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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로 사지가 불구된 우중민 억울하게 사망

[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칭하이 보도) 시닝 시(西寧市)의 파룬궁 수련생 우중민(武忠民)은 두 차례나 노동교양 박해당하면서도 사악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제1차 노동교양 당할 때 고문으로 하체가 불구 되어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제2차 노동교양 당할 때도 잔혹한 박해로 사지가 모두 불구가 되어 2013년 5월 20일, 50세로 억울하게 사망했다.

우중민은 허난 성(河南省) ‘정저우 기계전문대학’을 졸업하고, 허난 성 싼먼샤 시잔(三門峡西站) ‘위시(豫西) 공작 기계공장’에 배치받아 출근했다. 후에 공장이 파산되어 광둥(廣東)에 가서 일했다. 사치와 환락에 젖은 선전 특구에서 우중민도 많이 오염되고 정신도 퇴폐해져 많은 질병에 걸리기도 했다. 1993년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기적같이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았고, 명리를 담담하게 대하게 되었다. 그에게서 대법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 그의 부모와 아내도 뒤따라 파룬따파를 수련하게 되어 모두 도덕이 승화되고, 질병이 사라져 몸은 날 듯이 가벼워졌다.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10년 동안 우중민이 납치당하고 불법 감금당한 지역은 4개의 성과 시 즉 광둥(廣東), 허난(河南), 칭하이(青海), 베이징(北京)이며, 4개의 2급 시 즉 선전(深圳), 산먼샤 시(三門峡市), 쉬창 시(許昌市), 시닝 시(西寧市)이다. 불법 감금당한 장소는 열 곳인데 즉 선전훙링(深圳红嶺)중학교, 선전롄탕(莲塘)파출소, 베이징톈안먼(北京天安門)분국, 산먼샤북경사무소, 산(陜)현 구치소(看守所), 산현 교도소(拘留所), 산먼샤 시 노동교양소, 쉬창 ‘허난 성 제3노동교양소’, 산먼샤 시 제2기 세뇌반(원 산먼샤 시 무장부), 시닝 시 제2구치소이다

우중민이 처음 박해당한 곳은 허난 성 제3노동교양소다. 그곳에서 4년 동안 박해당해 건강했던 그가 오른쪽 발이 불구가 되고, 두 손도 잘 쓰지 못하게 되었다. 의사는 중추신경 손상이라고 했다. 그는 최고 검찰원, 성 검찰원, 시 검찰원, 공안, 민정 등 부분에 고발했으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2005년 6월 밍후이왕은 연속으로 우중민의 문장 ‘진·선·인을 신앙한 이유로 5년간 잔혹한 박해당한 사실’을 실어 중공당국에서 그를 박해한 죄악을 폭로하였다.

우중민은 문장에서, “5년 동안의 힘겨운 세월에 나는 상상하기 어려운 정신, 육체의 고통을 받고 비인간적인 삶을 살았다. 구치소, 노동교양소에서 ‘사인침대’ ‘밧줄로 묶기’ ‘족쇄’ ‘강제 음식물 주입’ ‘집단폭행’ 등, 고문당했다.허난 성 제3노동교양소의 경찰은 죄수 100명을 사주해 열을 지어 나를 뭇매질했고 과부하 노역, 체벌성 노동, 24시간 감시, 강제 세뇌, 공갈, 협박, 기만, 기아, 갈취, 찬물과 뜨거운 물 끼얹기 등, 가혹한 박해를 당했다.”고 했다.선량한 사람들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심경을 호소했다.

中共酷刑示意图:手铐脚镣
중공 고문 설명도: 수갑 족쇄

2006년 5월 26일 오후, 외지에서 1년을 일하고 돌아온 지 며칠 안 된 우중민은 시닝 시 ‘난산징위안(南山警苑)’에 있는 부모의 집에서 시닝 시 공안국의 악인들에게 납치당했다. 그날 오후 3시경, 시닝 시 공안, 국가안전국, 시닝 시와 청중(城中) 구 ‘610’, 청중 구 공안분국, 난탄(南滩)파출소, 난탄 판사처의 남녀 요원 10여 명이 방으로 쳐들어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우중민을 납치하여(들어서 차에 올려 끌고 구치소로 들어갔다.) 시닝 시 제1구치소 3호 방에 감금한 후 곧바로 ‘호랑이의자’에 앉히고(중공 악인들이 말하는 ‘징계의자’로, 철로 만들어졌다. 상하 좌우로 다리를 내리누르고, 수갑으로 손을 고정한다.)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진상을 말하지 못하게 했다.

2006년 7월 12일 점심, 산현(陕縣)정법위서기, 공안국국보대대의 뤼페이(呂飛)와 ‘610’의 자중민(賈忠民) 등 6, 7명이 각기 소나타 경찰차, 봉고차를 타고 ‘불법노동교양결정서’ 한 장을 갖고(지정된 노동교양소를 명시하지 않았는데, 보통 노동교양소에서는 심각한 장애인을 접수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복만 입고 있는 그를 수갑을 채워 허난 성 제2노동교양소로 납치해갔다. 우중민의 몸이 불편한 줄 알면서 노동교양소 부원장 장룽진[張榮斤, 노동교양소 의사인데 일반수감 인원들은 그를 수의(所醫-獸醫)라고 부른다.]과 전향반 주임 리 모(李某)는 ‘파룬궁 수련생이면 우리는 무조건 다 받는다.’고 말했다.

酷刑演示:毒打
고문시연: 혹독하게 구타

그날 저녁 식사 때 운동장에서 우중민은 ‘파룬따파 하오’를 소리 높이 외쳤다. 불법 경찰 3대대 대대장 스바오룽師保龍)은 1중대의 잡범과 바오자인원(마약 중독자로서 ‘마후-馬虎’란 별명을 가진 판융성-樊永勝과 배신자 탕졘훙-唐建红) 등을 사주해 우중민의 입을 막고, 들어다 감방 안에 넣고 들어가 폭행했다. 그런 후 검은 소굴인 3대대 1중대부로 끌고 갔다. 악경(사악한 경찰) 스바오룽은 감방에서 우중민의 머리와 갈비를 잔인하게 찼을 뿐만 아니라 1중대사무실에서는 신바닥으로 우중민의 입을 후려치면서 “이후부터 우중민이 기어가서 밥을 먹게 하라.”고 흉악하게 고함쳤다. 1중대 1반장 이융쥔(李勇軍, 마약 자, 문화 유물 밀수상습범) 은 우중민의 왼쪽 귀를 힘껏 차서 우중민이 혼절할 뻔했다. 1중대 대장 쉬수이왕(徐水旺)은 이리처럼 흉악하게 악담을 하면서 배신자 탕젠훙과 함께 우중민에게 밧줄로 묶는 고문을 가했다.

酷刑演示:上绳
고문시연: 밧줄로 묶다

우중민은 2006년 9월 말에서 11월까지 여러 번 기절하여 응급실로 실려 갔다. 스바오룽은 잡범 후즈융(胡志勇)과 하오하이순(郝海順, 모 종교 신도)을 사주해 우중민의 팔을 끼고 식당으로 뛰어가게 했다. 매달린 고문 같아, 우중민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으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후에도 여러 번 그렇게 끌고 갔다. 2007년 7월 2일 저녁, 우중민은 3대대에 와 현장 참관하는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자기 병세를 이야기하자 교도원은 펄쩍 뛰었다. 손님이 다 간 후 악경 주잉쿠이(朱英奎)는 잡범 장춘성(张春生)을 사주해 우중민의 두 지팡이를 빼앗아 전 대대 사람들 앞에서 때려 부수고 우중민을 스스로 걸어서 돌아가라고 핍박했다. 악경 쉬수이왕은 또 잡범 캉정(康正, 바오자)과 롄사오이(連小藝)를 사주해 우중민을 욕하고 그의 두 발을 차게 하였다. 우중민의 왼쪽 중간 발가락 발톱이 캉정에게 차여 빠져나가 땅에 피를 가득 흘렀다. 또 왼쪽 엄지발가락과 새끼발가락도 밟혀 감염되어 곪아 우중민은 어쩔 수 없이 참대 막대를 주워서 힘겹게 걸었고, 고열로 온몸을 떨었다. 주잉쿠이는 득의양양해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 “나는 네가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게 괴롭힐 것이다.”고 흉물스럽게 말했다. 또 바오자 롄사오이와 리둥빙(李東兵)을 사주해 대낮에 사람이 없는 곳에서 우중민을 들어 땅바닥에 팽개치게 했고, 저녁에 우중민의 두 발을 밟아 왼쪽 새끼발가락을 부러뜨리고 잘라 버렸다.

2007년 11월 30일 우중민은 노동교양 기한이 찼다. 노동교양소의 사악한 의사 장신(張新)은 병력을 찾지 못하겠다며(고의로) 오른 발목을 구부리지 못하고, 이전에 폐결핵이 있었다고만 적고, 발가락을 자르고, 왼쪽 발목을 구부리지 못하며, 4번을 입원한 것과 결핵에 걸린 사실은 한 글자도 적지 않았다. 사람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허난 성 산현 ‘610’직원 일행 4명은 직접 우중민을 정저우로 싣고 가 기차로 그를 칭하이 고향에 보냈다. 그들은 감염되는 것이 두려워 가는 길에 우중민에게 이중 마스크를 쓰게 했다. 시닝에 도착해 중공 악도는 가족이 책임을 추궁할까 두려워 그의 집 앞에서 농민 두 명을 고용해 들고 들어가게 했고, 문 앞에서 황급히 사진을 찍고(차오루이-曹瑞 촬영) 곧장 떠나갔다.

우중민은 노동교양소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 80세가 넘는 노 부친이 돌봐주었다. 우중민의 어머니 리웨구이(李月貴)는 ‘진선인’을 신앙하여 파룬궁을 위해 베이징에 두 번 청원하러 갔다가 천안문광장 공안 분국, 시구 모 파출소, 톈진바오디(寶坻)구치소에 감금되어 박해당했고, 나중에 칭하이 성(青海省)에서 1년 불법노동교양을 당했다. 불법 노동교양기간 악명 높은 칭하이 성 여자 노동교양소에서 박해당해 정신이상이 되었다.

2011년 5월 9일, 박해로 두 다리가 불구가 되어 생활을 스스로 할 수 없는 우중민은 칭하이 성 중공사당정법위에서 꾸린 세뇌반으로 납치되었다. 장소는 시닝 시 퇀제차오(團結橋)의 ‘칭하이 성 국가세국 훈련센터’다.

수년간의 잔혹한 박해로 사지가 불구가 되고 스스로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던 우중민은 2013년 5월 20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문장발표: 2013년 7월 1일
문장분류: 대륙종합소식/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7/1/27607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