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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자작극 폭로하여 15년 판결 받은 한웨이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남

[밍후이왕] (밍후이 통신원 허베이 보도) 헤베이성 안신(安新)현 한웨이신(韓衞新)은 파룬궁을 수련한 후 췌장염과 당뇨병이 사라졌다. 1999년 파룬궁이 탄압을 받으면서 한웨이신은 박해를 여러 번 받았다. 2000년부터 떠돌이 생활을 하다 2002년 8월 27일 수련생 몇 명과 허베이 쉬수이현 산꼭대기에서 텔레비전으로 천안문 분신 자작극을 폭로하는 CD를 방영해 중공경찰에게 납치되고 15년 형을 판결 받았다. 한웨이신은 허베이 제4감옥에서 7년을 박해받고 2011년 10월 15일에 사망했다.

1965년 10월 23일에 출생한 그는 허베이성 안신현 교통국에서 근무하던 중 1998년 7월에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부종으로 102kg 되던 몸무게가 짧은 기간에 75kg로 줄었고 무기력하던 증상과 질병이 다 사라졌다. 수련 후 ‘진선인(眞善忍)’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부단히 심성을 제고하여 담배와 술을 끊어, 동료와 지난 날의 의형제들이 모두 탄복했다.

1999년 5월 한웨이신은 다른 두 수련생과 함께 안신현 정부 민원실에 가서, 자신이 수련하여 이득을 본 상황을 알리며 합법적인 수련환경을 쟁취했다. 그 후 교통국 국장 왕궈쩡(王國增), 운수관리소 소장 멍젠서(孟建設)가 3개팀을 조직해 팀마다 십 여 명이 그를 감시하며 따라다녔다. 나중에 또 당직을 20여 일 세웠다. 1999년 9월 한웨이신을 교통국 4층에서 지키며 베이징에 갈까봐 20여 일을 불법으로 가두었다.

2000년 7월 그들은 수단을 바꿔 여행 명의로 한웨이신을 8일간 데리고 다니며 통제했다. 돌아 온 뒤 기율검사 서기 류샤오장(劉小江)이 파룬궁을 계속 수련할 것인지 질문했고, 한웨이신이 신념을 견지하자 그들은 늘 소란을 피웠다.

2000년 11월 한웨이신은 어쩔 수 없이 방랑생활을 하게 되었고, 한 달 된 딸은 부인 혼자 키워야 했다. 그 후 악인은 한씨의 소식을 알아내기 위해 부인을 10일 동안감금시켜 어린 아이가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게 했다.

2002년 8월 27일 쉬수이현 산꼭대기에서 분식 자작극을 폭로한 한웨이신은 돌아오는 길에 방범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경찰에게 맞아 머리에 큰 구멍이 났다. 한씨는 쉬수이현 형사경찰팀에 끌려가 호랑이 의자에 묶이는 등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酷刑演示:电棍电击
고문시연: 호랑이 의자에 묶어 전기 충격 가하기

경찰은 가족이 면회하지 못하게 하며 수련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한웨이신은 21일동안 단식하고, 나중에 검찰원에서 불법기소서를 하달하여 법정에 서서 변호하기 위해 단식을 멈추었다.

법정에서 수련생들은 그날의 CD 내용을 방송하라고 했으나 법정은 감히 방송하지 못했다. 10월에수련생들은 모두 중형에 처해졌고 한웨이신은 15년 판결을 받아 바오딩(保定) 제2감옥에 갇혔다.

일주일 후 수련생 다섯 명은 허베이성 제4감옥을 보내졌다. 한웨이신은 제4감구에 갇혔고 대장은 가오쥔링(高峻嶺)이었다. 그들은 일을 하라고 강요했고 한씨는 하지 않았다. 며칠 뒤 감옥 교육과 세뇌반에 갇혀 박해받았다.

2005년 한웨이신은 병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감옥 의사는 당뇨병 2기라고 했다. 2006년에 또 폐결핵에 걸려 전염병실에 갇혔다. 2008년 한웨이신은 당뇨병 합병증으로 목숨이 위태로워 스자좡(石家莊) 흉과 병원에 실려 갔다. 의사는 “흉부에 물이 차고, 한 쪽 폐가 괴사했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르고 오른 눈이 실명되었으며 음식을 먹으면 소화를 하지 못한다.”고 했다. 감옥측은 병원비를 내기 싫어 가족에게 통지했다. 가족이 와서 보니 뼈만 남아있는 그는 체중이 35kg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감옥측은 매일 경찰 4명을 파견해 병실 입구에서 교대로 지키게 하며, 가족 외의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가족은 병원비 2만 위안(350여 만 원)을 물고 보석치료를 요구했으나 감옥측은 이를 거절했다.

2009년 3월 감옥측은 안신 ‘610’, 공안국에서 증명서를 발부받아 위독한 한웨이신을 데려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증명서를 내주지 않았다. 3월 6일 감옥측은 책임을 지기 싫어 가족이 한씨를 데려가는 것에 동의했다.

한웨이신은 집에 와서 위독한 고비를 몇 번 넘기고 2011년 10월 15일에 결국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문장발표: 2011년 11월 08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1/8/24886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