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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로 도처를 떠돌아다닌 선량한 부녀자, 억울하게 세상을 뜨다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 보도) 경찰은 도처에서 류구이화(劉桂華, 40)를 붙잡았다. 장기간 도처를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는 과정에 그녀는 가족과 오래 동안 연계를 잃었다. 한번은 조카딸이 거리에서 우연하게 그녀를 만나 그녀를 안고 울면서 “작은 고모, 저는 고모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진선인(眞ㆍ善ㆍ忍) 수련을 견지한 이유로, 박해를 피하기 위해 류구이화 여사는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없었다. 가족과 친척, 친구들도 공갈협박과 위협을 당했다. 어린 딸은 경찰이나 경찰차를 보기만 하면 놀라서 즉시 얼굴색이 창백해졌으며 작은 손으로 어머니를 꽉 잡아당겼다……

刘桂华
류구이화(劉桂華)

류구이화 여사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치타이허시(七台河市), 타오산광(桃山礦) 둥쉐로(冬雪路)에서 살고 있다. 시계수리점 겸 매점을 차려 생계를 유지해왔다. 10년 동안 박해를 피하기 위해 줄곧 공포 속에서 생활하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그녀는 신체 상황이 갈수록 나빠졌다. 결국 2012년 4월 21일 저녁 10시, 이 젊은 생명은 불행히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오랜 병을 앓던 몸은 건강을 회복하고 고민하던 결혼생활에 다시 행복이 깃들다

류구이화는 기관지염에 걸려 담배와 술에 과민반응이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셔 두 사람은 이로 인해 끊임없이 다투기 시작했다. 체면을 중히 여기는 그녀는 고민을 마음속으로 참아 몸이 점점 나빠졌다. 어떤 때는 열이 오르며 크게 각혈해 정맥주사에 의거해야 했다. 결국 하얼빈(哈爾濱) 군사구역병원(軍區醫院) 전문가는 기관지염과 폐기종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전문가는, 20여 세인 그녀의 폐부위가 이미 60여 세 노인과 같아 감기에 걸리면 안 되고 힘을 써도 안 되며 화를 내도 안 되고 완치할 방법이 없어서 그저 유지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때 류구이화는 가슴과 등마저 아팠다. 매일 사는 게 고생스러워 삶이 의의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고 심신이 고통스러울 때면 모두 남편을 원망했다.

병고와 불행한 혼인 속에서 매일 시달리던 류구이화는, 1997년 10월 어느 날 파룬궁을 접촉하면서 생명에 전환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결혼생활에 다시 행복이 깃들었다.

원래 그녀의 둘째 시아주버니는 위장병과 십이지장궤양 및 관상동맥 질환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하루 그녀는 둘째 시아주버니의 얼굴에 광택이 나고 웃음기가 있으며 어떤 때는 또 노래 한곡을 소리 높이 부르는 것을 발견했다. 문의한 뒤에 그제야 파룬궁을 연마함을 알았으며 류구이화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건강을 회복해 십 몇 년 동안 다시는 약을 먹은 적이 없었다. 남편도 수련하기 시작해 악습을 고쳐버렸고, 딸은 수련한 뒤에 학습 성적이 중상위권에서 2등으로 변했으며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지덕을 인정받았다. 그녀는 말했다. “저도 차츰 사람이 병에 걸리고 고난을 겪는 이유를 알게 됐고 인생의 의의는 반본귀진(返本歸眞)임을 깨달았어요.”

류구이화는 시계수리점 겸 매점을 차려 생계를 유지했는데, 수련한 뒤 그녀는 진선인(眞ㆍ善ㆍ忍)에 따라 일을 했다. 시계를 수리할 때 고객을 속이지 않았고 돈을 더 받지 않았다. 매점에서 물건을 사들일 때 물건 값을 잘못 지불해 더 많이 준 돈은 모두 즉시 돌려보냈다. 어떤 때에 가짜 돈을 받게 되면 없애버렸고, 어떤 때에 물건 주인이 돈을 적게 받으면 즉시 보충해 주었다.

합법적으로 청원하여 박해를 반대해 ‘샤오룽녀’가 되다

1999년, 장쩌민과 중공은 서로 결탁해 텔레비전, 신문, 라디오 방송국에서 온종일 파룬궁을 모독했다. 류구이화는 1999년 7월 12일 두 차례나 청원하러 베이징으로 가서 정부를 향해 파룬궁 진상을 진술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불법 감금을 당했고 박해로 ‘샤오룽녀(小聾女-귀가 멀었다는 뜻)’가 됐다.

류구이화는 12월에 두 번째로 베이징으로 갔을 때, 직접 치타이허시 타오산 공안분국으로 납치당했다. 그 후 치타이허시 제2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해 보름 동안 행정구류를 당했다. 그 기간에 경찰은 친척을 동원해 류구이화에게 압력을 가해 파룬궁에 대한 믿음을 포기시키도록 했으나 류구이화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은 양심을 팔아 자유를 바꿀 수 없으며 그녀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사부님과 대법은 더욱 모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후 타오산 공안분국의 제(解)국장, 타오산 파출소 소장 천융(陳勇)이 두 차례나 와서 그녀에게 연마할지 물었는데, 그녀는 연마하겠다고 말했다. 결과 보름 동안의 구류는 무기한 감금으로 변했다. 하루 저녁, 복도에서 귀를 찢는 듯한 욕설을 퍼붓는 소리, 쇠고랑 소리, 수갑 소리, 혁대로 후려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전해졌는데 옆방 남성 수련생이 연공을 한 이유로 구타당했던 것이다. 여성 파룬궁수련생측에서는 ‘논어(論語)’[파룬궁의 주요 저작인 전법륜(轉法輪)의 첫머리 부분임]를 한번 한번씩 외우기 시작했다. 장서우이(張守義) 교도관은 술을 마신 뒤 격노해 혁대로 눈을 감고 ‘논어’를 외우는 류구이화를 후려쳤다. 그녀는 회상하며 말했다. “저는 입이 순식간에 마비됐고 부어올랐어요. 잇달아 우리들은 번갈아가며 혁대로 구타당해, 제 오른쪽 눈은 두 번째로 부어올랐어요. 세 번째는 저의 왼쪽 귀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끊임없이 윙윙했어요.(아주 오랜 시간 왼쪽 귀는 줄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음)” 장 교도관은 감옥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사형수마저 구타당할 때면 머리를 감싸거나 혹은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들 파룬궁수련생들이 구타당할 때 머리를 감싸지 않고 용서를 빌지 않았으며 심지어 동작마저도 변하지 않는데 대해 의혹스럽게 생각했다. 파룬궁수련생들은 “우리들은 대법수련생으로 법을 위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오래지 않아 류구이화를 식당으로 옮겨서 밥을 하는 일을 돕게 했다. 교도관들은 그녀가 정말 듣지 못하는지를 떠보기 위해 각종 실험을 했었다. 결국 모두 그녀를 ‘샤오룽녀’라 불렀다.

무기한 감금에 직면해 류구이화와 다른 6명 파룬궁수련생들은 노역 노동을 거부했고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해 즉시 석방을 요구했다. 교도관 장 모는 곧 몇 명 보통 죄수를 이끌고 절반쯤 자른 광천수병을 입안에 꽂아 넣고 옥수수가루죽을 주입했다. 입을 다물고 벌리지 않으면 곧 드라이버로 입을 비틀어 열었다. 그 후 단식을 했다는 소식이 가족에게 전해져 가족과 타오산 공안국 사람마저 모두 왔다. 그 후 경찰은 류구이화의 남편에게 강제로 종이 위에 ‘베이징으로 가지 않고, 부르면 곧 와야 한다’는 것을 서명시키고 1천 위안을 갈취한 뒤에야 류구이화를 석방해 주었다.

구치소에서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하다

2002년, 박해로 실업당한 후 류구이화는 체쯔허구(茄子河區) 신푸(新富)초등학교 인근에서 지도반을 조직해 열심히 모든 학생들을 대했다. 숙제를 지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또 아이들에게 사람이 되는 이치를 알려주어 아이들의 품행과 학문이 다 훌륭하도록 만들어 대부분 학부모와 학생들의 인정을 받았다. 교실은 아주 초라했으나 학생들은 아주 많았다. 어떤 학부모는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류 선생님, 저는 아이를 당신에게 맡겨요. 예전에 저와 그 애 아빠는 모두 포기했었어요. 각종 방법으로 그 아이를 대해도 소용이 없었는데, 지금 아이가 변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또 부모에 대해 자상하게 돌볼 줄도 알아요.” 그러나 류구이화의 평온한 생활은 바로 깨뜨려졌다.

2003년 3월 어느 하루 밤, 공안국장 장허핑은 많은 사람과 결탁해 특수열쇠를 사용해 불법으로 문을 열고 류구이화를 납치해 신싱 공안분국에 감금했다. 그 후 제2구치소로 보내졌다. 일주일이 됐을 때, 류구이화는 단식으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9일 째, 류구이화의 오빠가 그녀를 보러 왔는데 쇠창살을 사이 두고도 여동생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가 허약해져 외모가 상한 것을 본 오빠는 단번에 눈물을 흘렸다. 12일 째, 류구이화는 호흡이 아주 어렵게 되어 치타이허시 총병원으로 보내졌다. 의사는 맥박과 혈압이 매우 약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구치소 소장 인중량(尹忠良)은 매일 두 사람을 병원에 파견해 주야로 번갈아가며 그녀를 감시했다. 7일째 쯤, 인중량은 강제로 류구이화 언니에게 그들이 이미 다 써놓은, 류구이화를 지켰다는 보증서 위에 서명하도록 했다. 그 후 그녀 어머니도 그녀를 보러왔었다. 원래 건강하던 어머니는 백발이 됐고 온 입의 치아도 몇 대 남지 않았다. 그녀는 울면서 말했다. “너무 울어서 내 눈마저 멀 것 같구나.”

그 후 공안국 국장 장허핑, 610주임 비수칭(畢樹慶)은 타오산 분국 국장을 찾았다. 그들은 류구이화의 오빠에게 5서(五書, 보증서, 반성문, 결렬서, 적발서 등) 위에 서명시킨 후에야 류구이화의 병보석 수속을 해주었다. 류구이화는 그제야 다시 자유를 얻었다.

가족에 대한 끊임없는 교란

이유 없는 박해 중에서 류구이화는 핍박에 못 이겨 집을 떠났다. 경찰은 류구이화를 찾지 못하자 곧 그녀의 딸, 조카, 언니, 어머니, 큰 시누이, 둘째 시아주버니, 큰 시아주버니를 교란하고 위협했으며 공갈협박한 적이 있다.

안전국, 공안국, 공안분국, 타오산구 정부, 완바오허진(萬寶河鎭), 파출소, 가도에서는 모두 류구이화를 교란한 적이 있고, 몇 차례나 불법 가택수색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류구이화의 어머니는 매우 두려워하며 늘 아주 괴로워했다. 나중에는 공포적인 압력 하에 뇌출혈 증상이 나타나 장시간 병원에 입원했다.

그때에는 모든 전화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마저 수련을 하지 않는 가족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했다. 그 단락 나날에, 원래 매우 정정하던 노 모친은 화를 잘 내게 됐을 뿐만 아니라 또 아주 많이 늙었다. 당시 노인에게 있어서 시간은 그렇게도 아득히 길어져 1분 시간이 마치 1년과 같았다.

류구이화의 어머니는 연세가 80세에 가까웠다. 그녀는 그녀의 작은 딸 류구이화를 가장 사랑했는데 시시각각으로 작은 딸을 걱정했다. 류구이화가 막 박해로 떠돌이 생활을 할 때, 류구이화의 어머니는 늘 “구이화는 밖에서 거주할 곳이 있는지 모르겠다.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솜옷은 입었을까?”고 되뇌었다. 어느날 류구이화와 언니, 어머니 일가족 세 사람은 기차역 옆에서 한 번 만났다. 그 후부터 움직이기가 불편한 어머니는 곧 구이화의 언니가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기찻길 위로 달려갔다. 그녀는 늘 작은 딸이 여전히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0여 년 박해에서 노인은 그 어떤 때든 공포와 그리움 속에서 보내지 않은 날이 없었다. 노인의 가장 큰 소원은 바로 작은 딸의 동반 하에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공 사당(邪黨)의 박해 하에 노인은 이 가장 기본적인 소원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임종 전까지도 그녀가 가장 그리워하던 작은 딸을 보지 못했다.

류구이화의 오빠와 언니들도 그녀를 가장 아꼈다. 류구이화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큰 오빠는 그녀보다 20세나 더 많았고 언니는 그녀보다 10세나 더 많아 마치 부모가 아이를 대하듯 그녀를 보살피고 관심해 주었다. 그러나 중공 사당의 비열함과 사악함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해, 구이화를 더욱 사랑하고 아끼는 가족일수록 더 심하게 감시했다. 구이화가 박해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기간, 악독한 경찰은 비열한 수단, 위협, 감시, 미행, 전화도청(가족의 전화도 도청 당했음), 사기, 잠복 감시, 공갈협박 등 가장 사악한 수단을 취했다. 설이나 명절 기간 구이화 가족의 집에서 잠복감시를 했고 가족의 핸드폰을 도청했다. 가족은 얼마나 그녀가 그립든지를 막론하고 전화에서 감히 류구이화를 언급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언급하기만 하면, 악독한 경찰이 곧 찾아와서 한바탕 공갈협박하고 위협하기 때문이다. 류구이화와 가족들은 심한 심신상해를 입었다.

류구이화가 핍박에 못 이겨 집을 떠나자 타오산 공안분국 사람은 또 그녀의 큰 시아주버니의 집으로 가서 3일 동안 잠복해 있었다. 그 후 큰 시아주버니에게 쫓겨났다. 2005년 1월, 타오산 공안분국 정보과 사람은 류구이화의 집으로 가서 교란했을 뿐만 아니라, 또 그녀의 딸이 학교 다니는 길에서 잠복해 감시했다. 국장 텅윈(騰雲) 등은 또 그녀 언니의 직장으로 가서 교장을 찾고 아이의 담임교사를 찾아 2천 위안을 미끼로 해서 그녀의 아이와 가족을 속이라고 돈으로 유혹했다가 거절당했다.

2006년, 류구이화의 어린 조카는 겨우 11세가 됐는데 타오산 공안분국 사람은 차를 몰고 학교에 가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익으로 유혹하고 공갈협박했다. 아이는 경찰에게 놀라 큰 소리로 울었다. 어린 조카는 예전에 류구이화의 딸에게 말한 적이 있다. “여동생아, 이 오빠가 크거들랑 이들 나쁜 경찰들을 모두 붙잡아서 그들의 아이들도 이런 맛을 보게끔 할 거야.”

2007년 10월, 타오산 공안분국 정보과 쑨탕빈(孫堂斌)은 류구이화의 큰시누이를 불법 미행했고 불법 동영상을 찍었으며, 또 언니에게서 그녀 소식을 알아내려고 협박했다. 한 번은 그녀 언니가 외지로 류구이화의 시어머니를 보러 갔는데, 타오산 분국 사람들은 또 외지까지 추종했다. 쑨탕빈은 또 류구이화의 둘째 시아주버니를 교란했고, 그를 타오산 공안분국으로 끌어다가 공갈협박했으며 그들에게 돈을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큰 소리를 쳤다. 게다가 불법 감시하고 가족의 전화와 핸드폰을 불법 도청했다. 2008년 3월, 쑨탕빈 등 사람은 류구이화의 남편을 찾기 위해 수련생 왕충위안(王崇圓), 쉬옌(徐研) 등을 구타했다.

2009년 4월, 불법 요원은 류구이화의 언니를 교란했다. 46세인 언니는 무수하게 교란, 협박, 공갈협박을 당하는 상황에서 또 어머니를 위안해야 했는데, 심신에 입은 상해는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한 번은 류구이화의 남편이 베이징에서 붙잡혀 되돌아와 불법적으로 구치소에 감금당했는데 웨이(委)주임은 류구이화가 언니 집에 있음을 발견하고 곧 파출소에 통지했다. 타오산구 타오시가도(桃西街道) 사무실의 여성 주임, 체쯔허(茄子河) 공안분국 사람, 타오산 파출소의 부소장은 번갈아가며 류구이화의 언니 집으로 가서 그녀를 찾았다. 류구이화는 셋집을 맡아 거주했는데, 웨이주임은 또 집 주인에게 류구이화를 이사시키도록 위협했다.

중공 사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13년 동안, 류구이화는 핍박에 못 이겨 떠돌이 생활을 한지 이미 8년째다. 이 13년 동안 류구이화는 보통 사람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달림과 극심한 압력을 겪어왔다. 20대 때 대법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베이징으로 가서 청원해서부터 줄곧 40세에 억울하게 사망하기까지, 아름다운 청춘 시절을 모두 박해 속에서 보냈다. 극심한 공포와 엄청난 압력 속에서도 가장 그리운 가족과도 만날 수 없었다. 그녀는 예전에, 자신이 금생에 가장 걱정하는 사람은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은 그녀 언니고 다른 한 사람은 어머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또 딸을 키우는 목적은 노인을 잘 받들어 모시고 임종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얼마나 자신의 어머니를 보살펴드리고 싶었고 효도를 해드리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중공 사당의 박해 하에 요만한 소원도 이룰 수 없었다. 어머니는 임종 전에 최후까지도 그녀를 한번 만나 보지 못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뒤 3개월 만에야 그녀는 소식을 알게 됐다. 당시 그녀는 목 놓아 울었다. 그녀의 내심이 얼마나 비통했을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류구이화는 여전히 세상 사람들에게 파룬궁이 박해당한 진상을 알렸고 여전히 중생을 구도함을 생각했다.

류구이화는 2012년 4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 뜬 이튿날에 비가 내리기 시작해 꼬박 이틀 동안 내렸다. 이것은 봄이 시작된 이래 치타이허에서 가장 첫 번째로 내린 비였다. 하느님도 이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많은 시달림을 당했을지라도 그녀는 여전히 세상 사람들에게 대법 진상을 알리려 했는데 어쩌면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 눈물을 흘린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문장발표: 2012년 05월 06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5/6/2567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