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쓰촨보도) 쓰촨성(四川省) 시창시(西昌市) 파룬궁수련생 팡정핑(方征平)은 민중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렸다가, 2007년 10월 14일에 윈난(雲南) 쑤이장현(綏江縣)에서 중공(중국공산당)에게 납치당했다. 그 후에 또 쑤이장현 법원에 의해 7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 받았다. 2013년 8월 27일 밍후이왕에서 보도하기를 팡정핑은 이미 위난성 제1감옥의 박해로 사망했다고 했다. 그의 나이 겨우 57세였다.
중공이 광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한 14년 사이, 팡정핑은 거의 3분의 2의 세월을 옥중에 갇혀 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살아서 소굴을 걸어 나올 수 없었는데 그 기간에 당한 학대는 밖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소식에 따르면, 팡정핑의 부고가 전해오자, 울다 눈물까지 말라버린 팔순 노모는 소리 없이 책상위에 엎드렸다……
기구한 인생의 길
1956년, 쓰촨성 러산시(樂山市) 마볜현(馬邊縣) 민주향(民主鄉)에서 팡씨 성의 농민 집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당시 중화대지에는 재앙이 끊이지 않았다. 이 량산(涼山)의 밑자락에 자리한 변두리 산골도 재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토지개혁, 청비반패(清匪反霸), 반혁명 탄압이 막 지나가자, 당시 또 ‘농촌합작사’를 꾸미려 했다. 부모는 아이의 이름을 팡정핑(方征平)이라고 지어 그가 일생동안 평안하길 바랐다.
오래지 않아 대약진(大躍進) 운동이 왔다. 팡정핑은 운이 좋아 굶어죽지는 않았지만 두 남동생이 태어난 뒤, 부친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와 자식들만 남게 되었다. 살기 위해 어머니는 재혼을 했고 팡정핑은 남동생 3명이 더 많아졌다. 그 문화대혁명 시기 부모는 여섯 아이를 키울 힘이 없었기에, 팡정핑은 다른 집에 보내져 입양되었다. 그러나 그를 입양한 사람도 오래지 않아 그를 키울 여력이 없게 되자 팡정핑은 다시 고향집으로 돌려보내졌다. 고향 집에서도 그를 돌볼 여유가 없는 형편이라 어쩔 수 없이 그는 자신이 생계를 꾸리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육체노동으로 살아 가고자해도 일할 곳이 없었다. 때문에 팡정핑은 어쩔 수 없이 고향 인근인 쑤이장, 빙산(屏山), 마볜(馬邊) 일대를 유랑하였는데 굶주림에다 찬바람 속에서 노숙하면서 죽음의 문턱에서 몸부림쳤다.
대법을 수련해 새 생명을 얻다
40여 세 때에도 팡정핑은 여전히 혼자 동서남북을 떠돌며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시창시에서 꿀벌을 기를 때 청둥란(程冬蘭)을 만났다. 당시 청둥란은 막 남편을 잃고 아들과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불운한 두 사람은 같은 처지를 서로 동정하며 부부가 되었다.
1997년 친구의 소개로 청둥란은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몇 달 사이에 만면에 고생티 가득하고 잔병 많던 그녀는 단시간에 환골탈태한 듯이 건강하고 쾌활한 부녀자로 변했다.
청둥란의 변화를 보고 팡정핑은 매우 놀랐다. 천서를 본 적 없는 농민으로 말하면 건강한 신체가 있고 웃음소리 가득한 작은 가정이 있다면 바로 가장 큰 행복이었다. 팡정핑은 아내의 몸에서 이런 희망을 보고, 그도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전법륜(轉法輪)’을 끊임없이 학습함에 따라, 파룬따파(法輪大法)는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였는데 자신의 예상과 기대를 훨씬 능가했다. 젊은 시절의 각종 불행은 줄곧 그의 마음속의 가장 큰 그늘이었다. 이런 그늘은 그가 사회에 대해, 다른 사람에 대해 적의로 가득 차게 했고 작은 일에도 다른 사람과 크게 부딪혔다. ‘전법륜’의 인생에 대한 해석을 팡정핑은 종래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진심으로 탄복했고 마음이 탁 트이는 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 불행은 자신이 생생세세에 좋지 않은 일을 해서 조성된 것이기 때문이고, 고통은 업(業債)을 갚는 좋은 일이기에 자신을 좋지 않게 대하는 사람에 대해 원망해서는 안 됨을 깨달았다. 그는 또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며 문제에 부딪히면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고 다른 사람을 착하게 대하며 다른 사람과 아주 잘 지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자신의 미래에 무한한 아름다움을 가져다 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팡정핑은 변했다. 법공부를 하고 연공함에 따라 간염 등 고질병은 치료하지 않아도 완쾌되었고 성질도 크게 개선되었다. 얼마나 큰 억울함에 부딪히든지 더는 성질을 내지 않았고,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아도 더는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않았다. 당시 팡정핑은 온종일 싱글벙글 했다. 팡정핑 부부는 시창 410공장 생활구 내에서 거주했다. 정원의 하수도에는 쓰레기가 가득했으나 치우지 않아 악취가 하늘을 뒤덮었다. 대법수련을 시작한 후, 청둥란 부부는 일 년 내내 하수도를 깨끗이 파냈다. 주변의 주민들마저 모두 그들을 칭찬하며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은 정말 좋다고 말했다.
팡정핑 부부는 또 노인을 아주 공경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집에 갈 때 언제나 부모님께 무엇을 좀 가져다 드리려고 했다. 지금 팡정핑의 어머니는 여전히 청둥란이 사드린 옷을 입고 있다.
7차례 납치돼 감옥에서 사망
1999년 7월, 중공(중국공산당)은 광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팡정핑은 파룬따파수련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7차례나 중공 경찰에게 납치, 감금당했다. 그 기간에 두 차례는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고, 한 차례는 불법으로 7년의 중형판결을 선고 당했다.
2000년 4월 24일, 10여 명 파룬궁수련생이 팡정핑의 집으로 놀러갔는데, 경비는 거주지 칭닝(長寧) 사무실 주민위원회에 신고했다. 이튿날 창닝 파출소 경찰은 팡정핑을 파출소로 붙잡아갔다. 그런 다음 시창(西昌) 국가보안경찰은 시창시 구치소로 그를 끌어다가 감금했다. 수감관리는 팡정핑에 대해 무차별 폭력을 가했는데 상처가 심하고 전신이 부어올랐다. 집에 돌아온 뒤 1개월이 되어도 회복되지 못했다. 구치소에서는 여전히 팡정핑에게 감금기간의 급식비를 내라고 요구했다.
2001년 2월 18일, 파룬궁수련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창닝 사무실 주민위원회에서는 사람을 파견해 강제로 팡정핑을 창닝 파출소로 납치했다. 그리고 파출소에서 마핑바(馬坪壩) 세뇌반으로 옮겨 강제로 ‘전향’하려고 5개월 동안 감금했다. ‘전향’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시 국가보안 경찰은 팡정핑을 수갑에 채운 뒤 땅에 던져버렸다. 그런 다음 그를 뙤약볕에 놓아두었는데 하루 동안 몇 시간을 지속했다. 그 후 그의 아내를 통해 ‘방교(幫教-보석하여 원외에서 보도교육함)’할 것을 보증하는 서명을 한 뒤에야 풀려났다. 나온 뒤에도 또다시 핍박에 못 이겨 1000위안의 돈을 바쳤다. 이것은 팡정핑이 두 번째로 납치감금 당한 것이다.
2001년 10월 13일, 팡정핑은 시닝진에서 꿀벌을 기르는 사람에게 파룬궁이 박해당한 진상을 알린 것 때문에 신고 당했다. 시 국가보안 경찰은 몸수색, 가택수색을 감행한 뒤 그를 마핑바 마약 중독자 재활원으로 옮겨 30일 동안 가뒀다. 수련포기를 거부하자 간수소 경찰 주(周)모는 빈 서식의 구류증 한 장을 꺼내서 멋대로 써넣고 다시 20일을 가뒀다. 그곳에서 팡정핑은 학대를 당할 만큼 당했다. 그의 아내가 서명하여 ‘방교’를 보증하고 팡정핑으로 하여금 수련을 포기하도록 하게 해서야 풀려났다. 이것은 팡정핑이 세 번째로 납치감금을 당한 것이다.
2003년 8월 27일 이른 아침, 팡정핑은 외출하여 파룬궁 진상자료를 배포했다가 시닝진 파출소 경찰에게 붙잡혔다. 당시 당직을 서던 경찰은 전부 덮쳐들어 그를 한 바탕 구타했다. 그 중에 한 40여 세(키는 170cm쯤)에 체격이 약하고 길쭉한 얼굴인 경찰은 전문적으로 팡정핑의 가슴을 구타했다. 그를 구타해 땅위에 쓰러지게 하여 눕힌 뒤, 다시 전신주에 묶어 놓고 계속 구타했다. 그후 시창시 국가보안대대에게 끌려갔으며 가택수색을 당했고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당했으며 그다음 량산주(涼山州) 구치소로 보냈다. 구치소 사람들은 구타로 사람이 이런 지경이 된 걸 보고 감히 수감하지 못했다. 마지막에 팡정핑은 시창시 구치소로 보내졌는데, 9월 27일에야 풀려났다. 몸의 상처는 11월이 되어도 완쾌되지 않았다. 이것은 팡정핑이 네 번째로 납치감금을 당한 것이다.
2004년 1월 13일, 팡정핑은 시창시 국가보안대대로 가서 자전거를 되찾으려 했다(지난 번 그들에게 불법 압수당했던 것임). 결과 경찰 왕(王) 모, 뤄(羅) 모 등 4명에 의해 수갑을 찬 채 타황(拓荒) 마약 중독자 재활원으로 납치당했다. 수갑을 너무 단단히 조였던 까닭에 길에서 한 마디 외치는 소리마저 내지 못했다. 4월 8일, 팡정핑은 몐양(綿陽) 신화(新華) 노동교양소로 납치돼 1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다. 이것은 팡정핑이 다섯 번째로 납치감금을 당한 것이다.
2006년 8월 29일, 팡정핑은 파룬궁 진상을 알린 것 때문에 시창시 국가보안대대 경찰에게 납치당했다. 그 후 1년 8개월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해 시창 마핑바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서 비인간적인 박해를 당했다. 교도관은 마약복용자를 방임하여 그를 구타하게 했다. 팡정핑은 거의 매일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고, 가족이 보낸 돈도 팡정핑은 전혀 사용하지 못했으며, 옷을 세탁할 기회마저 거의 없었다. 이것은 팡정핑이 여섯 번째로 납치감금을 당한 것이다.
2007년 10월 14일, 팡정핑은 고향으로 가서 신분증 수속을 밟았다. 고향집 인근 지역에서 파룬궁 진상을 알렸다는 이유로, 쑤이장현 국가보안대대에 의해 붙잡혔다. 그리고 12월 13일에 쑤이장현 법원에 의해 7년의 판결을 선고 당했고 윈난(雲南) 제1감옥으로 납치돼 불법 감금을 당했다. 그 도중에 취징(曲靖)을 거쳤는데, 취징 감옥에서 하루 동안 머물렀다. 그는 취징감옥 교도관에게 구타를 당해, 45일 후에야 겨우 활동할 수 있었다. 이것은 팡정핑이 일곱 번째로 납치감금을 당한 것이다. 이번에 팡정핑은 살아서 나오지 못했다.
1999년 7월부터 2013년 4월까지인 165개월 사이에, 팡정핑은 106개월의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던 것이다. 마지막에 그는 비참하게 감옥에서 사망했다.
아직도 량산 밑자락에는 연로하신 그의 모친이 계시는데 더는 소박하고 착한 아들을 맞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청둥란은 2010년 9월 14일에 중공에 의해 10년의 중형판결을 선고 당해, 지금까지 쓰촨(四川) 젠양(簡陽) 인마허(養馬河) 여자감옥에서 박해를 당하고 있다.
문장발표: 2013년 9월 5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9/5/27911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