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보도) 전 상하이(上海) 복단대학(復旦大學)에서 석사과정 재학생인 장궁화(張公華)는 2000년 6월에 파룬궁을 위해 베이징에 가서 청원했는데, 학교 측은 강제로 휴학시켜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핍박에 못이겨 선양(瀋陽)으로 일하러 갔다. 2002년 7월에 불법 체포를 당해 15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 받았고, 랴오닝성(遼寧省) 선양교도소에서 고문, 노역 노동 등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현재 39세인 장궁화는 박해로 간종양 증상이 나타났으나, 선양 제1교도소에서는 병보석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선양 제1교도소는 2012년 봄부터 시작해, 파룬궁수련생을 핍박해 믿음을 포기시키기 위해, 가오제베이(高戒備) 감구역 감구역장 진쉬(金旭)의 직접 지휘 하에 감금당한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비인간적인 학대를 감행했다. 그 수단은 큰 괘에 올리기 고문(두 손과 발을 벌려 매달았음), 호랑이 의자에 앉히기 고문, 장시간 동안 한 가지 자세를 취하는 체벌을 가하기, 잇쑤시개를 눈꺼풀에 끼워 잠자는 것 허락하지 않기, 밥 조금 주기, 구타하고 욕설 퍼붓기, 고춧물 주입하기, 눈 안에 고춧물 뿜는 것 등이었다. 면봉으로 귀를 찌르고, 콧구멍 찌르기, 원주필심을 굽힌 뒤 콧구멍의 한 편에서 꽂아 넣어 다른 한 편으로 나오게 했다. 그리고 겨울에 구두를 신고 머리를 걷어차며 구타했는데 구타한 뒤에 여전히 눈밭에 던져버려 추위에 떨게 했으며, 뜨거운 물로 화상을 입히고, 동시에 몇 개의 전기봉으로 전신에 강도가 높은 전기충격을 가해 전신의 피부가 문드러졌다. 그리고 또 상처투성인 데도 라이터로 갈빗대 위에서 반복적으로 문질렀고 찬 얼음으로 고환을 얼렸으며, 전기봉으로 생식기에 전기충격을 가하는 등의 야수처럼 잔인무도하였다.
고문 시연: 호랑이 의자
장궁화(남, 후베이성 양신(陽新) 사람)는 2003년 4월에 선양시 제4교도소로 납치당했다. 그후 선양시 제2교도소 14감구역, 6감구역으로 옮겨졌다. 2007년 12월 19일에 또 선양 제1교도소 8감구역으로 옮겨졌고, 2011년에는 9감구역에 불법 감금당했다. 장궁화는 다음과 같이 자술했다.
학교 측에서 불법 감금, 강제 휴학을 감행, 핍박으로 유랑생활을 하다
나는 1999년 7월에 복단대학 학교당위원회에 파룬궁은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히 한다는 진상을 이야기했는데, 학교 측은 불법적으로 한 호텔로 납치해 일주일 넘게 감금하여 나를 전향하려고 시도했다. 나는 10월에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가서 민원사무실에 편지 한 통을 썼다. 그러나 편지를 아직 넘기지도 못했는데 나는 베이징 주재 상하이 사무실의 불법 인원에게 붙잡혀 갔다. 복단대학에서는 일찍이 내가 베이징으로 오는 그날 저녁에 두 사람을 파견해 비행기를 타고 와서 나를 납치했다. 그들은 베이징 주재 사무실에서 나를 학교로 압송해 3개월 넘게 불법 감금했다.
새해가 곧 다가왔다. 학교 측에서는 나의 가련한 노부친을 유인해 와서 나에게 ‘팔로는 허벅다리를 비틀지 못한다’며 나를 권고하게 했다. 나는 학교 측에 의해 강제로 1년 동안 휴학을 당했다.
2006년 6월, 나는 거듭 청원하러 갔다. 톈안먼 광장에서 진상을 알리다가 곧 악독한 경찰에게 납치를 당했다. 그 기간에 이름과 주소를 보고하지 않아 다싱현(大興縣) 구치소에 하루 동안 갇혔고, 칭윈루(青雲路, 이름은 확실하지 않을 수 있음)에 의해 1박2일 동안 박해를 당했으며, 상하이로 돌아와 1개월 동안 구치소에 갇혔다. 학교 파출소에서는 또 사복경찰들과 결탁해 학부모 및 후베이성 양신현의 경찰과 지방 진장(鎮長) 등을 속여 나에게 ‘전향서’에 서명하도록 핍박하였다. 내가 대답한 것이 그의 의사에 부합되지 않아 고향으로 보내졌다. 나는 나의 믿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더욱 그들에게 협력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간 이튿날 핍박에 못이겨 집을 떠났다. 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애통하게 가족과 고별했다. 나는 ‘내가 열애하는 조국은 이미 지옥으로 변했구나’하고 깊이 탄식하였다.
선양에서 납치돼 고문을 당하다
나는 어찌할 방도가 없어 동북의 선양으로 가서 일을 했다. 일을 하는 기간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에게 나의 내력을 말하고 나의 체험을 이야기했다. 또 다롄(大連), 푸순(撫順) 등 여러 곳에서 시장 판로를 위해 뛰어다녔다(跑市場). 그후 나는 한 중년 파룬궁수련생 류(劉) 씨와 한 방안을 썼다. 그도 역시 진선인(真善忍)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교양소에서 석방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뜻밖에 류씨는 딸을 면회할 때 경찰에게 미행당했다.
2002년 7월 5일, 나는 집으로 돌아온 뒤 푸순 공안국1처(국가보안지대)의 악독한 경찰이 납치, 불법 감금시켜놓고 꼬박 5일 동안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하루에 3~5번이나 혹독한 구타, 끈으로 묶기(끈에 묶여 남겨진 상처 흔적은 지금도 없어지지 않았음)고문을 당했다. 30여 세 가량의 한 악독한 여경은 한 편의 ‘심문 기록’을 만들어 나에게 단지, 연공을 하는지, 인터넷을 접속할 줄 아는지 두 가지 질문을 쓴 종이 위에 서명하도록 핍박했다. 내가 구두못을 삼키자, 그것들은 별일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배가 크고 뚱뚱한 사람이 와서 으슥한 곳에서 나의 복부를 사납게 쳤다.
고문 시연: 끈으로 묶기(上繩)
푸순 제1구치소의 교도소 의사는 나의 온몸에 상처 흔적이 있는 것을 보더니, ‘죽은 사람 같은 죄수’를 수감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구치소 소장이 후에 폭로한데 따르면, 공안국장이 보증했으므로 죽어도 두렵지 않다고 했다는 것이다. 악독한 경찰은 나에게 족쇄, 뒷짐결박을 채웠으며, 또 죄수를 파견해 구타하고 관리하게 해 내가 가부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구치소에서 13일 동안 음식물을 주입당한 뒤에 다른 방으로 옮겨져서 계속 박해를 당했다. 1개월 후 능욕을 참을 수 없게 되어 6일 동안 계속 단식을 하여 믿음이 있는 사람에 대한 박해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 당했는데, 줄곧 식도에서 출혈할 때까지 주입 당했다……사악한 교도관은 예상외로 죄수를 시켜 나에게 진한 소금물, 고춧가루물 등을 주입했는데, 나는 이로 인해 며칠 동안이나 혈변을 눴다. 그 기간, 나는 무거운 쇠고랑을 찼고 뒷짐결박을 채워졌으며, 화장실로 가는 것, 세수하고 양치질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겨울옷도 주지 않았다. 또 며칠 뒤에 나를 유인하고 속여 단식을 하게 했고, 다시 단식했을 때에는 혹독하게 구타했는데, 다른 죄수마저 같은 봉변을 당했다.
중공 고문 설명도: 뒷짐결박
몇 분 동안의 법정 심리, 15년의 억울한 판결을 내리다
2002년 10월, 교도관은 갑자기 나를 끌고 가서 이른바 ‘심판’을 했는데, 변호사가 법정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변호하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형신 박해에 대해 내버려 두고 상관하지 않은 채 개정하여 몇 분이 되지 않아 미리 프린터 해 놓은 판결문을 꺼내서 지명해 나누어 주었다. 내가 서명하기를 거부하자 그들은 대신하여 서명해도 효과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내가 열흘 전에 상소를 제출했으나 접수하는 사람이 없었다. 2002년에 푸순시 순청(順城)법원(재판장 탕톄쥔(唐鐵軍))에서 ‘인터넷에 접속한’ 것을 근거로 나에게 불법으로 유기형 15년을 판결한 이래 4년 동안 신소를 했으나 소식이 없다. 나는 정부와 법원에 ‘내가 어떻게 사악한지, 나의 피해자는 누구인지? 나에 대해 법을 위반하여 납치하고 혹독한 구타를 감행하고 강제로 감옥 개조를 집행한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 법률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는데 모두 답변하는 사람이 없었다.
선양감옥에서 육체적, 정신적 손상을 입다
2003년 4월 나를 선양시 제4교도소로 납치해 갔는데 정부에서 파견한 관계 죄수가 나를 박해했다(관계 죄수는 가족이 연줄을 찾아 조건이 있는 일을 하는 죄수인데, 죄수가 우리를 박해함에 효과가 있으면 특수한 공을 세워 포상을 받을 수 있음). 이곳은 장즈신(張志新)을 박해해 사망시킨 곳인데, 지금 또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해 사망시켰다. 한 경찰은 ‘이것이 무슨 이상할 것이 있는가?’고 말했다. 내가 앉아 눈을 감으면 관리를 책임진 죄수 왕광쑹(汪廣菘)에게 구타당했다. 장전(張震) 등 죄수는 계속해서 ‘교육’회의를 조직해 강화를 했고, 교도소 규정을 외우지 않으면 강제로 대오리 걸상에 앉혔다. 우리는 얼음과자 막대기를 줍는 노역 노동을 했다. 음식은 죄수들이 한번 나누어 먹은 뒤 남은 것을 우리에게 주었는데, 늘 반찬속에 파리와 쥐똥이 있는 것을 보았다.
2003년, 나는 선양시 제2교도소로 옮겨졌다. 가족이 보내온 돈은 감옥측에서 횡령했다가 몇 번 찾게 되자 영문도 모르게 반환됐다. 제작비가 1위안도 되지 않는 슈퍼카드는 세 개나 바꿨고, 매달 10위안을 바쳐야 했다. 다른 한개의 슈퍼카드를 발급받았으며 보증금 60위안을 더 보탰다. 그 후 슈퍼가 허사로 되었으나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족이 보내 온 돈마저 없어졌으나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고문 설명도:학대적인 음식물 주입
2004년, 나는 노역 노동을 거부해 관리를 책임진 죄수에게 욕설을 먹었다. 나는 단식을 했다가 강제로 음식물 주입을 당해 소화기관이 손상되어 끊임없이 토했다. 며칠 뒤 체력을 지탱하지 못하고 병이나 누웠다. 매일 소량의 음식밖에 먹을 수 없었다. 몸져누운 지 70여 일 후, 2교도소 원래의 14감구역 경찰 자오지둥(趙繼東)은 은밀하게 강제로 죄수 우다밍(吳大明)을 우두머리로 하고 장리신(張立新)에게 협력하도록 핍박했다. 고문실을 사설해 교도소 속의 교도소를 조직했고, 또 학습팀을 설립해 나를 납치해 가서 한 널빤지 위에 반듯이 눕게 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을 시켜 억지로 밥을 먹이게 하면서 혹독한 구타를 가했는데, 나는 소리 지를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어서야 목숨을 건졌다.
나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저녁에 일어나서 연공을 했는데, 관리를 책임진 죄수 웨이궈창(魏國強), 장전(張震) 등이 다가와서 밀치며 구타했다. 게다가 ‘독재 정치’를 받들어 관리했다. 내가 복종하지 않자, 14감구역에서는 질서에 영향을 주었다는 이유로 나를 고무 6감구역으로 끌어갔고, 두 명의 관계 죄수 천하이타오(陳海濤, 이 사람은 고무 6감구역의 죄수에게 ‘타이리화이(胎裏壞)’라고 불렸고, 이 죄수는 스스로 경찰의 형제라고 자칭했음), 다른 한 죄수 샤룽(夏榮, 이 사람은 자신의 딸을 강간한 죄명으로 15년을 판결당했음)을 파견했다. 이 두 죄수는 밤낮 나를 감시하며, 나에게 단식하도록 핍박했다. 죄수 천 모는 내가 행동하는 것이 불편한 것을 보고, 기회를 틈타 속여서 나의 카드로 담배를 샀다. 경찰은 자세히 조사한다는 이유를 대며 얼버무렸다. 얼마 되지 않아 죄수 천 모와 샤 모는 정부의 포상을 받고 감형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교도소 측은 문자옥(文字獄)을 사설해 여러 차례 내가 있는 곳에서 손으로 쓴, 사람에게 착해지도록 가르치는 좋은 책을 강탈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사교의 유해 기공으로 왜곡했다. 오늘까지 고무 7감구역에는 여전히 일부 강탈당한 책을 보관하고 있다. 나도 이 때문에 경찰에게 심한 질책을 받았다.
박해로 생명이 위급해지다
2007년에 들어서서 경찰 측은 각종 은폐된 방식으로 핍박해 나에게 자백하게 했다. 게다가 강제로 나에게 노역 노동을 시키고 교도소 규정을 외우게 했으며, 머리를 빡빡 깎게 했다. 심지어 개별적으로 야만적인 경찰은 내가 정상적으로 몸을 단련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오히려 ‘교도소는 집행 기관이다. 당신들이 죄가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관여하지 않는다’며 그들이 권력을 집행할 때는 정부를 대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률의 공평함과 정의를 수호할 때는 그들은 공안경찰을 대표하지 않고 책임을 법원에 넘겼다. 그리고 법원에서는 또 검찰원에 떠밀었고, 검찰원에서는 공안 경찰에게 밀어버렸는데 어쨌든 그들은 서로서로 미루며 책임을 회피했다.
2007년 12월 19일에 선양 제1교도소 8감구역으로 옮겼다. 2011년에 선양 제1교도소 9감구역에 감금했는데, 장궁화는 감옥에서 박해로 간종양 증상이 타나났으나, 감옥 측은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국내 국외의 각계 인사들은 시종 믿음을 견지하고 무고한 중형 판결을 받은 석사과정 학생 장궁화에 대해 관심을 가져 주시기 바란다. 또 당신들 모두 사랑의 손을 내밀어 이 파룬궁수련생을 도와주기를 호소한다!
박해에 참여한 감옥 인원의 정보는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4년 6월 8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6/8/29317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