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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베이 이현 파룬궁수련생 2명, 박해로 사망된 정황에 대한 추가 자료

글/ 허베이성 파룬궁수련생

[밍후이왕] 허베이성(河北省) 바오딩시(保定市) 이현(易縣) 파룬궁수련생 펑궈광(馮國光)은 야만적인 음식물박해를 당하여 결국 2002년 정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 44세였다.

이현 파룬궁수련생 리구이민(李桂敏, 여)은 2001년 7월 이현공안국에 의해 이현구치소로 납치당했고 2003년 13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받았으며 이현구치소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향년 38세였다.

아래에 내가 알고 있는 파룬궁수련생 2명이 박해로 사망한 상황을 보충하겠다.

1, 펑궈광이 박해로 사망한 상황

펑궈광은 허베이성 이현 청자가(城甲街)에 살았다. 2000년 이현공안국에 의해 납치된 뒤에 3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2002년 허베이성 바오딩 노동교양소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그의 가족은 나에게 그의 일부 상황을 이야기했다.

펑궈광은 원래 이현 시링향(西陵鄕) 향장이다.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기 전에는 늘 배가 아팠는데 병원에서는 줄곧 병의 원인을 검진해내지 못했다. 그의 가족은 그에게 ‘전법륜(轉法輪)’을 읽어주자마자 그는 배가 아프지 않게 되어 이로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대법을 수련한 뒤 펑궈광은 청렴한 관료가 되었다. 행실이 똑바르고 선량해 군중에게 좋은 간부로 불려졌다. 그는 식사초대와 뇌물을 받지 않고 권력과 이익을 다투지 않았다. 그리고 늘 스스로 라면을 가지고 농촌으로 내려가 군중의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펑궈광이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은 뒤, 이현 텔레비전에서는 이른바 ‘펑궈광 기인 기사(其人其事)’라는 가짜신문을 꾸며내어 그에게 일부 죄명을 뒤집어씌워 사실을 왜곡하여 파룬궁에 대해 먹칠했다.

그의 가족이 노동교양소로 첫 면회를 갔다가 그의 손목부위에 상처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가족에게 노동교양소에서 그를 전향시키기 위해 그의 입에 빨래판을 묶은 다음 몽둥이로 그를 구타했고 가죽채찍으로 그를 후려쳤다고 말했다. 그때 교도관이 그가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그의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酷刑演示:抽打
고문시연: 후려치기

2002년 나는 이현구치소에서 펑궈광이 사망한 소식을 들었는데, 당시 구치소 소장 장수강(張樹剛)은 그에 대해 유언비어를 날조해 “병이 있는데도 약을 먹지 않아 사망했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펑궈광이 사망한 주요 원인은 그가 엄정성명을 쓴 뒤에 단식을 했는데, 노동교양소 안의 의술을 모르는 죄수가 강제로 그에게 음식물을 주입하다가 음식물이 폐 안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후 그가 병보석을 받은 뒤 이현병원에서 사망했음을 알게 되었다.

酷刑演示:灌食
고문 시연: 음식물주입

펑궈광의 누나는 이전에 유선암을 앓은 적이 있었지만 파룬궁을 수련한 뒤 치료하지 않아도 자연히 완쾌되었다. 1999년 중공(중국공산당) 사악한 당이 탄압을 시작한 뒤 그녀는 감히 다시 연마하지 못했다. 그 결과 암이 다시 도져 오래지 않아 사망했다.

펑궈광과 그의 누나는 모두 사악한 당의 박해로 사망했다. 연로하신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아들과 딸을 잃어 만년에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다.

2, 리구이민이 박해로 사망한 상황

리구이민(李桂敏, 여)은 허베이성 이현 도시에서 살고 있었는데 2001년 7월 이현공안국에 의해 이현구치소로 납치당했다. 2003년에 13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받았으며 이현구치소 안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향년 38세였다.

2001년 7월 나는 이현구치소에서 리구이민과 서로 만났지만 우리는 줄곧 한 감방 안에 불법 감금당해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2001년 5월에 이현접대소 안에서 연금 당했을 때 거의 밥을 먹지 못했다고 알려주었다. 하루에 라면 두 개로 배고픔을 해결했기에 그녀의 몸은 매우 허약해졌다고 했다.

2001년 9월 그녀는 이현공안국에 의해 꼬박 삼일 동안 심문당했다. 돌아온 뒤 그녀는 울면서 나에게 알려주었다. 공안국에서 그녀에게 고문을 가했는데 특별히 만들어진 고무 몽둥이로 그녀의 등과 가슴, 손등을 때려그때 그부위들이 모두 아주 아프다고 했다.

오래지 않아 그녀의 여동생이 면회왔다가 말했다. 그녀가 붙잡힌 뒤에 공안국에서 몇 번이나 집으로 찾아와 그녀 남편을 공갈, 협박하고 벌금을 부가하였다는 것이다. 그녀 남편은 감히 집에 있지 못하고 외지로 일하러 가서 지금까지도 기별이 없고 그녀의 아들, 딸들도 모두 학업을 그만두고 집에 있으며 그녀 여동생에게 부양받고 있다고 했다.

이때 그녀는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아 몸이 점점 허약해졌다. 그녀는 오후부터 미열이 나기 시작했고 기침을 하는 것도 매우 심각했다. 밥을 먹으면 늘 구토했다. 그 후에는 자색의 점액마저 구토했다. 외부에서 받은 검진결과는 그녀가 흉막염에 걸려 매우 심하여 즉시 입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치소에서는 그녀가 입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또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받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면서 그녀에게 약간의 약을 내주어 먹게 했다.

2002년 7월 그녀의 병은 더욱 심해졌다. 밤새 고열이 내리지 않아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눕지도 못하고 호흡이 곤란해져 온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몸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었지만 집에서는 아무도 그녀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공안국에서도 그녀가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2002년 11월 내가 감옥으로 납치당해 떠나기 전날 그녀는 나의 손을 잡고 놓질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껴안고 울었다. 그녀는 “만약 내가 죽으면 당신은 꼭 내가 박해당한 진상을 써내야 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집 생각이 난다고 말하면서 그녀의 아들, 딸이 보고 싶다고 했다. 당시 그녀의 절망적인 눈빛은 지금까지 나의 눈에 선하다.

2003년 3월 나는 타이싱(太行)감옥에서 그녀의 부고를 들었다. 그 사람은 울면서 나에게 알려주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날 그녀는 점심밥을 먹지 않았고 말조차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구치소에서 그녀를 병원으로 끌고 갔으나 이미 가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 측은 그녀의 폐 부위를 절개했다. 의사의 말로는 그녀의 폐 부위가 전부 썩었다고 했다.

구치소의 교도관은 도리어 줄곧 그녀가 사망한 진상을 감추며 감방 안의 사람들을 속여서 말했다. “그녀가 전향했기에 병보석으로 치료를 받으러 집으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또 이것은 공산당이 그녀에 대해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 허튼소리를 했다. 그런 다음 죄수를 시켜 그녀의 이불과 물건을 전부 던져버리게 했다.

나이 겨우 38세인 선량한 여자는 바로 이렇게 무참하게 박해로 사망했다.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남편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 어린 아들, 딸은 고아가 되었고 행복하던 그들의 가정은 이렇게 중공 사악한 당의 박해로 파괴되고 말았다.

문장발표: 2011년 10월 04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0/4/247486.html