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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에 재차 박해당한 허난성 치현 자오쩌민, 억울하게 사망

[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허난성 보도) 허난성(河南省) 치현(杞縣)의 겨우 48세인 자오쩌민(趙則敏)은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사당(邪黨)에게 납치, 불법 감금, 불법 노동교양을 당해, 각종 고문 시달림을 받았고 심신은 매우 큰 손상을 입었다. 2009년 12월 말에 노동교양소에서 돌아올 때 온몸은 마비됐다. 중공(중국공산당) 인원의 끊임없는 교란과 공갈협박 하에 결국 2012년 11월 24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집에는 또 90세 고령인 노모, 아내와 가정을 이루지 않은 아들 딸이 있다.

자오쩌민은 1998년에 수련을 하기 전에는 체질이 약하고 잔병이 많았다. 가장 심한 것은 유행성 B형 뇌염 후유증인데, 머리가 늘 자기도 모르게 흔들렸고 항상 어지러웠으며 또 두 다리로 길을 걸을 수 없었고 피골이 상접했다. 파룬궁을 수련해서 몇 달 사이에 일체 증상이 사라졌고 신체가 건장하고 힘이 있었다. 몸무게는 원래의 55kg에서 75kg까지 늘어났다.

1999년 7월 20일, 중공 악당 장쩌민 집단은 전 선전기구를 동원해 파룬궁에 대해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모함했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잔혹하고 비열한 수단을 이용해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했다. 자오쩌민은 대법이 공정한 평가를 받게 하기 위해 대법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몇 번이나 청원하러 갔다가 각종 박해를 당했다.

1999년 11월, 자오쩌민은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치현 ‘610’(파룬궁을 박해하기 위해 성립한 불법 조직)과 공안국에 의해 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 그 기간에 고문학대를 당할 대로 당했다. 예컨대 마보로 쭈그려 앉기, 뒷짐결박, 무거운 족쇄 채우기, 뺨 때리기, 추운날에 옷 벗기기, 공안국 맨 꼭대기 층으로 끌어다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돌려 3시간 넘게 추위에 떨게 하기 등이다.

2000년 7월, 자오쩌민은 파룬따파가 좋음을 실증하러 베이징으로 들어갔다가, 톈안먼 공안국의 악독한 경찰에게 강제로 톈진(天津)시 구치소로 보내져 불법 감금당했다. 톈진 구치소에서 자오쩌민은 악독한 경찰에게 독주사를 맞고 또 고문 학대를 당했다. 무리한 폭정에 직면해 그는 단식으로 항의하며 무조건 석방을 요구했다. 악인은 난폭하게 음식물을 주입했다.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악독한 경찰에게 혹독한 구타를 당했는데 정말 죽도록 때렸다. 폐는 구타로 문드러져 끊임없이 고열이 올랐고 피와 농액을 토해냈다. 사경을 헤매는 상황 하에서 다시 치현 공안국에 의해 현지 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했다.

구치소 안에서 자오쩌민은 1개월이 넘게 각혈하고 농액을 토하며 고열이 올랐다. 박해를 당해 뼈만 앙상하게 남고 온 머리의 검은 머리칼은 다 빠져 이미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이러한데도 중공 인원은 여전히 석방해 주지 않고 또 강제로 행정 유치장으로 옮겨 불법 감금을 감행했다. 몸이 조금 호전되자 2년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내려 카이펑(開封) 노동교양소로 보내 계속 박해를 가했다.

카이펑 노동교양소에서 자오쩌민은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장 사악한 4대대로 배치받아 장시기 과부하의 강제 노역을 했다. 인산 비료를 포장했는데 매일 16시간 이상 일했다. 그 후 자오쩌민은 사악에게 협력하지 않고 박해를 반대했다가 악독한 경찰의 지시를 받은 죄수에 의해 삽에 맞아 갈비뼈가 부러졌고, 구타를 당해 폐부위가 출혈해 고열이 났으며 한 달이 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폭도는 여전히 그에게 무거운 체력노동을 하도록 핍박했다. 이른바 형기가 만료되어 집으로 돌아갈 때 그는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었고 온몸에는 옴이 생겼다.

2년 노동교양을 당해 석방되자 직장에서는 해고를 당했다. 성년이 되지 않은 두 아이를 부양하기 위해 자오쩌민과 아내는 작은 장사를 시작해 생활을 유지했다. 그 기간 늘 치현 ‘610’과 공안국 국가보안대대의 교란을 당했고 여러 차례나 이유 없이 불법 납치, 감금을 당했다. 예컨대, 사당 16기 인민대표대회 전야의 어느날 밤, 자오쩌민은 한창 깊이 잠을 잤는데 ‘610’과 공안국 국가보안대대 및 치현 시관(西關) 구치소의 한 무리 악인은 담장을 뛰어넘고 주택에 들이닥쳐 자오쩌민을 납치해 강제로 2개월 넘게 감금했다.

2008년, 중공 사당은 올림픽을 연다는 명목으로 파룬궁수련생을 함부로 납치했다. 2008년 5월 22일 오후, 자오쩌민은 자전거를 타고 상점으로 물건을 사러갔는데 국가보안대대의 몇 명 악독한 경찰들이 벌떼처럼 밀려들더니 그를 납치해 또 한 번 쉬창(許昌) 노동교양소로 보내 2년 불법 노동교양을 시켰다. 쉬창 노동교양소에서 자오쩌민은 ‘진선인(眞善忍)’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악독한 경찰은 그에 대해 각종 압력을 가했다. 예컨대 대법을 모독한 자료를 보도록 강요했고 노동을 하도록 핍박했으며, 이른바 ‘전향’을 하도록 협박했다. 자오쩌민은 합리적으로 강한 의지로 협력하지 않았다가 교도관 주잉쿠이(朱英奎)에게 심한 구타를 당했다. 구타로 두 눈이 부어오르고 안구가 충혈되어 오른쪽 시력이 떨어져 앞을 똑똑히 볼 수 없었다.

자오쩌민이 사악한 박해를 폭로한 이유로 3대대 악독한 경찰은 부끄럽고 분해했다. 그들은 3대대 전체 사악한 세력을 조직해 자오쩌민 및 다른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이른바 ‘공견전(攻堅戰)’을 감행해 마약범 롄하오(廖浩)에게 형기를 크게 줄여준다며 자오쩌민을 박해하게 했다. 그들은 ‘공심전술(攻心戰術)’을 채용해 여러 차례나 전체 대회를 열어 성세를 꾸며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시간이 오래지 않아 자오쩌민은 박해로 걸을 수 없게 됐으며 혼자 생활할 수 없게 됐고 걷는 것도 두 사람에게 의존해야 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든, 아니면 얼음과 눈으로 뒤덮이든지를 막론하고 모두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질질 끌려다녔다. 1년 넘는 시간에 신발은 끌려서 몇 개나 해졌다. 여러 차례나 눈 섞인 물을 신발 안에 주입해 발은 동상을 입어 곪았으나 악독한 경찰은 여전히 자오쩌민이 꾀병을 부린다고 말했다. 그리고 죄수에게 지시를 내려 여러 차례나 몰래 꾀병을 부리는지를 검증하게 했다. 예컨대 두 죄수가 이끌고 가다가 갑자기 손을 느슨하게 해서 그가 갑자기 넘어지게 했다. 자오쩌민은 괴로움으로 피골이 상접하고 몸은 극도로 허약했으며 머리칼도 희어졌다. 이런 상황 하에 노동교양소에서는 석방을 해주기는커녕 또 진일보로 박해를 감행했다. 두 죄수를 시켜 억지로 햇볕 아래로 끌어다가 뙤약볕을 쪼이게 했다. 섭씨 38도 되는 고온에서 몇 달 동안 직접 쬐여 피부가 몇층이나 벗겨졌는데도 또 쬐였는데 ‘칼슘을 보충한다’고 했다. 실제적으로 수단을 바꿔가면서 박해를 가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또 두 다리가 마비되어 스스로 생활할 수 없게 됐다.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노동교양소의 악독한 경찰은 여전히 두 사람을 시켜 그에게 수공 작업을 하도록 핍박했다.

가족이 여러 차례 면회와 석방을 요구했으나 노동교양소에서는 석방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면회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완전히 스스로 생활할 수 없게 되자 쉬창 노동교양소는 2009년 12월 28일에서야 가족에게 데려가라고 했다. 멀쩡하게 건장하고 힘이 좋던 중년 남자는 2년도 되지 않아 박해로 불구가 됐다.

자오쩌민은 근 13년 이래 정신과 육체적으로 장시기 심각한 상해와 손상을 입었던 이유로, 집으로 돌아온 후, 더군다나 현지 사악의 끊임없는 교란과 공갈협박으로 인해 결국 2012년 11월 24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각 방면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고려해 준 좋은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로, 사당에게 근 13년 동안의 박해와 공포 속에서 결국 보귀한 생명까지 빼앗겨 일찍 세상을 떠났다. 원래 멀쩡하던 가정도 산산조각 났다.

문장발표: 2012년 12월 18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2/18/2666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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