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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옥살이 박해당한, 미이 파룬궁 수련생 랴오위안푸 사망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쓰촨보도) 쓰촨(四川) 미이(米易) 파룬궁 수련생 랴오위안푸(廖遠富)는 중공(중국공산당)의 잔혹한 박해로 특별히 10년의 옥살이를 당해 속인이 상상하기 어려운 정신과 육체적인 박해를 당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여전히 지속적으로 현지 610, 국가보안에게 공갈 협박과 위협을 당했다. 랴오위안푸는 결국 2012년 11월 7일 박해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겨우 47세였다.

랴오위안푸가 세상을 뜬 후, 아내와 80여 세의 노인 그리고 한창 공부하고 있는 아들을 남겼는데, 집 형편은 처량하다.

진실한 말을 했다가, 여러 차례 감금당하다

랴오위안푸는 1966년에 출생했고 미이현 판롄진(攀蓮鎮) 수이탕촌(水塘村)에서 거주하고 있다. 1996년에 대법을 얻어 수련하여, 랴오위안푸의 몸은 더욱 건장하고 정력이 왕성했으며 온몸에 기운이 솟구쳤다. 랴오위안푸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길 즐기는 사람으로, 누구네 집에 무슨 일이 있어도 모두 주동적으로 도와주었다. 파룬따파(法輪大法)는 그에게 인생의 의의는 반본귀진(返本歸真)임을 깨닫게 했다. 이 때문에 그는 명리를 담담하게 보았고 일을 함에 늘 먼저 다른 사람을 위해 고려했다.

1999년 7월, 파룬따파는 억울한 누명을 썼다. 중공과 장쩌민(江澤民) 정치깡패집단은 광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했다. 랴오위안푸는 여전히 집 문을 나서서 세상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려 대법을 실증했으며, 또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서 사부님의 결백하심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1999년 10월과 11월에 랴오위안푸는 두 차례나 청원하러 베이징에 갔다가 납치당해 두 차례 불법 감금을 당했다. 1999년 11월, 랴오위안푸는 청원하러 갔다가 납치되어 미이로 돌아와서 또 일 개월을 감금당했다. 미이 공안국 정보과 과장 샹진파(向金發)는 랴오위안푸의 아내에게 “당신이 돈 천 위안을 바치기만 하면 곧 랴오위안푸를 풀어주겠습니다.”고 말했다. 랴오위안푸의 집에는 돈이 없었다. 아내는 남편을 좀 일찍 집에 돌아오게 하기 위해, 곧 은행으로 가서 천 위안을 대출해 샹진파에게 바쳤다. 그러나 생진파는 돈을 받은 후, 랴오위안푸를 석방해 돌려보내지 않고 판롄진과 결탁했다. 랴오위안푸는 막 구치소의 문을 넘어서자, 또 판롄진의 악도들에게 판롄진 세뇌반으로 납치당해 졸개들에게 혹독한 구타, 체벌, 폭력적 세뇌를 당했다.

10년의 옥살이로 고문을 당해, 상흔을 관에 지니고 가다

1999년 10월 20일, 랴오위안푸 등 20여 명 파룬궁수련생은 빙하이바(丙海壩)의 한 수련생의 집에 가서 법 공부하고 교류했다. 공안국의 샹진파, 양쯔화(楊梓華), 저우린(周林), 랴오훙빙(廖紅兵), 차이파샹(柴發祥), 리쉐쑹(李雪松)과 빙구(丙谷) 파출소의 경찰은 빙하이바로 다그쳐 가서, 법 공부에 참가한 파룬궁 수련생을 전부 납치했다. 26명의 남녀노소는 정보과 2층 회의실에 갇혔다. 그날 낮은 비교적 더웠다. 랴오위안푸는 단지 셔츠만 입었을 뿐이다. 그러나 저녁에는 날씨가 특별히 추웠다. 정보과의 악독한 경찰 차이파샹은 또 회의실의 문과 창문을 전부 열어서, 추운 바람을 방안에 들여보내 그들을 꼬박 하룻저녁을 추위에 떨게 했다. 이튿날, 랴오위안푸는 미이 계독소(戒毒所)로 보내져 7일 동안 감금당했다.

2000년 12월 14일 랴오위안푸는 진상 현수막을 걸었다. 12월 15일 아침, 랴오위안푸는 집에서 정보과 경찰과 무장경찰에게 납치당했다. 랴오위안푸는 정보과로 납치돼 악독한 경찰에게 무차별 폭력을 당했다. 무장경찰은 총으로 구타했는데, 랴오위안푸의 얼굴은 구타로 부어오르고, 눈은 구타로 시퍼렇게 부어올랐다. 반복적으로 몇 시간 동안 시달림을 당했다. 정보과 과장 샹진파는 심문할 때, 랴오위안푸의 두 손을 수갑으로 채운 뒤에 매달고, 단지 발끝만 땅에 닿게 했다. 샹진파 등 악독한 경찰은 경찰봉으로 그를 구타했는데 며칠 동안이나 시달렸다. 구치소에 갇혀 류치차오(劉啟朝, 구치소의 지도원)에게 구치소의 모든 문을 여는 열쇠꾸러미로 구타당했다. 2001년 1월 24일, 랴오위안푸는 10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받아 더양(德陽)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감옥 안에서 랴오위안푸를 전향시키기 위해, 악독한 경찰은 형구를 사용할 대로 다 사용해 랴오위안푸에 대해 고문 학대를 감행했다. 악독한 경찰은 죄수에게 지시해 랴오위안푸에 대해 주야로 감시하고 함부로 욕하고 때리며 체벌을 가해, 랴오위안푸는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10년 동안의 옥살이에서 랴오위안푸는 속인이 상상하기 어려운 정신과 육체적인 박해를 당했다. 늘 족쇄와 수갑을 채우고 각종 고문으로 시달림을 당한 외에, 교도관과 바오자(包夾) 죄수는 또 쇠사슬로 손발을 단단히 묶었다. 랴오위안푸의 두 손은 장시간 동안 쇠사슬에 묶여 살 속까지 패여 들어가 남긴 상처를 뚜렷하게 볼 수 있었으며, 줄곧 관에까지 지니고 갔다. 두 다리 무릎 아래는 검은색을 띠었고 근육이 위축되었다.

610 지속적으로 교란, 가족을 연좌해 위협하다

집으로 돌아온 후, 랴오위안푸는 한 단락 시간의 법 공부, 연공을 거치고 몸은 차츰 건강을 회복했고, 일부 가벼운 농사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악독한 경찰은 랴오위안푸에 대한 박해를 늦추지 않았다. ‘610’ 및 농촌사회구역(鄉村社)에서는 줄곧 랴오위안푸에 대해 교란하고 위협했다. 2012년 1월, 판롄진 및 수이탕촌(水塘村)의 관련 인원은 또 랴오위안푸를 촌으로 불러다가 ‘담화’했다. 악인은 랴오위안푸가 연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랴오위안푸가 파룬궁 수련생과 접촉함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또 랴오위안푸가 당한 박해의 폭로를 허락하지 않았다. 악인은, 랴오위안푸가 만약 협조하지 않으면 그의 모친에게 양로보조금(연세가 60세 이상인 노인은 매달 60위안의 보조금이 있음, 랴오위안푸의 모친은 이미 80세임)을 주지 않고, 또 그의 아들에게 직업(그의 아들은 모 대학 2학년을 다니고 있음)을 배치해 주지 않으며, 또 그의 아들이 일하고 개인 경영함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악인은 랴오위안푸에게 보증서를 쓰라고 했다. 랴오위안푸가 쓰지 않자, 진 정부 인원은 랴오위안푸의 손을 잡아당겨서 한 공백 종이 위에 지장을 하나 눌러서 가지고 돌아갔다. 사후에 악인이 공백 종이 위에 무엇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2012년 3월, 랴오위안푸는 온몸이 아프고 마음이 몹시 답답하며 아주 괴로웠다. 이로부터 증상이 끊임없이 가중되었고, 연이어 마비되어 자리에 누워 생활도 스스로 할 수 없었다. 그 기간에 파룬궁 수련생이 문안 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감시인원은 랴오위안푸와 그의 가족에게 공갈 협박했다. 9월, 랴오위안푸는 청두(成都) 화시(華西)병원에 의해 폐암 등 몇 가지 암증 합병증이란 진단이 내려져, 어떠한 치료할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랴오위안푸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서 병마에게 시달렸는데 칼로 마음을 에이듯이 괴로웠다. 몸은 더욱 수척해졌는데, 맨 마지막에 단지 뼈만 앙상하게 남아 참혹하여 차마 볼 수가 없었다. 2012년 11월 7일, 랴오위안푸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애도의 뜻을 표시한 사람을 납치 감금하다

랴오위안푸가 사망함에 수련생, 친척과 친구, 이웃들은 애석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주동적으로 그의 집으로 와서 도와서 후사를 처리해 주었다. 그러나 중공 사당(邪黨)은 여전히 랴오위안푸에 대한 마지막 박해를 지나쳐 버리지 않았다. 미이 국가보안에서는 사복경찰을 파견해 랴오위안푸의 집에 섞여 들어가서, 초상에 참여한 사람에 대해 비밀리에 감시했다. 무릇 파룬궁 수련생은 모두 납치 대상에 속했다.

본촌의 파룬궁 수련생 장지후이(張繼會), 장지핑(張繼平) 및 자지팡(張繼芳) 세 자매는 막 랴오위안푸의 집에서 도와주고 집으로 돌아 온, 그날 오후에 판롄진과 파출소 경찰에게 청관(城關) 파출소로 납치돼 감금당했다. 세 사람은 모두 가택수색을 당했다. 이튿날 오후 장지팡은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으나, 장지후이와 장지핑은 미이 솽거우(雙溝) 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했다가 11월 30일에 그제야 풀려났다. 그날, 여러 명의 파룬궁수련생이 악인과 악독한 경찰에게 미행당했고, 여러 명의 파룬궁 수련생 및 그의 가족이 교란을 당했다.

문장발표: 2012년 12월 25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2/25/26693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