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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닝 푸순 쑹원량, 억울한 6년 판결을 당하다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성 보도) 푸순시(撫順市) 쑨청구(順城區) 후이위안향(會元鄉) 마진촌(馬金村)의 농민 쑹원량(宋文良, 남, 49)은 1997년 7월에 파룬궁을 수련한 후 ‘진선인(眞ㆍ善ㆍ忍)’에 따라 자신을 수련해 도덕 경지를 제고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마을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쑹원량은 오히려 파룬궁에 대한 믿음이 매우 확고했다는 이유로 중공(중국공산당) 사당(邪黨)에게 납치당한 뒤에 전기봉, 바늘로 열 손가락 찌르기, 매달기 고문 등을 당했다. 동시에 6년 불법 판결을 당했다.

1. 신푸(新撫) 파출소로 납치돼 열 손가락이 바늘에 찔리다

2001 봄, 중공 촌지부 서기는 향 기율검사위원회에서 연공을 하지 않는다는 보증서를 받아오라고 했다며 쑹원량을 찾아왔다. 당시 향정부 1급은 아직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가 없었다. 게다가 그에게 “이 마을의 OO는 면담을 한 후에 돌아오지 못한 채 노동교양소로 보내졌다”고 말했다. 쑹원량은 듣자마자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공법을 학습하지 않고 연공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향 기율검사위원회로 가면 곧 납치를 당하고 가지 않고 집에 있어도 사악은 납치하려 할 것이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유랑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2002년 10월, 진상자료점이 파괴되어 쑹원량은 다른 2명의 파룬궁수련생과 함께 납치당했다. 악독한 경찰은 수건으로 입을 막고 수갑을 채우며 옷으로 머리를 감아서 신푸 파출소로 납치했다. 신푸 파출소에 도착한 뒤 또 족쇄를 채워 가뒀다.

저녁 무렵이 가까워졌을 때 또 신푸중대로 납치했는데 지점은 화산(華山)파출소에 있었다. 전 화산파출소 소장 자오(趙)모는 쑹원량의 뺨을 한바탕 주먹으로 쳤다. 그런 다음 슬리퍼로 한바탕 머리를 후려쳤다.

한 젊은 악독한 경찰은 또 핀으로 열 손톱을 찔렀고 또 열 발톱을 찌르며 또 입으로는 여전히 “당신을 장쉐친(江雪芹)과 마찬가지로 되게 하겠다”고 말했다. 다 찌른 뒤에 매달고 플라스틱 통으로 한통씩 냉수를 끼얹었다. 그 뒤 또 코와 입을 향해 한통씩 냉수를 끼얹어서 질식 시키려 했다.

그 후 쑹원량은 푸순시 제2구치소로 납치됐다.

2. 구치소 경찰이 형사범을 지시해 잔인하게 박해하다

쑹원량은 푸순 제2구치소 207호로 납치당했고 교도관은 랑징밍(朗敬明)이었다. 랑씨는 죄수를 지시해 쑹원량을 구타했다. 연공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말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또 일을 하지 않으면 곧 구타했고 임무를 완수하지 않아도 구타했다. 게다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어떤 때는 하루 에 단지 옥수수떡 반개만 주었다. 감옥규정을 외우지 않아도 구타했고 입을 움직이기만 하면 곧 대법을 외웠다며 몇 발 걷어차거나 혹은 슬리퍼를 쥐고 한바탕 구타했다. 사흘이 멀다 하고 구타를 당한 것이다.

구치소는 또 습한 환경인데 이로 인해 감금당한 다수 사람은 모두 옴이 생겨나 새로 들어간 사람은 모두 감염됐다. 쑹원량도 예외가 아니었다. 감방을 관리하는 우(吳)모는 수중의 졸개에게 쑹원량에게 옴을 치료해 주라고 알려주었다. 졸개들은 곧 슬리퍼를 들고 쑹원량의 몸 위의 옴을 쓸어 벗겨지게 했다. 그런 다음 소금으로 쓸려 벗겨진 몸에 문질렀다.

어느 한 번, 우모는 앞장서서 쑹원량의 옴을 치료해 준다고 하며 그를 치켜들게 했다. 그리고 나무로 만든 새 슬리퍼를 들고 둔부를 후려쳤는데, 줄곧 구타로 피가 날 때까지 후려쳤다. 그리고는 “둔부를 때려 꽃이 피게 했다”고 했다. 그런 다음 소금을 가져다가 한번 씻었는데 기회를 틈타 또 박해를 감행했다.

지난 뒤 우모는 쑹원량에게 “나는 당신에게 원한이 없습니다. 이것은 교도관이 연공을 하고, 대법을 외우며, 일을 하지 않으면 당신을 혼내주라고 한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혼내주지 않으면 교도관은 나를 혼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3. 6년 불법판결로 감옥에서 당한 박해

쑹원량은 6년 불법판결을 선고받고 2003년에 푸순구치소에서 랴오닝성(遼寧省) 제2감옥 2대대로 납치당했다. 대대장은 리젠궈(李建國)였다. 파룬궁수련생은 한 감금구역에 집중돼 매일 노동을 하는 외에 여전히 강제 세뇌를 당했다. 수련생 상호간에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물건을 주고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오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쑹원량이 납치당한 후 가족은 줄곧 소식을 몰랐다. 1년이 넘은 뒤 가족은 한 먼 친척에게 부탁해서야 제2감옥에서 쑹원량을 찾았다. 쑹원량의 어머니는 아들의 행방을 그리워했던 이유로 원래 있던 병이 더욱 악화됐다. 결국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세상을 떠났는데 사망할 때까지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2008년 1월, 중공 감옥측은 또 쑹원량을 랴오닝성(遼寧省) 둥링(東陵)감옥으로 납치했다. 2명의 바오자(包夾-파룬궁수련생을 24시간 밀착 감시하는 복역죄수)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연공과 법공부를 못하게 하며, 계속 세뇌와 전향공작을 감행했다. 그 후 쑹원량은 박해로 폐결핵성 흉막염, 흉내에 물이 고이고 배가 아주 크게 붓는 증상이 나타났다. 지도원 류(劉)씨는 가족에게 2천 위안을 요구했는데 말로는 쑹원량의 치료에 사용한다고 했다. 그 후 쑹은 또 톄링(鐵嶺)감관(監管)병원 2감금구역으로 납치돼 매일 노동을 했으며, 단지 소량의 약 몇 알만 받았을 뿐이다. 결국 감옥 만기에 돈을 돌려달라고 해도 지도원은 모른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문장발표: 2012년 10월 08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0/8/26378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