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허베이보도) 허베이성(河北省) 바저우시(霸州市) 화베이 석유채유2공장의 퇴직 직원 리룬후이(李潤會, 70)는 심신에 이로움을 준 파룬궁 수련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7번 납치박해를 당하고 7년의 불법 판결을 받았으며 감옥에서 박해로 생명이 위독해졌다. 감옥 측은 책임을 져야 할까봐 두려워 병보석으로 풀어줘 치료를 받게 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지 8개월도 안 된 2013년 8월 21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병보석 기간, 중공(중국공산당) 사당 610은 끊임없이 리룬후이 노인에게 교란, 공갈 협박, 압력을 가했다. 게다가 만일 병원의 진단서를 받지 못하면 거듭 그를 감옥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리룬후이 노인은 퇴직하기 전에 화베이유전 채유2공장 종합12처 퇴직 관리소에서 근무했다. 파룬따파(法輪大法)수련을 포기하지 않고,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저우 공안국, 바시(霸西) 공안분국, 화베이유전 지중(冀中)공안국, 채유2공장 12처의 610에 의해 납치박해를 당했다. 요 몇 년 동안 감옥에서 박해를 당해 여러 차례 심장병, 폐적액 부종(肺積液水腫) 증상이 나타나 생명이 위험해졌다.
아래는 리룬후이 노인이 생전에 구술한 박해당한 조우를 정리한 것이다:
1. 대법을 수련해 죽을 고비에서 다시 살아나다
리룬후이(남, 1945년 출생)는 40세가 되지 않았을 때 온몸에 병을 앓았다. 그때는 60년대라 조건이 간고했다. 그는 다칭(大慶) 석유기업에서 생산 간부를 맡았는데, 근무에서 오는 압박이 심했고 성질이 급했으며 승부욕이 강했다. 피로한데다가 쉽게 화를 내서 몸은 점점 엉망이 되어 심장병, 심방세동, 기외 수축에 걸렸으며, 도지기 시작하면 심장 부위가 잡아당기며 아팠고, 호흡도 어려워 어떤 때는 잠을 자다가 갑자기 숨이 막혀 깨어났다. 큰 병원을 다 다니면서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베이징 푸유가(福佑街) 의과대학병원과 창춘 바이추언(白求恩)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병원에서도 병의 근원을 없애지 못했다. 맨 마지막에 병원에서는 “어쩌면 편도선에 늘 염증이 생겨 늘 병이 도졌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편도선을 적출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리룬후이의 심장병을 치료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여전히 죽음 앞에서 몸부림치며, 고생스럽게 20년 가까이 시달렸다.
1997년 7월, 리룬후이는 운 좋게 파룬따파를 들었다. 당시 한 법공부팀을 따라 리훙쯔(李洪志)사부님께서 공법을 가르치신 녹화영상을 보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낮에 꼬박 하루 동안 잠을 잤는데, 비몽사몽간에 앞이마 부위에 ‘파룬(法輪)’이란 두 글자가 나타났으며, 저녁부터는 화장실을 10번 가까이 가서 가늘고 긴 헝겊 같은 것을 설사했는데, 한 주가 지난 뒤에 횟수가 줄어들었다. 리룬후이는 이 일체가 모두 사부님께서 그를 도와 몸을 정화해 주시고, 그가 생생세세에 조성한 업력을 없애 주시는 것임을 깨달았다.
리룬후이의 몸은 단번에 정화되었으며, 또 몇 십 년의 무신론 관념이 철저히 개변되었다. 그는 예전에 사당 서기를 맡은 적이 있어 독해를 매우 깊이 입었었다. 수련에 들어선 뒤에 완전히 신이 존재함을 믿었다. 리훙쯔 사부님의 설법 한 마디 한 마디마다 그의 봉쇄되었던 마음을 감동시켜 생명의 의의를 깨닫게 했으며, 세상에 온 것은 고생을 해서 업력을 갚고 반본귀진(返本歸眞)하기 위함임을 깨달았다.
2 청원했다가 박해를 당하다
1999년 4월 25일, 당시 리룬후이는 톈진(天津)에서 적잖은 파룬궁수련생을 붙잡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파룬궁을 통해 직접 경험한 것을 표명하기 위해 차라리 간부를 맡지 않을 지라도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려 했다! 당시 그가 있던 그곳에서 50여 명이 함께 파룬궁을 수련했는데, 다들 모두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려고 했다. 이렇게 당시 20여 명이 갔다. 그는 집에 겨우 몇 백 위안 밖에 없는 돈을 아내와 조금씩 나누고, 또 갈아입을 옷을 몇 벌을 지니고 베이징 푸유가로 가서 베이하이(北海)공원 가까운 곳에 앉았다.
당시 수천수만의 파룬궁 수련생이 사람이 다니는 큰길 양쪽에 꽉 차서 줄지어 있었는데, 질서 정연하게 정부와 대화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교차로에는 질서를 지키는 파룬궁수련생이 있었고, 사람마다 모두 안으로 자신을 단속해 땅위에 종이 한 장도 함부로 던지지 않았다. 그리고 경찰이 던진 담배꽁초도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 경찰은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서서 한담을 했는데 모두 상화했다. 수련생들은 표어와 구호도 없었고, 어떤 수련생은 경찰과 한담을 했다. “우리는 파룬궁 이념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 했습니다. 정부에서 박해를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통행하던 행인은 이 부대의 군용차가 한 대씩 오는 것을 보더니, 걱정이 되어 그들에게 “당신들은 6·4 사건을 들은 적이 있으세요? 그건 정말 비참하다고 말해요. 날이 어두워지면 당신들은 곧 서둘러 철수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손을 씁니다.”라고 말했다.
그 후 듣기로는, 당시의 총리가 파룬궁수련생의 대표를 접견했고, 다들 모두 돌아가라고 통지를 했다고 한다. 리룬후이 등은 우리는 아직 한 마디 공정한 말도 하지 못했는데 어찌 우리를 돌아가게 하는지를 생각했다. 경찰은 파룬궁수련생 각자의 직장에 사람을 데리러 오도록 통지를 내렸으며, 리룬후이 등을 바저우로 보내 이름을 등기시켰다. 그리고 직장으로 돌아가서는 곧 감시했다. 직장에서는 그의 업무를 중지시켰고, 공안 분처의 판더유(潘德友)는 리룬후이를 찾아 담화를 나눴다. 공안 정위 딩언천(丁恩臣)도 그를 찾아 담화하며 “내부에서 하달했는데, 파룬궁 구성원은 베이징에 가려면 비준을 얻어야 만이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당시 610과 공안은 파룬궁을 박해하기 위해 리룬후이를 중점으로 여겼다. 당시 그는 그곳의 보도원이었기에, 그들은 방법을 생각해 리룬후이를 혼내 이것으로 다른 파룬궁수련생에게 경고하려고 했다. 당시 형사과의 과장 리스전(李時貞)과 형사과의 왕쥔(王軍)은 그를 찾아서 압력을 가했다. 왕쥔은 또 손을 써 그를 구타했고, 수련을 포기시키려고 했다.
1999년 7월 20일, 바로 ‘720’에 리룬후이와 다른 두 파룬궁수련생은 함께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그들은 중난하이(中南海)를 한 바퀴 돌았는데, 한 경찰이 그들에게 “당신들은 뭘 하는 사람들인가?”라고 물었다. 그들이 “우리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자 경찰은 “어, 청원하는 사람이군. 내가 당신들은 데리고 가겠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차를 몰고 그들을 공안국으로 보내서 한 3층 접대소에 일주일 동안 가뒀다. 그들은 리룬후이의 주소를 문의해 아내와 딸까지 불러왔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그에게 수련을 하지 않는다는 보증을 쓰게 해야만 석방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내와 딸은 즉시 그에게 꿇어앉아 수련을 하지 않는다는 보증을 쓰라며 빌었다. 막내딸은 또 땅위에 엎드려 힘껏 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순식간에 그의 막내딸 머리에 혹이 몇 개 생겨난 것을 보고 그는 마음이 약해져 수련을 하지 않는다는 보증을 썼다. 그 후에 그는 매우 후회했고 죽고 싶을 정도로 슬펐다. 그는 ‘사부님께서는 곧 죽게 될 그를 구해주셨는데, 어찌 일시의 육친정과 안일함을 탐내서 생명을 구해주신 은인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직장으로 돌아와서야 그의 장려금과 월급을 적잖게 떼 내고, 간부 대우를 전부 박탈했음을 발견했다. 이는 경제적으로 매우 큰 손실을 조성했다. 그는 또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러 베이징으로 가야하고, 거짓말을 이렇게 계속할 수는 없으며 또 그들로 하여금 진상을 똑똑히 알지 못해 대법제자를 박해하게끔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8월 초, 그는 직장에 연말연시 휴가를 요구했다. 직장에서 허락하지 않자 그는 직장의 열쇠를 아내에게 맡겨 직장으로 보내게 하고는 또 한 차례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오고가는 파룬궁수련생을 접대하며 그들에게 먹고 투숙 할 곳을 배치해주었다. 공장을 운영하는 어떤 파룬궁수련생은 베이징에 올 때 충족한 돈을 가지고 왔으나, 많은 사람이 청원하기 위해 먹고 투숙하는 데 곤란을 겪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돈을 모두 생활이 어려운 수련생에게 나누어 주었다. 베이징 수련생은 많은 이불과 라면 등을 보내왔다.
10월 28일에 세 사람은 나갔다가 흩어졌다. 리룬후이는 이른바 ‘인민대회당’에 갔다. 한 사복경찰이 그에게 “당신은 뭘 하러 왔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러 왔다.”고 말했다가 곧 창핑(昌平)구치소로 붙잡혀 들어갔다. 십여 평방미터 되는 한 방안에 15명이 있었는데, 15명은 13개 성에서 왔다. 죄수는 그에게 돈을 요구했다. 옥졸 모양새인 죄수는 “당신들은 선(善)하지. 그러니 돈을 바쳐 통일적으로 사용하자.”고 말했다. 리룬후이의 호주머니 속은 텅텅 비어 있었다. 경찰이 이미 리룬후이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빼앗았던 것이다. 그곳에서 며칠 동안 가뒀다가 각지 베이징 주재 사무실로 옮겼다. 그리고 바저우 610에 통지를 내려 직장으로 마중해 갔고, 월급과 장려금을 모두 중지 당했으며, 행정 중 과실로 기록에 남긴 동시에 당적에서 제명되었다.
3. 여러 차례 납치, 노동교양소 세뇌반에 감금당하다
2000년 3월 1일, 리룬후이와 아내는 밖에서 연공을 하다가 화베이 석유 유치장 안으로 납치당했다. 낮에 끌어내다가 달리기와 개구리 뛰기로 들볶았고, 방안으로 돌아와서 혈압을 쟀는데 모두 정상이었다. 당시 리스전(李時貞) 수사 과장은 리룬후이의 태도가 좋지 않다고 말하며 불법으로 20일 동안 기한을 연장시켰다.
2001년에 현지에서 파룬궁 전단지를 발견했던 이유로, 보위과에서는 이튿날에 불법으로 리룬후이를 구치소로 붙잡아 들였다. 그가 24일 동안 단식하자, 왕쥔둥(王軍動)은 손으로 그를 구타했는데, 이 일로 앞니가 흔들렸다. 그 후에 하나씩 빠졌다. 리스전이 전향할지를 묻자 리룬후이는 “나에게 한숨만 남아 있어도 나는 연공을 할 것이다. 전향은 어림도 없다.”고 말했다. 그 후 스자좡으로 보내져 1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다.
스자좡 노동교양소에서 악독한 교도관은 그에게 지장을 찍게 했다. 리룬후이가 찍지 않자 5~6명이 덮쳐들어 그를 구타했고 뒷짐을 지게 했다. 그리고 한 달 세뇌반을 조직했는데, 0.4평방미터인 네모난 벽돌 안에 쭈그려 앉혀 4명의 죄수가 그를 지켰으며 또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아오잉(熬鷹) 고문을 당해 10여 일 동안에 8시간의 잠도 자지 못한 채로 밤낮 쭈그려 앉아 있어야 했다.
노동교양소에서 나오자 직장에서는 그를 일터로 가게 했다. 그러나 또 경제적 제재를 실행해 월급과 장려금도 전부 중지시켰다. 박해가 시작된 뒤로 리룬후이는 경제적으로 30만 위안 가까이 손실을 입었고, 월급지급을 공제당했으며, 예전의 병원의료비마저 공제당해 입원해도 딸이 돈을 내야 했다. 사당은 그의 가정에 극심한 고통과 상해를 입혔다.
2007년 9월, 리룬후이는 랑팡(廊坊)세뇌반으로 납치당했으며, 또 이른바 학습비용 4천 위안을 바쳤다. 세뇌반에서는 2개월 동안 차바퀴를 돌리는 방식으로 그를 ‘전향’했다. 그 후에 리룬후이는 밥을 먹을 때, 첫 번째로 자신에게 퍼주는 밥에서 약냄새가 나고 쓴맛이 남을 발견했다. 죽에도 쓴맛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이 몰래 무슨 손을 썼다고 의심하기 시작해 밥을 책상위에 놓고 먹지 않았다. 그를 감시하던 사람은 들어와서 그의 죽을 똥오줌통 안에 쏟아버렸다. 게다가 밥공기까지 깨끗이 씻었는데, 이것은 이전에 없었던 일이었다. 그 후에 리룬후이는 잠을 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았다. 그러나 약간씩 기억이 상실되었다. 그는 정신이 흐리멍덩한 상황 하에 수련을 하지 않는다는 보증서를 썼으며, 그제야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직장 보위과 지중(冀中)공안국 양(楊) 경찰과 다른 한 경찰은 그를 위협해 “랑팡 세뇌반에서의 그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신에게 10년, 20년 판결하는 것도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2008년, 리룬후이는 아내와 동북의 고향집으로 가서 노인을 돌봤다. 바로 그해에 베이징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는 이유로 채유2공장 12처의 610두목 류취안무(劉權木) 등은 동북까지 쫓아와서 그들을 납치하려 했다. 그러나 두 노부부는 그들에게 협력하지 않았다. 동북 고향집의 친척이 이런 극심한 정신적 압력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어서야 리룬후이는 또 직장으로 돌아왔다.
4. 7년의 불법 판결, 억울하게 사망하다
2009년 3월 11일, 610두목 왕이민(王一民)은 오후 2시에 집으로 가서 “바시공안국 리쩌린(李澤林)이 당신들을 찾아 담화하려 한다.”고 말했다. 두 노부부는 그들에게 협력하지 않았다. 그날 오후 5시 반, 즉 2009년 3월 11일에 갑자기 10여 명이 들이닥쳤는데, 610두목 류취안무, 쩌우보(鄒波), 왕이민, 리쩌린이었다. 그들은 모두 파룬궁수련생, 가족구(家屬區)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함에 참여한 이들로서, 연이어 관할구역의 파룬궁수련생 10여 명을 박해했다. 이번에 그들은 리룬후이를 강제로 끌고 갔고, 그의 아내를 랑팡 세뇌반에 보냈다.
리룬후이는 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했고 또 불법으로 7년 형을 판결 받아 탕산감옥으로 보내져 박해를 당했다. 그는 감옥으로 간 그날부터 곧 연공을 하기 시작했다. 감옥 측은 그에게 연공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또 그에 대해 방법을 생각해 혼내주려 했다. 그는 박해를 반대하기 위해 곧 단식으로 저지했다. 그곳에서 온갖 학대를 당해 심장병이 또 도졌고 정신적 압력이 컸다. 그는 끊임없이 경찰에게 진상을 알렸다. 더군다나 이전의 파룬궁수련생도 끊임없이 진상을 알렸기에, 그가 복도에서 연공하고 실내에서 연공을 해도 그다지 관할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은 죄수에게 지시해 그를 혼내주었다. 이로 인해 그는 심장병이 또 도졌다. 경찰은 책임을 감당할까 두려워 감옥 의사를 시켜 그에게 주사를 맞히고 약을 먹이게 했다. 리룬후이는 거부했으며, 또 그들에게 “외부의 큰 두 병원에서도 치료하지 못한 병을 당신들이 나에게 약을 몇 알 먹이고 주사를 맞혀서 치료할 수 있는가? 나는 파룬궁을 연마해 나았다. 그러니 당신들이 나더러 연마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라고 말했다.
감옥에서 박해를 당해 여러 차례 심장병, 폐적액 부종 증상이 나타나 생명이 위독해지자, 감옥에서는 책임을 져야할까봐 두려워 부득이 병보석으로 치료를 받게 집으로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법국 610 등은 그에게 사상 회보를 쓰도록 핍박했고 갈취했다. 또 특별히 그에게 핸드폰 한 대를 주었는데, 그를 수시로 감시하기 편리하기 위해서였다.
2011년 7월 6일, 그는 또 감옥으로 붙잡혀 들어가 박해를 당했다. 현지 공안과 사법계통 10여 명은 그를 끌고 가려 했다. 그는 아이에게 종이와 펜을 주고 그것들의 차동차 번호판과 이름을 기억하게 했는데, 때가 되면 그들을 청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악인은 아이를 속여 “보험기간을 연장하러 간다. 2~3일이면 되돌아온다.”고 거짓말을 말했다. 이렇게 나와서 10개월도 되지 않아 또 감옥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안에서 단식으로 항의했다. 구역장은 그를 찾아 “곧 18기 인민대표대회가 곧 열리니 전형적인 사건은 거둬들여야 한다.”고 말했고, 게다가 그에게 무슨 조건을 요구하는지를 물었다. 리룬후이는 안에서 조건이 악랄했던 이유로, 밥을 먹지 못했고 숨을 쉴 수 없었다. 그 후에 해방군병원으로 보내져 병상위에 묶여있었다. 교도관이 돌아가며 감시하자 그는 곧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씩에게 진상을 알리며, 그가 원래 외부의 큰 병원에서도 치료를 하지 못했던 이 병은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서 치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파룬궁을 연마해서야 완쾌되었음을 말했다. 한 달이 되어 심방세동이 완화되지 않자 감옥 측은 책임을 져야할까 두려워 곧 또 병보석 수속을 밟아주었다.
2012년 7월 6일 11시 30분, 난멍진(南孟鎮)사법소의 악인은 또 집으로 가서 교란했다. 리룬후이는 난멍진 사법소의 박해에 대해 또 협력하지 않았다. 그날 오후 6시 30분에 갑자기 경찰차가 석 대가 왔고, 탕하이(唐海) 감옥, 난멍 사법소, 채유2공장 등 사람 7~8명이 강제로 그를 끌고 갔다. 에워싸고 구경하던 군중마저 “정말 말도 안된다. 그 사람은 그렇게 연세가 많고, 아무런 나쁜 일도 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을 붙잡는가?”라고 말했다.
몇 차례를 엎치락뒤치락하던 리룬후이의 심장세동이 완화되지 않고 생사의 극한에 달하자, 감옥에서는 책임을 져야할까 두려워 또 병보석수속을 밟아 2013년 1월 21일에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이를 위해 감옥 측은 여러 차례 그의 직장을 찾고, 바저우 난멍 사법소에 요청했지만 감히 협조하지 못했다. 성에서 전화를 걸어도 안 되었다. 맨 마지막에 감옥 측 교도관은 그가 죽을까봐 두려워 빨리 책임을 미루려고 직장을 바꾸어 보석해 내가라고 말했다. 맨 마지막에 런추(任丘)에서 딸의 명목을 빌어서야 보석할 수 있었다.
비록 보석석방 되었으나 리룬후이는 사악의 강압 환경 하에 결국 심신에 극심한 상해를 입었다. 집으로 돌아온 지 6개월이 넘어서도 610은 끊임없이 교란, 공갈협박, 압력과 정신적인 학대를 감행했다. 게다가 거듭 감옥으로 돌려보낸다고 큰소리쳤다. 이렇게 극심한 정신압력으로 리룬후이는 결국 2013년 8월 21일 아침에 런추의 딸집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 중공 사당 분자는 또 그에게 병보석에 관련된 증명 등 수속을 밟으라고 요구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수감한다고 압력을 가했다.
박해함을 협동한 인원은 다음과 같다:
12처 당위서기: 쑨잔펑(孫佔峰)
퇴관소(退管站) 책임자:류취안무(劉權木)
12처 보위과: 쩌우보(鄒波)
지둥 공안분국 610 악도: 딩언천(丁恩臣)
랑팡 610 두목 한즈광(韓志光)
난멍진 정법서기 장리창(張立強), 핸드폰:15832689958
난멍진 진거좡촌(金各莊村), 전화번호:0316-7288598
난멍진 사법소장 쑨빈(孫賓), 핸드폰:13700361355
사법소 직원 궈야난(郭亞男), 핸드폰:15831630101
문장발표: 2013년 11월 14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11/14/28264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