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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두 칭양구 병원서 후훙웨를 살해, 장야링을 실성케 해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쓰촨보도) 중공(중국공산당) 장쩌민 집단이 광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한 뒤, 청두시(成都市) ‘610’ 및 공안부서에서 현지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인간성이 없는 육체적 학살을 범하고 정신적 손상을 입혔다. 동시에 청두시 칭양구 인민병원(이미 ‘칭양구 신화사회구역 위생복무센터’로 이름 변경)에 경계구역을 설립해 학대로 생명이 위독해진 파룬궁수련생을 가두고, 실탄이 장착된 총기를 소지한 무장경찰이 24시간 동안 보초를 서며 지켰다.

파룬궁수련생 10여 명은 이 ‘병원’에서 학살당했는데, 그중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장촨성(張川生, 청두대학 부교수), 팡셴즈(方顯智, 쓰촨 교통청 네이허 탐사설계원 엔지니어), 황리사(黃麗莎, 어메이산시 룽츠양촌 푸메이쾅 인사과 과원), 후훙웨(胡紅躍, 신두현 연료분사장비 공장 직원), 구촨잉(顧傳英, 청두시 훙광 전자관공장 선임엔지니어), 선리즈(沈立之), 천구이쥔(陳桂君), 돤스츙(段世瓊), 덩젠핑(鄧建萍), 자오중링(趙忠玲), 황민(黃敏), 저우후이민(周慧敏) 등이다.

청두시 칭양구 병원으로 납치돼 박해당한 한 여성 파룬궁수련생은 후훙웨가 박해로 사망하고 장야링이 정신이상이 된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2002년 9월, 중공 사악한 당이 제16기 인민대표대회를 소집하기 전에 우리시에서는 구(區)와 현(縣)공안국을 포함해서 모두 파룬궁수련생을 붙잡는 목표를 하달했다. 9월 26일 저녁 8시, 청두시 멍쭈이완(猛追灣) 파출소와 사무실 인원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 내 대법 책을 바치게 했고 연공을 하지 않는다는 보증서를 쓰도록 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들은 곧 우리 집을 불법으로 수색하고 나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렀다. 폭행을 당해 왼쪽 귀가 멀고 눈이 붓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들은 내 두 손을 뒷짐결박으로 묶어서 그날 저녁에 파출소에 가뒀다가 이튿날에 구치소로 보냈다. 당시 나는 부상을 입은 정도가 비교적 심각해 밥을 넘기지 못했다. 구치소에서 나는 그들의 불법 행위를 단식으로 항의했다. 10월 15일, 나는 감방에서 기절했다. 내게서 혈압이 나타나지 않자 감옥의사가 나를 칭양구 병원(전문적으로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는 병원임)으로 보내 이른바 ‘응급처치’를 했다. 나는 129일 동안 박해를 당한 뒤, 2003년 1월(음력 섣달 30일) 오후에 석방돼 집으로 돌아갔다.

칭양구 인민병원 안에서 파룬궁수련생을 감금한 병실은 매일 무장경찰과 교도관이 24시간 동안 지켰는데, 매일 세 팀(한 팀당 3명)이 지켰다. 이곳에 끌려온 사람은 모두 중공 당국의 관련 기구 인원에게 박해당해 생명이 위독해진 파룬궁수련생이었다. 병세가 위중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강제로 족쇄와 수갑 등 형구를 차고 있어야 했다. 이곳에서 나는 중공 악도가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한 죄행을 직접 목격했다. 내가 사용한 침대 오른쪽에 있던 이는 난무쓰(楠木寺) 노동교양소에서 박해당한 젊은 수련생으로 황리사라고 하는데, 내가 간 뒤 3일 만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내가 들어가서 6일째 되는 날, 즉 10월 21일에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한 지 오래된 수련생인 신두 연료분사장비 공장의 장야링과 후훙웨가 구치소로 끌려왔다. 사악한 당 인원은 우리끼리의 대화를 금지했으나 기회를 찾아 간단하게 교류하고 상대방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녀 둘은 청두의 공공버스에서 납치당했다. 사악에게 협조하지 않고 30일 동안 단식으로 항의했다는 이유로 병원에 들어온 뒤로도 계속 단식으로 항의했다. 의사는 매일 그녀들에게 링거를 주사했다. 링거를 맞아 소변이 많았으나 악독한 교도관이 족쇄를 풀어주지 않아 침대에서 내려와 소변을 볼 수 없었다. 부풀어 올라 견디지 못할 때면 침대 위에 소변을 누었다. 간호사는 위생을 지키지 않는다며 그녀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악독한 교도관은 그녀들을 욕하면서 듣기조차 민망한 저급한 말을 하고, 또 매일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시간이 길어졌음에도 간호사가 규정된 기간(일주일)에 맞춰 침대보를 갈아주지 않아 불결하고 구역질 나는 축축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런 비인간적인 학대에도 그녀들은 여전히 믿음을 견지했고, 나는 이에 매우 탄복했다.

11월 초에 이르러 그녀들은 이미 정상적으로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늘 “무슨 일이 발생했지요? 어떻게 되어 이곳으로 왔죠?”라고 반복해서 물었다. 그녀들은 천천히 기억을 잃었는데, 의사가 독극물로 손상을 입힌 것이 분명하다.

두 사람이 박해로 정신이 똑똑하지 못한 상황임에도 신두 파출소는 사람을 데려가지 않고 둘에게 1년 반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내린다는 통지서를 보냈다. 그녀들은 통지서를 들고 있었으나 이미 내용을 이해하지도 무엇에 사용하는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상태가 안 좋았다.

병원에 들어온 20여 일 동안, 독극물 박해로 밤새 몸부림치던 후훙웨는 결국 12일 오후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후훙웨의 시신이 들려나갈 때, 나는 그녀가 사용하던 병상의 흰색 침대보에 직경이 대략 20cm가 넘는 혈흔이 있는 것을 보았다.

장야링은 죽음의 재난은 벗어났으나 정신이 갈수록 흐리멍덩해졌고 생활마저 스스로 처리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청두구치소로 돌려보내졌다. 듣기로는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을 때, 노동교양소에서 수감을 거부해 구치소에 장시간 갇혔고, 가족도 그녀의 행방을 모르고 있다고 했다.

대략 2006년에 나는 우연히 장야링과 그녀의 어머니를 보았다. 그녀에게 “나를 알고 있나요?”라고 묻자 그녀는 모른다고 했다. “당신은 칭양병원에서 구타당하고 독극물을 주사당한 일을 기억하세요?”라고 묻자 그녀는 “기억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당신과 같은 직장에 다니는 후훙웨는 어디로 갔지요?”라고 묻자 역시 모른다고 말했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녀는 칭양인민병원의 죄악을 폭로하지 못하고 있다.

‘병원’하면 사람들은 깨끗하고 위생적인 곳이며 죽음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고 부상자를 돌보는 장소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파룬궁수련생이 감금당하는 ‘병원’은 최저한의 위생조건, 근본적인 인신 자유도 없다. 병원치료를 받도록 보내진 사람이 오히려 족쇄와 수갑을 찬 채 고문을 당하고, 악인에게 욕설과 무차별 폭력을 당해야 했다. 칭양구 인민병원은 노골적으로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는 인간 지옥이다.

문장발표: 2012년 08월 02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8/2/26105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