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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 1년도 안 된 차오둥, 베이징에서 다시 납치당해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베이징 보도) 차오둥(曹東)은 베이징 파룬궁수련생 장이쑤(張一粟.女) 집에서 2012년 6월 8일 8시경, 함께 경찰에 납치되어 행방불명 상태다. 납치 당일 장이쑤는 평소와 다름없이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집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7~8명의 경찰이 장이쑤를 따라 재빨리 집으로 따라 들어가 집안에 있던 차오둥과 장이쑤 모친 등 3명을 납치하고 가택을 수색하여 다량의 물품을 강탈했다. 차오둥은 베이징 외국어대학을 졸업한 재원으로 유럽의회 부회장을 만나 자신과 아내 그리고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파룬궁(法輪功) 수련생이 잔혹한 박해를 당한 사실을 알려 줬다는 이유로 중공(중국공산당)에 납치돼 징역 5년의 불법 판결을 받고 감금되어 박해받은 사실이 있다.

토비 같은 무리의 경찰 중에 자신을 안딩먼(安定門) 파출소 소장이라고 밝힌 자가 차오둥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요?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를 당신 집에 투숙시켰습니까?” 하고 장이쑤에게 물었다. 그러고는 “무슨 물건이 있으면 모두 바치시오. 그렇지 않으면 수색합니다!” 라고 말했다. 차오둥과 장이쑤가 그들의 지시에 따르지 않자 사악한 경찰들은 제멋대로 함부로 수색을 감행하여 물품을 강탈했다. 차오둥이 몸에 지니고 있던 파룬궁 서적과 기타 자료들을 강탈했으며, 차오둥의 아내 양샤오징(楊小晶)이 그동안 모은 많은 자료와 컴퓨터 등 개인물품까지 모두 강탈했다.

사악한 경찰들은 가택 수색을 마치고 강탈한 물건과 함께 차오둥, 장이쑤, 장쑤이 모친 등 3명을 안딩먼 파출소로 납치했다. 납치된 3명을 각기 다른 방에 격리하여 감금하고 한 사람씩 심문을 했다. 그들은 우선 70여 세의 모친을 집중적으로 심문하며 캐물었는데, “당신은 그 차오둥이 무슨 사람인 줄이나 알고 그를 투숙시켰습니까?” 하고 물었다. 모친은 “나는 그가 우리 애들의 친구임을 알고 있고, 우리 집에서 임시로 며칠 동안 묵었습니다. 그가 셋집을 얻으려 했으나 아직 얻지 못해 잠시 우리 집에 있는 것이며 셋방을 얻게 되면 나갈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다음 날 새벽 3시에 모친은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으나, 차오둥과 장이쑤는 가족에게 아무런 연락이나 통지도 없어, 소재나 근황을 알 수 없는 행방불명 상태로 실종된 것과 다를 바 없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장이쑤의 집 대문 위에 쪽지 글을 붙여놓은 것에 의하면 그들 악경은 이미 언제부터인가 차오둥을 감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6년 전, 유럽의회 부의장 에드워드 맥밀란 -스코트(Edward Mc Millan-scott)가 중국을 방문하여 베이징 체류기간에 중국의 인권상황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일반인들을 접촉했는데, 당시 차오둥과 또 다른 파룬궁수련생 뉴진핑(牛進平) 등이 중공의 적색 공포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약속 장소에서 유럽의회 부의장을 면담하고 중국의 인권상황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당시 노동교양소에 감금당해 있는 아내 양샤오징(楊小晶)이 직접 당한 박해 사실을 증언했고, 중공이 파룬궁수련생의 생체에서 장기를 적출하는 놀라운 흑막을 증언하기도 했다. 면담이 끝난 후 두 시간 만에 집으로 돌아가던 차오둥은 베이징 국가보안국 2처 사복경찰에게 납치되어, 비밀리에 베이징 모처에 3개월 넘게 감금되었다가 고향 간쑤(甘肅)로 이송돼 징역 5년의 불법 판결을 받았다. 그의 아내 양샤오징은 여러 차례 노동교양소에 감금되어 장기간 고문 박해를 당하는 등 심신의 고통과 놀라움 속에서 유랑생활을 하다가 2009년 10월 1일 슬프게 세상을 떠났다.

차오둥은 2011년 9월 28일에 간쑤 톈수이(天水) 감옥에서 나왔다. 차오둥은 안정을 되찾은 후 정상적인 직업을 구해 자신의 힘으로 평온하게 살면서 다시는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근심걱정을 끼쳐드리지 않으려 했었다. 그래서 우선 베이징으로 와서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여 죽은 아내를 안위시켰으며 직업을 찾는 한편 셋집을 구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장쑤이 집에서 집을 구할 때까지 머물기로 하고 방 한 칸을 빌려 생활했던 것이다.

차오둥은 출소한 뒤 하나의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동안 구금된 자신에 대해 항상 관심을 갖고 각 방면으로 노력하여 자신을 구출한 에드워드 맥밀란-스코트에게 감사의 편지를 써서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중공 당국은 차오둥이 출소된 후에도 계속해서 ‘요주의 인물’로 지정하고 중점 감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오둥이 고향인 간쑤를 떠났음을 알게 된 중공 당국은 혈안이 되어 도처로 찾아다니며 조사를 하고 수색을 하여 출소한 지 1년도 안 된 상태에서 다시 납치를 한 것이다. 그동안 감옥에서 받은 고문박해로 나빠졌던 심신의 건강은 어느 정도 회복 했으나, 아직 이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또 다시 납치된 것이다.

차오둥은 다만 외국인과 몇 마디 실정을 말했을 뿐인데,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거주할 장소와 직업을 구할 수가 없었다. 차오둥은 일반 국민들처럼 자신의 국토에서 자유롭게 다니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생활할 수 없었다. 중공은 일관되게 다른 나라의 인권상황을 공격하고 비난하며 중공은 중국인민의 생존권을 보장한다고 표방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수많은 파룬궁(法輪功) 수련생과 권익 보호를 주장하는 사람과 중공의 탄압에 반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미 기본적으로 생존권조차도 보장된다고 말할 수 없다. 중공 통치 하에서는 중국인민의 인권의 최저선인 생존권은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공에게 차오둥과 장이쑤 여사를 즉시 석방할 것을 엄중하게 촉구하고 경고한다! 그리고 각계 정의로운 인사들이 차오둥과 장이쑤의 생명 안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인도주의 차원에서 긴급히 구출되도록 노력해 줄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

문장발표: 2012년 6월 16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6/16/25898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