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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박해당한, 산둥 장애인 왕광치 억울하게 세상을 떠남(사진)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산둥 보도) 산둥(山東) 린이시(臨沂市) 멍후이현(蒙陰縣) 파룬궁수련생이자, 장애인인 왕광치(王光起)는 13년 동안 중공(중국공산당) 사당(邪黨)에게 상해를 입고 유린당해 납치 감금, 고문으로 혹독한 구타 및 개인 소유의 농지와 채소밭 그리고 밤나무밭을 몰수당했다. 결국, 핍박에 견디지 못하고 밥을 빌어먹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결국 2012년 6월 19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당시 58세였다.

파룬궁을 연마해 이로움을 얻은, 장애인 새 삶을 얻다

왕광치는 1954년에 출생했고, 멍후이현 타오쉬진(桃墟鎮) 주취안구촌(九泉峪村, 지금의 바이취안구촌(百泉峪村))에서 살고 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배우는 것을 좋아해 성적이 아주 좋은 학생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주취안구촌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맡았다. 그가 젊었을 때 훌륭한 인물이어서 혼담을 꺼내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왕광치는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왕광치는 26~27세 때, 갑자기 허리가 아파서, 한 시골의 한의사에게서 ‘접골약’을 지어 세 첩을 먹은 뒤에, 주요한 뼈가 튀어나와 변형되었다. 그 후에는 또 두 다리 대퇴골이 괴사하여 두 다리를 벌리지 못해 옷을 입을 수 없게 되었고, 다만 목발을 짚으며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30세에 불구가 된 그는 더는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게 되었고, 또 더는 가정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대퇴골 괴사를 치료하기 위해, 왕광치는 민간요법을 알아보고, 허난(河南) 정저우(鄭州)로 가서 약을 지어먹으며 치료를 했다. 매번 약 비용은 1천3백 위안(약 22만 원)이 필요했는데, 이 돈은 전부 빌린 것이었다.

당시 그는 얼굴이 아주 많이 부어오르고, 머리가 매우 크게 부어올랐는데, 이웃마저 그가 살 가망이 없다고 여겼다. 병고의 괴로움 속에서 가난 속에서 왕광치는 죽음만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1998년, 왕광치는 기쁘게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했다. 한 단락을 수련한 뒤, 그의 얼굴은 혈색이 좋아졌고 지팡이 하나를 버리고 지팡이 하나로 걸어 다녔다. 두 다리도 약간 벌릴 수 있게 되어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만약 평지에서 걷는다면 또 매우 빨리 걸을 수 있었다. 몸은 아직 완전히 정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지는 못했으나, 병고의 시달림은 없었다. 그는 또 전신이 마비된 큰형 왕광파(王光發)를 돌봐주었다. 동시에 자기 집 밭을 잘 가꿨으며, 또 다른 사람을 도와 약간의 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왕광치에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변화였다.

대법의 불광이 널리 비추니 왕광치는 새롭게 생활에 대한 희망을 불태웠으며, 대법수련 중에서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진상을 알렸다가, 공갈·협박과 혹독한 구타를 당하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1999년 7월 20일에 장쩌민 깡패집단은 파룬따파에 대해 잔악 무도한 박해를 발동했다. 장애인 왕광치도 이번 박해 속에서 모면할 수 없었다.

2000년 정월 19일, 주취안구촌 사당 서기 팡궈밍(方國明)은 사람을 파견해 대대에서 회의한다고 왕광치를 속여 타오쉬진으로 끌고 가 감금했다. 타오쉬진 정부 사당인원은 파룬궁수련생에게 사람마다 2백 20위안(약 3,700원)을 갈취했는데, 왕광치는 돈이 없어 바치지 않아, 진 재정소에 구류 당해 박해를 당했다. 2월 초 하룻날 저녁, 진의 불법 인원 모광리(莫光利), 바오시탕(包西堂), 수청즈(秦成志), 라이셴루(來現錄) 등 20~30명의 사람이 왕광치 이 장애인을 싱싱한 회초리로 후려쳐서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온통 시퍼렇게 부어올랐다. 이들 악도는 의자 다리로 머리를 부수어놓아 흘러내린 피는 옷에 가득 묻었다.

酷刑演示:暴打
폭력적 구타

집으로 돌아온 뒤, 타오쉬진 정부의 사당 인원이 늘 집으로 찾아와 교란해, 왕광치는 생활도 편안하게 할 수 없었다. 핍박에 못 이겨 장애인 왕광치는 전신마비된 큰형을 두고 핍박에 피해 남산(南山)으로 들어갔다. 산속에서 먹을 것이 없게 되어, 이웃과 친척이 사람이 그에게 갖다 주는 전병이나 저 사람이 그에게 갖다 주는 전병으로 가난하게 나날을 보냈다.

몸은 남산에서 살았으나, 대법이 박해를 당하고 사부님께서 누명을 쓰심에 심신이 이로움을 얻은 왕광치로서 사부님과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려고 했다. 2002년 3월, 왕광치는 법에 따라 청원하러 베이징에 갔다가, 톈안먼광장에서 그들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고 쓴 현수막을 펼쳐 들고 큰 소리로 ‘파룬따파하오’를 외쳤는데, 그는 즉시 납치당했다. 그 후 타오쉬진 파출소 부소장 리창샹(李長祥), 진(鎮) ‘610’ 두목 스롄돤(石運端), 본촌의 사당 서기 팡궈밍(方國明)은 베이징에 도착해 그를 진 파출소로 납치해 돌아왔다. 도중에 스롄돤은 뜻밖에 “우리는 돈 5천 위안(약 85만 원)만 사용하면, 불량배를 고용해 당신을 죽일 수 있으며, 사람을 감쪽같이 인간세상에서 없애고도 또 우리가 한 것임을 모르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타오쉬진 파출소에 도착한 뒤, 댜오촨쥔(刁傳軍)은 왕광치를 벽을 마주하고 서 있게 했다. 한 사람이 그의 몸 뒤에서 “당신들은 구덩이를 다 파놓았습니까?”라고 말하자, 다른 한 사람은 깊이가 1미터가 넘게 팠다고 대답했다. 악독한 경찰은 그를 산채로 멍산(蒙山) 위에 묻으려고 했다. 소문이 날까 두려워 악독한 경찰은 또 다른 배치를 하여, 그를 진으로 이송해 7일 동안 감금했다가 석방해 집에 돌려보냈다.

악독한 경찰 인원의 핍박으로 몰락하여 거지가 되다

2002년 봄, 주취안구촌 사당서기 팡궈밍은 스롄돤, 왕자오양(王兆洋), 리샹옌(李向岩)은 왕광치의 집에 들이닥쳐 거의 없는 재물인 가마, 바가지, 대야, 찻주전자, 칼을 전부 부수었고, 두 근되는 전병도 가루가 되게 찢어서 산비탈 위에 뿌렸다. 이것을 제외하고 그의 집에는 더는 다른 물건이 없었다. 왕광치는 20여 년 동안에 불구 생활을 했기에 돈을 벌 수 없었고, 그의 큰형(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음)은 어린 시절에 마비되었다. 큰형이 거주한 방안은 진의 서기 류위안더(劉元德)의 담배 한 갑의 가치도 없었다. 말로는 ‘집’이라 했으나, 사실 바로 돌로 네모나게 테두리를 쌓아 윗면에 비닐 주머니를 덮었다. 바닥은 풀을 깔았고, 몇십 년 된 아주 낡은 이불을 덮었으며, 주위에는 밥을 먹는 공기 하나가 바로 그들 집의 모든 재산이었다. 이것이 바로 시내에서 이름있는 ‘문명촌’ 국민의 생활이다.

'王光起的家当'             '王光起和大哥住的房子'
             왕광치의 집안 재산                     왕광치의 큰형이 사는 집

스롄돤과 팡궈밍은 사람을 지휘해 왕광치의 방문과 창문을 돌로 막았다. 팡궈밍은 또 사람을 파견해 윤번으로 왕광치를 일어나지 못하게 지키게 했는데, 심지에 다른 사람이 그에게 밥과 물을 보내주는 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왕광치는 이미 학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팡궈밍은 매일 촌안에서 큰 나팔로 ‘누가 왕광치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보내주었다면, 누굴 처리할 것이다. 그를 방안에서 굶어 죽게 하겠다.’라고 외쳤다. 그 후 왕광치가 말하기를, 어느 마음씨 착한 마을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몰래 그에게 전병 몇 개와 물을 놓아두어, 그제야 그는 이 20일 동안의 난관을 건너왔다고 했다.

팡궈밍은 또 스스로 주장해 왕광치의 텃밭과 농지 채소밭마저 모두 몰수했으며, 가치가 만 5천 위안(약 256만 원)되는 밤나무밭을 몰수해 박매했다. 왕광치는 기본적인 생활보장을 잃고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불구인 몸을 지탱하며 곳곳에서 밥을 빌어다가 큰형의 목숨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 장애인은 ‘진선인(真善忍)’에 대한 믿음 때문에, 악당(惡黨) 정부인원에 의해 핍박으로 거지로 되었다.

팡궈밍이 왕광치의 밤나무밭을 박매하고 텃밭과 농지 채소밭을 몰수할 때, 왕광치의 아직 수련하지 않은 둘째 형이 중공(중국공산당) 악도의 사악한 폭행을 폭로하자, 진 ‘610’의 리전궈, 왕자오양(王兆洋)은 곧 그에 대해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두 사람은 또 그의 팔을 손으로 힘껏 그의 목을 조여, 그로 하여금 아주 오랜 시간을 질식하게 해, 심신에 극심한 고통을 조성했다. 맨 마지막에 또 그에게 2천 위안(약 34만 원)을 갈취했다.

주취안구촌의 사당서기 팡궈밍의 악행에 대해, 왕광치의 비참한 조우에 대해, 마을 사람은 모두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팡궈밍은 너무 잔인합니다. 생산 농지와 채소밭을 주지 않는 것은 너무 맞지 않습니다. 남의 밤나무밭을 몰수하는 것은 너무 양심이 없습니다. 바로 사형수라 해도 밥을 먹여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는 법을 어기며 나쁜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습니다! 이건 정말 사람을 너무 업신여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요 몇 년 동안 왕광치는 친척과 친구의 일부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장기간 중공 사당의 박해 속에서, 왕광치는 경제적으로 여태껏 수입이 없었다. 주취안구촌의 사당 서기 팡궈밍은 왕광치의 토지를 한촌도 돌려주지 않았다. 왕광치는 기본적인 생활마저 보장할 수 없게 되어 생활은 빈곤 속에 처했다. 중공 사당의 강압적인 박해 속에서, 왕광치는 아주 억압된 생활을 하며, 늘 사당에게 납치박해를 당할까 두려워했다. 공갈·협박과 놀라움 속에서, 그의 형 왕광파는 2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2012년 6월 19일, 왕광치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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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발표: 2012년 1월 13일 문장분표: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1/13/26775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