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보도) 랴오닝(遼寧) 판진시(盤錦市) 랴오허(遼河)유전의 파룬궁수련생 왕카이밍(王開明 혹은 王開銘)은 2011년 1월 19일 오전에 판진감옥 4감구역에서 또 박해당해 정신이 혼미해졌고 뇌출혈 증상이 나타나 식물인간이 되었다. 교도관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판진 제2인민병원에서 응급처치를 했다. 그러나 여전히 족쇄와 수갑을 채워 두었다. 3월에 이르러, 감옥 측은 왕 씨가 감옥에서 사망할까 두려워 병보석 수속을 밟아주고는 랴오허 유전 중심병원으로 옮겼다. 결국 2011년 12월 20일에 왕카이밍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왕카이밍의 아내 야오구이란(姚桂蘭)은 2009년 3월 15일 오후에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말했다는 이유로 판진시 국가보안 경찰에 의해 구치소로 납치돼 보름 동안 박해를 당했다. 그 후, 2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았고, 판진시 610의 악독한 경찰에 의해 선양(瀋陽) 마싼자(馬三家) 노동교양원(勞教教養院)으로 납치돼 박해를 당해 몸에 병상태가 나타났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생활을 스스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2009년 8월 9일 점심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2008년 4월에 납치당했을 당시 왕카이밍은 굉장히 건강했다. 그러나 2년 사이에 박해로 식물인간이 되었다. 랴오허유전 병원에 입원한 기간에 수련생이 그를 면회하러 갈 때마다 그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말을 할 수 없었다(감옥 내에서 무슨 약물을 주사 당했는지 모르고 있음).
왕카이밍은 예전에 랴오허유전 가오성(高升) 채유공장 푸치(附企)금속회사에서 사장으로 있다가 주임을 맡은 적이 있다. 1996년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 뒤에 그는 가오차이(高採) 연공장에서 봉사하는 보도원을 맡았다. 왕카이밍은 엄격하게 ‘진ㆍ선ㆍ인(眞ㆍ善ㆍ忍)’에 따라 마음을 닦아 병 없이 온몸이 가벼웠다. 그리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근무를 해 사람들은 그를 좋은 간부, 좋은 직원, 좋은 남편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중공(중국공산당) 사악한 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뒤, 부부는 여러 차례 박해를 당했다.
2008년 4월 28일, 판진시 공안국 싱룽타이(興隆台) 공안분국 가오차이 파출소의 경찰 한스룽(韓世龍), 싱바오창(邢寶昌) 및 가도사무실 왕궈린(王國林) 등은 베이징 올림픽 명목으로 왕카이밍의 집 문어귀에서 열쇠를 강탈하고 그를 납치했다. 당시 불법 경찰은 가족이 현장에 없는 상황에서 불법으로 컴퓨터 등 개인물품을 수색해갔다.
왕카이밍은 비밀리에 6개월 동안 판진시 구치소에 감금당한 뒤, 2008년 10월에 판진법원에 의해 4년의 불법 판결을 당했다. 그는 먼저 판저우(錦州) 난산(南山)감옥에서 잔혹한 박해를 당했고, 2009년 하반기에 판진감옥 4감구역 9중대로 이송되었다. 대대장 왕쥔쑹(王峻松) 등 악독한 교도관은 각종 수단으로 왕 씨에게 잔혹한 박해를 감행했다.
원래 건강했던 왕카이밍은 2010년 4월 14일에 랴오닝 판진감옥 4감구역의 교도관에게 박해를 당해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제야 왕 씨가 판진 제2인민병원 1층 중환자실에서 응급처지를 받고 있고, 병원에서 왕 씨에게 이미 뇌출혈 증상이 나타나 생명이 위험하다는 진단을 내렸다고 가족에게 통지했다. 왕카이밍은 손과 발에 수갑을 찬 채 병상에 누워서 대량의 약물을 주사 당했으며,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감옥 측은 단지 딸이 곁에서 보살펴 주는 것만 허락했다. 당시 아내 야오구이란은 이미 2009년 9월에 박해로 사망한 후였고, 큰 딸은 출산한 지 겨우 만 한 달이었으며, 둘째 딸은 대학공부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딸은 여러 차례 부친의 병보석을 요구했으나 판진감옥은 가오차이 파출소에서 접수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수속을 밟아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입원하고 11일 만에 왕카이밍은 또 판진감옥 병원으로 끌려가 독극물을 주사당했다.
6개월이 지난 2011년 1월, 왕카이밍은 거듭 박해를 당해 두 번째로 뇌출혈 증상이 나타났고 식물인간이 되었다. 판진감옥은 또 왕카이밍을 두 번째로 판진2원(盤錦二院)으로 보내 이른바 ‘응급처치’를 했다. 그러나 여전히 족쇄와 수갑을 채웠다. 3월이 되어도 전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판진감옥은 왕씨가 감옥에서 사망해 책임을 감당할 까 두려워, 그제야 왕카이밍에게 병보석 수속을 밟아주었다. 그리고 랴오허유전 중심병원으로 옮겨서, 두 딸이 보살펴 주게 했다. 집의 10여 만 위안(170만원 남짓)의 저축을 전부 써버리고(왕씨가 공직에서 해고당했던 이유로, 월급 지급과 의료보험 등 대우를 중지당했음), 두 딸은 돈을 빌려서 또 왕씨를 뇌내과에서 재활의학과(康復科)로 옮겨 치료를 받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호전이 없었다. 확실히 입원비용을 지불할 돈이 없게 되자, 또 셋집으로 옮겨 보살펴 주었다. 2011년 2월에 몸이 계속 악화되어 또 유전 중심병원에 입원해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12월 20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아내 야오구이란이 생전에 당한 박해
왕카이밍의 아내 야오구이란은 랴오허유전 가오성 채유공장의 퇴직 직원이었다. 1996년에 파룬따파를 수련해 각종 질병이 약을 먹지 않고도 전부 완쾌되었다. 2000년 10월에 대법을 실증하러 베이징으로 갔다가 그곳의 악독한 경찰에게 납치당해 판진 노동교양소에 불법 감금돼 박해를 당했다. 판진 노동교양소는 1999년부터 2000년 12월까지 남녀 파룬궁수련생 총 2백여 명을 감금한 적이 있다. 판진 노동교양소에서는 깡패 같은 수단과 각종 고문으로 전향을 강요했다. 예전에 수련생 3명이 박해로 사망했고, 백 명 이상이 구타로 상해를 입기도 했다. 2000년, 판진 노동교양소는 랴오닝성 및 공안부로부터 이른바 ‘전향선진단위’로 평가받아 단체 2등 공로를 세워 판진시, 랴오닝성, 공안부 각급으로부터 고액 장려금과 장려상을 받았다. 이는 파룬궁수련생의 생명과 선혈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불법 경험을 전국에 전수했다. 그들은 네이멍(內蒙) 등 노동교양소 소굴의 악독한 교도관을 판진노동교양소 불법 소굴로 끌어들여 불법 경험을 학습시켰다.
2001년 5월 26일, 야오구이란과 여대(女隊)의 다른 파룬궁수련생 28명은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자 여대 대장 이슈옌(羿秀豔), 부대대장 류징(劉靜), 대장 황량(黃亮), 차이리(蔡莉), 왕옌(王岩), 치샤(齊霞), 옌리나(晏麗娜), 류위메이(劉玉梅), 리지(李潔), 자오훙옌(趙紅豔), 류민(柳敏) 등 대장 10여 명이 쇠몽둥이와 전기봉을 들고 접대소 위층으로 가서 물·밥·잠·화장실까지 금지시키고, 둔부 치켜들기, 다리 굽히기, 마보(馬步)로 서있기, 두 다리 모아 군대자세로 쭈그려 앉기, 문가 창문을 풀로 붙이기 등을 감행했다. 제대로 쭈그려 앉지 못하거나 표준적인 자세가 아니면 곧 쇠몽둥이로 구타했다. 게다가 한 사람 한 사람씩 1층 식당으로 끌고 가 쇠몽둥이와 전기봉으로 구타했다. 야오구이란은 이슈옌, 류징, 황량, 차이리, 옌리나, 왕옌, 치샤에게 구타를 당해 허리와 다리에 심한 어혈이 생기고 부어올라 아팠다.
2000년 새해 전 날에 면회를 할 때, 야오 씨의 남편 왕 씨는 천 위안(17만원 남짓)을 당직을 서는 대장에게 넘겨 아내에게 전해주도록 했다(새로 들어간 수련생이 전향하지 않으면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던 탓에 돈을 대장에게 바쳐 일률적으로 보관하게 했음). 그러나 대장은 돈을 탐오해 2001년 1월까지도 돈을 건네주지 않았다. 통계를 내보니 모두 14명[총 7천 여 위안(120만원 남짓)]이 돈을 받지 못했다. 원장 장서우장(張守江)은 대대장 이슈옌을 불러 조사를 지시했으나(류징 부대대장이 돈을 관할했음) 밝혀내지 못했고 돈도 주지 않았다. 이 일을 당시 파룬궁수련생은 모두 알고 있다.
야오구이란은 박해를 당해 몸이 좋지 않아 아주 수척했다. 야오 씨는 잔인무도한 박해에서 마음을 어기고 전향했다. 야오 씨는 2002년 3월에 소굴에서 석방되었고, ‘엄정성명’을 발표해 계속 파룬궁을 수련하여 대법에 가져다 준 손실을 갑절로 메우겠다고 표시했다. 새롭게 수련한 뒤로부터,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나 2009년 3월, 야오구이란은 판진시 싱룽타이구 싱룽청사 4백에서 진상 소책자를 나눠주다가 전싱(振興) 주택단지의 악독한 경찰에게 납치돼, 시 제3구치소[보하이(渤海)]에 보름 동안 불법 감금당했는데, 박해로 구토했고 수척해졌다.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름 뒤에 또 마싼자 노동교양소 소굴로 납치당했다. 하지만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되어 수감을 거부당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감시를 당했다. 야오 씨는 감옥에서 잔혹한 박해를 당하고 있는 남편 왕카이밍을 걱정하느라 몸 상태가 나날이 심각해졌다. 그 후에 랴오닝유전 병원에 입원했다. 결국 구치소에서 나와 5개월 뒤인 2009년 8월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문장발표: 2012년 10월 14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0/14/2640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