 차례 납치당했고 구치소에 수감돼 고문을 받았다. 심하게 구타, 판자로 갈비뼈를 긁는 등이 포함됐다. 각종 정신적, 육체적 시달림 하에 그는 요독증에 걸렸다. 결국 2006년 8월 29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집에 오직 돈을 벌지 못하는 어머니와 젊은 아내 밖에 남지 않아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됐다.

◇ 림세웅(林世雄, 남, 46, 조선족)은 원래 연길시 미쓰비시 차량 수리부 책임자였다. 박해 초기 림세웅은 파룬궁을 위해 평화적으로 탄원했고 연길시 시장에게 긴 공개편지를 썼는데 불법 노동교양 1년을 선고받았다. 2002년 연길시 국가보안대대는 또 연길시 구치소에 림세웅을 2년 넘게 불법 수감했고 날조한 죄명으로 중형 13년을 선고했다. 림세웅은 박해를 받아 생명이 위독한 상황에서 병보석을 신청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지린 교도소 방면과 연길시 정법위 계통 요원은 여전히 림세웅을 놓아주기 싫어했고 늘 교도소의 형이 아직 만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에게 소란을 피웠다. 이 악인들의 장기적인 소란은 림세웅에게 정신적으로 매우 큰 압력을 줬기 때문에 집에서 안정적으로 몸조리를 할 수 없어서 결국 2006년 11월 20일 쯤 집에서 사망했다.

◇ 허현자(許顯子, 여, 70여세, 조선족)는 연변대학 영어학과 부교수였다. 1994년 8월에 허현자는 운 좋게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께서 연길에서 개최한 파룬따파 전공(傳功) 설법반에 참가했고 그때부터 수련을 시작했다. 중국공산당 사당(邪黨)이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시작한 후, 2000년 2월에 허현자는 대법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파출소 경찰 쑹저쿠이(宋哲奎), 연변대학 영어학과 서기, 보위처 인원에 의해 현지로 끌려와 연길유치장에 15일 불법감금 박해를 당했다. 이후 악인들은 늘 그녀에 대해 괴롭힘, 불법 가택수색, 미행, 거주지 불법감시 등을 가했다. 2000년 11월, 허현자를 또 연길시 제1기 ‘세뇌반’으로 납치해 박해를 가했으며 아울러 그녀를 불법노동교양(이후에 교도소 외에서 집행)을 시켜 편안한 날을 보내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허현자가 퇴직한 후에도 연변대학 책임자는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고 성(省)에서도 사람을 파견해 그녀 집에 머물면서 장기간 그녀에게 ‘전향’ 박해를 감행했다. 매번 이른바 ‘민감한 날’이면 악인은 집을 찾아가서 괴롭히고 공갈 협박했으며 또 여러 차례 불법가택수색을 자행했다. 허현자는 장기간 박해 중에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 정신적으로 압력을 당해 우울증이 병이 되어 결국 2007년 10월 14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김광수(金光洙, 남, 44세, 조선족)은 도문시 량수이(凉水)진 스터우(石頭)촌에 살았다. 수련 전에 성격이 난폭하고 늘 말썽을 부려 가족의 걱정거리였다. 심한 관절염이 있어 다리가 매우 심하게 아팠다. 김광수는 1999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는데 수련한 후 변화가 매우 컸고 다리도 다시는 아프지 않았다. 술을 마시지 않고 말썽을 부리지 않았으며 연장자를 존중하고 어린이를 사랑했으며 집안의 기둥이 됐다. 2001년 1월 김광수는 베이징에 가서 파룬따파의 아름다움을 실증했다는 이유로 연길 노동교양소에 수감돼 박해를 받았다. 노동교양 기간에 비참한 비인간적인 고문을 받았고 몸에 큰 상처를 입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김광수는 암 증세로 표현됐는데 병원에 입원하고 치료했는데 효과가 없어 결국 2008년 5월에 사망했다.

◇ 김영남(金永男, 남, 60세, 조선족)은 도문시 우궁(吳工)촌에 살았다. 2000년 3월 김영남은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베이징으로 갔다가 강제 송환되어 도문시 구치소에 불법 수감됐고 돈도 빼앗겼다. 2001년 1월, 김영남은 갑작스레 웨궁(月宮)가 파출소의 김창수(金昌洙) 등 경찰들에게 납치돼 도문시 석현진 제지공장 양로원에 가서 비인간적인 세뇌 박해를 받았다. 김영남이 수련을 포기하지 않자 세뇌반에서 간수소로 넘겨졌고, 다시 간수소에서 세뇌반으로 넘어왔다가 4월 중순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2002년 6월, 김영남이 대법을 실증하자 또 다시 연길과 화룡 파출소 경찰들에게 불법으로 체포됐고 주먹과 발길질을 당했다. 같은 해 7월, 김영남은 불법적으로 지린성 주타이 인마허 노동교양소에 보내졌고 형기가 훨씬 지난 2003년 7월이 되어서야 겨우 풀려 나오게 됐다. 집에 돌아온 지 겨우 반년이 된 2004년 2월 4일, 또 다시 악인의 고발을 받은 도문시 웨궁가 파출소 경찰들이 그의 집을 수색했고 그날 바로 그는 도문시 국가보안대대에 불법적으로 감금됐는데 고문을 당했다. 2004년 10월에 김영남을 또 주타이 노동교양소로 보냈는데 피를 토하는 등 엄중한 현상이 나타나는 바람에 노동교양소에는 책임이 두려워 2006년 11월에 생명이 위독한 김영남을 집으로 데려가라는 보석신청을 허락했다. 2007년 하반기 김영남은 한동안 건강을 회복했다가 또 악화됐다. 2008년 3~4월부터 기침을 심하게 하기 시작해 정상적인 수면과 식사를 심하게 영향 받아 몸이 허약해졌다. 장기적인 고문 박해를 받은 김영남은 집에 돌아온 후에도 긴장상태에 처해있었는데 설령 조그마한 소리도 그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 5월 3일, 김영남은 두 눈도 감지 못한 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최광영(崔光泳, 남, 38)은 지린성 왕칭(汪清)현 둥신(東新)향 좐자오러우(轉角樓)촌 사람이다. 1999년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 남을 잘 도와줬다. 그러나 1999년 7월 20일 이후 현지 공안부서에서 연공을 못하게 강압하고 개별 촌 지도자의 참여 하에 사악한 자들은 늘 구실을 찾아 최광영 집으로 찾아가 정신적, 육체적 박해를 가했으며 핍박으로 회계사 직업을 그만두게 했다. 그는 두 번 불법 수감됐고 아울러 몇 천 위안을 강탈당했다. 이후로 최광영의 부모님은 문소리만 나도 벌벌 떨었으며 아들이 불법 납치당해 노동교양을 당할까 봐 걱정했다. 집에서는 일할 사람이 그 외엔 아무도 없었다. 2007년 10월 농촌 추수 기간에 공안들이 사람을 데리고 와 아무런 증명서도 없는 상황에서 그를 납치해 노동교양소로 보내 박해했다. 그곳에서 건강에 나빠져 집으로 돌아온 후 2008년 5월 29일 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황규희(黄奎喜, 남, 69, 조선족)은 연길시 사람으로 2004년 5월 13일 아내와 함께 연길시 북산(北山)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당했고 연길시 구류소에서 총 38일 동안 불법 감금박해를 당한 후 불법 노동교양 1년을 선고받았다. 황규희는 주타이 노동교양소로 보내졌는데 노동교양소에서 심한 박해를 받았다. 2005년 4월 20일 황규희는 노동교양소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그는 원래 70kg 정도 체중이었는데 25kg 정도가 줄어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황규희의 신체는 이미 상당히 허약했기 때문에 자녀는 상하이에 가는 비행기표를 샀고 상하이의 큰 병원에 가서 검사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상하이로 가는 전날, 즉 2006년 5월 11일 저녁 5시쯤 황규희와 아내는 또 다시 연길시 차오양 파출소에게 납치됐고 가택수색을 당했으며 40여 일간 불법 수감한 후에야 그를 석방했다. 이후 현지 파출소와 주민센터 사당요원은 소위 민감한 날이 되기만 하면 황규희 부부 집에 와서 소란을 피워 황규희의 건강을 계속 악화되게 만들었다. 결국 2008년 9월 25일 오전에 연길 병원에서 사망했다.

◇ 김준걸(金俊杰, 남, 35, 조선족)은 용정시 사람으로 1999년 ‘7.20’ 이후 여러 차례 불법구류당하고 잔혹한 학대를 받아 몸에 심한 손상을 입었다. 김준걸은 두 차례에 걸쳐 불법노동교양 4년을 받았다. 첫 번째 노동교양 때, 그는 어머니에게 업혀진 채 노동교양소에서 집으로 돌아왔고, 두 번째는 손에 수갑을 차고 머리에는 피가 흥건한 상태에서 노동교양소를 나왔다. 2004년 5월 김준걸은 다시 가족들에 의해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2007년 여름, 김준걸은 가슴이 갑갑하고 숨이 가쁘며, 수척해지고 피를 토하는 등 증상이 나타났다. 체중은 겨우 30kg밖에 되지 않았다. 병원 검진결과 폐결핵 말기 진단을 받았으며 폐는 결핵으로 인해 대부분 괴사된 상태였다. 2008년 12월 13일 김준걸은 원한을 품은 채 인간세상을 떠났다.

◇ 김덕주(金德洙, 남, 40여세, 조선족)는 용정시 둥성융(東盛湧)진 룽산(龍山) 초등학교 교사로, 2002년 파룬궁 연마를 견지해 룽산 초등학교 교장 조철호(趙哲浩)에 의해 해고당했다. 2006년 2월 28일 김덕주는 연길시에서 또 국가보안 경찰에게 납치당했고 연길시 구치소에 1년 넘게 불법 수감됐다. 2007년 9월 29일 정오, 김덕주는 직장에서 두 사복 경찰에게 강제 납치됐고 보름 후에 연길시 국가보안 경찰은 김덕주에게 불법 노동교양 1년을 선고했으며 그를 주타이 인마허 노동교양소로 압송했다. 노동교양소에 있던 7개월 만에 김덕주는 박해를 받아 뼈만 남았고 심한 폐결핵 증상도 나타났으며 여러번 까무러치기도 하는 등 생명이 위독했다. 노동교양소에서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의사의 호송 하에 그를 용정으로 보냈다. 나온 후 김덕주는 두 번 입원했는데 결국 병원 응급처치도 소용없이 2008년 12월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 쉬쥔(許君, 남, 53)은 도문시 지중(集中)촌에 살았고 이전에 지중촌 연공장 보도원이었다. 파룬따파에 대한 믿음을 견지했기 때문에 1999년 7월 20일 이후 납치당하고 불법 수감을 당했는데 한번은 보석을 받고 풀려났다. 이 외에 쉬쥔은 불법 징역, 노동교양을 선고받았고 ‘세뇌반’에 수감돼 박해를 받은 적이 있다. 2009년 2월 6일, 주타이 인마허 노동교양소에 수감되어 있는 쉬쥔은 갑자기 신체 상황이 급격히 악화돼 창춘 중일친목 병원에 이송돼 응급처치를 받았는데 2009년 2월 17일 저녁에 사망했다. 그전에 노동교양소는 쉬쥔이 ‘목욕한 후 갑자기 뇌출혈’했다고 즉시 화장해야 한다며 가족에게 다급히 서명을 요구했고 18일 당일부터 모든 면회를 정지시켰다.

◇ 장후이(張輝, 남, 30)는 안도현 사람으로 불법 수감되기 전에 172cm의 키에 몸무게가 70kg 가량인 매우 건장한 젊은이이었다. 2004년 5월 26일 저녁, 장후이는 연길시 이란(依蘭) 파출소 및 국가보안대대에게 납치당해 불법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불법적으로 지린성 궁주링(公州嶺) 교도소에 수감돼 박해를 받았다. 궁주링 교도소의 제3구역에서 장후이는 각종 불공평한 대우와 노예노동을 저지하다 교도소 정치과 경찰 류하이(劉海)에게 구타당했고 제3구 교도관 왕지칭(王吉慶)에 의해 여러 차례 독방에 갇히고 박해를 받았다. 장기적인 박해와 학대 하에 장후이의 내장은 심한 상처를 입었지만 교도소에서는 치료시간을 끌고 병보석 신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2009년 4월 의사가 칼로 해부하자 장과 위가 다 새까맣게 된 것을 발견했고 병원에서 이미 장후이를 구할 수 없게 됐을 때에야 교도소에서는 장후이 고모보고 병문안을 하라고 했다. 마지막에 장후이는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교도소에서는 박해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장후이가 박해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엄밀히 봉쇄했다.

◇ 손희(孫希, 남, 50세 가량, 조선족)는 연길시 사람으로, 2000년 10월에 중국공산당 흉악한 경찰에게 납치당해 불법적으로 중형 판결을 선고받았고, 2002년 봄에 창춘(長春) 톄베이(鐵北) 감옥에서 박해를 당했다. 손희는 당시에 불법으로 제3감옥[청싱(成型) 감옥] 3소대에 감금되어 있었다. 손희는 교도소에서 잔인한 구타, 괴롭힘을 당해 온 몸의 근육이 위축되어 걷기도 힘들었다. 출옥 후에 몸 상태가 점점 나빠져 걸을 수 없었으며 오직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고 가래와 피를 토했으며 대소변을 가릴 수 없었다. 2009년 8월 5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김제국(金濟國, 남, 50여세, 조선족)은 훈춘시 사람으로 1999년 ‘7.20’ 박해가 시작한 후부터 그와 아내 정경애(鄭京愛)는 믿음을 견지해 여러 차례 불법 구류, 세뇌 박해를 당해 할 수 없이 집을 떠나 유랑하게 됐다. 2003년 2월 28일 김제국 부부는 불법 체포당해 징역 3년을 선고받았고 창춘 톄베이(鐵北)에 불법 수감됐다. 당시 경찰은 김제국 부부를 찾기 위해 그의 딸 학교에 가서 소란을 피우고 미행했으며 부모 둘이 모두 박해를 받자 중학교를 다니는 딸은 생활할 돈이 없어 할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2006년 출소할 때 박해를 받은 김제국은 이미 노동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결국 9월 8일에 세상을 떴으며 당시 몸에는 뼈와 가죽만 남아있었다.

◇ 김영단(金英丹, 여, 50, 조선족)은 용정시 사람으로 2009년 4월 어느 날, 용정 공안국 정법위 용문가 파출소의 많은 직원이 그녀가 일하는 곳에 뛰어들어 수색한 후 대법 책과 진상지폐를 몰수했다. 그녀는 용정 공안국, 용문 파출소로 납치됐는데 밥을 주지 않고, 잠을 자지 못하게 했으며 이후에는 용정 구치소에 보내 계속 박해를 진행했다. 닷새째 되는 날, 김영단은 이미 생명위험이 나타났으나 사악한 자들은 여전히 사람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후에 병원 측에서 아주 위험하니 즉시 석방해야 한다고 하자 용정공안국은 부득불 놓아 주었다. 집에 돌아온 김영단은 사당 악도들이 늘 와서 소란을 피우자 심신이 거대한 타격과 위협을 받아 2009년 10월 5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김련순(金蓮順, 여, 69, 조선족)은 연길시 담배공장의 퇴직직원으로 2009년 8월 19일에 연길시 공안국 국가보안대대에게 납치당했고 연길시 구치소에 15일간 불법 수감됐는데 석방될 때 원래보다 많이 말라 알아보기 힘들었다. 줄곧 납치의 충격 속에서 벗어나지 못해 얼마 못가서 사망했다. 천척들이 통지를 받고 왔을 때 이미 김련순의 온몸은 뻣뻣해 사망한지 이미 며칠이 지난 상태였다. 친척들은 10월 15일 극도의 고통 속에서 노인의 유체를 화장시켰다.

◇ 조련화(趙蓮花, 여, 조선족, 46, 연길시 사람)는 원래 몸이 매우 좋지 않았는데 1998년에 운 좋게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해 건강한 몸을 얻을 수 있었고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사당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부터 조련화 일가족은 하루라도 편안한 생활을 보낸 적이 없이 매일 경찰에게 추격을 당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활동 범위도 심한 제한을 받았고 일가족의 정상적인 생활은 전부 방해를 받았다. 조련화는 박해를 당한 이후부터 또 출근한 적이 없었고 강제로 수련 환경을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박해를 당해 집에도 돌아갈 수 없게 되어 정신적, 심리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줄곧 건강을 회복하지 못해 결국 2009년 10월 30일에 원한을 품은 채 인간세상을 떠났다.

◇ 인펑친(殷鳳琴, 여, 63)는 연변주 수리공사 회사에서 일했고 파룬궁 양푸진(楊福進)의 아내다. 1999년 7월 20일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 인펑친은 잔혹한 박해를 받았고 불법 감금, 거주 불법감시 등을 받았다. 2000년에 불법 노동교양 2년을 선고받고 악명이 높은 창춘 헤이쭈이쯔 여자 노동교양소에 수감돼 박해를 받았다. 노동교양소에서 강제 세뇌, 강제노역 등으로 심신에 괴로움을 당했다. 인펑친의 두 눈은 박해를 받아 실명에 가깝게 됐다. 2002년 3월에 집으로 돌아와서도 끊임없이 주민센터 등 악인의 소란을 받았다. 2010년 1월 29일 오전, 연길 솽양(雙陽) 지역사회 사람과 두 남자가 양푸진의 집으로 찾아와 그의 일가에 대해 ‘전향’을 요구했는데 인펑친의 저지를 받았다. 악인들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연길시 ‘610’과 국가보안대대의 경찰을 불러오고 인펑친을 강제 납치하려 했다. 국가보안대대 경찰과 한 무리 지역사회 사람들에게 강제 납치되는 중, 무슨 원인인지 인펑친이 갑자기 자기 집 5층 베란다 창문에서 떨어져 전신의 갈비뼈, 팔뼈, 다리뼈, 등뼈 등 여러 곳이 골절됐다. 연변 병원에 보내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결국 억울하게 사망했다. 2010년 새해 직전 인펑친의 시신은 황급히 화장됐다.

◇ 리웨(李岳, 79)는 화룡시 사람으로 1995년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수련하기 전에 심장병, 신경쇠약, 좌골신경통 등 각종 질병이 있었는데 수련 반년 후 이 질병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진정으로 질병이 없어 온몸이 가뿐한 느낌을 체득했다. 1999년 7월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부터 리웨는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기 위해 두 번이나 탄원했고 바깥에서 연공해 경찰에게 15일간 불법 감금당했다. 이 10여년 적색테러의 고압 하에 노인은 사악의 교란과 협박 등을 받았고 가족이 여러 번 사악의 불법 수감과 박해를 받았다. 노인은 몸과 마음으로 큰 압력을 감당하는 상황에서 2010년 2월 9일 뇌간출혈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장리신(張立新, 여, 40여세)는 원래 훈춘시 광무국 제3초등학교 교사로 파룬궁수련생 리신의 아내다. 2000년과 2003년에 각각 불법 노동교양 1년을 선고받았는데 2003년에 창춘 헤이쭈이쯔 노동교양소에서 박해를 받아 고혈압이 생겨 곧 죽을 위험이 생기자 앞당겨 석방됐다. 돌아온 후 또 직장의 무리한 해고를 당했다. 부부가 모두 박해당해 심한 병업상태가 나타나 생활이 매우 어려워 2010년 사망했다.

◇ 양푸진(楊福進, 남, 62)은 연길시 사람으로 파룬궁수련생 인펑친(殷鳳琴)의 남편이다. 1999년 7월 20일 박해가 시작한 후, 양푸진은 진상을 밝히려는 생각으로 여러 차례 성정부,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는데 모두 불법감금을 당했다. 2000년에 불법 노동교양 2년을 받았는데 먼저 연변 노동교양소에 수감된 후 다시 지린성 주타이(九臺) 인마허(飮馬河) 노동교양소로 옮겨졌다. 정신세뇌를 당하고 강제노동 등 심신의 박해를 받았다. 2003년부터 중국공산당 악인들은 양푸진의 집을 불법 감시하기 시작했으며, 차오양 파출소와 주민센터 악인은 일상적으로 그의 집을 교란했다. 2004년 5월, 양푸진 일가족은 핍박으로 의지할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게 됐으며 헤이룽장성 무단장(牡丹江)시에서 4년 동안 살았다. 2008년, 연변주시 국가보안대장 샤오빈(肖彬), 퍄오구이난(朴貴男) 등 경찰 무리는 무단장 국가보안대대 악인들과 결탁해 양푸진과 사위를 무단장시에서 납치했다. 수감 기간에 양푸진은 경찰 천룬(陳潤)에 의해 ‘큰 괘에 올리기’ 고문을 당했고 박해를 당해 뇌출혈이 가중됐다. 마지막에 징역 4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집으로 돌려보내 치료받게 했다. 2010년 1월 29일, 아내 인펑친이 박해로 사망한 후 양푸진은 억울함이 있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610’, 공안국 등에서 오는 공갈 협박, 압력을 받았다. 아내가 사망한 후 박해로 정신이상이 된 딸은 어린 두 딸을 보살필 수 없어 두 손녀는 부득이 친척집에 입양됐다. 62세인 양푸진은 비분과 동시에 정신적으로 심각한 충격을 받고 2010년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박계숙(朴桂淑, 여, 58, 조선족)의 사례. 훈춘시 국가보안대대와 마촨쯔(馬川子) 파출소에서 여러 차례 사람을 파견해 그녀 집에 찾아가 소란을 피우고 으름장을 놓았고 몇 번이나 국가보안대대로 납치했다. 그녀는 2010년 4월에 협박을 받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 김금옥(金錦玉, 여, 65세 조선족)은 연길시 사람으로 2005년 6월에 연길시 공안국 경찰에게 납치당해 연길 수용소에 15일간 구속당하고 박해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온 후부터 몇 년간 김금옥의 거주지는 줄곧 감시를 당했고 여러 차례 협박 전화도 받았다. 몸과 마음이 시달림에 받아 심한 병증이 생겨 2010년 5월 25일에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다.

◇ 신옌쥔(辛延俊, 남, 46)은 지린성 전업 군 간부로 수련 전에 질병에 시달렸다. 1996년 파룬궁을 연마하기 시작했는데 한동안 수련하자 몸이 완쾌됐다. 1999년 7월 20일 박해가 발생한 후 신옌쥔은 파룬궁 수련을 견지해 네 차례나 중국공산당 경찰에게 납치됐다. 2002년 불법 징역 7년을 선고받았는데 연길 교도소에서 혹독한 구타와 학대를 당해 2005년 생명이 위급해져서야 교도소에서 석방됐다. 아내가 출근해서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보살펴야 했기에 그 후 줄곧 80세에 가까운 노모가 고향집에서 그를 보살폈다. 건강 상태는 극도로 좋지 않았으며 혈뇨와 결석을 배출했다. 그리고 마비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해 스스로 생활할 수 없었다. 지린 교도소에서 대뇌 파괴 약물을 주사당한 이유로 그는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의식이 똑똑하지 못했다. 사람을 알아보다가 잠시 후면 알아보지 못했으며 사지 중 오른손만 움직일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잠깐 지나면 한 번 몸을 뒤척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통증이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5년간 비인간적인 고통을 겪은 후, 신옌쥔은 결국 2010년 5월 27일 저녁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사망할 때 그는 목 부위에서 줄곧 발밑까지 모두 1평방인치의 욕창이 있었다. 체중은 정상일 때의 80kg에서 40kg로 줄어들었는데 누가 봐도 모두 마음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 오영자(吳英子, 여, 68, 조선족)은 왕칭현 사람으로, 파룬궁을 수련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10여 년간 중국공산당의 심한 박해를 당했다. 10여 차례 불법 납치를 당했는데 그 중 3번이나 불법 노동교양을 선고받았다. 경찰이 집에 찾아가 가택수색하고 소란을 피우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관칭유(管淸友)를 비롯한 왕칭현 공안국, ‘610’, 정법위 등 사람들은 노인의 퇴직금을 몇 년간 지급 정지했다. 왕칭 세뇌반에서 박해로 심각한 심장병 증상이 나타났고 혈압은 220에 달했다. 당시 경찰은 “지금 노부인이 연세도 많고 상부에서도 요구하지 않으니 먼저 집으로 돌아가서 병이 나아지면 우리가 다시 당신을 붙잡아오겠소”하고 말했다. 노인은 핍박으로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게 되어 또 한 차례 고단하게 유랑생활을 했다. 결국 2010년 7월 17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쑹야친(宋雅琴, 여, 77)은 원래 지린시 사람으로 1998년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당시 류머티즘 관절염과 정맥류 등 질병으로 앓고 있었는데 걷기도 어려웠다. 대법수련을 통해 심신에 이로움을 얻었다.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이후 그녀는 매달기, 혹독하게 구타하기 등 고문을 당해 이미 손목 위에 깊은 상처가 있었다. 2008년 9월 8일 그녀의 아들 선취안후이(申全會)와 며느리 리펑윈(李鳳雲)은 화룡시 터우다오진(頭道鎭)에서 진상 전단지를 배포하다 화룡 파출소에 의해 납치돼 아울러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았다. 2009년 쑹 노인은 아들을 구하려고 늘 화룡시 공안국으로 가서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화룡시 공안국은 석방은커녕 연세가 많은 쑹 노인에게 잔혹한 수단을 썼다. 몇몇 흉악한 경찰들은 그녀를 넘어뜨리고는 층계 위에서 왔다갔다 끌고 다녔으며 또 마구 구타했다. 이러한 학대는 수차례나 된다. 2009년 7월 10일, 쑹야친과 다른 한 노인 파룬궁수련생은 아들을 구하려고 검찰원으로 가던 도중 택시 기사에게 대법 진상을 이야기하다가 기사에게 고발을 당했다. 두 노인은 화룡 경찰국 경찰에게 도중에서 차단당했다. 6명 경찰이 쑹야친을 차에서 끌고 나오려 하는데 그녀가 협력하지 않자 경찰들은 땅에서 그녀를 끌었다. 다른 한 노인 파룬궁수련생은 뺨을 맞거나 무릎꿇림, 벌을 당했다. 경찰의 학대로 그녀는 늘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기운이 없었으며 몸은 점점 허약해졌다. 결국 2010년 7월 18일 아침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차이푸천(蔡福臣, 남, 40여세)은 원래는 룽징시 세무국의 우수 공무원이었다. 1999년 ‘7.20’부터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이후 그는 장기간 불법 감금당했다. 2004년 5월 26일 차이푸천은 연길시 이란(依蘭) 파출소에게 납치당했고 2005년 불법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며 줄곧 불법으로 지린시 궁주링(公主嶺) 교도소에 수감됐다. 수감 기간 그를 여러 차례 독방에 가두고 강박해 믿음을 포기하게 하는 ‘전향’을 실시했다. 차이푸천은 박해로 매우 허약해지고 얼굴이 매우 초췌해졌지만 교도관은 여전히 그를 잔혹하게 박해했다. 2008년 5월 5일, 차이푸천은 청원서를 썼다는 이유로 교도관에게 한 독방 안에 갇혀 박해를 당했다. 교도관은 그를 침대 위에 묶어 매달아놓고는 그에게 잠을 재우지 않았으며 전기봉으로 목, 하지 등 부위에 충격을 가했고 꼬박 1개월 동안 박해를 가했다. 2010년 9월 초, 차이푸천은 마지막으로 가족과 통화했는데 그는 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다. 나흘이 지난 2010년 9월 15일에 박해당해 사망했다.

◇ 장칭쥔(張慶君 혹은 張慶軍, 남, 61)은 도문시 스옌(石峴)진 사람이다. 장칭쥔과 아내 장수화(張淑華)는 파룬궁을 연마하기 전에 몸에 여러 질병이 있어 일을 할 수가 없고 일 년 내내 병고 속에서 보내 생활이 고생스러웠다. 파룬궁을 수련하고 파룬궁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어 이로부터 신체가 건강하고 튼튼해졌으며 생활이 즐거웠다. 하지만 1999년 7월부터 중국공산당이 파룬궁 ‘진선인’에 대해 박해를 시작한 이후, 장칭쥔과 장수화는 여러 차례 현지 중국공산당 사당 정부 인원과 경찰들의 불법 강탈, 납치, 불법 감금 등 박해를 당하고, 각각 2001년과 2005년에 불법 노동교양을 선고받았다. 노동교양소에서 비인간적인 학대와 고문, 박해를 당했다. 노동교양소에서 석방돼 나온 최근 몇 년간 여러 차례 불법 체포, 가택 수사, 구류, 강제 세뇌반 감금을 당했다. 장칭쥔은 2010년 9월 10일에 집에서 납치당해 세뇌반에 감금됐는데 수련을 포기하지 않아 9월 19일 세뇌반에서 직접 시 공안국 안산(安山) 구치소로 이송됐고 불법 노동교양 1년을 선고받았으며, 10월 22일에 주타이인마허 노동교양소로 압송돼 계속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장칭쥔은 단 7일 만에 노동교양소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가족은 20120년 10월 30일 아침에 노동교양소의 전화를 받았는데 심장병이 발작해 사망했다고 했다.

◇ 장구이친(張桂芹, 여, 60)은 화룡시 파가자 임업국에 거주했다. 장구이친은 파가자 ‘610’ 주임 장원신(張文信)에게 진상을 알린 적이 있다. 그에게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지 말라고 했고 선행에는 선과(善果)가 있고, 악행에는 악과(惡果)가 있다는 등을 알려줬다. 그는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구이친을 세뇌반을 납치해 박해를 가했다. 장구이친은 여러 차례 소란을 받고 납치당하고 박해를 받아 몸과 정신상에서 매우 큰 상처를 입어 2013년 5월 23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리기옥(李琪玉, 여, 68, 조선족)은 연길시 사람으로 몇 년간 중국공산당 당국의 박해를 받았고 여러 차례 납치당하고 고문을 받았다. 2014년 7월 21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 장수셴(張淑賢, 여, 53)은 도문시 취수이차이(曲水菜)대대에 거주했다. 2014년 8월 7일 2시경 5번 버스를 타고 도문으로 가는 도중 실종됐다. 이후에 도문시 국가보안대대 경찰에게 납치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도문시 웨궁로 파출소 경찰은 차를 몰고 장수셴의 집에 가서 장수센의 남편에게 웨궁로 파출소에 가라고 통지했고 이후에 또 도문시 공안국에 갔는데 한 두목이 오더니 또 장수셴의 남편을 데리고 시 병원으로 갔다. 당시 이 사람들은 장수셴은 심장병이 돌발해 시 병원에서 응급조치(장수셴의 남편은 장수셴은 전혀 심장병이 없었다고 했다) 중이라는 거짓말을 했다. 시 병원에 도착한 후 장수셴이 병실 침대에 누워 수액을 맞는 것을 봤지만 신체는 이미 차가워졌고 생명의 징후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흉부 아래 복부와 허벅지까지 모두 푸른 빛이 도는 검보라색 흉터투성이였고 의치도 맞아 없어져 고문으로 사망한 것이 분명했다. 아내의 상황을 목격한 장수셴의 남편은 커다란 분노와 충격에 휩싸였다. 신체가 아주 건강했던 사람이 24시간도 안 돼 경찰의 박해를 받아 사망한 것이다! 장수셴의 남편은 가족에게 알린 후 일부 친척들이 시 공안국에 와서 시비를 따지자 도문시 공안국은 개인 합의를 희망했다.

(계속)

문장발표: 2015년 2월 27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2/27/3054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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