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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인이 하얼빈 노동교양소 병원에서 양빈의 장기가 적출됐다고 전해

글/ 헤이룽장성 파룬궁수련생

[밍후이왕] 며칠 전 하얼빈(哈爾濱)시 핑팡구(平房區) 신장(新疆)파출소 소장 류훙웨이가 갑자기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돼 걷지도 못하고 말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된 모습을 보았다. 그가 받은 보응을 보고 전에 그가 젊은 파룬궁수련생 양빈(楊濱)을 박해했던 일이 생각났다.

10여 년 전인 2003년, 류훙웨이가 핑팡 파출소 소장에 임직할 당시 안둥(東安) 소형차 엔진공장의 26세 미혼 파룬궁수련생 양빈을 불법 납치하도록 부추겼다. 단지 15일 만에 양빈은 살해됐다. 얌전한 젊은 청년이 짧은 시간 내에 악인에게 생명을 잃었다.

내부인은 양빈이 하얼빈 노동교양소 병원에서 장기를 적출 당했고 242병원에 이송돼 응급처지를 받았다고 말했다. 응급처치는 완전히 사람 눈을 속이려는 연극이다. 당시 소문에 의하면 양빈은 242병원에 이송되기 전에 이미 박해로 사망했다. 양빈의 가슴과 등은 모두 피투성이였다. 시신은 2003년 3월 5일 화장됐고 장례를 치를 때 많은 경찰과 경찰차가 있었다.

杨滨被迫害致死后遗体运回242医院“抢救”
양빈이 박해로 사망하자 시신을 242병원으로 이송해 응급처치를 했다.

그날 소식에 의하면 양빈이 병원(공군242병원)에 이송돼 ‘응급조치’가 진행될 때 사람들은 242병원 문과 양빈에게 응급처치를 하는 병실이 줄곧 경찰에게 봉쇄돼 있었다고 말했다. 절대로 파룬궁수련생이 다가가지 못하게 했고 그들은 누구라도 오기만 하면 붙잡는다고 떠들었다.

양빈은 190cm의 키에 균형 잡힌 체격이며 두 보조개가 있었고 얼굴이 하얗고 서생 같았다. 그는 미남이었고 칭찬도 자자했다. 양빈은 회사 지도자와 동료의 호평을 받는 우수 직원이었다.

1996년 19세였던 양빈은 파룬궁이 불가(佛家) 수련대법이라는 것을 알고 수련하기 시작했다. 양빈이 일하는 안둥공장은 본래 전투기를 생산하는 비밀공장이다. 젊은 사람이 많고 수련인도 많다. 친구들은 평소 함께 자연스럽게 파룬궁을 이야기한다. 모두 ‘진선인(眞善忍)’ 법리를 인정하고 좋은 사람으로 되려는 소원이 있어 함께 모였다. 주말에 그들은 나가 함께 홍법을 하여 더욱 많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는 길로 들어서게 했다. 그는 이렇게 좋은 공법을 수련하기에 비로소 삶이 의의를 느끼는 듯했다.

1999년, 파룬궁이 중공 정치 깡패집단의 모함을 받았고 불법적으로 탄압을 당할 당시 양빈과 수련생들은 여러 번 사회와 세인에게 파룬궁 진상과 박해 진상을 알려 세인들이 파룬궁의 진상을 알기를 바랐다. 한 수련생이 회상하며 말했다. “처음에 그와 만났을 때 말이 적긴 하지만 순정하고 평온한 심태를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체험을 말할 때 그는 조용히 들었고 여유가 있으면 법공부를 했다.”

2000년 이후 양빈은 박해를 당해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이후에 한 동안 우리와 함께 있었다. 그에게는 법에 대해 더욱 깊은 이해가 있었다. 다른 수련생이 박해당한 소식을 접할 때 그는 아주 슬퍼했다. 사부님에 대한 존경과 법에 대한 확고함을 말할 때 그는 아주 자신감이 있었다. 한번은 1999년 7.20 이후 안전국 사람이 그를 찾아갔다. 그를 중요 인물이라고 생각해 상세한 조사를 했다. 당시 그는 22세였다. 마지막에 박해 구실을 찾지 못하고 체포해 그에게 다른 수련생에 대해 말하라고 했다. 당시 그는 정중하게 “모릅니다”라고 했다. 그는 다른 수련생을 배신하지 않았다. 이후에 그들은 또 아는 사람을 데려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의 일을 다 알고 있어요. 그가 말했어요”라고 했다. 당시 그는 그 사람을 보고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사악은 박해할 어떤 이유도 찾지 못하자 그를 석방했다.

중국공산당 정치 깡패집단의 잔혹한 박해로 그는 몇 년간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양빈은 자신을 수련인으로 생각하고 시시각각 엄격하게 자신을 요구하고 자신의 전력을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하는데 썼다. 때로 수련생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나요?” 그는 때로 엄마를 생각한다고 했다. 엄마가 아주 좋기 때문이다.

2002년 말 그는 고향에 돌아갔다. 2003년 2월 8일 양빈은 다른 수련생과 핑팡구 난창(南廠)에서 핑팡진에 진상 현수막을 걸기 위해 갔다가 악인의 고발을 당했다. 핑팡진 악경 소장 자오한빈(趙寒彬), 류훙웨이 및 악독한 경찰 쉬양(徐洋)이 차로 뒤쫓아 강제로 양빈을 파출소로 납치했다. 핑팡진 파출소에서 자오한빈 무리는 양빈에게 고문을 가했다. 그리고 양빈을 핑팡 공안국에 보내고 보름 후 양빈은 박해로 사망했다.

당시 해외 언론 기자는 양빈의 사망 사건에 조사했다. 양빈의 회사 하얼빈 둥안공장 공안처 남자가 양빈이 죽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양빈이 일하던 204작업장은 양빈이 파룬궁을 수련해 회사에서 제명당했다고 시인했다. 핑팡 공안국 구치소 한 남자 경찰은 기자가 양빈의 사망 상황을 조사하는 것을 듣고 큰소리로 욕하며 문제에 대답하지 않았다.

11년이 지났다. 파룬궁 박해에 참여한 많은 경찰은 진상을 알게 됐고 어떤 사람은 더 이상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자신의 퇴로를 위해 퇴직하려 했다. 어떤 사람은 적극적으로 국제 사법조사기구에 협조하고 범죄자의 증거를 제공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양빈의 아버지는 아들을 매우 그리워했고 고소할 곳이 없어 우울해 하다가 사망한지 몇 년이 됐다고 한다. 당시 양빈의 어머니는 심장병이 비교적 심해 감히 그녀 아들 소식을 알려주지 않았다. 지금 양빈 어머니의 생존 유무는 알 수 없다.

문장발표: 2014년 9월 27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9/27/2982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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