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산둥 신쾅그룹의 前 광산 부총책임자와 교사가 불법 판결받아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산둥보도) 2011년 6월 27일 오후 3시쯤, 산둥성(山東省) 신원(新汶) 광업그룹의 광산 부총책임자이자 파룬궁수련생인 장관민(姜官民)은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유랑생활을 하고 있는 초등학교 교사이자 파룬궁수련생 리윈자오(李雲召)와 함께 칭다오시(青島市)에서 진상을 알리다가 시(市) 국가안전국의 악도들에게 납치당했다. 8월 2일 두 사람은 칭다오시 리창구(李滄區) 검찰원으로부터 불법 체포령을 받고 칭다오시 제1구치소에 감금당했다. 11월 3일 가족이 모르는 상황에서 칭다오시 리창구 법원은 두 사람에게 불법적으로 각각 5년형을 판결했다. 법을 집행하는 중공(중국공산당) 사법기관이 오히려 범법행위를 했으며 깡패짓을 할 대로 다 했다.

장관민(姜官民, 56)은 대학을 졸업했고 지금 칭다오시 성쓰(聖思)기업관리 유한회사의 강사이다. 1999년에 사악한 당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전, 산둥성 신원 광업그룹(‘신광(新礦)그룹’으로 약칭, 총 본사는 산둥 타이안(泰安) 신타이시(新泰市) 신원사무실에 위치해 있음)의 위춘쾅(禹村礦)과 원난쾅(汶南礦)은 광산 부총책임자를 맡은 적이 있다.(현재 명칭: 화헝(華恒) 광업유한회사) 1999년, 사악한 당이 파룬궁을 박해할 때, 당시 43세인 장관민은 젊고 혈기 왕성하며 지식이 있고 유식해 한창 재능을 발휘할 나이였다. 신쾅그룹의 책임자는 오히려 사악한 당의 압력에 못 이겨, 강제로 그에게 ‘명예퇴직’ 시켜 직장을 떠나게 했다.

2001년 장관민과 그의 아내 쑨윈화(孫運華, 중공 사악한 당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전에 신쾅그룹의 파룬궁보도소 소장을 맡았음)와 함께 신쾅그룹의 ‘610’(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위해 설립한 불법 조직으로, 공안, 검찰, 법원 위에 군림함)과 타이원(泰汶)공안분국의 악인(惡人)에 의해 산둥성 쯔보시(淄博市) 왕춘(王村)노교소 세뇌반으로 납치돼 1개월 동안 박해를 당했다. 쑨윈화는 박해로 당뇨와 심장병에 걸렸다. 악인의 끊임없는 교란을 피하기 위해 장관민은 곧바로 칭다오시 리창구(李滄區) 헤이룽장로(黑龍江路) 625호 주택단지로 가서 거주할 집을 사고 그곳으로 이사했다.

장관민의 아들(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았음)이 대학을 졸업한 뒤, 장관민은 신쾅그룹의 책임자를 찾아가서 아들에게 직업을 배정해 주도록 요구했다. 그 책임자는 오히려 먼저 파룬궁수련을 포기하고 파룬궁을 연마하지 않는다는 ‘보증서’에 서명해야만 배정해줄 수 있다고 했다. 장관민은 이치에 맞지 않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했고, 아들의 직업에 대해서도 더 결론이 없었다. 맨 마지막에 장관민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아들을 도와 칭다오시에서 성쓰 기업관리 회사를 설립했고 또 자신이 강사를 맡았다. 가족의 생활이 드디어 안정되었다. 뜻밖에도 쑨윈화는 박해로 조성된 당뇨와 심장병이 줄곧 완쾌되지 않아 불행하게 2007년 세상을 떠났다.

리윈자오(李雲召, 39세)는 산둥성 신원 광업그룹 셰좡쾅(協莊礦) 초등학교(산둥성 신타이시 샤오셰진(小協鎭)에 위치했고, 지금은 신타이시에 귀속돼 있음)의 교사로, 임시로 칭다오시 리창구에 거주하고 있다. 1999년 중공 사악한 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이후, 리윈자오는 청원하러 가고 또 진상을 알렸다는 이유로, 셰좡쾅 공안국과 타이원 공안분국의 악인에게 납치돼 1개월 동안 감금당했다. 그 기간에 수갑을 사용해 나무 위에 채워놓고 경찰용 고무몽둥이로 혹독하게 괴롭혔다.

2006년 8월 22일 오후 두시쯤, 셰좡쾅 공안과와 타이원 공안분국 8~9명의 악인이 리윈자오의 집에 들이닥쳐, 가택수색을 한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허락하지 않았는데 악인이 수색하는 것을 저지했다가 악도에게 수갑에 채워진 채 집에서 끌려 나갔다. 이제 겨우 6세인 아들이 이 일체를 목격하고는 놀라 엉엉 큰 소리로 울었다. 악인은 리윈자오의 탁상용 컴퓨터 한 대, 디지털 카메라, USB메모리 3개, 대법 서적과 명혜주간을 강탈해 갔으며, 또 리윈자오에게 그들을 따라오라고 요구했다. 리윈자오는 이에 협조하지 않는 동시에 큰 소리로 외쳤다. “사악이 어떻게 사람을 붙잡는지 모두 와서 보세요.” 그 후 악인이 갑자기 소침해져 물러가자 리윈자오는 벗어날 수 있었는데, 이로부터 핍박에 못 이겨 유랑생활을 했다.(밍후이왕 2006년 8월 24일자 보도)

리윈자오가 유랑생활을 한 뒤, 타이원(泰汶)공안분국과 ‘610’악인은 늘 리윈자오의 집에 가서 교란했다. 특히 중공 사악한 당의 ‘민감일’이 되면, 악인은 곧 와서 문을 부수고 걷어찼는데 대문 위에는 온통 큰 발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리윈자오의 아내와 아이는 늘 무서워 편안히 있을 수 없었다.

2011년 6월 27일 오후 3시쯤, 장관민은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리윈자오와 함께 칭타오시 진예촨로(金液泉路) 길옆에서 메시지를 보내다가 칭다오시 국가안전국의 악도에게 납치 및 강탈을 당했는데 노트북 컴퓨터 한 대, 핸드폰 3개, 승용차 한 대를 빼앗겼다. 이어서 두 사람의 거주지 역시 불법 수색 및 강탈을 당했다. 장관민이 거주지에서 강탈당한 물품으로는 파룬따파(法輪大法)서적 29권, ‘명혜주간’ 76권,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가 씌어있는 호신부 한 장, 진상전단지 100장, CD 7장, ‘9평공산당’1권, ‘NTD TV 전세계 중국인 신년맞이 공연’CD 150장, 1위안(약 180원) 짜리 진상화폐 160장 등이다. 리윈자오의 거주지에서 강탈당한 물품으로는 파룬따파서적 22권, ‘명혜주간’ 28권, ‘사은을 회상하다(憶師恩) 제7집’ 1권, CD 11개, 파룬따파서적 겉표지 13장이 있었다. 사람을 착해지도록 가르치는 서적, 사실 진상을 알린 물품, 중화 5천년의 휘황한 문명을 펼친 프로그램은 중공 사악한 당 사법기관의 눈에 오히려 증거로 되었다!

칭다오시 국가안전국 악도는 두 사람을 납치한 동시에 이틀 동안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했으며, ‘국가정권을 뒤엎는 범법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받는 이유’로 칭다오시 국가안전국에게 거주지를 감시당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6월 29일에는 또 ‘×교 조직을 이용해 법률 집행을 위반했다’는 혐의’(중공은 진정한 사교임)를 씌워 칭다오시 공안국 리창분국으로 이송해 형사구류를 시켜, 칭다오시 제1구치소에 불법 감금했다. 그러나 리윈자오의 아내는 7월 27일에 이르러서야 타이안시 타이원 공안분국 원시(汶西)파출소에서 보내온 형사구류 통지서를 받았다. 같은 해 8월 2일, 두 사람은 칭다오시 리창구 검찰원의 불법 체포령을 받았다.

리윈자오의 아내는 형사 구류통지서를 받은 뒤, 곧 변호사를 선임을 착수해 남편을 위해 변호하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감히 이를 접수하려는 변호사가 없었다. 어떤 변호사는 “이런 사건(파룬궁수련생 박해 사건)은 법률 범위 내에 없습니다. 상부에서 규정했는데 파룬궁수련생을 위해 변호함을 허락하지 않습니다.”고 말했다. 맨 마지막에 겨우 사건을 접수하는 한 변호사를 찾았다. 2011년 10월 12일, 변호사는 칭다오시 제1구치소로 가서 리윈자오를 만나려고 하다가, 구치소에서 거부당했다. 그리고 면회를 허락하지 않은 동시에 위탁서와 변호사증(변호사증은 그 뒤에 되돌려 왔음)을 압수했다. 사법부문의 위협으로 변호사는 커다란 압력을 받았다. 결국 핍박에 못 이겨 변호 대리를 취소했다.

11월 3일, 가족이 모르는 상황에서 칭다오시 리창구법원은 ‘공개적 재판’을 열어 두 사람에 대해 각각 5년의 불법 판결을 내렸다. 장관민과 리윈자오 두 사람은 법원의 법관이 무고하게 판결을 내린 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어서 상소를 제출했다. 리창구법원은 ‘판결서’ 중에서 “두 사람은 공소기관에서 고소한 범죄사실과 죄명에 대해 모두 이의가 없으며, 또 죄를 인정했다. 자원적으로 죄를 인정했다.”는 거짓말을 했다.

리윈자오의 아내는 베이징의 정의로운 변호사가 파룬궁수련생을 위해 법에 의거해 무죄변호를 할 수 있음을 알고는 곧장 베이징의 변호사를 선임해 리윈자오에게 변호를 해주려고 했다. 핸드폰으로 칭다오시 중급인민법원의 전화번호(0532-83098059 83098007)를 눌렀을 때, 이전과 똑같이 여전히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공중전화청으로 가서 걸자마자 곧 걸렸다(그러나 처음에 막 핸드폰으로 연계했을 때에 첫 몇 번은 걸렸음).

2012년 3월 2일 금요일 아침 9시, 안옌(安彦)은 공중전화를 사용해 칭다오시 중급인민법원에 리윈자오의 사건이 아직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를 문의했다. 법원 업무 담당자는 “일주일 시간이면 문서(이른바 ‘판결장’)가 내려옵니다. 물어서 뭘 하렵니까?”라고 말했다. 리 씨 아내가 “저는 변호사를 선임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법원 담당자는 “선임해도 헛수고일 뿐입니다.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리 씨 아내가 “필요 없다고 해도 저는 전력을 다해 선임할 겁니다.”라고 말하자, 법원 담당자는 “어느 곳의 변호사를 선임합니까?”라고 물었다. 리 씨 아내가 “베이징에서 선임합니다.”라고 말하자, 법원 담당자는 “선임하세요! 선임하세요! 선임하세요! ……” 하고 연속 6~7번이나 ‘선임하세요!’를 외쳤다. 그런 다음 전화를 ‘팍’하고 끊어버렸다.

바로 그날(3월 2일 금요일) 오후, 리씨 아내의 핸드폰이 울렸다. 칭다오시 중급인민법원에서 전화를 걸어왔는데 말로는 “리윈자오의 사건에 대해 판결장을 내렸습니다!”라고 했다. 리씨 아내가 “오늘 아침에 당신들은 또 일주일 시간이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지금 판결을 내렸습니까?”라고 묻자, 법원 측은 “법원에는 절차가 있습니다. 절차가 이미 이곳까지 왔으니 다시 되돌아 갈 수 없기에 지금 판결을 내렸습니다!”라고 말했다. 리 씨 아내가 “어떻게 판결을 내렸지요?” 하고 묻자, “원래의 판결을 유지합니다!”라고 했다. 이어서 ‘팍’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직도 계속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박해에 참여하고 있는 그들, 당신들은 알아본 적이 있는가?

장쩌민이 제 고집만 내세워 질투와 극단적인 권력욕망으로부터 출발해, 정치국을 억눌러 파룬궁을 탄압하려는 결의를 통과한 첫 시작부터 바로 법을 어긴 것이다. 그는 스스로 “파룬궁을 탄압함은 바보짓이다.”라고 했는데, 홍콩 ‘첸사오(前哨)’ 잡지의 2011년 2월 대륙보도란 중의 톱기사로 간주되어, 제249회 겉표지에 엄선된 문장으로 되었다. 제목은 ‘장쩌민이 평생 후회하는 두 가지 대 사건’이며, 역시 이 점을 명확하게 했다.

2009년 11월, 스페인 국가법정에서는 ‘군체멸절죄’ 및 ‘고문죄’로 파룬궁을 박해한 중공의 원흉 장쩌민(江澤民), 뤄간(羅幹), 보시라이(薄熙來), 자칭린(賈慶林), 우관정(吳官正) 5명을 기소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 일은 당신들이 깊이 사고하고 반성할만한 가치가 있다. 중공을 끝까지 따라 간다면, 자신이 자신을 해칠 수밖에 없다. 역사의 교훈도 역시 분명하다.

과거 독일 나치스가 잔혹하게 유태인을 박해했는데, 어느 누가 히틀러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는가? 그들은 지금 많은 사람이 이미 백세에 가까우며, 또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도처로 도망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 만약 발견된다면 역시 정의의 징벌을 벗어날 수 없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득세자는 광적으로 ‘당촨파이(當權派)’, ‘쩌우쯔파이(走資派)’를 박해했는데, 어느 누가 모(毛)씨의 ‘최고지시’를 집행하지 않았는가?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인기절정이던 베이징시 공안국 국장 류좐신(劉傳新)은 그 첫 번째 사람으로 ‘징벌이 두려워 자살’했다. 적극적으로 중공 ‘적색 노선’에 충성을 다 한 793명 경찰과 군정 간부 17명은 윈난(雲南)으로 끌려가서 비밀리에 총살당했다. 그런 다음 가족에게 ‘국가 용무로 순직했다’는 통지서 한 장을 보내 일을 마무리했다.

오늘 중공 사악한 당은 인성을 완전히 상실하여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감행했는데, 악을 행한 자, 어느 누가 장쩌민의 불법 지령을 집행하지 않았는가? 지난 운동마다 모두 국민에게 재앙을 입혔고, 그것의 추종자는 모두 좋은 결말이 없었다. 당신들의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위해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흐리멍덩하게 중공 사악한 당의 순장품이 되어, 사악한 당에게 팔리고도 또 사악한 당을 위해 돈을 세주지 말라!

(역자주: 박해사건에 연루된 인원과 부문은 아래
원문위치를 클릭해서 참조바랍니다.)
문장발표: 2012년 03월 22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3/22/25457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